킬링 디어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드라마 / 2017

개요
드라마, 공포(호러), 미스터리, 스릴러, 미국, 영국, 121분, 청소년 관람불가, 2018.07.12 개봉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배우
콜린 파렐
니콜 키드먼
배리 케오간
래피 캐시디
서니 설직
알리시아 실버스톤
빌 캠프
데니스 댈 베라
시놉시스
“왜 내가 대가를 치러야 하지?”

성공한 외과 의사 스티븐과 그에게 다가온 소년 마틴
미스터리한 그와 친밀해질수록
스티븐과 그의 아내의 이상적인 삶은 완벽하게 무너지는데…
95.95%
3.98점
키노라이트 분포
6개
142개
별점 분포
리뷰
64

2018.07.12 18:25:55
신화의 비극을 재현하다
<킬링 디어>는 에우리피데스의 연극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는 위기에 처한 트로이 정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딸 이피게네이아의 숭고한 희생을 다룬 비극이다. 영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비극을 현대에 재현하고자 한다. 이런 특징이 나타나는 게 연좌제 그리고 신탁의 운명론과 같은 구조이다. 외과의사인 스티븐이 과거에 한 잘못으로 가족들이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이야기는 선대의 잘못이 후대에 영향을 끼치는 신화의 이야기를 보는 듯하다. 또 소년 마틴이 내리는 저주는 신탁의 운명론처럼 스티븐이 아무리 애를 써도 빠져나오기 힘들다.

이런 기본 골격 속에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전작 <송곳니>와 <더 랍스터>가 생각나게 만드는 연출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속박’이다. <송곳니>는 집이 <더 랍스터>는 사랑이 사람들을 속박하는 소재로 활용되었다. <킬링 디어>에서는 가족이 이런 존재가 된다. 스티븐은 잘 나가는 외과 의사인 반면 마틴은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아가는 학생일 뿐이다. 헌데 가족의 죽음 예고는 그를 빠져나올 수 없는 속박의 그물로 붙잡는다. 두 번째는 인간에 대한 염증과 공포다. 그의 영화들은 주어진 속박 속에서 또는 그 속박을 지키기 위해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지고 나약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인간의 존재 혹은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염증을 품게 된다. <킬링 디어>는 이런 염증을 더 심화시키는 요소가 있다. 바로 ‘죽음’을 둘러싼 가족 간의 ‘눈치 게임’이다.



아버지는 자녀들이 다니던 학교에 찾아가 ‘누가 더 우수한가’에 대해 묻는다. 자신도 죽음의 범위에 들어간 어머니는 나도 당신도 애 하나 정도는 더 낳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자신은 시험관 아기라도 낳을 수 있다 어필한다. 이는 두 아이 중 하나를 선택해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는 <소피의 선택>의 소피를 생각할 때 불편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부모들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자식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들과 딸은 아버지에게 조금이라도 더 자신들을 어필하기 위해 노력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신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 익숙하고 굴곡이 적은 스토리를 택했다는 점에서 지루해질 수 있는 작품을 독특한 연출을 통해 극복해 낸다.


첫 번째는 소리다. 영화는 잡음이 많다. 음악이나 대화 같은 잡음이 아니다. 고장 난 기계음과 같은 잡음들이 영화 곳곳에 등장한다. 이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무겁게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음악이 줄 수 있는 가벼움이나 침묵이 줄 수 있는 지루함을 벗어나 긴장감과 스릴감을 느끼게 하는 역할을 한다. 두 번째는 카메라의 구도다. 영화는 유독 크게 구도를 잡는다. 대표적인 장면이 밥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다 쓰러지는 장면이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 보는 또는 위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구도는 마치 신이 되어 인간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신화적인 요소를 카메라 구도로 잡아줌과 동시에 인물의 세세한 표정을 잡는 컷들과 대조적인 느낌을 주면서 강약을 살리는 리듬감을 준다.

마지막으로 작품의 주제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써볼까 한다. 원제 <The Killing of a Sacred Deer>가 의미하듯 이 작품은 ‘신성한 사슴의 죽음’을 이야기한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와 연관되어 있다. 아가멤논은 출정식 전 아르테미스 여신의 사슴을 죽였고 이에 대한 벌로 딸을 산 제물로 바치라는 신탁을 받게 된다. 잘못을 저지른 건 아가멤논이지만 신탁에 의해 저주는 자식세대가 물려받게 된다. 그리고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은 아가멤논 가문의 저주의 시작이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가멤논은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헌데 아가멤논 가문은 처음부터 저주를 받은 가문이다.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탄탈로스가 아들 펠롭스를 죽여 음식으로 만든 뒤 신들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내놓았던 그 순간부터 가문의 저주는 시작되었다. 영화의 처음 심장이 등장하는 장면과 쓰레기통 위로 떨어지는 피 묻은 수술 장갑 장면은 이런 지점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스티븐은 능력 있는 의사지만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듯 음주 후 수술을 하곤 했다. 그는 뛰어오르는 심장처럼 강한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존재지만 동시에 쓰레기통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는 신들의 능력을 시험하려다 나락으로 떨어진 탄탈로스처럼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려다 사고를 치고 만다. 그리고 그 피는 자식 세대를 향해 스며들어간다.

아가멤논 역시 주변의 조언을 무시한 채 사슴을 잡았다는 점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의사의 금기를 어긴 스티븐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들의 죄는 생명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에 따른 저주는 희생을 통해 풀리기 때문에 신성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신성은 함부로 범접하거나 다가설 수 없기에 인간의 힘으로는 풀 수 없다. 스티븐은 이성을 잃고 날뛰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신은 운명의 밧줄을 더 세게 조른다. 감독은 고대의 운명적 비극론을 현대로 가져오면서 인간의 나약함과 교만함, 이로 인한 염증과 혐오를 긴장감 넘치게 스크린으로 옮겨 놓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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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mon 님의 리뷰
2018.03.30 16:12:55
유예기간 45일 안에 사랑하는 짝을 찾지 못하자는 유죄이기 때문에 동물이 되어야 한다는 특이한 설정으로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사랑의 허구성을 다룬 <더 랍스터> (The Lobster, 2015)로 한국에서 점차 많은 관심을 받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킬링 디어>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2017)라는 새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그리스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작가주의 감독인데, 놀라운 점은 할리우드 자본이 투입되고 유명 배우들이 참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 랍스터>뿐만 아니라 <킬링 디어>에서도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잃지 않고 철학적인 사유를 굉장히 심오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킬링 디어>는 에우리피데스가 쓴 희곡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모티프로 삼고 있으며 원제 'The Killing of a Sacred Deer'는 큰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아가멤논의 비극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희곡과 달리 <킬링 디어>는 끊임없는 카메라 무브먼트, 귀를 거슬리게 하는 사운드, 그리고 감정이 삭제된 듯한 톤을 통해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부모의 슬픔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그래서, 현대사회로 넘어온 '성스러운 사슴 죽이기'는 굉장히 이기적이며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기 위한 '대속(代贖)'은 대단히 끔찍하고 폭력적인 균형 잡기로 보이게 만든다.

[인간은 죄를 짓기 마련이고, 누군가는 죄를 지은 사람을 심판한다.]

<킬링 디어>의 오프닝 시퀀스는 한동안 암전 상태였다가 수술대 위에서 박동하는 심장에서 죽은 심장을 떠올리게 하는 쓰레기 통에 버려진 수술 장갑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는 성공한 심장전문의 스티븐(콜린 파렐)이 과거에 술을 몇 잔 마시고 수술하다가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의료사고를 저질렀음을 설명한다. 수년이 지나 죽은 환자의 아들 마틴(배리 케오간)이 스티븐 앞에 나타난다. 처음에는 스티븐은 마틴에게 시계 선물을 해주면서까지 잘해주려고 노력을 하지만, 점차 만나는 횟수가 증가하자 그는 마틴이 자신을 옥여 바싹 죄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멀리하려고 한다. 하지만, 마틴은 끈질기게 스티븐과 그의 가족 주변을 서성거린다. 그리고, 어느 날 마틴은 스티븐에게 네 가지 저주를 경고한다. 첫 번째는 사지가 마비되고, 두 번째는 거식증이 진행되고, 세 번째는 두 눈에 피가 흐르고, 마지막에는 죽게 될 것이라고 한다. 스티븐은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이 전부 다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누군가를 선택해 죽여야만 한다.

이 순간 누가 스티븐을 심판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사용된 시점 쇼트와 극단적인 부감 쇼트를 미루어 볼 때 신이 스티븐을 심판한다고 볼 수 있거나, 전지전능한 능력을 소유한 마틴이 스티븐을 심판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마틴의 존재가 의심스럽게 다가온다. 과연 마틴은 그저 전지전능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아이인지 아니면 인간의 형태로 존재하는 신인지 의문을 던지게 된다. 스티븐의 딸 킴(래피 캐시디)을 오토바이로 집에 바래다준 다음 어둠 속에서 그의 집을 응시하는 모습, 앞으로 벌어질 상황들을 예언하는 모습, 그리고 애나(니콜 키드먼)가 지하실에 묶인 마틴의 두 발에 키스를 하는 모습을 고려해 보면, 마틴은 후자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특히, 마틴을 보여주는 장면은 줌 인을 통해 그려지는데, 이는 마틴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심판하는 느낌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마틴이 스티븐을 심판하려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아마도 마틴은 고통을 균형 잡기 위해 그를 심판하려고 한 게 아닐까 싶다. 스티븐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마틴은 똑같이 그의 가족 구성원을 죽임으로써 고통의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마틴이 스티븐의 팔에 상처를 입히고 바로 자신의 팔을 물어뜯음으로써 균형을 맞추는 장면에서 명확해진다.

[<더 랍스터>는 사랑을 시스템 안에 가뒀다면, <킬링 디어>는 가족을 시스템 안에 가뒀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전작 <더 랍스터>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커플 메이킹 시스템 안에 가둬 통제를 한다면, <킬링 디어>는 가족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다루고 있다. 혈연의 정이 소거되고 그저 건조하게 그려진 스티븐의 가족은 수직적 계층으로 구성된 집단처럼 보인다. 마치 스티븐은 가족이라는 시스템을 다스리는 왕, 애나는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남편의 말을 따르는 왕비, 킴과 밥(써니 술리치)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이 제물이 되겠다는 자식으로 그릴 수 있다. 킴은 자신이 가족을 유지하는 제물이 되기 위해 피를 흘리면서까지 몸을 질질 끌며 집에서 나와 죽음을 맞이하려고 하고, 밥은 그동안 스티븐의 말을 듣지 않고 자르지 않던 머리카락을 자르면서까지 아버지에게 자신이 제물이 되겠다고 나선다. 애나는 신의 뜻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다만 누가 제물이 될지는 왕처럼 군림하는 스티븐이 궁리한 방법을 따르겠다고 의사 표현을 한다. 일반적인 가족이라면 부모가 자식 대신 희생하겠다고 나서지만, 스티븐의 가족은 오로지 가족이라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다. 가족 간의 정과 사랑이 배제된 대속(代贖)은 확연히 올바른 구원과 멀어지고 불행한 일로만 여겨진다.

[어른의 나약함과 사악함이 드러나는 이기적인 성스러운 사슴 죽이기]

자발적으로 제물이 되겠다는 아이들과 달리 어른들은 나약한 면모를 보인다. 결정권을 지고 있는 스티븐은 자유 의지를 포기한다. 우선, 그는 학교를 방문해서 교장과 함께 학부모 면담을 한다. 그는 교장으로부터 딸과 아들이 학교에서 어떤 학생이었는지 듣다가 교장에게 둘 중에 누가 더 가치가 있는지 물어본다. 스티븐은 가족이라는 체제 위에서 군림하는 위치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건 자신의 위신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보다 나약한 존재라는 걸 보여준다. 어른의 사악함이 드러나는 장면은 누가 제물이 '성스러운 사슴'이 될지를 러시안룰렛과 비슷한 방식으로 운에 맡기는 장면이다. 스티븐은 얼굴을 가린 채로 소파에 결박된 가족 구성원처럼 자신의 얼굴을 가린 다음 빙빙 돌다가 방아쇠를 당긴다. 스스로 선택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냥 운에 맡기는 스티븐과 자식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애나의 침착한 자세에서 사악함이 드러난다. 이들의 모습은 Shirley Jackson의 'The Lottery'를 연상케 한다. 물론, 'The Lottery'는 신에게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비는 목적으로 추첨을 통해 죽일 사람을 정한다는 점에서 <킬링 디어>와 차이점이 있지만, 오로지 운에 맡긴다는 점에서 이들은 소름 돋을 정도로 끔찍하고 사악하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자식 한 명이 제물로 바쳐지자 스티븐의 가족은 마틴이 내린 저주에서 풀렸다. 하지만, 비극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의 가족은 전혀 슬픔에 잠겨 있지 않는다. 오히려, 스티븐과 마틴이 자주 만났던 레스토랑에서 만나 서로를 확인하고 가게에서 나선다.

스티븐은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직접 치르지 않고 누군가가 대속하게 만든다. 덕분에 그는 가족이라는 시스템을 유지했지만 가족 구성원 간의 관계는 분명히 예전만 못할 게 당연하다. 그러므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현대화한 대속(代贖)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시작해 비극으로 끝맺음을 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감독이 그려낸 인간의 나약함, 사악함, 그리고 이기심에 충격애 빠질뿐더러 현대인은 과연 죄의식을 갖고 살고 있는지 혹은 상실한 상태로 살고 있는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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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채 님의 리뷰
2019.02.25 23:17:42
반항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영화 내내 부조리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이 점은 란티모스 감독의 전작인 '더 랍스터 The Lobster (2015)'에서 콜린 파렐이 연기한 데이비드가 부조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를 부수려는 노력을 했던 것과는 크게 대조된다.

 내 나름대로 이 점을 가지고 생각해보며 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죽어있는 듯한 연기를 했는지 답을 찾아보았다. 감독에게는 더 랍스터의 데이비드와 같은 '반항하는 인간'이 긍정적인 인물이며, 지향해야 하는 인물상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들을 보면 문제 상황이 눈에 훤히 보이지만 계속해서 부정하는 이가 있고, 문제 상황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이에 대해 대응하지 않는 이도 있는 등 부조리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는다. 게다가, 영화의 결말부에서는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 순응하고 가족을 희생시키기까지 한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바람직한 인간상과 대척점에 놓인 인물들이다. 감독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며 이 인물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관객들이 극 속의 각각의 인물들의 감정에 이입하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순간, 냉정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갖추기가 어려워진다. 이러한 연유로, 감독은 이 작품에서는 인물들에게서 감정을 빼앗은 것이 아닐까 싶다. 콜린 파렐이라는 같은 배우가 연기했음에도, 더 랍스터의 데이비드는 다채로운 감정을 느낄 줄 알았다면 이 작품의 스티븐은 슬픔과 분노라는 두 개의 감정만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 외의 상황에서는 무감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설정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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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5 22:25:53
뜨거움 속의 차가움, <킬링 디어>
뜨거움 속의 차가움, <킬링 디어>

우리가 잘 아는 로봇영화 <트랜스 포머> 2편의 제목은 패자의 역습이다. 이 영화에서는 오토봇과의 전투에서 패한 디셉티콘 군단이 재기를 꿈꾼다. 로봇들의 치고받는 거대한 전투는 마치 스크린 밖을 뛰쳐나올 듯하다. 그리고 거대한 쇳덩이들이 두 집단으로 나뉘어 싸운다는 점은 흡사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모습이다. 무조건 적보다 더 많이, 더 강한 병기를 생산해야만 하다는 점에서다. 더 나아가, 미국 본토에서 미군과 결합한 오토봇과 그에 대항하는 디셉티콘의 모습은 빼도 박도 못하게 미국이라는 국가의 자구책을 상징한다. 알래스카 아래에 자원이 묻혀있듯, 미국의 어딘가에 숨은 ‘큐브’를 찾아온 그들의 모습은 미국의 시각에서는 명백하게 침략자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위해 저리 싸우는가. 미국의 자구책과 병진 노선으로 설립된 사이버트론의 자구책이란 과연 무엇인가. 첫 번째로 디셉티콘. 그들은 고향의 재건을 위해 강력한 권력을 떠올린다. 메가트론이라는 강권자를 필두로 뭉친 그들의 이름은 ‘전투용 로봇’이다.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 부하는 그 자리에서 처단된다. 고향의 재건이라는 대업 아래에서 부하이든 지구이든 그 무엇도 부품처럼 소모된다. 그는 명백하게 군사적 독재자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연상케 한다. 반면 두 번째인 오토봇. 그들은 고향의 재건을 위해 강력한 민주화를 떠올린다. 옵티머스 프라임이라는 프롤레타리아를 필두로 뭉친 그들의 이름은 ‘노동자 로봇’이다. 명령을 수행하지 못해도 화해와 격려를 해주며, 고향의 재건보다는 민족의 정착이 더 우선시된다. 말하자면 돌아갈 고향이 아니라 정착할 고향만이 있는 셈이고, 이것은 곧 이민자와 토착민이 한데 어울린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과도 연관된다.

디셉티콘이 오토봇의 대립항이라고 해서, 미국을 상징하는 오토봇과 대립하는 디셉티콘이 소련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승자와 패자가 나뉘었다는 건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인데, 잘 생각해보면 표면적인 전투 없이도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때도 있다. 이를테면 냉전시기 소련과 미국의 우주개발은 물리적인 위협이 아니라 심리적인 자존심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전투라고 칭하지는 않았고, 한편으로는 누구라도 그것을 전투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경쟁상대가 다름 아닌 적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국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온갖 갈등의 방패막이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싸움의 논리는 ‘나’와 ‘너’라는 이분법을 따른다는 점이다. 우리 몸에 들어온 병균이 제거되어야 하는 것처럼, ‘나’라는 형체 안에 들어온 타자에게 우리는 거부감을 느낀다. 몸 안의 타자를 필히 제거해야만 한다는 점은 우리 몸에 생겨난 종양을 떼어내야하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때 종양을 제거하는 것은 끝이 날카로운 칼이다. 그런 칼날이 바로 메가트론과 같은 독재자요, 그러나 이 칼날은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양을 제거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칼날이라는 선택지를 테이블 위에서 배제한 채로 유동적인 치료요법들을 찾아보게 된다. 그래서 메가트론과 같은 독재자가 미국에 등장한 적은 없었다. 그들은 단지 그에 비견되는 히틀러와 전쟁을 치렀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오토봇에 직접적으로 동일시되는 것도 무리다. 먼 곳에서 온 강력한 외계인이 지구의 토착민과 한데 어울린다는 점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웨스턴 장르를 내세운 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칭호다. 결국 뜨거운 전쟁 속에 숨은 차가운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구도가 아니라 미국과 미국의 대립 구도라는 점을 우리는 깨닫는다.

이것은 냉전이 아니다


<킬링디어>는 미국과 미국의 대립구도를 그리는 작품이다. 다분히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이 작품을 해석할 방법은 아마도 그것밖에는 없다. <트랜스포머>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전개가 지속되지만 사실은 어느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영화 밖의 이데올로기를 끌어온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유사하고, 반대로 그 폭력의 규모는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미국 속의 개인으로 축소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트랜스포머>에서는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하고 어느 인간에게 그 미래가 맡겨지는데, <킬링디어>에서는 외계인과도 같은 이가 등장해 오토봇처럼 자신의 출신지를 설명하고 그 정당함을 논한다. 피해자의 아들이라는 점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피해를 줬다는 간접적인 위로 심리의 회로를 작동시키고, 그 회로가 가동된 이상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요컨대 출신지는 지워진 채로 그는 단지 외계인에 불과할 뿐이며,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협동하거나 대척해야 할 타자의 논리에 편입되고야 만다.

하지만 사실은 타자는 없었다. 그것은 오토봇에 이입한 마틴 랭(배리 코건)을 맞이하는 인간 진영의 스티븐 머피(콜린 패럴)의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논리의 형벌을 주장하는 마틴의 모습은 피해자의 아들은 동정받아야 한다는 선악의 논리를 붕괴시킨다. 아니, 이 물음은 보다 근원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머피는 마틴을 피해자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을까? 그가 마틴에게 자신이 사용하던 시계를 준 것은 자신의 도덕적 결함을 그 근원으로 되돌려 완벽한 에고(Ego)를 보상받으려 한 시도는 아니었을까? 이것은 <트랜스포머>의 서사에서 가져온 심리 도식이다. <트랜스포머>는 현대 미국의 과학기술이 사실은 오래전 땅속에 묻힌 메가트론의 신체에서 발원했다는 점을 설명하고는 그 과학기술이 다시금 메가트론을 때려잡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미국의 과학력은 근본적으로 타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결함을 타자의 개념을 지움으로써 보상받으려 한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머피는 마틴을 자신의 편으로 편입하여 타자의 개념을 지우고 그것으로 도덕적인 결함을 떨쳐내려 한다. 그 결함은 머피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든 하지 않든 간에 불완전한 에고를 채우려는 항상성의 논리에 의해 작동되므로, 어쩌면 이 영화의 결말은 영화의 시작점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냉전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 냉전의 흐름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등가교환의 법칙은 과연 누가 누구에게 제기해야 할까. 복수가 나의 것이라면 그 복수의 대상은 누구인가. 혹시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회포를 푸는 원죄는 아닐까? 마틴과 머피는 서로를 피해자라고 주장하는데 사실 그 피해자라는 생각은 어느 한구석을 콕 집어서 언급하기가 힘들다. 영화는 진실을 보여주지 않고 진실이라 주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진실게임은 스페인 축구전술 티키타카(tiqui-taca)처럼 마취 의사에게로 책임 떠넘기고 그는 다시금 외과 의사에게로 떠넘기고 그 과정에서 머피가 했던 두 잔의 유흥은 그가 수술에서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를 증명하지 못한다. 술을 마신 것이 음주 운전의 기준은 되고 또한 음주 운전이 사람을 살해할 수는 있지만 여기서는 그 살해대상이 지나가던 행인이 아니라 그가 탑승한 자동차 자체이기에 잘못을 명쾌히 따져 물을 수가 없다. 결국 책임은 분명 음주하고 수술실에 들어선 머피에게 있는 게 확실한데 그 죄는 명확하게 추궁되지 않는다. 이때 그것을 추궁하려 드는 건 마틴이고, 이 마틴의 처벌과정은 서사 상으로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마치 존 매카시의 마녀 사냥처럼 원인과 결과는 형체가 없다.

암묵적인 승자와 패자

이 영화에는 미국이라는 국가 내에서 암묵적인 승자와 패자와 분할되나 그럼에도 승패를 가로지를 수 없는 형이상학의 공포가 깃들어 있다. 그들이 느끼는 공포는 과연 형체가 있는 것일까? 이것은 단순히 절대 악과 절대 선을 마주했을 때 느끼게 되는 종류의 공포가 아니다. 외계로부터 온 타자인 오토봇은 자신을 선하다고 소개하는데 어느 순간 인류에게 불필요한 정치적 희생물로 변모하고야 만다. <트랜스포머> 4편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크툴루적 공포에 시달리며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프레임에 싫증이 난 인류는 트랜스포머라는 단어의 개념 자체를 아예 말살해버리려고 한다. 단어의 개념을 말살하지만 그들의 눈앞에는 명백하게 커다란 쇳덩어리가 현실의 위협으로 다가오기에 개념은 없되 공포만이 존재하는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그것이 바로 냉전의 해체이다.

냉전이라는 기표는 단순히 한 가지 의미만을 담은 단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하위에 여러 의미를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변증법이었다. 냉전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는 어떠한 알레고리도 완성할 수 있었고 어떠한 공포도 보상받을 수 있었다. 이 현상은 공포스럽다. 그러나 알 수는 없다. 그럼 왜인가? 그것은 바로 빨갱이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적이기 때문이다. 라는 조건없는 논리가 냉전 시대를 편리하게 해주었다. 어느새 우리는 그 속에 잠식되어 버렸고, 이 작품은 ‘형용할 수 없는’ 크툴루 신화적인 공포를 작품의 소재로 가져온다. <겟 아웃>이나 <곡성>이 그러했듯이 이런 장르에서는 오래전에 우리가 알던, 너무 오래되어 출처를 알 수 없는 아군과 적군의 그 논리가 자기 자신을 공격하게 되는데, 그런 공포 중에서도 정말로 공포스러운 것은 아마도 우리 생활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생활의 공포다. 그들은 이제 적이 없으나 그 적은 어느새 내면을 파고들어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게 된다.

오토봇과 디셉티콘이라는 양측의 대립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말해서 냉전이 해체되고 나자 빨갱이 사냥조차 사라지고 냉전의 공포는 자신을 명칭 하는 단어를 잃고 미국 사회를 하염없이 떠돌게 된다. 이 유령은 파시즘이 사라진 유럽 땅을 떠도는 것처럼 냉전이 사라진 미국 땅을 하염없이 떠돌고 있다. 마치 오토봇이 ‘빨갱이 사냥’이라는 이름의 냉전 이데올로기를 피해 온 지구를 떠돌았듯이 그들의 이념 또한 기표를 잃고 기의만이 남은 채로 그들 사이의 물리법칙이 된다. 어쩌면 일종의 자장에 해당할지도 모르는 이 인과는 분명 영화 밖에서 존재하지만, 영화 밖에서 끌어오면 안 된다고 나지막이 말해준다는 점에서 현실과는 모순관계이기도 하다. 이것은 영화이지만 관객은 자신의 세계를 투영할 것이고, 그런데 그 세계를 투영하지 않아야 한다고 내면의 목소리는 말한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드러난 심장

영화는 카메라 구도의 중심에 인물을 놓으면서도 항상 어딘가 불완전한 부분을 남김으로써 대칭의 완성을 일부러 피해가는데,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주체적으로 삶을 산다고 느끼는 게 사실은 주체적일 수가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카메라라는 타자의 시선이 사실은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는 셀프 카메라의 성격이라면, 그것은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을 자신이 만들어 내어 타자로부터의 관찰을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재를 직시하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현재를 살아간다고 가정하는 것은 이 카메라요,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불균형한 부감 쇼트로 깨어지는 편집의 불연속성은 ‘위’에서 내려다본 ‘현재’라는 미래로부터의 구원을 상정하고는, 그런 카메라가 이어서 잡는 건 자신의 ‘과거’가 가족이라는 ‘현재’를 구원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왜 구원인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영화는 “아이는 또 낳으면 되잖아.”라는 말로 자식 살해를 정당화하는 두 부부의 행복한 말로로 끝이 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제시되었던 마틴과 머피의 만남은 결말부에서 아들의 빈자리를 통해 강조된다. 아마도 영화는 가족 모두가 죽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희생하는 게 낫다고 말하는 듯한데, 실제로 영화의 전개도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은 머피가 말했듯이 한 사람이 죽었다면 한 사람이 죽는 게 정의이자 구원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다. 이 알 수 없는 혼돈 속에서 마틴과 머피는 이분법의 프레임을 지운 채 자기 자신의 과거 덕분에 구원을 받으려는 시도를 성공시킨다. 차가운 서사 속에서는 그 무엇보다 따스한 심장이 콩콩대며 뛰고 있었던 셈이다.

적과의 싸움에서 진 패자는 기회를 엿보며 힘을 기르게 된다. 물리적인 위협이든 심리적인 위협이든 자신이 패배할 확률을 다들 제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문제는 적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을 때다. 적이라는 하나의 교집합이 없을 때 집단은 분열되고 형상은 분해된다. 어둠은 ‘내부의 적’이라는 공포로 형상화되고 형체 없는 그것은 대응조차 할 수 없다. 이 시꺼먼 침묵은 승자와 패자를 하나로 모으기도 하지만, 그런데 냉전이라는 단어의 뜻을 잘 생각해보면, 표면적인 접촉 없이도 갈등의 씨앗이 금세 피어오르기 마련이다. 괜히 ‘차가운 전쟁’이라는 용어가 쓰인 게 아니다. 뜨거운 전쟁이 오토봇과 디셉티콘의 갈등을 상징한다면, 차가운 전쟁은 미국을 수호하는 이와 미국을 공격하는 이들의 이데올로기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뜨거운’ 이념에도 관심을 둔다. 아마도 이 영화의 시작이 마틴 아버지로 추정되는 어떤 이의 심장이 뛰는 모습이었던 것은 그런 이유였을 테다.

드러난 심장은 신체의 급소가 아무런 보호 없이 노출되었다는 점에서 공포감을 준다. 우리는 그 심장을 단순히 신체의 장기로만 보지 않고 우리가 뜨거움을 투사하는 어떤 것, 이데올로기 혹은 사랑 더 나아가서는 어떤 생명과도 같은 활동의 중심지로 여기고는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의아한 것은 그런 중심지로부터의 파괴, 내면으로부터의 파멸을 암시하는 듯하면서도 정작 영화의 내용은 자신을 제외한 가족이 서서히 죽어갈 것이라는 성서의 예언이다. 신체의 말단인 사지가 마비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온다는 것은 척수에서 심장으로의 전이이며, 그 끝이 사망이라는 점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허나, 이 영화에서 폭력의 근원은 중심지에 자리 잡지도 않았고 또한 제거되지도 않는다. 마틴은 사회적으로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유한 계급도 아니고 그러나 예언을 주는 사람이며 그래서 그를 죽이면 가족 전체가 몰살하는 자폭 스위치에 해당한다. 결국 머피는 신체의 중심인 심장을 살리려고 주변부의 사지 하나를 잘라내게 된다. 눈을 가린 채로 빙글빙글 돌아서 자식을 쏴 죽인다.



너무나도 불확실한

“마르크스의 정신은 미래에도 유령처럼 출몰하리라.”라는 데리다의 예언은 ‘과거로부터의 구원’이라는 벤야민의 메시아론과 거의 유사하다. 물론 마르크스주의가 구원자라고 여길 경우일 테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구원은 미래로부터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은 이 영화를 독해할 때 의미가 깊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은 차츰 이민자의 나라에서 이민자의 속성을 지워버린다. 이민자에 의해 설립된 국가라는 점은 희미해지고 이민자에 의해 망가지는 국가라는 피해의식만이 강하게 대두된다. 여기서 이민자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만 (우리가) 도움을 주기 싫은 이들이다. 그럼에도 미국 사회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정통성이 그들의 과거로부터 암시된다. 미국은 이민자의 국가이기에, 다시 말해서 그들의 현재는 이민자가 몰아닥침으로써 맞이할 불행할 미래가 아니라 사실은 과거로부터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이 이민자라는 존재를 이물질이라는 단어로 교환해보자. 마틴의 말처럼 일대일로 대응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주변부의 의미는 어느 정도 맥락이 닿는다. 사회를 서서히 잠식해오는 그들은 지금 눈앞에 지하철 한구석을 떠돌면서도 사실은 뉴스 속이나 서류뭉치 속에서 범죄와 실업이라는 수치를 통해 제시되는 유령들이다. 바로 그 유령들이 이 영화에서 메꾸어지지 않는 앞뒤 서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이제 다시금 이 영화를 마틴과 머피가 사는 세계로 가정하고 그 세계에 우리가 자신을 대입한다고 가정해보자. 현대인에게 공포영화보다 두려운 것은 자신을 이루는 세계가 서서히 붕괴되는 것이다. 개인의 시야에 보이는 세계가 하나의 방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방의 테두리부터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걸 무기력하게 지켜만 보아야 하는 심리가 이 영화에 있다. 그것은 그 붕괴현장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존의 심리가 작용하면서도, 막상 문밖을 나서기에는 너무나도 불확실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 망설여지기 마련이다. 마치 <미스트>의 주인공이 안개를 피해 마트에 숨었고 그 마트 밖을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 마트 밖에는 괴물들이 있는 게 분명함에도 군대가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구해준다는 점이 뒤늦게 밝혀지듯이, 어찌 되었든 간에 선택의 순간은 분명 온다는 점에서 시간의 흐름을 통탄하게 된다.

영화의 시간은 그런 불확실함 속에서 조용히 흘러간다. 이야기는 몹시 간단해서 요약하기가 더할 나위 없이 쉽다. 음주 상태로 한 남자의 심장 수술을 집도했다가 그를 사망에 이르게 한 외과의사 스티븐 머피에게 죽은 남자의 아들인 마틴 랭이 복수를 벌이는 미스터리 추리극이다. 끝내 머피는 마틴의 예언에 따라 자신의 가족 중 한 명을 죽이고 나서야 가족을 구할 수 있었다. 영화는 그 결말까지 달려가는 과정을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의 흐름으로 묘사하는데, 전체적인 줄거리만을 늘어놓을 뿐 그사이의 인과를 일일이 봉합하지 않는다. 극은 시작되었고 복수가 무대에 올라옴에도 시선은 서로를 응시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이의 시선은 극의 논리에 의해 관객의 시선으로 봉합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관객의 시선을 제거한 채 보아야 한다. 복수란 무엇인가. 복수란 그들 사이의 관계이지 외부 관찰자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모호한 공기의 흐름만을 보아야 하는 것이지 영화 밖에서 전지적 시점으로 지레짐작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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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님의 리뷰
2018.07.18 10:24:07
기괴하고 스산한 서정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긴장감입니다. 영화 전반적으로 배경음악을 거의 배제해 고요하지만 특정 장면에서는 기괴한 음악을 사용하여 관객의 감정을 조련하죠. 가족을 모두 죽일거라는 마틴의 서슬퍼런 예언이 적중하기 시작하면서는, 부부 모르게 그들의 아이 곁을 맴보는 마틴의 존재만으로도 긴장감은 상승합니다.

반면 어떻게 저럴 수 있었을까? 라는 리얼리티의 측면에서는 거의 낙제점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스릴러가 감정만큼 트릭의 재미를 주는데, 이 영화는 그 부분을 무시한 채 흘러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틴의 존재를 다르게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숲속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도와준 동물이 알고보니 신이라,
뜻하지 않은 복을 만나는 것처럼.
혹시, 그의 존재가 혹시나 신은 아닐까?
글쎄요.
이런 이야기가 어떤 관객층에게 어떤 재미를 줄 수 있을지.


물론 큰 미덕을 갖고 있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인간 본성, 본연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초월할 수 있는 도덕성의 앝음.

주인공은 이 저주를 깨기 위해서 결국 그런 선택을 하게 되고 그것이 씁쓸한 뒷맛을 남기게 되죠. 그 뒷맛은 꽤 강렬해서, 영화를 모두 보고 나서도 자꾸만 되내이게 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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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5 22:52:22
란티모스의 경제게임.
란티모스 영화의 핵심은 '게임'이다. '게임'은 경제용어로, 마주한 상대와의 손익을 고려해 최선의 결과를 선택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란티모스의 영화들은 이 지점에서 영악하다. 자본주의가 정한 룰로 자본주의 내부의 병폐들을 폭로한다. 란티모스의 게임들은 교환/화폐경제의 자본주의 사회를 물물교환의 세계라는 원점으로 되돌린다. 란티모스 영화는 신화로 시간역행을 해 이 물물교환만도 못한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의 카타르시스를 자극한다. 김기덕과 라스 폰 트리에 영화가 이 세계를 원형구조로 파악하는 상징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비해, 란티모스는 이 세계를 적확한 방식으로 보는 알레고리의 세계를 구축한다. '장르'를 이용한 '탈장르, '게임'을 이용한 '탈게임'은 이 영화가 주는 아이러니들을 설명하기에 좋다.

1. 란티모스의 타자는 어떻게 돌아오는가?

란티모스 영화에는 '타자'들이 존재한다. 주류사회에서 시스템에 들지 못한 사람들은 그 겉을 맴돌거나 시스템에서 차별당한다. 란티모스가 <킬링 디어>에서 푸코를 연상시키는 흰색 병원을, 그 전작인 <랍스타>에서 교정을 하는 호텔을 등장시킨 이유도 그 때문이다. 란티모스가 보는 정상성의 세계는 폐쇄회로다. <킬링 디어>에서 감독이 무표정한 카메라로 병원 복도라는 같은 공간을 비추는 데에는 이 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폐쇄회로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중간에 등장하는 와이드샷이라든가 여러 요소들은 시스템이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관객에게 체화하도록 만든다. 이 영화에서 동선을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은 오로지 '마틴'뿐이다. <랍스타>에서 커플들이 솔로를 수용소로 들어오게 만드는 규칙, <킬링 디어>에서 병원이 환자의 목숨을 결정하는 시스템에서 예외인 건 '마틴'이다. 이 란티모스 영화의 타자들은 시스템을 붕괴시키러 돌아온다. <랍스타>에서의 솔로들은 호텔에 비밀침투하고, '마틴'은 스토킹으로 가족을 뒤흔들어 놓는다. <랍스타>와 <킬링 디어>에서 모두 타자는 메시아로 등장한다. 요한계시록으로부터 시작해, 벤야민 등등의 종말론자들이 주장하듯, 정치는 종말에서부터 시작한다. 란티모스는 자본주의 내부의 순환논리를 불신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초법적인, 혹은 초자연적인 존재를 등장시킨 뒤 이를 설명하지 않는다. 새로운 규칙이 들어선 시대는 지금의 어법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 폐쇄회로의 조건들

란티모스 영화가 도전하는 이데올로기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다. 란티모스는 첫 영화부터 가족들의 관계를 옭아매는 게, 그들의 유착관계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형상화한다. <랍스타>의 커플들이 실은 가짜임을, <송곳니>의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허울이라는 걸 증명하는데 <킬링 디어>에서는 이 방식을 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다. 이 영화를 여는 첫 장면에서 심장은 수술대 위에 놓여 동그란 원 안에 갇혀있다. 이는 의료체계가 생명을 어떻게 고립시키며, 생명정치의 틀 아래 놓을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내에게 '전신마취'라 말하며 체위를 요구한다. 이 방식은 무언가, 가족마저도 이 '생명정치'의 대상으로 판단하리라는 암시라고 볼 수 있다. 란티모스의 <킬링 디어>는 그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선 자들이 겪는 신경증적 불안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동시에 계급의 문제로 치환시킨다. 폐쇄회로란 결국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정상 계급의 문제로 귀결된다. 마틴과 의사가족이 느끼는 이질감이 이 문제를 보여준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선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더욱 많은 솔로들을 잡아들이는 <랍스타>의 기괴한 설정이 그걸 보여준 적 있다. 이 폐쇄회로에 타자인 마틴이 제인한 게임이 들어온다. 그리고 가족은 신체가 '정상'이라는 의료인의 판정들에 따라 '비정상'으로 변하는 기이한 체험을 하기 시작한다. 란티모스는 폐쇄회로가 설정한 룰을 역이용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전개시킨다. 장르의 룰로 장르를 거부하는 란티모스의 영화도 이를 따른다.

3. 교환의 법칙

<킬링 디어> 속 스티븐은 마틴에게 시계를 사주고, 여러 호의를 베풀어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려한다. 마틴에게 그 선물들은 어딘가 불만족스러워보인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화폐로 무언가를 교환하는 일이 어딘가 모순으로 치닫는다는 걸 영화 장면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스티븐은 돈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는 걸 알수록 더욱 돈에 집착하기에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부조리로 몰아넣는다.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인과를 모두 '마틴'에 의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티븐이 생각한 것처럼 모든 인과를 '마틴'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마틴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게임이란 무엇일까? 바로 부조리를 부조리로 되돌려주는 부조리극이다. 의사가 술을 마신 채 환자를 죽인 일을 상식의 입장에서 납득할 수 없듯이 마틴은 일부러 상식 바깥의 행동들을 반복한다. 스티븐도 상식을 빙자한 상식 바깥의 행동들을 계속 한다. 자본주의가 지탱되는 법칙은 1의 화폐를 주면 1만큼의 가치를 돌려받는다인데, 계속 '정상'이라 판명되는 아들로 인해 스티븐은 그 가치가 무력해진다는 걸 알아차린다. 1:1로 교환되는 건 결국 죄와 죄뿐이다. 상품가치가 교환가치를 압도하는 시대를 파괴해 란티모스는 가부장제 시스템과,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폭력을 가시화한다. 마지막 장면은 특히나 압권이다. 합리적 선택의 여지들을 모두 제거한 채, 우리가 게임이라 부르는 경제적 선택들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보여준다. 그 합리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바로 서로가 죽으면 서로의 mp3를 뺐으려하는 밥과 킴만이 남아있다. 란티모스는 이걸로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란 결국 약육강식의 시스템을 반복한다는 걸 보여준다.

4. 희생제의의 세계

영화 곳곳에서 우리는 딸과 아들이 희생양이 되리라는 암시를 받는다. 바로 월경과 겨드랑이 알레고리다. 순결한 존재가 되지 못하면 희생제물이 되지 못한다는 논리가 가능한 게 <킬링 디어>의 세계다. 란티모스의 세계는 화폐로 교환되지 않는 무언가를 자신이 얻는 대가의 대가로 바쳐야만 가능하다. <랍스타>의 눈, <송곳니>의 송곳니가 그 예시라 할 수 있다. 란티모스는 이처럼 무언가를 바쳐야 무언가를 얻는 세계를 계속 영화화한다. <킬링 디어>에서의 스티븐은 순결한 두 자녀 중 한 명을 바쳐야만 죄를 해결할 수 있다. 마틴이 킴과의 섹스를 일부러 거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디테일에서 그의 정치적 무의식은 여기에서 나온다. '희생제의'의 세계는 화폐라는 추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실재를 이야기하려 한다. 부르주아의 세계로 들어서며 우리는 탈마법화(베버)된 세계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란티모스가 이를 거부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굴러가는 방식이 이로 인해 '소외'당했기 때문이다. 계급이 나뉘고,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생산양식과 멀어졌다. 탈마법화된 세계는 그렇기에 모두에게 불공평한 세계다.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시스템의 눈에서 개인은 와이드샷으로 비춰지며,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불안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란티모스식 세계로 회귀한다면 우리는 죄를 그대로 갚을 수 있는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사형수에게는 사형'을 이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는 폭력적이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은밀히 그런 논리를 바란다. 시스템이 그런 부분들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란티모스가 시스템을 공격하는 이유는 시스템이 보여주지 못한 정의를 그가 대신 실행하려는 의지에서 온다.

5. 사운드와 시선의 지옥

와이드샷과 사운드, 그리고 선악이 불분명한 '마틴(배리 케오간)'의 연기는 이 영화의 백미다. 란티모스의 영화 진행은 그 동안 동화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에서 시작해왔다. 그러나 <킬링 디어>는 환상이라는 소재를 가장 현실에 가까운 미장센으로 보여준다. <랍스타>와 <송곳니>에서 등장하는 이국적 공간 대신 병원을 등장시킨다. 란티모스가 병원에서의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밥을 보여주는 와이드샷을 통해 드러난다. 심장을 보여주는 오프닝도 마찬가지다. 개인은 란티모스의 해부대에 오른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반면 마틴을 보여주는 장면은 독특하다. 킴이 보는 '프레임'으로만 '마틴'이 드러나는 장면, 집 창문밖 프레임으로는 '마틴'이 보이지 않는 장면 연출은 '마틴'이 감독의 시선을 어쩌면 복사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영화에서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운드 연출은 이에 백미를 더한다. <킬링 디어>에서 가족에게 벌어진 일은 타인에겐 아무런 일도 아닌데, 사운드는 계속 그걸 어떤 일이라 강조시킨다. 이는 그리스 비극에서 등장하는 코로스가 쓰이는 방식과 비슷하다. 음악이 나오고 한 박자 늦게 비극과 부조리가 등장하는 이 양식은 란티모스의 연출이 그만큼 섬세하다는 걸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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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3 19:43:58
인신공양로 대가를 치루다!
3> 노이즈 록 이여, 불쾌감을 고조시켜라!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관객들은 점점 불편한 상황으로 몰아가는데 주안점을 준답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고, 음악들은 하나같이 신경을 긁고, 불협화음으로 거슬리게 한답니다.


영화에 쓰인 노이즈 음악은 역사는 꽤 깊어요.
비틀즈의 Revolotion 9 부터 루 리드, 생활속 소음을 다룬 구체음악등 말이다. 사운드트랙은 클래식부터 요즘 노이즈 음악이라면 당연하게 전자음악까지 음향감독 쟈니 번은 짜증나게 믹싱했더군요


딸 킴이 Ellie Goulding - How Long Will I Love You을
무반주로 부를대의 서늘함은 이 영화의 분위기를 더욱 암울하게 한다.




1번부터 5번까지 나머지 글들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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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량한 님의 리뷰
2019.05.13 11:22:03
‘여자는 부양될 존재’라는 느낌이 강하다. 마틴은 자신이 몇 년 후면 집을 나갈 거라면서 혼자 남겨질 자기 엄마의 배우자로(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스티븐를 원한다. 마틴이 킴을 거부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 봐야하는 게 아닐까. 부양할 의무를 지고 싶지 않아서. 남자의 손은 사람을 죽이는 손이지만 여자의 손은 어떤가. 마스터베이션을 해주는 손? 이 영화는 (여자를 부양해야 하는)가장과 가장이 돼버린 소년의 이야기인 것 같다. 스티븐이 아들을 죽인 건 우연이었을까. 가장을 죽였으니 잠재적 가장이 죽는 게 맞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겨드랑이 털이나 정액의 양에 집착하는 것도 그렇고 생각보다 상당히 가부장적인 이야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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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알못 님의 리뷰
2019.04.20 10:58:40
신적인 지위에 도취됐던 자의 추락, 자신이 희생되지 않기 위해 매달리는 주변인의 처절함, 잔혹한 등가교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불쾌하지만 소름끼치는 그리스 신화의 21세기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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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ntea 님의 리뷰
2019.03.21 08:59:31
개인적으로 인상깊게 보았던 <더 랍스터>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이었다. 영화 보기 전, 기괴하다는 평을 듣고 보았는데도, 보는 내내 불안함과 불편함이 계속 따라다녔던 것 같다. 오히려 무섭거나 잔인한 장면 보다는 배경음악이 계속 심리적으로 조여 오는 듯한 느낌.

이 영화는 단순한 스릴러물이 아니었다. 전체적인 틀에서 종교적인 은유와 의미가 숨어져 있고, 영화가 끝나고 알아보니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인 에우리피데스의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을 모티브로 하고 있었다.

단순히 한 번 보아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고, 해석이 조금 필요한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라이브톡으로 꼭 보고 싶었지만 아쉬웠다.) 인상깊었던 배우는 작년 <덩케르크>에서 소년 조지로 잠깐 나온 배리 케오간 배우가 정말 소름돋게 연기를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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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정치, 종교 등
욕설 및 음란성
타인에게 모욕감이나 수치심을 주는 언행
개인 안전 보호
개인의 사적인 정보, 특정 개인에 대한 강도 높은 비방, 혐오 발언
도배 및 광고
영화를 보지 않고 남긴 것이 분명한 리뷰
스포일러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