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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퀘어 (The Square)

코미디 / 2017

개요
코미디, 드라마, 독일,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151분, 15세 이상 관람가, 2018.08.02 개봉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
배우
클라에스 방
엘리자베스 모스
도미닉 웨스트
테리 노터리
크리스토퍼 레소
엘리한드로 에두아르
시놉시스
뭘 해도 더-럽게 안 풀리는 이 남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더 스퀘어’라는 새로운 전시를 앞둔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안’

누구보다 완벽했던 그에게
예측불허! 기상천외한 트러블이
빵! 빵! 터지기 시작했다

통제 불가! 짜증 유발!
그럼에도 불구하고,

HELP HIM, PL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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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스트리밍을 통해 더 스퀘어을(를) 다시 볼 수 있는 곳은 없으며, 현재 더 스퀘어을(를) Google Play 무비, 네이버 시리즈on, 씨네폭스, 인디플러그에서 유료 다운로드하실 수 있습니다.

85.51%
3.59점
키노라이트 분포
10개
59개
별점 분포
리뷰
31

2018.08.21 01:46:51
왜 사람들은 ‘The’ square 안에서만 도덕적이려고 하는가? 그 밖에도 사각형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moviemon 님의 리뷰
2018.07.26 05:00:25
위선적인 현대사회를 벗기는 예술의 공간, <더 스퀘어>: 현대인의 비합리적이고 위선적인 초상을 스크린 안팎으로 전시하다
"'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공간으로 이 안에서는 모두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더 스퀘어>는 작년 제70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킬링 디어> (2017), <그 후> (2017), <러브리스> (2017), <옥자> (2017) 등을 제치고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이변의 주인공이 되었다. 감독은 북유럽을 홀렸던 예술 프로젝트 '더 스퀘어'를 영화로 재탄생시켰는데, 이는 개인과 사회, 일상과 예술, 그리고 전시와 비전시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드나든다. <더 스퀘어>는 표면상으로 기상천외한 사건 사고들이 하나둘씩 터지면서 뭘 해도 일이 꼬이는 크리스티안(클라에스 방)의 날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바닥에 설치된 정사각형 모양의 공간을 통해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고 조화롭게 공존하는 휴머니즘 세계를 갈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갈망 또한 위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냉소적으로 전달한다. 그래서, '더 스퀘어' 전시회를 앞둔 크리스티안이 겪게 되는 크고 작인 일들을 따라가 보면 전시된 현대인의 초상을 천천히 확인하게 될 것이다.

크리스티안에게 터지는 연속적인 문제들은 모순적이고 위선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매개체 역할을 할 뿐이다. 'I MISTRUST PEOPLE'과 'I TRUST PEOPLE' 양 갈래로 나뉜 전시회 입구에서 크리스티안과 두 딸은 'I TRUST PEOPLE' 입구로 들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평소에 자신이 '더 스퀘어' 전시회의 가치를 따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음을 마주하게 되는 출발선을 상징한다. 그 출발선에 서 있게 될 때 비로소 크리스티안의 일상에서 현대인의 나약한 도덕성을 하나둘씩 목격할 수 있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도덕적인 가치관을 인지하고 있지만 이와 대조적인 행동을 보이는 모습과 모두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 공간을 경계 안으로만 한정 짓는 전시물을 통해 현대인의 모순성을 직간접적으로 폭로한다. 이를 폭로할 때 감독이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을 나열해서 보여준 목적은 비합리적이고 위선적인 본성이 크리스티안과 극 중 인물들 뿐만 아니라 관객 자신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과 연관이 있다. 또한 크리스티안의 기자회견 장면은 전시의 대상을 스크린 밖으로 범위를 확장한다. 기자회견장에서 기자가 던진 질문은 대중의 이목을 끌기 위해 선정적인 콘텐츠를 만드는 미디어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동시에 울상을 짓는 크리스티안을 지켜보면서 웃는 관객의 모습과 결부시킴으로써 관객의 초상까지 그 자리에서 바로 전시해버린다. 그래서, <더 스퀘어>는 나열하는 방식으로 스크린 안과 밖을 통합함으로써 비로소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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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na09 님의 리뷰
2018.07.27 12:23:29
양심과 위선, 우리는 모두 스퀘어 경계에 서 있다
"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영역으로 이 안에서는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




제70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더 스퀘어>는 위선적인 인간의 본성을 희화한 예측불허 부조리극입니다. 칸에서 수상한 작품은 어렵다는 편견을 누그러트린 강력한 메시지, 수려한 미장센까지 담아낸 작품임에 틀림없는데요. 마치 스웨덴의 현대미술관에 다녀온 듯한 경험치 뿐만 아니라, 북유럽의 성향과 복지국 스웨덴의 다중적 사회문제까지 집약한 인간 본성 탐구 보고서 같았습니다.


주인공 '크리스티안(클라에스 방)'의 뉴 프로젝트 '더 스퀘어'는 2015년 감독이 직접 제작한 동명의 예술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받아 극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어쩐지 모르게 도와주고 싶은 짠 내 나는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안(크라에스 방)'의 좌충우돌 인상을 통해 이중성, 위선 그리고 나약함을 위트 있게 다룬 블랙 코미디입니다.


# 머피의 법칙, 더럽게 안 풀리는 그런 날

세상 가장 우아할 것 같은 완벽해 보이는 수석 큐레이터의 양심을 찌르는 연쇄 도미노처럼 일어나는 사건사고가 '만약에 나라면..?'이란 상상을 해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아침부터 나도 모르게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나, 재미로 시작한 범인 찾기 놀이가 일파만파 커지고, 일상적 하룻밤을 보냈다고 생각한 앤의 질척임으로 난감, 전시 홍보에 관여를 안 했더니 일어난 노이즈마케팅의 여파까지. 머피의 법칙, 운수 좋은 날이 겹친 '크리스티안'의 꼬여버린 일상과 핀 조명으로 밝히는 특별한 현대미술관의 전시가 매칭 되며 자연스러운 스토리텔링으로 이어집니다.


#선과 악의 경계, 우리들의 선 긋기는 어디까지?

194cm의 훤칠한 키, 수려한 외모, 수석 큐레이터라는 직업까지 혼자 사는 세상 같은 크리스티안은 사실 우리 모두를 대변합니다. 도와 달라는 난민을 외면하고, 정치적인 올바름을 추구하지만 속내는 다른 이중성. '더 스퀘어'가 같은 컨셉은 경계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프로젝트로 선 안과 밖의 사람이 다르지 않음으로 해석할 수 있는 설치미술입니다.

적당히 매너를 지킬 줄 알고, 주변 평판도 괜찮은 크리스티안은 체면 차리다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결국 거지에게 도움을 빌어야 하고, 자신의 경솔한 행동에 피해를 입은 아이에게 사과를 해야 했으며, 수석 큐레이터 자리까지 물러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죠. 이처럼 한 가지 일로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일상을 통해 반성하고 삶을 되돌아볼 것을 이야기하고 있죠.

초반부 크리스티안을 줄곧 나선형 계단의 꼭대기에서 바라보던 카메라가 후반부로 갈수록 계단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바뀐 형태는 모두의 양심에 호소하는 작은 움직임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또한 엄숙함이 감도는 작가 인터뷰 장면에서 터져 나오는 틱장애 발언은, 위선에 정면 대응하는 감독의 영민한 꼼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북유럽의 흔한 일상, 유럽 난민과 육아

스웨덴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지는 복지국가로 알려져 있죠. 무엇보다 스웨덴의 육아정책은 모범사례로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아빠의 육아 참여제도가 활발하다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보면 직장에 아무렇지 않게 아기를 데려와 돌보면서 회의하는 장면이 시선 강탈! 인상적인데요. 스웨덴은 최소 6개월 이상 부모휴가를 선택해 아빠의 육아도 존중해 주는 나라인 점을 알아두면 좋습니다.

요즘 유럽 영화에서 두드러진 소재는 바로 '난민 문제'입니다. 개봉을 앞둔 <주피터스 문>에서는 난민을 SF적 판타지로 담아냈으며, <더 스퀘어>에서는 일상화된 난민을 다루고 있죠. 복지국가 스웨덴도 예외 없는 난민을 향한 다각화된 시선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전시 '더 스퀘어'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신뢰와 배려, 사회적 역할의 변화 그리고 책임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상황은 바뀔 수 있는 가변성, 연대의 필요성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전작<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으로 제67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루벤 외스틀룬드'감독은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불가항력'이란 제목답게 돌발 상황에서 발현되는 나약함을 제대로 파고든 연출이 돋보이는 영화지요. <더 스퀘어> 관람에 만족하셨다면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도 추천드립니다.


참고로 쿠키영상은 없으며, 모션 캡처로 잘 알려진 배우 '테리 노터리'의 숨 막히는 열연은 새로운 영화적 체험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 부분을 놓치지 마세요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이재윤 님의 리뷰
2019.12.08 00:28:43
더 스퀘어를 보았을 때, 나는 이 작품에서 정지돈의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에서 보았던 오사카의 만국박람회를 떠올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득한 광장이나 시설에서 어떤 잡음, 우리가 잡음으로 치부하지만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을 한 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절규나 다른 무엇이 들리고 사람들은 무심과 주목 사이에서 주저하다가 결국 다시 자신들의 생활영역으로(영화에서 스퀘어라고 지칭하는) 복귀한다. 우리는 한 순간 분노하거나 혀를 찰 뿐이다. 특히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는 타인들에 있어서도 지나칠 정도로 경직되어 있고, 그 속에서 깨어나는 몇몇 경험은 이 영화의 놀라운 장면들이다. 이 극은 디 뮤지엄에서 진행하는 더 스퀘어라는 전시 준비과정과, 한 여성을 괴한으로부터 보호하다가 겪게 되는 소매치기를 해결하는 과정이 조합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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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민철 님의 리뷰
2019.03.29 00:06:54
영화 전반을 가득채운 위선과 풍자에 대한 소요가 상당하다. 현대의 지식인이 가지는 허울뿐인 허구적 가치들이 "더 스퀘어"란 장치로 절정을 이루고 또 틀어지기 시작할 때의 딜레마와 블랙코미디는 곧 감독이 자신과 자신의 세상에 들이댄 거울과도 같다. 자기반성과도 같은 영화의 흐름이 혼란스럽고 불편하지만, 이 차가운 냉소와 도전을 끝까지 보게되는 이유는 그 "삿대질"에서도 나도 자유로울 수 없음에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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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0 18:53:50
네모는 어떻게 구조가 되었나.
네모는 어떻게 구조가 되었나.



구조라는 말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건 네모다. 이유는 간단하다. 최초의 구조는 네모였기 때문이다. 엄지와 검지를 벌려 양쪽 손을 붙여 놓으면 세상에서 가장 직관적인 네모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인류는 세상을 보는 방식을 확립했다. 처음에는 흙을 뭉쳐 흙집을 만들었다. 여기에 시간이 흐르고 벽돌이 등장했다. 이것은 네모를 짓기 위해 제조된 네모다. 인류는 벽돌을 쌓아 집과 거리를 건설했다. 즉, 네모난 손으로 보이던 풍경을 건설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있고, 벽돌로 쌓은 집이 있다. 다리가 생겼고, 수로가 흐르며, 역사가 시작되었다.



네모의 개념이 물질이 아니라 관계를 말하게 된 것은 지난 50년대의 일이다. 구조주의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지는 프랑스 철학의 어떤 경향이다. 그들은 언어의 본질이 구조를 잇는 부분에 있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집이 아니라 벽돌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기호의 본질은 기의가 아니라 기표에 있다. 기표와 기표가 맞닿는 지점에서 태어나는 게 바로 기의다. 레비스트로스가 있었고 소쉬르도 있었으며 라깡이 있었다. 그들은 이게 왜 집인지를 설명하기보단, 재료가 무엇이고 이것으로 다른 걸 만들면 어떨지를 물었다. 즉, 같은 재료라도 다른 형태 속에 있을 때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에 주목했다.



<더 스퀘어>에서는 공간의 질료를 바꾸어놓는 개념이 등장한다. 한 조형미술인데, 바닥에 네모난 선을 그려놓고 그 안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고 말한다. “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으로, 이 안에서는 모두 동등한 의무와 권리가 있다.”라는 부가 설명을 덧붙인다. 영화는 이 문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차별과 차이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호한 일들, 의무와 권리라는 추상적 개념들의 경계를 헤매는 이들, 신뢰와 배려가 한 줄기의 선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 즉, 이 영화에서 도드라지는 핵심은 인간을 편협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신은 이게 무슨 말인지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선택의 기로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양 갈래 길목에 선 우리는 선택하지 않는다. 다만 돌아설 뿐이다. Y자 형태로 제시된 이 길목에서 뒤를 돌아보면 우리가 흘러왔던 길이 있다. 즉, 선택지는 2개가 아니라 3개다. 이 간단한 해법은 왼쪽 혹은 오른쪽이라는 이분법을 탈피한 결과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한복판에 선 주체가 그 길에 어떤 생각을 품느냐에 따라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성립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선택지는 “뒤로 간다.”, “왼쪽으로 간다.”, “오른쪽으로 간다.”라는 기표로부터 시작된다. 그곳에 무엇이 있고, 혹은 무엇을 향해 가는지는 상관없다.




어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은 시선의 문제다. 어디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지만 여기에 ‘어쩌면’이라는 단서를 붙여둔다. 왜냐하면 시선이라는 말보다 시점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선과 시점은 의미의 지향점이 다른 단어다. 시선에는 주체가 있는데 시점에는 주체가 없다. 시선은 누군가의 의지이고, 시점은 한순간의 의미이다. 즉, 시선과 시점은 의지와 의미의 단어다. 어딘가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지가 시선을 만든다. 의미가 있는 곳에는 어떠한 시점이 있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의 갈림길은 의미와 의지라는 두 가지다.



카메라는 등장인물과의 동일시를 유도한다. 즉 카메라는 우리에게 시선을 담지하도록 한다. 이 의지는 일차적으로 등장인물의 것이면서도 이차적으로는 감독의 의지이다. 요컨대 우리는 이 인물의 시선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만드는 셈이다. 갈림길의 갈림길이 중첩되는 상황에서 의미는 줄곧 비틀어진다. 무수히 많은 방향성이 태어난다. 이게 영화를 보고 난 우리가 수다를 떠는 것에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명확한 답이 없다는 점에서는 뒷맛이 찝찝하다. 물론 이 영화의 목적은 관객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므로 논외의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카메라가 생각을 유도하는 방식은 비판의 대상이다. 우리는 카메라가 어디를 바라보는지에 따라 생각하게 되므로, 카메라 포착의 윤리의식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의미가 있는 곳을 바라보지 않는다고도 비판할 수 있다. 아마 <더 스퀘어>는 이런 중립성마저 의도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의 주된 목적은 시선과 시점이라는 두 가지 갈래가 아니라, 그것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관계의 모호성이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는 비판의 지점을 역으로 이용한다.



온갖 비판을 끌어당겨 담론의 난투장을 만드는 이 기술은 탁월한데, 반대로 또 그 탁월함의 윤리에 의심이 가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양쪽을 미디움 쇼트로 넓게 잡다가, 뭔가 이야기가 잘 안 풀리면 곧바로 쇼트-리버스 쇼트로 진입한다. 이때 관객은 시선의 분리를 통해 두 사람의 갈등이 깊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또는 자신이 생각하던 이상의 분열을 겪는다. 쉽게 말해, 주체로 진입하던 도중 양쪽의 선택지로 자아를 분열시킨다. 라깡의 거울은 이상적인 자아가 아니라 이질적인 타자가 된다. 리버스 쇼트라는 거울에 비친 자아는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너무 이상적인 것만 말하는 ‘이질적’ 타자이다.



이상적인 것의 대립은 늘 있었던 일이다. 악당도 어떤 관점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런 이상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하다. 회의실에서 갓난아이를 품 안에 든 남자는 회의 내내 사소한 울음소리를 듣는다. 다른 팀원들도 그걸 이해해준다. 하지만 영화는 회의 중인 팀원에게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앙(클라에스 방)를 보낸다. 그는 갑작스레 들어와 팀원들을 하나둘 빼간다. 이야기가 한창인데 팀원들을 빼내는 모습에 팀원들은 당황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이때 갓난아이를 잠시 바라본다. 또한 영화 밖의 우리는 그가 사적인 일로 팀원들을 데려가는 걸 안다. 이때 의미는 분리된다. 그 두 가지 분리를 잇는 게 갓난아이다.



작품 속의 아이는 대략 6개월에서 24개월 사이로 보인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갓난 아이는 아니다. 하지만 거울 속의 자신은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아이는 영유아다. 이때 영유아를 두고 벌어지는 양쪽을 살펴보자. 회의라는 담론이 진행중인 상황에 들어온 이는 자신의 목적, 의미가 있는 곳으로 떠나는 시선을 담지한다. 반대로 회의장에 남은 이들은 전시회를 어떻게 홍보할지를 두고 고민하는, 의미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의 시점을 고민한다. 말하자면 영유아를 그 둘을 잇는 중립지대로 보았을 때, 주체와 타자 사이의 거울 역할이 아이에게 맡겨진다. 의미를 찾아가는 주체인 크리스티앙이 있고,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 타자인 팀원이 있다. 어쩌면 공과 사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있다. 사적인 일에서는 주체인데 공적인 일에서는 타자가 되어야 한다. 그 불일치 지점은 갓난아이 즉 거울 단계이다. 요컨대 크리스티앙은 거울 단계에서 무언가를 알아보지 못했거나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그에게 거울은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일 뿐이다. 그는 계속해서 기수를 돌리고, 돌린다.



이것은 퇴행이 아니다. 그러나 선택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말하자면 관계이다. 우리는 네모의 프레임 안에서 관계를 보고 있다. 누군가는 이 네모를 카메라의 프레임으로 볼 것이다. 카메라가 포착한 세상은 무엇인가. 신뢰와 배려의 성역으로 모두가 동등한 의미가 있는 이곳은 말 그대로 평평한 차원, 2차원의 세계, 그러나 속에는 3차원이 있으며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다는 점에서는 차원을 구분할 수 없다. 말하자면 스크린의 입구는 현실의 3차원 속에서 2차원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그 속은 4차원에 해당한다. 그래서 영화 밖의 담론을 스크린 안에 담을 때, 또한 그 역으로 스크린 안의 담론을 영화 밖으로 끌어올 때는 필연적으로 왜곡이 발생한다. 즉 이 담론을 하나의 상태로 정의하는 것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을 테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영화와 영화 속과 영화 밖에 존재하는 세 개의 차원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일이다.



요컨대 이 영화의 언어는 의문문이 아니라 물음표에 방점이 찍힌다. 무엇이 네모인가? 라는 말에서 담론을 향하게 하는 것과 담론을 끌어들이는 건, 다름 아닌 물음표이다. ‘네모’라는 목적지나 ‘무엇’이라는 의문점은 중요하지 않다. 물음표라는 문장 부호가 인물의 사망 시기를 알 수 없을 때 쓰이기도 하듯, 문장의 시작과 종착지를 설정하기보단 그 물음 자체에 의의를 둔다. 그래서 이 영화의 문장구조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같은 공간이라도 다른 느낌을 준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를테면 작품에서 줄곧 등장하는 흙더미가 박물관에 있어서 예술작품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떨쳐낼 수 없다. 그게 현대미술의 개념이기도 하다. 대상을 그려내는 게 아니라, 대상과 세계의 관계를 담아내는 것. 이때 대상과 세계의 자리는 딱히 정해진 게 없다. 관객이 세계를 갖고 대상을 내면에 흡수해야 할 수도 있다. 반대로 관객이 대상이라서 세계 속에 흡수되어야 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현대미술은 인터렉티브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현대미술이 아니다. 영화는 제 자리로 돌아온다. 크리스티앙이 집안에서 문을 두들기는 소리를 들을 때 카메라는 제 자리에서 한 바퀴를 천천히 돌아본다. 절반쯤 돌았을 때는 왼쪽에 크리스티앙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거울에 비친 크리스티앙이 있다. 말하자면 크리스티앙이 두 명이 된다. 그런데 둘 다 불안해 보인다. 밖에 누가 찾아와서 그렇다. 이때 카메라가 하나의 ‘스퀘어(프레임)’에 두 크리스티앙의 모습을 잡는데 그것은 거울상처럼 보인다. 이내 조금 더 나아가면 다시금 하나로 합쳐진다. 그렇다면 그의 분열이 회복된 것일까? 우리는 알 수 없다. 맨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기에 있는 그대로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변했다가 다시금 회복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카메라가 그 방향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여러 가능성이 한 자리에 공존한다. 다시 말해서 갈림길에 선 게 아니라 갈림길을 쇼트와 리버스 쇼트로 보여준다. 그는 이 프레임 안에서 자신에게 묻고 답한다. 그는 주체이고 타자이다. 그래서 주체가 타자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고, 자신에게 변명할 수 있기도 하다. 이건 내 선택이 아니야. 그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거부하려 한다. 그런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는 몹시 이상해 보인다. 그럼에도 크리스티앙이 이해받을 수 있는 건 모두가 그렇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그동안 쌓아왔던 스택이 와르르 무너지는 걸 느낀다. 담론의 집을 건설하던 벽돌들, 내러티브에 자리한 여러 사건들은 무의미해진다. 중요한 건 벽돌이 아니라 벽돌과 집의 관계다. 손만 잡아서 아이가 생기지는 않지만 손을 잡는다는 건 아이를 선택할 수 있는 관계다. 그리고 그 아이가 바로 영화의 첫 번째 장면으로 우리를 이끈다. 아니, 이끈다기보다는 우리를 선택하게 한다. 그곳으로 향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결론을 낼 것인지를.



그들만의 토포스



영화의 첫 번째 장면으로 돌아왔다. “비전시와 전시의 토포스가 뭘까요?”라고 인터뷰어가 묻는다. 그러자 크리스티앙은 답한다. “미술관에 뭔가를 놓으면 그 물건은 저절로 작품이 되나요?” 그리고 우리는 이 대답을 다음과 같이 변형한다. “세계 안에 놓인 우리는 저절로 대상이 되나요?” 이 작은 논제로 촉발된 생각의 우주에는 여러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가령, 없어진 핸드폰과 지갑이 어느 빌라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가옥 전체에 찌라시를 살포하는 그는 빌라 주민 전체를 도둑으로 취급하고 있다. 결국 그는 핸드폰과 지갑을 되찾는다. 그런데 누군가의 편지가 날아온다. 자신을 도둑으로 취급했으니 자신과 가족에게 사과하라는 내용이다. 만나보니 그 편지의 주인은 소년이다. 말을 들어보면 아마도 이 소년은 그저 같은 빌라 주민일 뿐인데 집안에 들어온 찌라시가 자신을 특정하여 살포된 것으로 오인받아 호되게 혼난 모양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그들만의 토포스이다. “빌라 안에 핸드폰이 있다면 그 물건은 도둑맞은 건가요?”라는 크리스티앙의 물음이 있고, “집안에 찌라시가 있다면 자신은 도둑인 건가요?”라는 소년의 물음이 있다.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두 가지 물음은 그들의 마음 속에 있다. 크리스티앙은 소년의 항의에 줄곧 저항하다가 끝내 자신의 오해를 인정한다. 또한 소년은 어느 순간 빌라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그래서 이 사건의 진실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소년이 정말로 도둑이었는데 괜스레 양심에 찔려 적반하장으로 나온 것이라면 굳이 사라질 이유가 없다. 혹은, 소년이 정말로 도둑이 아니었다면 빌라에서 갑자기 사라져 크리스티앙에게 따질 정도로 화를 낼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에서 문제의 방향성은 명확하지가 않다. 그래서 문제인지를 따질 수도 없다. 어느 관점에서는 긍정인 게 반대로는 부정일 수도 있으므로, 모든 것이 로테이션 될 뿐이다.



정말로 있는 것일까? 라고 그들이 물었다. 이때 플라톤은 현실에는 없고 이데아에 있다고 말한다. 이때 칸트는 의심의 기준을 세운다. 이때 데카르트는 있는 것을 의심하는 자신을 본다. 이때 후설은 어떤 면을 의심하느냐고 묻는다. 이때 하이데거는 있는 것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냐고 따진다. 그리고 라깡은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물음표라는 부호만으로도 생각의 방향은 무궁무진하다. 이 생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계단을 내려보는 장면에서 고정되어 있던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것은 빙글빙글 돌아간다. 두 사람을 한 자리에 잡을 때는 가운데를 비워놓던 카메라가 갈등의 전조를 감지하고 서서히 찢어지며 쇼트와 리버스 쇼트를 진행할 땐 인물을 각각 중앙에 놓았었다. 그렇다면 이 중앙에는 무엇이 놓이는 걸까? 혹시 언어와 담론이 지나가는 통로는 아닐까? 우리는 이 영화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까?



바깥의 침팬지가 진짜 폭력이 될 때 집안의 침팬지는 립스틱을 입에 바르고 있다. 바깥의 원숭이는 롱테이크로 잡는데 집안의 원숭이는 배경으로만 포착된다. 이때 바깥의 침팬지는 미술관에서 사고를 쳤으며, 그 미술관에서 크리스티앙을 인터뷰했던 기자는 자신의 집으로 그를 초대해 잠자리에 든다. 토포스를 따져 묻는 영화의 화법을 생각해보면 그 두 가지가 같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침팬지는 행위미술이 아니라 진짜 침팬지였을 수도 있다고, 혹은 저 침팬지는 사실 사람인데 행위예술로 립스틱을 바르는 게 아닐까 하고. 그리고 이런 것들, 다른 기표에서 같은 기의를 공유하고 있는 기호가 영화에는 수두룩하다. 그들의 섹스에서 그녀는 그를, 그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영화는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싸우는 쪽과 싸움 당하는 쪽은 둘 다 미치광이처럼 보인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이 ‘정말로’ 이상하다는 걸 우리는 깨닫는다. 이상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 영화의 카메라는 주인공에 동일시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단지 이해 가지 않는 양측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이 양측은 같은 기의의 다른 기표로 여러 번 나타난다. 즉, 같은 말을 다르게 반복한다. 그럼에도 결론은 나지 않는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계단층계처럼 구멍이 숭숭 나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파급력은 그 계단이 소용돌이치는 회전력에서 나온다. 이 계단은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이 연계하고 연쇄되는 관계다. 쉽게 말해 오르막길이 있다면 내리막길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크리스티앙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언젠가는 또다시 올라갈 테고 크게 보면 인생은 순환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회전력에서 비롯된 바람이 향하는 건 영화 밖의 우리이다. 계단 쪽에서 “도와줘요!”라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지만 막상 가보니 소년은 귀신같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애초에 거기에 없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이윽고 크리스티앙은 여태까지 자신이 했던 일을 반성하고 영상을 촬영해 소년에게 보낸다. 이제 네모가 분리되고, 시점과 시선이 그 사이를 잇는다. 아마도 우리는 프레임 안에 뛰어들거나 그 속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영화의 의미지점을 주관적으로 잇는 행위는 영화 자체를 하나로 규정하는 것, 혹은 어떤 프레임을 설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지리멸렬한 일들을 통해 감독이 말하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다. 미술관에서 창문으로, 창문에서 스크린으로, 스크린에서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토포스의 행렬이 우리에게 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이쪽에서 저쪽을 들여다보는 것, 저쪽에서 이쪽을 들여다보는 것.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감독은 묻는다. <더 스퀘어>는 네모를 꿈꾸는가. 우리는 답한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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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명 님의 리뷰
2018.11.30 14:54:27
조롱, 모순, 위선
중간 중간 차분한 클래식이 나오는 게 제일 큰 위선

위선의 위선, 죄다 모순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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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님의 리뷰
2018.09.28 17:03:33
더 스퀘어
네모칸 하나로 세상이 얼마나 팍팍한지 역설하는데 일단 재미없었음. 인물들의 허례허식 까발리기나 다루고 있는 주제 자체가 별 감흥이 없네. 어렵기도 하고. 중간중간 몰입 가능한 장면들이 섞여있지만 그 외로는 참 지루하게 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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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SIA 님의 리뷰
2018.08.18 20:52:44
현대인 사이를 가르는 무수한 선을 전시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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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W 님의 리뷰
2018.08.15 14:38:56
인간의 위선과 이중성을 꼬집다
1. 블랙코미디답게 전반부는 코믹하게 꾸려간다.

2. 후반부는 조금 지루한 감이 있었다.

3.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의 위선과 이중성에 대해 담고 있다.

4. 은유적으로 계속 비판하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이 재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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