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았다 (Custody)
드라마 / 2017

개요
드라마, 프랑스, 90분, 15세 이상 관람가, 2018.06.21 개봉
감독
자비에 르그랑
배우
레아 드루커
드니 메노셰
토마 지오리아
마틸드 오느뵈
마튜 사이칼리
장 마리 윈링
마르틴 밴데빌
장 클로드 레궈이
줄리엔 루카스
플로렌스 자나스
사디아 벤타이브
시놉시스
“영영 안 보면 좋겠어요. 그게 다예요”

‘그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11살 소년 줄리앙은
엄마를 위해 위태로운 거짓말을 시작한다.
98.57%
3.76점
키노라이트 분포
1개
69개
별점 분포
리뷰
40

moviemon 님의 리뷰
2018.06.24 23:52:17
<모든 것을 잃기 전에> (2012)라는 단편영화로 제39회 세자르영화제를 포함한 유수 영화제에서 단편영화상을 수상한 자비에 르그랑 감독은 장편영화 데뷔작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선보였고, 이 작품은 제7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미래의 사자상을 받았을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자비에 르그랑 감독은 처음으로 장편 영화를 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제3자의 시선과 서스펜스를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뛰어난 강약 조절 능력을 보여줬다. 그리고, 클로즈업 쇼트, 시점 쇼트, 그리고 롱 쇼트를 중심으로 한 장면 편집은 한 사람의 거짓말로 인해 드러난 법체계의 무능력에 관한 분노와 손 쓸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한 무력감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감정들은 93분 동안 축적되어 결국 강렬한 여운으로 전환되고, 이는 관객들의 시선을 스크린에 고정함으로써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간 뒤에도 쉽게 자리를 뜨기 어렵게 만든다. 이 영화에 삽입된 곡 'Proud Mary'의 가사와 그 노래를 부르던 조세핀(마틸드 오느뵈)의 무대 위 표정을 곱씹어 본다면 영화 제목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더 극심한 무력감 혹은 심리적 공포를 느낄 것이다.

1. 제3자의 시선

영화에서 제3자의 시선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오프닝 시퀀스, 공포가 절정에 이르는 장면, 그리고 엔딩, 이렇게 총 세 번이 나온다. 오프닝 시퀀스는 판사의 사무실을 비춰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공간 자체가 평정심을 갖고 마리암(레아 드루케)과 앙투안(드니 메노셰)의 대립하는 주장의 진위를 따져 양육권 문제를 판결할 것이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양육권 조정판결이 시작되자 클로즈업과 쇼트의 빠른 전환으로 그려낸 마리암과 앙투안의 법률대리인이 양육권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 사이에도 판사는 중간에서 객관적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한다. 마리암은 남편이 자신과 아이들에게 협박한다고 주장했지만 증거의 실효성이 없으므로 판사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심리 끝에 앙투안이 격주로 주말에 줄리앙(토마 지오리아)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권리를 허가한다. 하지만, 영화는 얼마 안 있어 누가 목적을 위해 거짓말을 했는지 알려준다. 그 순간, 법체계의 허점이 드러나는 동시에 제3자의 관점이 누군가에게는 심리적인 공포감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드러나는 두 번째 제3자의 시선은 다름 아닌 마리암과 줄리앙을 계속 전화로 안심시키려는 경찰관이다. 경찰관은 수렵 엽총으로 협박하는 앙투안을 제압하기 위해 출동한 현장 경찰관이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극심한 공포에 떨고 있는 마리암과 줄리앙을 돕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하지만, 현장에 있지 않은 경찰관의 장면과 현장에서 살해당할 위기에 놓인 모녀의 장면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면서 긴박하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공포를 형성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제3자의 시선은 마리암의 이웃집 할머니의 시선이다. 이웃집 할머니는 무슨 상황인지 눈치를 채고 빨리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마리암과 줄리앙을 구출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준 인물이다. 하지만,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는 두 사람에게 이웃집 할머니의 걱정되는 눈빛은 오히려 무언가를 주시하는 눈빛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나타난 제3자의 시선은 되레 아직 가시지 않은 불안과 공포를 자극할 뿐이다.

2. 장면 편집이 만들어낸 손 쓸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이로 인한 무력감, 불안, 공포

자비에 르그랑 감독은 관객들이 느낄 전반적인 무력감과 불안, 그리고 후반부에 터질 공포를 위한 작업을 하는데, 이를 위해 클로즈업된 인물의 반응이 아닌 시점만 드러나는 쇼트를 롱 테이크 기법으로 찍고, 인물을 화면의 중앙에 위치시킨 다음 최대한 인물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여주는 쇼트를 활용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앙투안이 비로소 마리암이 자신을 피해 살고 있는 거주지를 알게 되자 줄리앙을 위협하며 길을 안내하라고 하는 장면은 전자의 방식을 사용하고, 앙투안으로부터 도망쳤다가 먼 거리를 유지한 채 서 있는 줄리앙의 모습을 후자의 방식을 통해 앙투안의 어깨너머로 비춰준다. 두 가지 방식의 효율적인 활용은 영화에서 그나마 볼륨이 큰 음악이 흘러나오는 파티 장면마저도 긴장감 넘치게 만드는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이 영화는 무력감, 불안, 그리고 공포를 인물의 연기보다 철저한 장면 편집으로 이뤄냈다는 점에서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다.

3.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문장에는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 우선 확실한 것은 마리암과 줄리앙, 그리고 조세핀이 느꼈을 불안과 공포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영화에서 조세핀의 생일 축하 파티 장면을 주목해야 한다. 조세핀은 자신의 생일 파티에 와준 손님들을 위해 남자친구와 함께 'Proud Mary'라는 노래를 부른다. 다른 사람들은 흥을 돋우는 노래를 들으면서 춤을 추며 파티를 즐기지만, 조세핀은 언제 어디서 공포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공포감 때문에 굳은 표정으로 노래를 부른다. 'Proud Mary'라는 가사에는 '커다란 수레바퀴는 계속 돌고'라는 구절이 몇 번 반복되어 나온다. 가사의 맥락과 상관없이 이 구절에 마리암, 줄리앙, 그리고 조세핀이 느꼈을 불안, 공포, 그리고 스트레스를 대입해본다면 걱정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주시하는 눈빛으로 전환된 이웃집 할머니의 시선과 교차하면서 아직 그들의 심리적 고통이 끝나지 않았음을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혹은 폭력성이 대물림되어 가정 폭력이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 유추해볼 수 있는 장면은 앙투안이 줄리앙을 데리고 친정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손자에게는 친근해 보이는 앙투안의 아버지는 앙투안의 태도에 불만을 보이는데, 불만을 드러낼 때 이 집에서 자신이 왕이라고 고함치는 그의 태도는 앙투안도 유년 시절 폭력적이고 지나치게 남성 권력적인 집안 영향 아래 성장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Proud Mary' 노래의 가사를 다시 한번 고려해본다면, 폭력성이 계속 돌면서 11세 소년 줄리앙이 무의식적으로 앙투안의 폭력성을 학습해 성인이 되었을 때 이를 드러낼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모든 프랑스 예술 영화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1959), 장 뤽 고다르의 <주말> (1967), 올해 3월에 개봉했던 로빈 캉필로의 <120BPM> (2017), 현재 상영 중인 세르쥬 보종 감독의 <미세스 하이드> (2017) 등을 고려해보면 프랑스 예술 영화는 '교육 영화'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자비에 르그랑 감독의 <아직 끝나지 않았다>도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교과서 공부로만 알 수 없는 법체계의 무능력함이 실제로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여줄뿐더러, 앙투안과 그의 아버지를 통해 폭력성은 단순히 매체의 노출로 인한 결과물이 아닌 사회화를 담당하는 가정이 인지 및 정서 발달에 절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때 형성되고 드러나는 성질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가정폭력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공포를 향한 분노를 느끼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교육적인 깨달음까지 얻어가는 감상까지 확장되면 좋을 것이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8.06.04 22:57:38
아이의 찌푸려진 미간에 담긴 진실
브런치 무비패스에서 먼저 관람하였습니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정 내의 불화와 이혼에 대한 객관적인 관점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초등학교 때 즘 부모님이 많이 다퉜던 때가 있다. 이혼의 말까지 오고갔던 그 때의 나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하지만 공포에 질리지 않은 척, 태연하려고 애썼다. 집에서 벌어졌던 그 일에 대해서 외부의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에서 볼 때 그 문제는 외부의 문제 였으며 그 일에 대해 판단하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3자로써 양 쪽의 의견을 궁금해하게 된다. 그 복잡한 내 가정의 문제를 일일이 설명하긴 어렵다. 그건 말 그대로 아주 개인적인 문제 이기 때문이다.

법원에서는 가정 내 문제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양쪽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하여 판단한다. 잘못의 경중을 떠나 아빠와 엄마, 모두에게 아이에 대한 동등한 권리가 있으며 서로 각자의 방식으로 아이에 대한 교육을 할 책임이 있다.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그 관점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가정법원 이혼 심리에서 변호사를 대동한 부모는 각자의 입장을 판사에게 설명한다. 아이의 입장도 판사의 입을 빌려 편지 형식으로 제시된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그 문제는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 성격차이로 벌어질 수 있는 이혼 과정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최대한 부모의 입장이 공평하게 전달되는 것 처럼 보인다. 각자 상황에서 느끼는 불만들도 관객입장에서 일반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다.

아들 줄리앙의 찌푸려진 표정을 통해 서서히 드러나는 가정 문제

짧은 법원 장면이 끝난 후 결론은 바로 제시된다. 부모에게는 두 아이가 있다. 큰 딸 조세핀(마틸드 오느뵈)은 성인이어서 본인에게 선택권이 있지만 작은 아들 줄리앙(토마 지오리아)은 아직 미성년이어서 법원은 격주로 주말에 아빠(앙투안-데니스 메노체트)와 만나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다. 엄마(미리암-레아 드루케)는 최대한 저항해보지만 고소한다는 아빠의 말에 결국 줄리앙을 보낸다. 아빠와 함께 있는 내내 줄리앙의 미간은 찌푸려진다. 차 속에서 클로즈업으로 비추는 줄리앙의 얼굴엔 왠지 모를 불안함이 있다.

줄리앙의 시선으로 당사자의 감정을 느끼게 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가정의 문제를 쉽사리 결론 낼 수 없다. 영화 속에 제시되는 단편적인 정보 만으로는 아빠와 엄마 둘 만의 문제처럼 보인다. 각자가 갖고 있는 문제 때문에 이혼한 것처럼 구성되어 있는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을 높인다. 그 긴장감을 높이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아들 줄리앙의 반응이다. 불안함은 점점 공포로 바뀐다. 미성년의 입장에서 아빠의 불안정한 모습을 최대한 피하려 한다. 엄마와 있을 때 아빠가 폭력적으로 변한 것을 본 줄리앙은 최대한 아빠와 엄마의 접촉을 막는다. 줄리앙이 가진 유일한 무기는 거짓말이다. 그 거짓말이 통하지 않을 때 보는 우리는 숨이 턱 막힌다.

영화 후반부에서 결국 아빠 앙투안은 이성을 잃는다. 그것이 가족에게 그가 평소에 보였던 모습일 것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애써 균형을 잡으며 이성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후반부 모든 설명을 한 번에 하듯이 한쪽으로 기운다. 그리고 엄마와 딸, 아들의 공포심과 상황을 이해시킨다.

외부의 시선이 배제되는 가정 내 폭력

모든 가정 내 폭력은 외부의 시선이 철저히 배제된다. 외부의 시선이 개입되려면 그 가족에 대한 세세한 사항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대부분은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정폭력을 당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계속 폭력을 당하는 것에 대해 답답하다는 반응도 있다. 그 상황을 도망칠 수 있는데 못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 줄리앙이 도망쳤다 다시 아빠에게 돌아가듯이 공포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선택권이 많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상황을 외부에 일일이 다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의 초반 재판 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법과 제도 안에서는 이런 가정폭력을 모두 다 막을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아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부모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려 노력한다.

영화의 맨 마지막 앞 집의 할머니가 열린 문을 통해 앞 집의 상황을 놀란 표정으로 보고 있을 때 엄마 미리암은 망가진 문을 닫아버린다. 그런 외부의 시선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싸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빠가 풀려나면 다시 맞이해야 할 일일 것이다. 어느 곳으로 도망쳐도 오히려 법이 그를 다 막지 못하고 다시 가족에게 이끌지도 모른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끈, 부부라는 끈은 이런 폭력적인 상황에서도 질기게도 붙어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끊어질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영화 속 공포스런 일이 끝났늘 때 펑펑 울던 줄리앙과 엄마의 모습에서 그들의 절망감과 안도감을 느낀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한 시간 반 정도 듣고 같이 공포를 체험했지만 그들은 문을 닫아 버렸다. 우리는 결국 그들에게 외부인일 뿐이다.

외면하지 말아야 할 시선

그들이 문을 닫는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끔찍한 상황에서 트라우마를 겪고있다. 그들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다가가려고 노력할 때 결국 그들도 문을 열지 않을까?

이 영화는 프랑스 영화다. 하지만 다루는 주제는 전 세계 공통적인 문제다. 영화는 이것을 최대한 건조하게 다룬다. 한편으로는 아이의 시선으로 상황을 조망하는 것 같기도 하다. 줄리앙을 연기한 토마 지오리아의 연기가 우리에게 현실감을 더한다. 그의 눈빛과 미간이 흔들릴 때 우리는 똑같은 공포를 느낀다. 마치 그 상황에 있는 것 처럼.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9.01.13 02:56:52
과연 끝났을 지에 대한 의문
과연 이들은 끝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계속되는 공포와 현실의 압박속에서 존재한 이들은 끝이라고 생각을 할 법한 시간에 영화는 막을 내린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끝을 본듯 보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끝이 났을지는 몰라도 이들에게 다가오는 압박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들에게 있어서 더욱 큰 공포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이들은 끝을 냈지만 끝내지 못한 심적 불안감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 불안감이 해소가 되어야 이들에게 끝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데, 결코 그것이 해결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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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gnamu 님의 리뷰
2018.12.24 10:38:41
영화의 시작은 가정법원에서 양육권을 두고 벌이는 소송집행으로 시작된다. 솔직히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영화 제목 때문에 영화에 반전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알고보니 엄마 마리암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막연한 의심을 품었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영화가 전개될수록 남편 앙투안이 마리암에게 보이는 비이상적인 집착과 11살 줄리앙에게 보이는 협박, 심리적 신체적 폭력은 보는 내내 가슴을 조이는 무서움으로 다가왔다. 음향적 효과가 없으니 더 사실적으로 다가와서 소름이 돋았다.

줄리앙이 느꼈을 공포는 공감할 수 없는 감정이다. 법도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다고 느꼈을때...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고 그저 앞으로 닥칠 일에 두려움을 느껴야 할 때..... 그 공포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가족들은 앙투안을 두려워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는데, 평범한 일상에 항상 공포가 드리워져 있으니 언니 조세핀의 파티 장면에서도 무언가가가 일어날 것만 같아 두려웠다. 이러한 두려운은 앙투안이 집에 무단침입하려 할 때 극에 치닫는데,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앙투안을 보면서 폭력의 무서움이 스크린 너머로 와닿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가정폭력의 폐해를 절실히 알려주는 영화이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8.12.09 14:33:56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가 서사적으로 실패해야만 했던 이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가 서사적으로 실패해야만 했던 이유



자비에 르그랑 감독은 이 영화의 충격적인 결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화의 경로는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 있었다. 법정에서 시작해 호러로 끝나는 것으로. 법정에서 내리는 판결이 가족을 진정한 비극으로 내모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씨네 21> 1161호) 감독의 말처럼, 법정에서 시작한 영화가 집안에서의 총질로 끝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는 영화 같은 일들이 많이 있지만, 이런 종류의 ‘영화’는 스크린에서도 불합리하게 느껴질 만큼 끔찍하기 때문이다. 장르 영화로 따지면 ‘실패’에 가까운 이 서사적 흐름이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은 우리를 숙고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 ‘실패’에 가까운 서사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네 현실에 옮겨오게 되었나. 아니, 그 반대로 물어야 한다. 이 ‘현실’은 왜 ‘실패’에 가까운 것처럼 묘사되어야만 했나.


끝나는 것과 끝나지 않을 것



영화는 이혼한 부부 앙투안(드니 메노셰)과 미리암(레아 드루케)의 법정 심리로 시작한다. 딸은 18세가 넘었으니 양육권 분쟁은 없고 줄리앙은 아직 나이가 어리니 누구에게 양육권이 돌아갈 것인가의 문제로 다툰다. 아버지 앙투안과 어머니 미리암은 2주에 한번 주말 동안 아버지에게 줄리앙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주인공 줄리앙(토마 지오리아)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줄리앙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를 오가며 그들 사이의 상처를 온몸으로 맞이한다. 영화는 자동차에 줄리앙의 가방을 던져 넣는 앙투안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쇼트 직후에 안전벨트를 메는 줄리앙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두 쇼트는 화면 내의 운동-이미지를 하나로 봉합함으로써 ‘짐짝처럼 취급되는 줄리앙’이라는 기표를 완성한다. 이때 우리는 ‘짐짝처럼 취급되는’이라는 모멸감이 아니라 ‘짐짝’으로써 바닥에 내팽겨지면서 받을 충격을 생각해보게 된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지점은 폭력적인 아버지와 학대받는 어머니라는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니다. 영화는 아버지의 총질이라는 충격적인 결말로 끝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어머니임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즉 어머니의 품 안으로 돌아간 줄리앙이 ‘짐짝’ 취급에서 벗어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미리암은 앙투안의 학대를 피해 줄곧 거처와 연락처를 바꾸어서 수중의 돈이 별로 없다. 제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아들에게 쓸 수 있는 돈이 많지 않을 테고, 어쩌면 줄리앙은 미리암이 아니라 할머니의 품에서 자라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미리암도 나쁜 부모여서 줄리앙을 다시금 학대할 수도 있다. 또는, 차후 재혼을 하게 된다면 미리암이나 그녀의 재혼 상대가 줄리앙을 ‘짐짝’으로 여길 수도 있다. 결국 이 영화는 제목처럼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다.



영화의 제목은 아주 다양한 방면으로 줄리앙을 압박한다. 영화의 중간에, 어린 줄리앙은 어머니의 거처를 알려주기 싫어서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도망친다. 앙투안은 도망치는 줄리앙을 쫓아가다가 이내 그만두고 돌아선다. 앙투안은 병원의 보안과장으로 일해서 어린 줄리앙을 쫓지 못할 정도로 체력이 달리지는 않으니, 의도적으로 추격을 그만둔 셈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추격을 그만두었을까? 어린 줄리앙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여운 줄리앙은 아직 초등학생이어서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혹은 자립의지가 있다고 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도망쳐서 할머니 댁으로 간다 하여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이 도주는 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줄리앙은 자신을 포기하고 자동차로 돌아가는 앙투안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다가 쭈뼛한 발걸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짐짝 같은 상황이다.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는 건, 내버리고 싶지만 내버릴 수 없는 것을 뜻한다. 그게 경제적인 이유이든 도의적인 이유이든 간에, 버려지고 싶어도 버려질 수 없는 현실은 어디까지나 ‘끝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꺼진 불씨가 아니라, ‘아직은 끝날 수가 없다.’라는 반강제적 현실에 가깝다. 요컨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감독의 의도는 영화의 마지막에 경찰이 왔음에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도 있지만, 끝나는 것과 끝나지 않을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되는 어떠한 문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가 있는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



끝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부부 관계다. 끝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자녀들이다. 법적으로 앙투안과 미리암의 관계는 끝났으나 두 사람의 피가 섞인 자녀 줄리앙은 그들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줄리앙이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는 한, 그들의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또한 끝나서도 안 된다. 자녀들이 독립한 후에야 비로소 이혼하게 되는 ‘황혼이혼’의 증가추세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황혼이혼은 여성들의 경제 및 사회적 지위가 높아져 가부장제로부터 탈피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자녀라는 공통분모가 사라질 시에 부부라는 이름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는 뜻도 된다. 마치 결혼반지가 그들 사이의 ‘고리’로 기능하듯이, 이 고리는 서로를 잇는 것이자 구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는 고리의 두 가지 기능을 모두 떠올릴 수 있을 듯하다. 앙투안은 의처증에 걸린 남편으로 가부장제의 억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앙투안은 딸 조제핀(마틸드 오느뵈)의 연애를 두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의 성적 억압을 휘두른다. 이때 딸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두고 아내를 불러들인다는 점에서, 집안의 폭력은 어머니에서 딸아이로 계승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는 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의 억압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폭력을 계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줄리앙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아직 어리지만 언젠가는 저런 괴물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줄리앙에게 있고, 그럼에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안티 오이디푸스적’ 신화가 그들 사이에 작용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라깡의 오이디푸스 개념을 비판한다. 자녀는 부모를 싫어함에도 닮을 수밖에 없다는 라깡의 주장에 수정표를 긋고, 위에서 아래로의 수직적인 계승이라면서 가정 내의 문제는 사회로부터 근원했다고 말한다. 요컨대 사회가 그들 가정을 보듬지 못한 것은, 제도적인 미비나 실천의지의 부족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득과 실을 명확하게 계산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줄리앙이 앙투안에게 느끼는 공포란 자신이 그처럼 폭력을 행사하는 사리분별 결핍의 괴물이 되리라는 게 아니라, 부모가 없다면 자신이 내쳐지게 될 사회가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억압하는 가정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자본주의 논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줄리앙은 아버지로부터 도망쳤음에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에게 어머니의 집 주소를 알려줄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로는 아버지의 총격이 어머니의 거처에 발사된다.



이러한 오이디푸스적 신화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우라노스의 거세를 떠올릴 수도 있다. 헤밍웨이가 작은 성기 콤플렉스로 낚시와 사냥을 즐겼다는 말이 있듯이, 모자를 향해 치켜세운 총구는 앙투안의 남성성이 결핍되어 있노라고 말하는 듯하다. 또한 가여운 줄리앙을 품에 안은 미리암의 모습은 이 공간 전체에 자궁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총격을 피해 욕조 안에 숨는 장면에서는 그러한 이미지가 더욱 확대된다. 정리하자면 바깥에서는 거대한 남근으로 ‘사정’을 일삼는 거세된 아버지가 있고, 안쪽에서는 자궁으로의 회귀를 통해 폭력세계로부터 보호받으려는 모자가 있다.



그렇다면 이때 남근은 무엇이고 자궁은 무엇일까. 이 영화는 폭력의 대물림이라는 오이디푸스 신화가 아니라, 부유한 아버지와 가난한 어머니라는 자본사회의 근본적인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즉, 자궁에 삽입되려 하는 남근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가 하층민의 마지막 쉼터를 빼앗아 감으로써 자신의 도덕적인 결함을 채우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태어났기에 출발점인 그곳은 우리가 그곳으로 회귀할 때에는 도착점이기도 한데, 자궁으로의 회귀를 택한 모자는 ‘최초이자 최후의’ 지점으로 돌아온 것인데, 그곳을 침탈당한다면 더는 갈 곳이 없을 테다. 그러니 어쩌면, 영화는 자본주의의 최하단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수탈행위를 멈춰야 하노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누구의 시선인가



이 영화는 예술성이 높지만 상업영화에 더 가깝다. 그리고 상업영화의 공식으로 보았을 때 기존의 것들과는 다른 구조를 취한다. (예술 영화라고 생각한다면 별수 없다.) 열린 곳에서 닫힌 곳으로 향하는 공포,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의 침묵, 자유로운 발언대가 억압의 굴레로 바뀌고, 삶은 죽음으로 바뀐다. 그런데 불특정 다수에게 이런 불쾌함은 그다지 달갑지 않다. 사람들은 위기에서 탈출해 새 삶을 찾는 이야기를 더 선호한다. 이를테면 수년간의 감금에서 탈출하는 <룸>(2015)이나 집안에 침입한 괴한들로부터 몸을 피하는 <패닉룸>(2002)이 있다. 여기에 판타지적인 요소를 조금 가미하자면 <큐브>(1997)나 <쏘우>(2004)가 된다.



사람들은 이런 영화에서 감금된 공간을 영화관이라는 지정좌석과 동일시하게 되고, 위기를 극복한 후 맞이하는 행복한 결말을 가슴에 품은 채 자리를 뜨게 된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총격이 끝나고 경찰이 들이닥치는 순간에 영화가 끝나버리니 관객은 여전히 ‘위기상황’인 셈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관객들은 여전히 ‘위기상황’ 속에 내동댕이 처져 있다. 스크린 속의 모자가 어두운 집안에서 밝은 경찰들을 맞이했듯이, 관객도 어두웠던 영화관에 ‘결말’이라는 밝은 조명을 맞이하게 된다.



이 영화의 결말로 돌아가 보자. 앙투안이 미리암의 집에 들이닥쳐 줄리앙을 향해 총질한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집에 들이닥쳐 ‘아들’을 향해 총질한다. 이들을 지켜보는 것은 맞은편 가구에 사는 어느 할머니다. 영화는 할머니의 신고로 경찰을 출동시킨 다음 공황상태에 빠진 미리암이 뒤늦게 신고했을 때 상담원을 통해 “이미 경찰이 출동했다.”라는 말을 전달한다. 그리고는 총질해대는 아버지가 출입문을 부수고 모자가 숨은 화장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경찰이 아슬아슬하게 도착한다. 말하자면 맞은편에 사는 할머니가 미리암보다 먼저 신고를 했기에 경찰이 제때에 도착한 셈이다. 이런 식의 서사구조는 아마도 누군가의 폭력을 목격했을때 보다 빨리 신고해야만 그들을 구할 수 있다는 ‘신고정신’을 독려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남겨진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누구의 시선으로 보아야 할까. 영화는 줄리앙을 주인공으로 진행되므로 줄리앙의 시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폭력행위를 신고한 이웃집 주민의 존재로 우리의 시선은 모호해진다.



영화의 마지막은 문틈 사이로 자신이 신고한 이웃집의 ‘결과’를 지켜보는 할머니의 시선으로 끝나는데,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제3자’의 시선으로 끝나는 게 된다. 그리고 제3자라는 점에서 할머니와 우리는 동일시된다. 우리는 스크린 밖에서 그들을 염탐하고 있었고, 할머니도 문 안에서 그들을 염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점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신고하지 않았고 신고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관찰자이자 방관자로서의 무기력함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우리와 할머니의 차이점이라면 할머니는 서사 안의 인물로서 경찰신고를 통해 서사에 개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영화는 이 지점에서 자신이 ‘신고정신’을 독려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애초에 영화 밖의 인물이니 신고할 수가 없고, 그 신고는 영화 속에서 이미 실행되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마지막 시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전히 ‘위기상황’을 마주한 채로 영화가 끝나버린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다. 이 영화의 위기상황이 일차적으로 가정폭력이라는 점에서는, 스크린이라는 미디어 매체 속에서 방영되는 여러 폭력의 굴레가 채널을 돌리면 금세 사라져 버리고 또한 시청자들도 그것을 금세 잊어버리게 된다는 ‘망각’의 슬픔을 떠올릴 수 있다. 요컨대 마지막 장면에서 할머니는 신고는 했어도 여전히 문안에 머무르며 그들 서사 안으로 개입하기를 망설이고, 경찰도 할머니가 이쪽을 염탐하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문을 닫아버린다는 점에서 두 공간 사이의 교류를 차단하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은 마치 미디어 매체에서 벌어지는 여러 폭력에 잠깐이나마 귀를 기울이다가 다른 화면으로 넘어가면 금세 그것을 잊어버리는 우리들의 아둔함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눈앞의 위기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금세 시선을 거두어 버리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 있었다



누군가는 사건에 개입하지는 않았어도 타인의 도움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몸이 약한 할머니가 경찰을 부르는 것 말고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고 결과를 확인하는 할머니의 염탐이 저쪽에서의 시선 차단으로 끝이 난 직후에 이 영화가 엔딩 크레딧을 맞이한다는 점이다. 즉, 우리뿐만 아니라 그들도 이쪽을 외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이쪽을 외면한 이유를 이차적인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이들의 문제를 ‘가정 내로’ 국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하나의 가정이지만 두 개로 분할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회에 존재하는 상류층과 하류층의 극단을 떠올릴 수 있다. 결국 이 영화는 ‘가정 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내의’ 문제가 된다. 그런 맥락에서 “프랑스에선 사흘에 한명꼴로 영화와 비슷한 상황에서 여성들이 사망한다.” (<씨네 21> 위와 동일)라는 감독의 인터뷰는 이 영화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참극은 단지 프랑스라는 사회에만 국한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어느 나라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가정 내의 폭력이고, 자본의 억압이다.



영화의 오프닝 직후 15분은 앙투안과 미리암이 각자의 변호사를 대동하고 판사 앞에서 심리를 진행하는 법정 시퀀스이다. 이들은 각각 자신의 변호사와 짝지어서 테이블의 양쪽 가장자리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두 커플의 정 중앙 맞은편에는 판사가 근엄하게 앉아있다. 말하자면 하나의 공간에서 서로의 주장이 오간다. 그런데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프레임을 제한한다. 카메라는 정중앙에서 살짝 뒤로 물러나 각자의 변호사를 제외하고 앙투안과 미리암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잡기도 하고, 반대로 각자 변호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즉 카메라가 어떻게 그들을 프레임화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공간은 같은 곳이기도 하고 다른 곳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이곳은 프랑스이면서도 프랑스가 아니기도 하다.



각자 변호사와 있는 장면에서는 서로가 법정의 양극단에서 원고와 피고로 앉아있는 듯하다가도, 변호사를 제외하고 부부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흡사 화해를 도모하는 부부클리닉처럼 보인다. 이렇게 분해와 화해의 가능성을 오가던 카메라는, 그들의 주장 중 어느 것이 옳은지를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게 하며, 이후로 벌어지는 서사의 흐름은 그런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아버지가 정말로 폭력적인지 혹은 어머니가 과민반응을 하는 건지 우리는 판단을 유보하게 된다. 모든 사건은 끝에 가서 진실이 드러나기에 끝까지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질 가능성은 없다. 영화에서 앙투안은 미리암에게 대화를 하자고 말하지만 끝내 진정성 있는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고야 만다.



이제 우리는 답할 수 있다. 왜 현실은 실패에 가까운 것처럼 묘사되어야만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감독의 말을 빌려 답하자면 “영화의 경로는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 있었다.“ 우리네 현실이 정말로 그렇기에 영화도 이렇게 묘사되었다. 현실에서도 불합리한 것은 스크린에서도 불합리하다. 자동차 안에서 앙투안과 줄리앙의 대화 장면이 어떻게든 앙투안 쪽으로 시선이 높아지게끔 설계되었듯이, 현실이라는 쇼트와 영화라는 리버스 쇼트는 기울어진 시선을 줄곧 유지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두 계급이 아무리 대화를 타진해도 그것은 원초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리라고 영화는 말한다. 또한 안티 오이디푸스적인 논의에서 자본의 영향 아래에 놓인 그들은 상류층의 하류층에 대한 총질이라는 비극으로 끝나게 될 테다. 이제 앙투안의 가부장적인 성격은 하류층을 지배하려는 상류층의 계급제도가 되고, 앙투안의 의처증은 계급적인 순결을 강요하는 상류층의 강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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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님의 리뷰
2018.05.16 12:38:34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작품이 어떤 지점에서 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는지 알 것 같다. 영화는 시대를 반영한다. 개인주의, 가정폭력, 사람보다 우선시 되는 법치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다만, 영화속의 문제는 현재시대의 문제를 개인에게 투영시켜 문제점을 다룬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양육권 분쟁으로 시작된 이 문제는 가정폭력으로 그 원인이 번진다. 그리고 이 폭력의 주체는 남성인 아버지다. 아버지는 시종일관 시한폭탄과 같은 분위기를 내뿜으며 긴장을 고조시킨다. 그리고 아들에게 한번 그 폭력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 후반에 이르러 감정이 고조되어 폭탄이 터진다. 이때 영화는 양육권분쟁, 가정폭력이라는 드라마의 결을 벗어버리고 스릴러의 성격을 갖게된다. 마치 초중반의 극의 흐름이 마치 이것을 위해 달려왔어라고 말하는 것 처럼 말이다.


아버지의 감정이 폭발하는 그 시퀀스를 위해 영화가 달려가고 그것의 공포, 충격을 고스란히 관객이 잘 전달받는다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현실을 영화속에서 조차 봐야한다는 지점에서 슬픔이 느껴져 영화는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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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lair 님의 리뷰
2019.02.08 05:12:31
두 사람의 입장을 제시하며 흡사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를 연상시키는 오프닝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20분도 채 안 돼서 어느 부모가 정신병자인지 뻔히 티가 나니 그 이후로부터는 내가 이 영화를 왜 보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관객에게 진중하고 심오한 드라마로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긴 한데 과잉의 극치인 결말까지 보고 나면 그냥 예술 영화를 빙자한 슬래셔나 워너비 스너프 영화라 해도 무방하다 싶다. 빈곤하고 얄팍하다.

결혼은 어떻게 한다 해도 애를 낳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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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 님의 리뷰
2019.01.15 21:21:03
그 문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최근 이렇게 스타일리시한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단순히 스타일리시하다는 말로 이 영화의 특징을 환언할 수 있을까. 쇼트와 쇼트 사이의 세련된 단절, 빛과 어둠을 활용한 대비의 아이러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표정과 호흡으로 모든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인물들의 연기, 그리고 ‘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사람/시스템에 대한 냉소적인 조롱과 보이지 않는 것을 기어이 설명하려 하지 않고, 관객에게 채워 넣을 수 있도록 남겨두는 여유까지. 이 영화를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줄리앙(토마 자오리나)의 부모님인 미리암(레아 드루케)과 앙투앙(드니 메노셰)은 이혼했다. 줄리앙과 누나 조세핀(마틸드 오느뵈)은 함께 엄마 미리암의 집에서 살고 있지만, 양육권 문제로 전남편과 법정 공방이 벌어지게 된다. 미리암 측은 전남편의 협박으로 인한 아이들의 반감과 폭력 문제 때문에 접근금지 요청을 하지만, 앙투앙 측은 사실이 아니라며 맞선다. 결국 협박의 증거가 없다고 판단한 판사는 미리암의 접근금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심리는 종료된다. 그리고 앙투앙은 격주 토요일마다 미리암의 집으로 찾아가 줄리앙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한 가정의 아픔을 다룬다는 면에서 대단히 감상적인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의 아픔을 전시하며, 관객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이끌어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음악이 단 한차례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조세핀의 공연을 제외하고)은 이 영화의 지향점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있지 않다는 분명한 증거가 아닐까. 음악만이 아니다. 조명의 활용 또한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 인공조명을 받는 캐릭터는 그 누구도 없다. 방의 전등의 꺼지면, 인물들은 그대로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기게 된다.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이 등장하지 않아도) 오히려 이 영화는 대단히 비극적이고, (긴장감을 조성하는 음악이 나오지 않아도) 대단한 서스펜스적 스릴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공 되지 않은 일상의 소리에서 기인한다. 영화의 첫 시작이 암전 상태에서 웅성거리는 소리, 비행기 소리, 발걸음 소리 등이 나오는 것과 토요일, 앙투앙의 차 안에서 줄리앙과의 감정적 갈등이 심화될 때 등장하는 안전벨트 경고음 소리와 자동차 비상등 소리까지. 그건 아마도 감독 자비에 르그랑은 진정한 비극이란, 영화감독만의 인위적인 통제(음악적/연출적)에서가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과 순간들에서 비롯된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지극히 사실적이고 일상적이기에 관객이 느끼는 시리고 불편한 마음 또한 지독하게도 생생하기만 하다.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첫 장면은 창가에서 그 너머를 응시하는 판사에게 시선을 맞춘다. 이어 판사는 앙투앙과 미리암의 양육권 심리를 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한다. 미리암은 앙투앙이 조세핀에게 폭력을 사용했던 적이 있고, 여러 협박을 함으로써 아이들과 자신에게 큰 피해를 끼쳤다고 말하지만, 앙투앙 측은 그것이야말로 왜곡된 주장이라며 맞선다. 앙투앙은 조세핀이 다친 건, 자신이 때려서가 아니라 학교 수업 시간에 다친 것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신 역시도 아이들이 잘 되길 바라며, ‘부모’는 아이들의 울타리이므로 아버지라는 울타리를 빼앗는 것이 아이에게 옳은 것이냐며 반문한다. 상반되는 양측의 말을 듣고 참과 거짓을 판단해야 하는 판사는 ‘여기서 누가 더 거짓말쟁이시죠?’라며 인식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고야 만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에 있다. 그런 면에서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적극적으로 생략과 괄호 치기의 여백을 활용한다. 우리는 줄리앙의 일그러진 표정을 볼 수는 있지만, 그가 왜 앙투앙을 아빠가 아니라 ‘그 사람’으로 부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볼 수 없다.(영화에서 플래시백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앙투앙과 줄리앙이 이혼한 것은 알지만, 그 둘 사이에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이혼의 계기가 된지는 알 수가 없다.(역시 마찬가지로)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근거이자 동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보여주지 않음’을 화법으로 사용하는 이 영화를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어쩌면, 앞서 말한 판사의 시선은 영화를 보며 앙투앙과 미리암 사이의 잘잘못을 판단하던 관객 자신의 시선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역시 또 하나의 판사가 되어 뒤이어 펼쳐지는 앙투앙과 줄리앙의 모습을 보며, 어느 쪽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 내려야 하는 우리의 근원적 절망이 있는 셈이다.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바로 이 점에서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해야 하는 사람과 나아가 보이는 ‘증거’만으로 판단 내리는 사법 시스템에게까지 날카로운 창 끝을 겨누고 있는 건 아닐까.

민주사회의 사법 체계는 인류의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이루어진 결과물이므로 세밀하게 가지를 쳐나간 수많은 조목의 구속력으로 사회를 지탱한다. 그러나 이 법은 절차와 체계의 무흠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종종 일반인의 상식과 정의, 그리고 삶에 대해 어긋나는 결론을 내릴 때가 있어 절망케 한다. 이 영화의 후반부, 미리암의 집 문을 향해 총을 마구 쏘아대는 앙투앙의 광기를 우리는 아연실색하면서, 동시에 이 모든 일의 출발이 지나칠 정도로 무심하고 소극적이었던 사법체계로부터가 아니겠는가를 필연적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된다.

미리암과 줄리앙을 근거리에서 촬영하다가 갑자기 확 거리를 늘려버린 이 영화의 엔딩 쇼트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출동한 경찰에 의해 앙투앙은 포획되므로 상황은 인단락되었다. 내내 카메라는 미리암과 줄리앙 모자 바로 곁에서 그들을 비추며 그들의 아픔과 함께했다. 그러다 카메라는 갑자기 시선의 기준점을 옮긴다. 미리암과 줄리앙 바로 옆에 있던 카메라는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소리 없이 흐느끼는 미리암과 줄리앙을 비춘다. 이 시선은 맞은편 집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다가 경찰에 신고했던 이웃집 할머니의 시선이다. 그들과 함께하면서도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판단과 ‘보이는 증거’에 근거하겠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판사의 시선에 비해,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종합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은 내리기 어려웠지만, 적극적으로 위험에 달려들어 경찰에 신고하는 이웃집 할머니의 시선이야말로 훨씬 더 따뜻하고 나은 것이 아니겠는가.

‘누가 더 거짓말쟁이죠?’라며 판사는 질문하지만, 어떤 문제는 참과 거짓의 차가운 논리로 신중하게 다가가다 이미 커져버린 위험에 뒤늦게 후회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 영화가 겨누는 칼 끝은 결국 앙투앙의 일탈적인 행동 외에 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준다던 민주사회 사법 시스템이라는 ‘울타리’까지 놓여있다. 이 상황에서 미리암의 집 현관문이 앙투앙에 의해 너무나 쉽게 부서져버렸다는 사실은 얼얼할 정도로 현 사법 체계에 깊은 상흔을 남긴다. 한 개인의 일탈에 울타리가 부서져버린다면, 과연 그 울타리는 믿을만한가라는 근원적인 탄식인 셈이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라고 위로하는 경찰, ‘다 끝났어’라고 되뇌는 미리암. 이어 미리암은 옷을 추스르다가 조심스럽게 이 상황을 지켜보던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다. 이어 미리암은 삐걱거리는 문을 닫는다. 그러나 그 문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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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민철 님의 리뷰
2019.01.14 00:16:00
단순히 가정폭력의 결과가 아닌, 그 과정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충격적인 리얼리즘을 선사한다. 불안감에서 시작한 긴장감은 그 어떤 영화와도 비교불가의 서스펜스로 발현되며 충격적인 체험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낸다. 백문이 불여일견. 그 어떤 매개체보다도 섬뜩하게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각인시켜주는 이 영화야말로 가정폭력이라는 이 시대의"아직 끝나지 않은" 심각한 위험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방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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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잔 님의 리뷰
2018.12.07 01:26:24
서로 자신만 바라보는 다른 시선.
이혼을 한 부모가 미성년인 아들을 놓고 싸운다. 법정에 서게 되고 아버지의 손을 들어준 법정의 확정대로 이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들은 아버지를 싫어하고 아버지는 막무가내로 폭력적이다. 아들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법정의 결정대로 이주에 한번씩 아버지와 같이 지내는 것이 지옥 같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어느 한쪽의 거짓말이 보여지는 순간을 얘기 한다. 그것으로 인해 진화되는 현실의 양면성 같이 결국 양쪽 모두 거짓말 쟁이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이야기를 녹녹하지 않게 풀어낸다.

90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런닝타임에도 인트로 부터 보여지는 면접교섭권을 두고 법적 공방을 벌이는 모습을 20분 이상 할애하면서 보여준 이유는 분명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보여주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이 20분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인공인 두 부모의 보다는 변호사의 대사들로 두 부부와 아이들의 상황을 묘사하고, 그 상황속에서 판사는 "누가 더 거짓말 쟁이"냐며 이 영화의 핵심포인트를 집어낸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진실되게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무엇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 혹은 아내와 남편,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먼저 봐야 한다. 그 울타리 안에서는 어떠한 자신들만의 규율과 법칙, 그리고 서로간의 공감과 배려 또한 마련되어야 한다.

영화속 아이는 결국 그 어떤 공감과 배려도 없이 두 부모들에게서 외면당하는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끝까지 아이와 아빠, 혹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놓지 않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시작은 아이의 양육권에 대한 법정 드라마 처럼 시작되서 은근히 <크레이머대 크레이머>를 상상하게 되지만, 그러한 가족의 애정에 대한 시선보다는 조금 더 현실을 직시하는 시선들이 다가온다. 이야기는 어느새 아버지와 아들의 공간에서 엄마까지 이어지는 순간 스릴러 같이 무시무시한 상황들이 만들어지고, 그 상황에 대한 피드백으로 <샤이닝>속의 광기어린 아버지를 떠올려야 하는 엔딩이지만, 영화속의 차가운 시선들이 그러한 광기어린 아버지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결국 남편은 총을 쏘면서 포악한 광기를 내뿜고, 그것은 오롯하게 그 남편만의 폭력성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그것 보다는 가족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문을 닫아버려야하는 현실의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순간이다.

소수의 어느 누군가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짓말은 의문이 되고, 의문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공포로 진화되는 정말 무시무시한 폭력의 영화나 극한의 공포영화가 될지도 모른다. 서로 자신만 보는 다른 시선으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뉘앙스까지 겹쳐지면서 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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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정치, 종교 등
욕설 및 음란성
타인에게 모욕감이나 수치심을 주는 언행
개인 안전 보호
개인의 사적인 정보, 특정 개인에 대한 강도 높은 비방, 혐오 발언
도배 및 광고
영화를 보지 않고 남긴 것이 분명한 리뷰
스포일러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