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Mother!)
드라마 / 2017

개요
드라마, 미스터리, 스릴러, 미국, 121분, 청소년 관람불가, 2017.10.19 개봉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배우
제니퍼 로렌스
하비에르 바르뎀
에드 해리스
미셸 파이퍼
도널 글리슨
브라이언 글리슨
크리스틴 위그
크리스티나 로사토
에밀리 햄프셔
루이스 올리바
크리스토퍼 가틴
시놉시스
평화롭던 부부의 집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온다. 낯선 이들의 방문이 불편하기만 하던 중 손님의 짐에서 남편의 사진을 발견하게 된 아내는 이들을 환대하는 남편의 모습이 의심스럽기만 하고, 그들의 무례한 행동은 갈수록 극에 달한다. 계속되는 손님들의 방문과 집안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은 아내를 더욱 불안하게 하는데... 도대체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83.51%
3.55점
키노라이트 분포
16개
81개
별점 분포
리뷰
29

손정빈 님의 리뷰
2018.04.06 14:57:31
결국 사랑만 남았네

'마더!'(감독 대런 애러노프스키)는 당황스럽다. 평화를 깬 이방인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하는 전형적인 스릴러처럼 보였던 이 작품은 정상 범주를 벗어난 인물들을 차례로 등장시키고, 그들이 만들어낸 비전형적인 상황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어붙이며 충격적이고 대담하게 내달린다. 환시와 환청에 시달리는 듯한 극도의 혼란과 당혹을 121분간 견디고 나면 다시 당황스러운 질문이 마음 속에 들어앉는다. '아, 이게 대체 다 무슨 이야기란 말인가.' '대런 애러노프스키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애러노프스키의 영화는 언제나 파괴적이었다. 데뷔작인 '파이'(1998)에는 괴작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후 내놓은 두 편의 걸작 '레퀴엠'(2000)과 '블랙 스완'(2010)도 다르지 않았다. 한 편은 나약한 인간에게 닥친 비극을, 또 다른 한 편은 인간 내면에 자리한 욕망의 광기를,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이미지에 담아 관객을 찍어눌렀다. 방식은 달랐지만, 그의 영화는 인간 존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같았다. '과시와 과잉'이라는 지적이 따라붙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다만 그의 작품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의 방식이 인간을 가장 솔직하게 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영감이 메말라버려 고통스러워 하는 시인(하비에르 바르뎀)은 새로운 작품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한 남자를 집 안에 불러들인다. 아내(제니퍼 로런스)는 둘만의 공간에 낯선 사람을 부른 그 행동이 마뜩잖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재기를 바라며 받아들인다. 그런데 남편을 찾아온 이 남자, 수상하다. 남편과 너무 잘맞는 것도 미심쩍고, 우연히 본 그의 짐가방에 남편 사진이 있는 것도 이상하다. 의심은 점점 커지는데, 이 남자는 자신의 아내까지 집으로 끌어들인다. 여자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부부를 점점 더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남편에게는 그런 기색이 없다.

'마더!'에서도 애러노프스키의 방식은 다르지 않다. 그는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전복(顚覆)해 인간에 다가간다. 아담과 이브 그리고 선악과, 카인과 아벨 그리고 인류 첫 번째 살인 등의 상징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다. 모든 사건이 집에서만 벌어지고, 집 주인은 창조자 시인이며(그는 남자를 자식처럼 보살피고, 여자에게서는 관대한 분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아내가 집을 낙원(paradise)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것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애러노프스키의 야망은 인류를 2시간짜리 영화에 담아내는 것이다.

애러노프스키 감독은 인류의 탄생과 그들이 걸어온 길을 최대한 압축해 폭발시키며 관객을 충격으로 몰아넣는다. 형제의 살인 이후 집에서 벌어지는 파국은 보는 것 그대로다. 집은 무질서로 가득찬다. 온갖 쾌락이 자리하고, 약탈·방화·강간·납치·테러·전쟁 등 인류가 저질렀으며 현재도 자행하는 온갖 폭력이 '지금 여기', 집 안에서 벌어진다. 종교마저 폭압으로 변질된지 오래다. 아내가 꿈꾸던 낙원은 이제 소돔과 고모라다. 한꺼번에 닥쳐 당황스러울 뿐 이 충격은 모두 인류가 행한 일들이다.

"내가 처리할게."(I got it) 아내는 일이 생길 때마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아내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무력감에 통곡한다. 카메라는 오직 아내를 따른다. 아내를 비추거나 그의 시선만 담는다. 그러니까 관객은 오직 아내의 시각으로 모든 사태를 지켜본다. 그러니까 관객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떤 해석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내를 인간에 의해 훼손된 대자연으로, 하나님과 예수에 가려졌던 마리아의 목소리로 봐도 무관하다. 중요한 건 아내가 남편과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건들의 가장 큰 피해자이자 결정적인 목격자라는 점이다.

인간(아내)이 파국을 목도하고 고통에 몸부림 칠 때 신(남편)은 침묵한다. 애러노프스키 감독은 잔인하지만 그게 인간이고, 이 세계의 정체가 아니냐고 말한다. 이기적인 신은 자신의 창조 행위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창조가 빚은 어떤 불행에도 책임지지 않는다(아내는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제 신은 없고 남겨진 건 오직 괴로워하는 인간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소설 '장미의 이름'을 "이런 난장판에는, 이런 난장판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아"라는 말로 마무리한 것으로 '마더!'를 이해할 수도 있다. 절망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용서를 이야기할 뿐이다.

이때 구약성서의 또 다른 인물 욥을 떠올릴 수 있다. 욥은 누구보다 신실한 믿음을 가진 남자였다. 그런 그에게 신은 최악의 고난을 선사했다. 재산을 모두 잃었고, 자식을 전부 떠나보냈고, 지독한 병을 얻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기에 욥은 울부짖는다. 도대체 내게 왜 이러시는 거냐고. 그러나 신은 말이 없다. 욥이 고통스러워 했던 게 이부분이다. 신은 어떤 설명도 하지 않으니 자신의 고통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보인다는 것. 의미를 찾을 수 없기에 고난을 이해할 수도 없다. 그게 바로 아내가 처한 상황이며, 우리가 절망을 견뎌온 과정이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사일런스'가, 이창동의 '밀양'이, 코언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모두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제 아내는 남편에게 아들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이 설정은 하나님이 아들인 예수를 세상에 내려보낸 것을 상징한다). 더이상 어떤 희망도 없는 것일까. 애러노프스키는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남편은 아들을 뺏아기 위해 말한다. "난 그의 아버지야."(I'm his father)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내가 외친다. "난 그의 엄마야!"(I'm his mother!) 이 난장판 속에 그나마 남은 건 결국 사랑이다. 우리는 신을 아버지(father)라고 부르며 의지한다. 그러나 세상을 그나마 유지하게 하는 건 아버지의 창조가 아니라 엄마(mother!)의 사랑이다. 영화가 아내의 사랑(heart)을 통해 세상을 복원하게 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글) 손정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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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9 00:41:18
대런감독은 블랙스완에서 끝났다. 억지도 억지나름이지 상징 범벅의 전개에 짜증이 치밀었다. 남은건 대자연, 혹은 인간의 사랑, 혹은 제니퍼 로렌스의 명연기. 정적과 소란으로만 구성된 사운드, 그 자체가 새로운 세계인듯 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집, 그녀가 칠하던 페인트에 섞어버린 노란색과 pain killer가 물에 퍼질때의 노란색 등에 집중해서 후반에 뭔가 대단한 이야기가 터질 줄 알았다. 그러나 계속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들이는 남편의 태도에 일차적으로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고, 동생을 죽여버린 형, 결정적으로 ‘비 유대인을 잘 감시해!’라는 대사에서 망삘이 왔다. 그의 날것 같은 표현방식은 참신했지만, 감독의 자아도취가 너무 가버렸구나.. 제니퍼 로렌스는 갈수록 영화를 못고른다.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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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알못 님의 리뷰
2018.01.21 15:29:40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신작 '마더!'를 보고 난 뒤,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관객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엄청 갈리겠구나'였다. 그동안 그의 작품은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고 보는 이들의 감정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해오기로 유명하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노아'에 이어 이번 '마더!' 또한 성경에서 영감을 얻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구절과 함께 현재 사회 곳곳에 일어나는 이슈들을 한꺼번에 담아내고자, 초대받지 않는 손님들의 주거 무단침입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나비효과로 대런 아로노프스키식 '안티크라이스트'로 완성되었다.

오늘날 기독교의 여러 문제점과 세상의 어두운 면을 비틀어 적나라하게 들추어냈지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들 정도로 '마더'를 극한으로 몰아가며 괴롭히고,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잔인한 장면들이 후반부로 갈수록 잦아지는 등 필요이상의 강한 자극이었다. 그렇기에 보는 이들에 따라 '좋다' 혹은 '나쁘다'로 극명히 나뉘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해피엔딩을 지양하고 관객들이 상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잔상이 남는 영화를 만들기를 선호한다고 밝혔는데, '마더!'의 후유증은 지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브이아이피' 못지않게 강력하다.

-2017년 10월 13일 '마더!'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언론 시사회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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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1 17:21:00
블루 마블 홈 커밍 데이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역할을 맡게 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는 ‘마기’라는 슈퍼컴퓨터가 등장하는데, 이 컴퓨터는 제작자 본인의 인격을 세 갈래로 나누어 만들었다. 그래서 실제로 컴퓨터가 세 대고, 삼권분립의 형태로 의사를 결정한다. 말하자면 ‘마기’라는 컴퓨터는 어느 하나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그 세 개의 연합이 보유한 의사결정능력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마기’라는 컴퓨터의 제작자가 여성이라는 점, 또한 현 관리자가 제작자의 딸이라는 점이다. 이게 여성과 여성이라는 흐름으로 이어지기에 흥미로운 것만은 아니다. 세 대에 나누어진 인격이 다음 세 가지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로는 어머니로서의 인격이 있고, 둘째로는 여자로서의 인격이 있고, 셋째로는 과학자로서의 인격이 있다. 따라서 ‘마기’라는 의사결정체계란, 개인이 내리는 판단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관한 설명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역할을 맡게 된다. 눈앞의 아르바이트생이 누군가의 자녀이기이기도 하다는 말처럼, 어머니가 한 사람의 여자이면서 동시에 고유한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마기’는 보여준다. 다만 보다 핵심적인 것은, 그것이 인격들의 모음집이 아닌, 인격들이 모여 만들어낸 체계라는 점이다. 이 세 가지 인격은 하나의 모체에서 태어났지만 분명히 구분된다. 비유하자면 일란성 쌍둥이와도 같다. 따라서 이 물음 자체는 복제 인간에게 인격을 부여하는 절차와도 유사한 면이 있다. 예를 들어 복제인간에게 인격이란 어떤 문제인지를 생각해볼 때, 흔히들 하나의 개체로 착각하고는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억을 담는 그릇은 뇌이고, 복제인간의 뇌는 별개로 동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시간으로 동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격이 갈라져 나온 순간부터 다른 사람이라 보아도 좋다.



‘마기’가 동작하는 방식이 삼권분립에 대응하는 것은 그런 이유로 성립한다. 하나의 모체가 만들어낸 세 개의 인격, 이들은 모두 다른 사람이므로 각각의 판단은 유효하다. 그러나 이 물음을 하나의 신체로 국한할 때, 그 판단의 신빙성에는 문제가 생겨버린다. 세 개의 그릇은 물리적으로 분리되어있으니 속에 무엇이 들었다고 확언할 수 있지만, 하나의 그릇에 세 개의 내용물이 있다면 어디까지가 별개인지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마치 이렇다. 물과 기름을 비커에 모았을 때 층은 확실히 분리된다. 하지만 그 비커를 따라내는 방법으로 두 층을 나누기는 어렵다. 그런 맥락으로 보면, 유기적인 것도 아닌데 어째서 분리하기 힘느냐는 물음에 그런 답변을 보낼 수 있을 테다. 유기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기적이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경계다.



중요한 것은 경계다



마찬가지로 영화라는 것을 하나의 자아로 볼 때, 우리는 그 속에 담긴 여러 인격들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만약 카메라가 각 인물의 인격을 대변한다면, 오가는 시점 쇼트가 인격의 교환을 뜻할 수도 있을 테다. 허나 그 쇼트의 경계가 무엇인지를 나눌 수가 없다는 게 문제다. (방금 한 말은 오타가 아니다. 경계란 ‘어디’가 아니라 ‘무엇’의 문제다.) 왜냐하면 경계는 우리가 찾으려 한다고 해서 찾아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경계란 우리가 그것을 목격하는 순간에 존재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말하자면 그런 발견의 순간에 우리가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묻게 된다.



영화에서 시점 쇼트란 카메라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그곳이 인격이 형성되는 지점인 셈이다. 따라서 이 ‘무엇’은 그 인격의 전제가 된다. 요컨대 카메라의 시선이란 경계를 확립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테다. 우리가 마주한 인격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카메라는 이미 자신의 시선을 기록해두었다는 점에서 ‘실시간으로’ 동기화되지 못하고, 그러므로 각자가 별개의 인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를 보는 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기에 경계를 특정할 수가 없다. 즉, 우리는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 특정한 자세를 취할 수가 없다.



아마도 이게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한 가장 큰 딜레마일 것이다. 영화의 안쪽에서 카메라의 시선을 분석하면 여러 시점을 잡아낼 수 있지만, 의사결정체계라는 점에서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영화의 바깥에서 우리의 시선을 분석하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잡아낼 수 있지만, 비커 안의 물과 기름과도 같아서 그걸 분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단적으로 보면 이 두 가지는 담론이라는 것의 두 가지 전개양상을 보여주는 듯 보인다. 영화를 안에서 보아야 하는가 혹은 바깥에서 보아야 하는가. 이때 흥미롭게도 그 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 된다. 안과 밖을 미시와 거시세계로 빗댄다면 안쪽이 주관적이고 바깥쪽이 객관적일 것 같은데, 사실은 안쪽이 객관적이고 바깥쪽은 주관적이다. 즉 미시적인 시선인 카메라가 객관적이 되고, 거시적인 시선인 우리가 주관적이 된다. 많은 걸 볼 수 있다는 게 (경계라는) 객관성을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의사표현’ 자체가 아닌 ‘의사결정체계’라는 점



쇼트와 리버스 쇼트를 나와 상대로 지칭하기는 쉽다. 혹은 설정 쇼트와 같은 비인격적인 시선이라 하더라도 관객과 영화를 가르기엔 충분하다. 설정쇼트란 무대가 이곳임을 선언하는 장치이니 말이다. 그러니 영화를 보면서 자신을 전제로 사용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보는 ‘무엇’이 영화라는 점에서, 그것을 피응시 대상으로 남아있게 하는 우리를 하나의 인격으로 여기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 전체가 한 사람의 시점이라면 모를까, 영화가 리버스 쇼트를 발명한 이후로 하나의 시점은 사라져버렸다. (사실 ‘시점’이라는 말 자체에 외부로부터의 개입이 전제되어 있기도 하다. 심지어 그 한 사람이라는 정의조차도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린다.) 따라서 우리의 상대는 단 한 명이 아니다. 쇼트와 리버스 쇼트라는, 화자와 청자가 주고받는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영화를 봄에 있어 중대한 사실을 깨우쳤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하나지만 그 안에 여러 인격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걸 인지하지 않으면 하나의 인격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맥락으로 슈퍼컴퓨터 마기는 이곳에 불려 온다. 영화 자체를 하나의 그릇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이걸 복제된 신체에 생겨나는 여러 인격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해석은 갈라진다. 만약 영화를 하나의 그릇으로 두고 쇼트를 경계로 본다면, 인격에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유사한 쇼트들이 별개의 인격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깨우친다면, 또한 그것들이 만들어낸 한 편의 영화가 ‘의사표현’ 자체가 아닌 ‘의사결정체계’라는 점을 깨우칠 때, 우리는 그 별개의 인격에 대한 심층탐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된다.



쇼트 간에 이어지고 나누어지는 경계는 우리가 그걸 인식하지 않으면 연속성 그 자체로만 남게 된다. 영화란 본래 콘티뉴이티를 추구하니 말이다. 그러므로 쇼트의 경계를 바라본다는 건, 우리와 영화의 경계를 바라본다는 것과 같다. 쉽게 말해 영화에 몰입한 순간 영화가 삶이 될 수는 있지만 체계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물론 영화를 의사표현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경계를 일부로 못 본 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루어지는 양자 간의 동기화가 어느 한쪽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실이 영화에 먹히든, 영화가 현실에 먹히든 어느 한쪽은 반드시 침탈당하게 될 테다. 그게 고의이든 실수이든 간에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는다면, 도구로 사용될 위험뿐만 아니라 단편적인 모습만을 보여줄 공산이 크다.


종교 이전에 도덕이 있었다


영화를 말하는 방법이 여러 개 있고, 그중에 뭐가 제일 좋은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물론 영화를 담론 도출의 레퍼런스로 사용하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말하는 것 자체가 ‘말하려 하는 것’인 영화가 있다면, 영화는 레퍼런스가 될 수 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마더!>가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는 안과 밖 그 어느 것으로도 독해되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딱 경계에 있을 때 의미가 있다. 말 그대로 안과 밖의 경계에 선 영화다.) 바깥에서 보면 제니퍼 로렌스의 시선이 독식되고, 안쪽에서 보면 하비에르 바르뎀의 행동이 이어지지 않으니 일반적인 영화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대런은 이 영화를 어떻게 기획했고, 왜 만들었을까?



대런은 이 영화를 발표하면서 천지창조의 여섯 번째 날을 자랑스럽게 언급한다. 그러면서 해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고 말한다. 이 시점에서 본작을 비평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행위가 되어버린다. 이에 대해서는 사진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를 떠올려 보면 좋겠다. 19세기에 사진을 찍는 행위는, 피사체로 쓰일 ‘완전한’ 가족들이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들에게 사진이란, 가족의 한때 모습을 기록하는 것이면서도, 이걸 찍을만한 여유가 있고 또 구성원 사이에 빈틈이 없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를 <마더!>에 적용하면 이렇게 된다. 대런에게 이 영화는 레퍼런스로 쓰일 완전한 이야기이다. 그는 영화를 해석할 여유가 있으면서도, 또 그런 구성원끼리 해석을 나눌 수 있는, ‘관객’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따라서 이 영화가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꽃이 꿀벌을 위해 꿀을 만들어내는 것과 비슷하다. 이를테면 6번째 날이라는 가제와 어머니라는 확정된 제목을 보면서, 이것이 어머니 자연과 그 위의 인류에 대한 메타포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작부터 알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까지, 하비에르 바르뎀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면, 아직 영화를 보기에는 이른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애초에 대런은 이 영화가 개봉하기 직전에 ‘지구에 살기에는 인간은 너무 과분한 존재’라고 말한 바가 있다. 안과 밖으로 모든 힌트를 다 준 셈이다. 우리 식으로 서술하면, 대런은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도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첫째, 이 영화의 제목과 연결되는 제니퍼 로렌스의 포지션 ‘어머니’는 곧 카메라의 시점을 독식한다. 대런은 이 카메라 독식을 통해 ‘어머니’라는 단어의 경계를 작품 속 집으로 한정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영화의 제목을 영화 속에서 찾아내야 한다. 그가 말하는 지구 위의 인간이 ‘살아있는 지구’, 즉 ‘어머니 자연’으로 연결된다는 점만 알아두면 이것은 정말로 재미있는 탐정 놀이가 된다.



여기서 둘째, 이 탐정 놀이를 위해 대런이 멍석을 깔아놓은 건 우리가 초대를 받았다는 뜻이다. <록키 호러 픽처 쇼>에서처럼 알 수 없는 오프닝 시퀀스를 거쳐 저택의 입구로 들어선 우리에게 주어진 건, 의사결정능력이 아니라 의사결정체계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 영화는 해석능력이 아니라, 해석의 체계를 학습시키려고 한다. ‘마기’라는 게 ‘마더’랑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은 그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같아 보이지만 다른 것들, 현실의 상징이 영화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같아보이지만 다른 게 된다. 이미 분리될 때부터 인격이 별개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영화에서 찾아내는 ‘마더’는 대런이 말한 것과는 다른 무언가다. 또한 우리가 그걸 발견할 때 그 무언가의 존재는 확증된다.


어찌 보면 청년 세대가 기성세대에 반기를 들었던 역사상의 많은 시기처럼 반항을 유도하는 것 같기도 하다. 기성세대가 특정한 모티브를 준다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변형하는 게 청년 세대의 도리였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대런은 기성세대를 자청한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건 ‘어머니’라는 달콤한 꿀이다. 너무 대놓고 있으니 이게 아닌가 싶어지고, 혹은 영화가 무언가를 담고 있으리라고 추측하는 이들이 이곳에 찾아온다. 이 과정에서 관객에게는 다르게 보는 힘이 길러진다. 같은 극장에 있다고 같은 걸 보는 게 아닌데, 그럼에도 같은 세계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던 이들에게. 은폐된 경계를 드러내는 것은 영화의 붕괴이다.



적어도 관객석, 혹은 우리와 스크린과의 거리가 곧 경계가 된다. 그리고 제의적인 의미에서 집은 우주의 중심이다. 그렇게 보면, 본작의 집이 영화 자신에 대한 메타포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라는 우주가 있고, 인간이라는 우주가 있다. 그런데 그 우주 안에 있는 건 ‘어머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자신이 자리한 바깥에서부터 어머니를 찾아 나가게 될 것이고, 영화를 보는 관객은 자신이 보는 영상 안쪽에서 어머니를 찾게 될 것이다. 후반부에 벌어지는 광란의 도가니는 그 두 가지 흐름이 뭉쳐지는 곳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우주에 두 가지 해석이 있는 걸까, 아니면 두 개의 우주에 두 개의 해석이 있는 걸까. 무언가를 잉태한 건 집 안의 제니퍼 로렌스인지, 아니면 필름 안에 자리한 집인지를 생각해보다가 그대로 펑하고 터져버린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만드는 대런의 태도가 꼰대스럽다는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듯싶다. 경계에 서 있다는 말은 양쪽 모두를 볼 수 있다는 것이며, 독해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기는 하다. 허나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서 꼭 영화를 많이 안다거나 잘 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대런은 관객이 그 경계에 서서 영화를 보는 자신만의 방법, 체계를 만들어보길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에 응답하지 않으면 무식하거나 무지한 게 되어버린다. 물론 이것은 영화 자체와는 별개로 생각해볼 부분이다. 단지 대런만의 문제가 아니고, 영화를 향유하는 2차 창작자에게 요구되는 도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 영화는, 대런이 꼰대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던져야 했던 화두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게 정말이라면 대런이 말하려는 ‘체계’란, 영화를 보는 방법이 아니라 영화를 둘러싼 태도에 관한 것일 테다. 요컨대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종교 이전의 도덕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마기’라는 초월적 어머니, 그런 종교 이전에 어머니와 여자와 과학자로서의 도덕이 있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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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겐 님의 리뷰
2018.09.08 19:08:35
감독의 야심에 동의할 것인지 아닌지에 따라 평가가 극단으로 나뉠 문제작.
거대한 이야기를 다룬다고 무조건 훌륭한 영화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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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냥 님의 리뷰
2018.09.03 15:08:38
과하고 자연스럽지도 않은 상징 밀어 넣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일차원적인 비유의 남발. 물론 이 정도 일차원적이라면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의도는 그다지 흥미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상징과 비유를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자신이 하고픈 말을 모두가 이해하기를 바란 걸까? 그렇다면 그 쉬움은 어설펐다. 어설픈 안티 크라이스트. 작품을 관객에 손에 건네주지 못하고 떠먹여준다. 관객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강요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관객에게 작품을 음미할 틈은 없다. 쉴 새 없는 몰입감은 작품의 재미도 되기도 하지만 작품에 대한 미각을 마비시킨다. 여름철 블록버스터 오락 영화에서 쉴 새 없이 맛을 제공한다면 장점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영화를 보는 순간 혹은 영화를 보고 나서 음미할 수 있는 무언가를 줘야하는데 이 영화의 상징은 음미하기에 맛이 너무 직접적이다. 이름도 등장하지 않았던 등장인물 중에 크레딧에 보면 사마리아인이라는 말도 나오는 설명은 다했다. 정말이지 기독교에 대해서 1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내가 봐도 심할 정도 였다. 짧은 지식으로도 대략의 해석이 될 정도로 직유다. 심지어 그 해석조차 새롭거나 신선하지도 않다. 당연한 것을 강한 자극으로 포장했을 뿐이다.
아마도 하비에르 바르뎀이 맡은 그는 하나님 일 것이다. 제니퍼 로렌스가 맡은 마더는 대자연이자 마리아 정도 일 것이고. 집은 지구, 그리고 그의 작업실은 에덴 동상일 것이다. 그리고 작업실에 돌은 선악과 정도. 에드 해리슨과 미셸 파이퍼는 남지와 여자라는 정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브와 아담 일것이고 그들의 아들은 카인과 아벨이다. 여자가 돌을 깬 행위는 선악과를 먹은 이브의 행동이고 그 후에는 하나님, 그가 에덴 동산을 막는다. 카인과 아벨의 사건 이후에 펼쳐지는 장례식. 그 속에서 인간의 탐욕이 발생하고 지구는 파괴된다. 성경 속에 대홍수가 일어난 것처럼 수도배관은 파열되고 집안은 물로 가득찬다. 그리고 그는 시집을 낸다 아마도 성경에 대한 모티프 일 것이다. 마더는 임신을 하고, 그 아이는 예수일 것이고. 책은 성공하고 사람들은 집으로 몰려든다. 사람들은 시집, 성경을 오도하고 구원을 갈구한다. 집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지구에 폭발하는 인구, 혹은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 그는 마더, 대자연이 원치 인류의 구원을 말한다. 그는 구원을 말하지만 구원해주지 않는다. 종교이자 종교적 장소, 집으로 인류는 몰리지만 그 결과는 폭력과 혼돈 뿐이다. 그 와중에 마더는 출산을 한다. 출산을 돕는 사람들 아마도 사마리안이나 동방박사의 비유일 것이다. 예수, 아들은 태어났다. 하지만 그, 하나님은 아들을 사람들을 위해 희생시킨다. 사람들은 아이의 시신을 성찬 먹듯이 섭취한다. 전쟁, 유대인 학살 등 인류역사를 집어 넣기 바쁘다. 대자연, 마더는 분노하고 벌을 내린다. 결국 불로써 징벌하는 것은 지극히 성서적인 불구덩이기도 하지만, 지구온난화이기도 한 건가?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이건 뭔지 모르겠다. 에반게리온인가?) 순환론적 세계관이자 자연의 회복을 다룬 세계관일 것이다. 결국 신이 그래도 자연을 창조한 것일까? 신은 자연은 창조했고, 인간의 구원을 말하지만 무책임하다. 이건가? 심지어 엔딩크레딧에 나오는 노래 마저 참...the end of the world라니...
문제는 이 비유들이 상징을 억지로 밀어 넣은 느낌이고, 자아의식 과잉을 벗어나지 못한다.일차원적인 접근 일 뿐이고.
물론 인간의 시선을 배제하고 자연의 시선에서 인간의 파괴 행위, 신의 이야기를 다룬 점은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신 아니면 사람에서 다루는 작품들이 많았으니. 신의 시선도 아니고. 신의 시선은 마지막에 되어서 나오니. 그리고 제니퍼 로렌스의 연기. 클로즈업을 활용한 카메라 워크는 좋다. 클로즈업 중심으로 영화가 흐르다보니 마더 즉 대자연의 입장에서 몰입할 수 있는 것은 큰 장점이다. 원래 별이라는 것에는 생명이 살지 않는 게 정상일 수도 있으니. 푸른 별 지구가 아름답고 생명이 있어서 아름답다는 것는 자연의 입장에서는 뭥미일테니까.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이니. 자연의 입장은 마더의 마더 같을 것일 수도 있으니. 결국 자연이 지키고 싶은 것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 자연 그 자체이고 자연으로 머무르고 싶은 것일지도. 신은 자연을 창조했다. 하지만 자연의 의도는 신과 다를 수도 있다. 자연은 자연 그 자체로 머무르는 것이니까.
'마더!'라는 제목에서 이 영화가 모성을, 여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아닌 것 같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여성화된 대지, 여성화된 자연 그 이미지 그 이상은 아닌 것 같다.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낳는 대지. 인간이 아닌 자연 가이아. 굳이 여성상으로 따진다면 전통적인 여성의 가치이다. 자연이고 모든 것을 포응해야하는. 모성이라고 하지만 그 모성은 전통적인 가치이고 신화적 가치에 머무를 것이다. 여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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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ak 님의 리뷰
2018.08.24 01:37:57
부담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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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ish 님의 리뷰
2018.08.10 16:47:11
그녀만 쫓는 카메라 따라 나도 예민해진다.

그나저나 아기 낳기 정말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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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9 02:59:38
<블랙 스완>(2010)부터 강렬함을 주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노아>(2014)를 딛고 일어나 성경을 은유한 사랑을 표출하고 있다. 답답함과 화가나는 부분이 영화 내내 등장하고 불편함이 가득하지만 이 불편함은 불과 함께 아름답게 소화될 수 있다는 것에 환상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분명, 호불호가 가득히 갈릴 수 밖에 없는 영화지만 영화의 후반부부터 절정을 이루고 이 절정을 느낄 수 있다면 '마더!'를 외치게 될것이다. 마더(제니퍼 로렌스)의 행동과 그녀의 남편(하비에르 바르뎀)의 행동이 전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에 황홀함을 느낄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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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4 17:58:09
Me, I am I.

'그'(Javier Bardem)는 남자(Ed Harris)에게 그녀(Jennifer Lawrence)를 집에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라 말하지만,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보석이다. 그런데도 그는 보석을 깨뜨린 남자와 여자(Michelle Pfeiffer)를 내쫓진 않는다. 그렇게 귀하게 여겼음에도, 그는 못을 박아 방을 막는 것만으로 깨진 보석을 잊어버린 듯 행동한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를 사랑해주는 이들이고, 또 다른 보석을 간직한 그녀 역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홀로 집을 지키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그를 추종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사랑하는 이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Mother of Everyone

실수로 컵을 떨어뜨리고, 몇 번의 경고에도 싱크대를 부수고, 깨진 그릇 조각 마저 훔쳐간다. 집에서 생명을 느끼고 이를 소중히 여기는 이는 그녀뿐이다. 끊임없이 사람을 끌어오는 것은 그이지만, 이들을 먹이고 재우는 것은 그녀의 역할이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집에 혼자 남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가 사는 집을 바로 세우는 것도, 다시 불태우는 것도 그녀만이 할 수 있다. 추종자들의 생각과 달리, 집은 그가 아닌 그녀의 것이다. 그녀가 지칭하듯, '그' 역시 그녀의 아이(Baby)일 뿐이다.


Babies

글로써 구원하는 존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누는 존재, 죽어가는 순간 손을 잡아주는 존재. 집을 찾아온 군중은 그를 찬양하고, 추종한다. 하지만 그들의 먹는 음식과 잠자리를 마련한 것은 그가 아닌 그녀다. 그는 그녀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시 세우지만, 그가 없었다면 불에 타 없어진 집이 다시 세워질 순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사랑해 찾아오는 이들을 베풀지만,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 더 중요한 존재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글귀를 써낸 그인가, 모든 중요치 않아 보이는 것을 끊임없이 재건하는 그녀인가.


완성도: A, 중요도: A

종교영화보다는 자연보호 영화에 훨씬 더 가까워 보이는 이야기에 노골적으로 성경을 덧씌운 것은 내러티브를 더 어렵고 논쟁적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표면적인 상징과 차용을 걷어내면 <마더!>는 명확한 이야기로 또렷한 주제를 전달하는 영화다. 타들어 가는 심장과 태양 빛 물과 같은 강렬한 이미지 역시 이를 위한 것이다. 선언적 주제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복잡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영화의 방식은, 과도하면서도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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