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 더 실버레이크 (2018) - 키노라이츠
언더 더 실버레이크 (Under the Silver Lake)
범죄 / 2018

개요
범죄, 스릴러, 미국, 139분, 청소년 관람불가, 2019.09.19 개봉
감독
데이빗 로버트 미첼
배우
앤드류 가필드
라일리 코프
그레이스 밴 패튼
토퍼 그레이스
지미 심슨
로라-리
칼리 헤르난데스
섬머 비실
이지 코피
조시아 마멧
아담 바틀리
리키 린드홈
패트릭 피슬러
시본길 믈람보
앨리 맥도널드
돈 맥마너스
시놉시스
마을에 나타난 ‘개 도살자’
할리우드 대부호의 의문사
이웃집 썸녀 ‘사라’의 실종

연이은 사건 속 단서를 따라
‘사라’를 찾아 나선 청년 백수 ‘샘’은
실버레이크 아래 감춰진 비밀에 조금씩 다가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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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
리뷰
20

제트별 님의 리뷰
2019.09.24 22:25:53
깨달았다 한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매일매일 대중문화에 허우적거리며 희로애락의 감정을 꿀꺽꿀꺽 삼키는 나에겐 여러모로 꽤나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정직하게 서사를 따라가다간 수몰되기 십상이고, 개연성보다는 상징성을 따지는 게 차라리 속 편한 구성이나 한 번 보고는 아니 두세 번 더 본다 해도 알게 될 거라 자신은 없으며,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요소들(특히 대중문화 부분)의 직시로 뭔가 번쩍하고 새로운 시각을 손에 쥐게 된 느낌이 들었다. 객관적인 사실을 제외하고 영화의 느낌이나 해석엔 옳고 그름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역량 부족으로 이 작품에 대한 해석에 과부하가 걸렸고 개인적인 해석을 시도할수록 내가 영화를 해석하는 건지 영화가 나를 해석하는 건지 그 난해함에 표류되어 어느새부턴가는 그냥 나름의 고뇌를 치우고 뭉텅이 자체를 즐기려 미소만을 잔뜩 머금은 채 관람했다. 꽤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 영화의 호수 아래에서 무언가를 퍼올리면 퍼올릴수록 손가락 사이사이로 순식간에 빠져나가기 일쑤였으나, 퍼내는 손이 따끔할 만큼 섬뜩하게 와닿았던 건 대중문화를 저격하는 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 음모론은 싫어하지만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건 좋아하는 이 묘한 모순점을 여기서 특히나 느꼈는데, 스스로의 민망함에 실실거리며 적당한 합리화의 물안경을 쓰고 뭔가 더 건져보기 위해 호수 안으로 빠져들어갔다.

살면서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다. 대중문화엔 분명 본래의 것과는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고. 문화의 ‘본래 목적’을 운운하는 게 참 웃기기도 하지만, 당장 우리나라의 5공 시절 3S정책처럼 문화의 이면엔 결코 순수하지 않은 도구성이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눈과 귀를 가리는 그런 차원을 넘어 특정 부류만을 위한 직접적인 메신저 역할까지 한다면? 도구성에 도구성을 얹은 초도구성이 문화의 뿌리였다면? 그리고 의미에 목매는 당신에게 무의미라는 최후의 갈증을 내려준다면? 거기에 영화는 아주 깔끔하게 반박하지 못할 막타까지 선사한다. ‘그래서, 그렇다면 네가 뭐 어쩔 건데?’ 극중 샘이 조각조각을 모아 나름의 퍼즐을 완성했지만, 탐정 뺨치는 시도로 찾고자 했던 것을 찾았지만, 당도한 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더불어 그가 ‘현실에서의’ 마지막 도착지도, 지독하리만치 잔인하고 ‘현실적인’ 결말이었다. 허나 그런 결말과 대비되는 샘의 마지막 미소는 서글프다기보다는 오히려 너무나 당연해서 공감되는 느낌이랄까. 나 역시 다르지 않다. <트루먼 쇼>에서의 시청자들처럼, <트루먼 쇼>를 보고도 생각했던 것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영화는 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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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거니 님의 리뷰
2019.09.02 18:41:16
씨네필을 위한 시험지
당신이 씨네필인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영화. 자칭 21세기 힙스터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동시에 계몽주의로 무장한 지식인/문화평론가의 머리통을 터뜨리는 영화. 데이빗 로버트 미첼은 또라이가 분명하다. 시대의 아이콘을 쫓아다니는 이들에겐 이보다 더한 공포영화도 없을듯. 영화광이라 자부하는 이들은 필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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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재성 님의 리뷰
2020.01.08 07:07:03
꿈의 공장 절망편
뜻밖의 영화였다.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영화였고, 이 감독과 이런 영화로 만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그 반전이 밉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영화라 고마웠다. 앤드류 가필드의 연기력도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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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 님의 리뷰
2019.10.03 11:40:45
이상의 '오감도'가 해석의 가능여부에 상관없이 시가 쓰여진 형태만으로도 흥미롭고 아름다운 작품인 것처럼, 이 영화에 쓰인 수많은 레퍼런스를 알지 못해도 이미 충분히 재밌고 골때린다. 몇 년이나 앵무새를 키우던 사람도 앵무새가 내는 소리의 정확한 정체를 알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키우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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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Vet 님의 리뷰
2019.09.23 16:58:55
예술? 평론? 그거 다 똥이다 - 미첼 가라사대
<언더 더 실버레이크> 간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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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 본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영화의 후기를 작성하는 과정이나 자칭 '평론'이라고 싸지르는 글에서 영화를 일종의 코드 집합체로 치환하는 분위기가 만연해진 것은 그의 영향임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그런 분석이 도움이 되는 영화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영화가 가진 유기성을 철저하게 무시하며 그 생명력을 죽인 채 진행하는 해부학에 불과하다. 제대로 해부를 한다면 그 구조적인 예술성이라도 배우겠지만, 살아있는 영화의 에너지가 가진 아름다움은 죽어버리기 십상이다. 해부만으로 그 생명체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이런 방구석 전문가와 스노비즘에 찌든 코드 해석가들에게 시원하게 한 방 먹이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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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의도적으로 모든 쇼트에서 의미를 제거하며, 영화 내에서 코드를 해석함에도 스스로의 코드를 모두 제거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코드를 헤쳐나가며 서사를 진행하지만, 이 과정을 보는 관객은 그 끝에서 코드 해석의 무의미를 자각하게 된다. 영화는 불친절하고 파편화된 이미지를 통해 코드 해석용 영화인 척 하지만, 의미가 영리하게 거세된 본연의 구조를 통해 코드 해석의 덧없음을 역설한다. 결국 열심히 설치는 얼치기 평론가들을 향해 "너네 다 ㅈ까"라고 말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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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주제 의식은 결말부에서 정점을 찍는다. 일련의 코드 해석을 통해 찾아낸 목표는 결국 현실 너머 이데아의 공간에 존재한다고, 아니 존재해야 한다고 영화는 말한다. 결국 그런 단편적 분석으로 결과를 얻어냈을 때에는 이미 진짜로 찾아야 할 의미가 휘발됐다는 것이 아닐까. 나아가 영화는 배설물의 이미지를 통해 예술 분석, 혹은 예술 자체의 무의미를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현재의 공장화된 생산 시스템에서 예술의 가치를 붙들고 있는 것은 서브컬쳐 너드들이며, 그들은 결국 실버레이크 호수 아래에 가라앉아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닐까. 저멀리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할리우드는 결국 이런 세태를 대변하는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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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불친절한 영화이다. 난해하다는 평도 충분히 이해하며, 필자도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했다거나 전심으로 즐겼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뚝심 넘치는 영화를 찾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고전 영화, 특히 히치콕의 문법을 고스란히 가져다 쓰면서 과잉의 이미지들로 극에 불어넣은 활기는 관객을 휘어잡는다. 이 영화는 당신에게 색다른 체험의 장을 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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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DaSi 님의 리뷰
2019.09.22 14:53:52
훔쳐보는 이유의 변화
영화를 좋아하는 마니아를 씨네필이라고 합니다. 이 영화는 그런 씨네필을 위한 게임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영화 속 어떤 장면을 보면 과거 어떤 영화에 대한 향수가 떠오릅니다. 뿐만 아니라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로 고전영화라 불리는 영화들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OST나 관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는 마치, 히치콕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합니다. 이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듯 영화에서도 히치콕이라는 이름이 대놓고 등장하기도 하죠.


씨네필의 게임

이 게임의 난이도는 그리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꼭 고전 영화가 아니라 비교적 최근 영화에 대한 요소도 존재하고 있어서 아는 사람만 피식거리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절대로 웃긴 장면이 등장하지 않으니 혹시 누군가가 웃고 있다면 그 사람은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이겠죠. 영화는 직접적인 유머의 사용을 상당히 자제했지만, 이런 식으로 뜻하지 않은 장면에서 과거 영화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 있도록 설계를 했습니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은 바로 히치콕일 것입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시선 자체가 그의 영화와 닮아 있는 지점이 많습니다. 관음적 시선의 등장이나 가부장적인 모습들은 과거 영화에서 보였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를 연출한 ‘데이빗 로버츠 미첼’은 할리우드 고전 영화감독들을 인용하는 것이 재밌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번 작품에는 [이창], [현기증], [욕망], [침실의 표적], [멀홀랜드 드라이브]까지 LA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대한 애정을 담았다고 합니다. 음악 또한 당시의 음악을 참고하는 등 영화를 정말 사랑하는 씨네필인 감독의 애정이 담겨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클래식 비디오 게임인 ‘슈퍼 마리오’와 ‘젤다의 전설’도 이 영화에 등장합니다.

영화에서 벌어진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이 이 사건을 파헤친다는 전개를 보여줍니다. 주인공인 샘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된 이웃집 여성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녀의 행방을 쫓아갑니다. 사건을 쫓으면서, 그녀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비밀 메시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메시지를 풀기 위한 과정을 그립니다.
이런 이야기는 마치 탐정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필름 누아르가 유행하던 4, 50년에는 어두운 분위기에 탐정 영화가 유행했습니다. 이 영화는 그런 공식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미스터리하고 매력적인 이성에게 빠져서 그 인물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거듭될수록 사건은 처음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죠. 심지어 인물의 생명을 위협을 받는 상황도 생기지만 인물은 그 수사를 멈추지 않습니다. 결국 몰랐던 진실을 알게 되고, 주인공도 그 사건에 말려들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성을 다루는 시선

이 영화는 남성보다는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샘의 여자 친구는 샘을 찾아올 때마다 독특한 분장으로 그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극 중 이름조차 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여성은 샘의 혹은 기존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보여주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샘이 다른 여성들을 훔쳐보는 관음적인 시선으로도 샘은 여성을 자신의 성적인 요구를 해결하는 수단으로만 보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여성들은 샘의 성 요구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주체적인 모습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샘이 사라를 찾기 위해서 쫓아가는 여성을 관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영화는 그들의 개개인을 만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느 순간은 샘에게 먼저 다가오기도 합니다.

다른 모습으로는 샘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샘은 초반에 다람쥐의 죽음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개를 죽이는 사람의 존재는 자신도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샘의 꿈속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이 갑자기 개의 울음을 내면서 공포스러운 존재로 변화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남성의 권력을 보여주는 도구로 사용되는 모습도 등장합니다. 영화 속에서 권력이나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남성으로 그려지고 그런 남성 주위에는 많은 여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여성의 수가 그 사람의 권력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모습을 방관하지 않죠. 파티를 열어서 항상 많은 여성을 초대하던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장면에서 죽이는 과정에 대해서 상당히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전까지는 꽤 진중한 톤으로 유지되고 있던 영화가 갑자기 폭발하는 순간입니다. 영화가 이러한 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과거 잘못된 모습에 대한 처형을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대중문화 속 메시지

영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중문화 속 비밀 코드에 대한 이야기는 과거부터 사람들이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대중문화의 팬들을 사로잡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감독은 영화에 대해서 ‘우리는 대중문화라는 호수 안에서 헤엄치고 있다. 하지만 수면 저 아래에는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구가 쉽게 즐기는 대중 문화지만 그 이면에는 많은 뒷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에게도 흔히 접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연예에 대한 기사가 꾸준히 나오는 것 또한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 생활에서 많은 영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 연예인의 사건보다 연예인의 사건이 더 부각되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이미지와 다른 모습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버레이크 아래에는 무언가가 있다는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관음적인 시선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사라를 찾기 위해 시작한 샘의 여정은 어느덧 이들의 메시지를 찾는 것에 더욱 주목하게 되고, 이들의 메시지를 찾으면 사라진 사라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샘은 더더욱 이 사건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그 메시지는 우리가 쉽게 알지 못할 것입니다. 샘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미스터리에 점점 가까이 가면서 그 의미를 알아가고 있지만, 옆집 앵무새가 하는 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라 볼 수 있겠죠. 듣고는 있지만 그 자세한 의미에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냥 흘러가게 되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장르적인 재미가 충분히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 장르적 재미가 조금 과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관객분들에게는 이 영화가 과하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영화는 고전 영화에 대한 향수와 대중문화의 이면의 이야기를 게임 북 같은 형식으로 하나씩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샘은 탐정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의 시선을 관음적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독특하고 개성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장르적인 힘을 과신한 것인지, 결말에 보여주는 이야기가 크게 와 닿지 않습니다. 인물이 무언가를 쫓아가면서 결국 알아낸 것에 대해서 통쾌함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느낌이 들지는 않습니다. 단순히 모든 사건의 해결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그동안 보여준 미스터리함을 모두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영화는 그 공백들을 모두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저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다양한 영화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장르적 재미는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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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 님의 리뷰
2019.09.21 07:32:50
미끈한 여체에 혹했지만 한무더기의 똥덩어리에 식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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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량한 님의 리뷰
2019.09.21 01:34:58
|| 오늘날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세계 각지의 연구개발로 수수께끼와 신비가 잇따라 해명되면서 점차 꿈과 낭만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

이러한 것들이 하나하나 해명되고 개발될 때마다 어떤 이들은 “아, 또하나의 꿈이 사라지는구나”하고 탄식합니다. 얼마 안 가 인류가 이 세상의 모든 수수께끼를 풀어버려 어린이들이 더이상 그 무엇도 꿈꾸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나는 하나의 수수께끼가 풀리고 나면 그 열 배의 새로운 수수께끼가 탄생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 p. 71-72, 데즈카 오사무 『아톰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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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님의 리뷰
2019.09.16 12:15:25
모든 루저들은 실버레이크 호수 아래 가라앉는다
오타쿠-루저-게임적 리얼리즘

아즈마 히로키는 아니메, 망가 등 일본 서브컬처를 분석하며 포스트모더니즘시대 서사의 특징을“게임적 리얼리즘”이라 설명했다. 삶에서 단 한 번뿐인 삶과 죽음이 서브컬처에서는 게임처럼 무한히 반복된다는개념이다. <슈퍼마리오>를 플레이할 때, 플레이어들은 마리오가 죽어도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마리오의 목숨이무한하기 때문이다. 소설독자들은 캐릭터의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플레이어는죽음에의 불안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캐릭터가 되살아날 때마다 전략을 달리해 다른 삶을 플레이할 수있기 때문이다. 이런 “게임적 리얼리즘”은 문화만 존재할 뿐 더 이상 도시 바깥의 풍경이 부재하는 시대에 탄생했다. 게임 소비자(오타쿠)들은 서브컬처로 둘러싸인 인공현실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현실로 인지하기에 더 이상 현실과 맞닿은 리얼리즘 서사를만들 필요가 없다. 그 현실인식이 “게임적 리얼리즘”의 근간에 깔려있다. 2017년 칸 영화제 경쟁작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게임적 리얼리즘의 메커니즘을 영화에 내화한다. 그간 많은영화들게임의 전개방식을 차용했다면 이 영화는 게임 그 자체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이런 밑바탕 때문에 괴작이라 불릴 수밖에 없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샘(앤드루 가필드)이 5일간 5번의 삶을 사는 이야기고,실종된 첫사랑 사라(라일리 키오)를 찾아다니는추리게임을 플레이하는 영화다. 히치콕의 어법을 기반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듯 서사를 이끌어나가다가 관객을“미국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낙하시킨다. 이 영화와흔히들 비교하는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파편화된이미지를 꿈처럼 나열하는 방식이라면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정반대다. 두 영화 모두 미국이 꿈처럼 이미지들의 파편으로 구성된 국가라는 데에는 동의하나, 이를 전개하는 방식이 다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관객이 누구를 중심인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샘을 중심인물로 제시해 이미지를 연결시키려한다. 샘은 “사라를 찾아라”라는 임무를 뒤따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NPC를만나 새 퀘스트를 받아 수행한다. 임무에 실패할 때마다 샘은 죽고, 다음날아침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난다. 이 영화에서 현실과 가상(혹은꿈)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한 이유다. 이미 샘의 시점에서세계는 게임이다. 샘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도 없이 유령처럼 여기저기를 떠돈다.

감독은 앞서 Filmmaker지와의 인터뷰에서 “저만의 스타일은 자연세계의 규칙에 가둬지지 않으려는 것”이라며, “가능한 한 영화를 창조할 때, 세계의 룰을 바꾸려 한”다고 밝힌 적 있다. 이는 리얼리즘의 상상력에서 이탈해 게임화된 상상력을 추구하는 것이라 넌지시 암시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인터뷰를 한 시점에 만든<팔로우>는 상황극에 불과했다. <팔로우>는 “섹스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규칙 아래 삶을 실존적 공포와 섹스뿐이라는 극단적 이분법을 세운다. 많은 비평가들이 인물들을 쫓아오는 ‘그것’을 (에이즈라 암시되는) 성병이라 해석하며 이 영화를 주제를 중심으로 분석해왔다. <팔로우>의 카메라는 인물들이 혼자 있을 때 그 힘을 발한다. 인물을정중앙에 두고 롱샷을 찍고, 카메라를 점차 뒤로 빼며 개인을 어둠 한가운데에 둔다. 그때에만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것이 다가온다. (그것은 노파로, 좀비처럼 걸으며 다가온다.) 인물들이 그에 맞서 전략을 짜 서로를지키려할수록 그것이 화면에서 사라진다. 섹스하기 전까지 10대들에게죽음은 낯선 형상이지만 죽음을 인지하고 그것에 맞설수록 그 이미지는 내면으로 들어와 삶의 일부가 된다. 이는성병으로 규정하기에는 그 해석의 폭이 다양한 이미지다. 엔딩에서 커플이 된 인물은 점차 어둠으로 걸어가고, 그 어둠이 끝나는 순간 영화는 게임전원이 꺼지듯 끝난다. <팔로우>는 주인공의 목숨이 하나라는 전제가 있기에 완전히 게임이지는 못했다. 오히려 상황극에 가까운 영화였다. 게임은 어쩌면 영화보다 더 순수성과 절대성을 추구하는 서사예술이다. 어떤 룰을 정해 인물을 통제한 뒤 그것을 오롯이 유희로만 즐긴다는 점에서, 현실과맞닿을 수 있는 지점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팔로우>의상황극을 게임으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언더 더 실버레이크>다. <팔로우>와 <언더더 실버레이크>모두 10-20대의 미성숙한 인간의 성장을섹스를 중심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형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팔로우>에서와 달리, <언더 더 실버레이크>에서 죽음은 인물에게 아무런 것도 아니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에서 감독이 샘이 계속 퍼즐을 풀고 닌텐도 잡지를 보며 슈퍼마리오를 플레이하는 것을 몇 번씩 비추는 것은 고의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완전히 게임을 오마주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샘은 오타쿠이며 너드이다. 이런 유형의 인물은 <팔로우>에서 성인잡지를 보는 폴로도 나온 적 있다. 이 폴이 성인잡지에서나와 제이와 교감을 나눴듯, 샘도 성인잡지의 세계에 갇혀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다. 샘에게 현실은 가늠할 수 없는 것의 연속이다. 샘은 슈퍼스타를 꿈꾸던배우였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슈퍼스타들의 이미지뿐이다. 가쉽지 속 그들은 어디를 가나 여자를 끼고다니며손짓만 까딱해도 수천만 원을 벌 수 있다. 수면 위로 드러난 극히 일부의 진실들 사이에는 일상이 생략되어있다. 즉, 노동의 현장이 없다. 이전의 리얼리즘은 그 인물들의 일상으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지금 사회는 다르다. 현대사회는 일반인들로 하여금 그들처럼 슈퍼스타가 될 수 있다고 유혹하며, 이를성욕을 자극시키는 방식으로 전시한다. 샘에게 슈퍼스타들의 삶은 신화 그 자체다. 그리고 그는 그들과 유리된 자신의 삶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이는현재 미국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인셀에 가깝다. (자신의 능력부족으로) 여자와 섹스할 수 없는 자신을 자책하며, 언제든 시한폭탄이 될 수 있는 그 루저들 말이다.
샘은 그 현실을 견딜 수 없어 “5일 내에 방을 빼라”는 현실을 가상으로, <슈퍼마리오>와 히치콕 영화라는 가상을 현실로 취급한다. 아니, 그래야한다. <언더더 실버레이크>는 비루한 현실을 게임으로 견뎌내는 루저 세대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영화의 모든 요소에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샘이음모론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세계의 비밀이 아니라 자신의 주변 물건들을 변형한 결과물에 불과하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을 꿈으로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저 너머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기에 상상력을 총동원해보지만 샘은 결국 자신의 어떤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계급간의 차이에서부터 왜 자신이 너드로 살아야하는지 조차 밝혀내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만다. 이 절망감이 <언더 더 실버레이크>의 기저에 흐르고 있다. 그해<언더 더 실버레이크>와 경쟁한 이창동 감독의<버닝>이 같은 주제를 다룬다. <버닝>에서 이창동 감독은 종수(유아인)이 해미가 사라진 공백을 응시하는 장면을 찍어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로 남겨뒀다. 비닐하우스는 불탔지만, 불 탄 현장은 없는 심증의 세계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벤과 종수가 마주하는 거리의 차이로 드러난다. <언더더 실버레이크>에서 샘은 그 자리를 편집증적 서사로 채우려한다. 스릴러에서부터 로맨스, 호러물과 미스터리물, 심지어는 포크 호러까지 장르를 변주하며 세계를 영화화하려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의 상상력으로 그 세계를 창조해낼 수 없기에 음모론과 영화적 상상력의 힘을 빌린다. 그리고그 시도는 계속 실패로 돌아간다. <버닝>에서 종수는 소설을 구상하는데 실패하지만, <언더 더 실버레이크>에서 샘은 구상한 소설을 적어내려가는 순간에 실패한다. <버닝>이 계속어딘가를 뛰어다니는 종수의 육체적 힘으로 불가해한 자본주의를 파고들려 했다면,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오로지 상상으로 그 너머를 파고들려했다. 두 감독 모두 자본주의사회를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말하고, 그 계급적 차이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듯 보인다. 결국 <버닝>은 벤을 죽이고 불태우고,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커트 코베인의 기타로 조물주의 두개골을 부수는 상징적 행위로 이를 해결하려하지만 결국 그 세계가 해결되지 못하고 존속될 것이라는 비전만을 남긴다.
히치콕은 영화를 “지루한 것들을 다 잘라낸 쇼트”라 한 적 있다. 샘은 히치콕 영화를 자신의포스터 곳곳에 걸어뒀고, 감독은 히치콕의 문법으로 영화를 찍는다. 샘은이 히치콕 영화대로 현실을 상상하고, 이 현실은 영화와 다를 바가 없다. 영화는 비전을 제시해야하지만 <언더 더 실버레이크>에서의 할리우드영화는 개인을 환상으로 몰아넣는 역할밖에 못한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들뢰즈가 말한대로) “영화가 세계”가 되어버린 현장이다. 샘은 그 때문에 영화와 게임으로 자신의 방에 시공간을 가늠할 수 없는 인공낙원을 차린다. 2010년대의 아이콘 맥북에어와 1980년대의 아이콘 닌텐도의 <슈퍼마리오>, <젤다의 전설>이 뒤섞여있다. 게다가 방 곳곳에 1950년대 유행한 <푸른 산호초의 괴물>와 <늑대인간>, 히치콕 영화포스터가 방 곳곳에 걸려있고 비디오 플레이어로 무성영화를 본다. 이처럼 무작위로 나열된 이미지들은 <언더 더 실버레이크>의 재료가 된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비선형적 서사로 이 파편화된이미지들의 근원을 찾으려한다.
너드-플레이보이-대중음악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샘이 대중문화의 환상으로 둘러싸인 세계를 깨고 나오는 현대판 <데미안>이라 말할 수 있다. 샘은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가로지르며 자신의 첫사랑 사라를 찾아 할리우드를 방황한다.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개 도살자를 조심하라!”라는 문구가 적힌 가게 유리창을 비춘다. 가게로 샘이 들어와 처음보는 것은 주방에 있는 아르바이트생들이다. 그 뒤 잡지 커버에 있는 “예수와 드라큘라의 신부들”이다. 한 남자와 세 여자로 구성된 이 밴드는인류의 우상들을 한데 모아놓은 듯 보인다. 그는 알바생들을 보며 예수처럼 여자를 거느릴 수 없는 자신을 자책했을 것이다. 그 뒤 가게에서 나온 샘은 숲이 우거진,시공간이 부재한 길을 따라 걷는다. 그는 그 길을 벗어나 집에 들어가려던 참에 급작스레 다람쥐가 죽는 것을 목격한다. 카메라는 샘을 클로즈업하다가 뒤로 물러나며 공간을 왜곡시킨다. 이때 일그러진 시공간은 게임의 오프닝씬처럼 샘을 낯설게끔 만든다. 앞서밴드로 제시된 한 남자와 세 여자라는 모티프는 반복되며 관객을 시공간이 무화된 지옥으로 끌어당긴다. <언더더 실버레이크>는 이처럼 할리우드의 오브제들을 낯설게 만들어 초현실주의 미장센 내부로 유입시킨다. 이런 미장센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킨다.
샘은 집에 돌아와 세 여자와 만난다. 그는 LA의 자취방에서 백수로 지내며 망원경으로 여자들을 관음한다. 첫 번째 여자는 나체의 이웃집여자, 두 번째 여자는 첫사랑인 사라(라일리 키오), 세번째 여자는 간호사 코스프레를 한 조연배우다. 그의 시선은 두번 이동한다. 이웃집 여자는 히치콕의 <새>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새장을 가꾸는 여자다. 그녀는 매번 새를 매만지는, 새 외에 별 흥미를 못 느끼는 오타쿠처럼 보인다. 샘은그녀가 자신과 동족이라 여기는 듯 자신을 투사를 해 그 여자를 무표정하게 응시한다. 두 번째 여자인사라를 볼 때 그는 고개를 앞으로 빼 그녀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비숑프리제를 안고 있는 사라는 (마릴릴 먼로를 닮은) 그의 이상형이다. 그녀를 보던 중 벨이 울린다. 세 번째 여자인 간호사 코스프레를 한 조연배우가 들어와 그와 섹스를 한다. 그들은 섹스하는 동안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피상적인 이야기만을 나눈다. 이는 교감이 오가는 섹스라기보다 자위나 교미처럼 보인다. 그는 성적 미숙아로 그런 방식의 교류만을 배워왔던 것이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그가 어릴 적 아버지 서랍에서 훔친 <플레이보이>다. 부자만 여자를 거느릴 수 있다는 판타지를 배웠고 여자는능력에 따라 따라오는 부속품이자 성욕을 해결하는 도구로 여겼을 것이다. 샘에게 여성은 성욕을 해결할 수 있는 도구로만 비춰진다. 그는 이런 식의 이야기를 그녀와 성매매하며 나눈다. 그는 성매매가 끝난 뒤 자신이 사랑한 사라를 찾아 여기저기를 떠돌며 무의식에 이식된 욕정의 허구성을 깨달아간다.

그 뒤 샘은 계속 퀘스트를 받는다. 배우와 섹스를 하던 중TV에서 부자의 실종소식이 들려온다. 그는 그 비밀을 밝혀야할 첫 임무를 받은 셈이다. 퀘스트는 그 뒤로 계속 쌓여간다. 그는 그날 밤, 만화책을 사러 갔다가 <언더 더 실버레이크>라는 만화를 본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라는 만화는 도시괴담과 음모론을 나열한 만화로, 모든 진실이실버레이크 호수 아래로 가라앉는다는 식의 플롯을 가진 만화다. 그는 그것에 감명받아 작가를 만나기로한다. 그 뒤 그는 사라가 옆집에 산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는오프닝씬에서 나온 가게에서 집으로 왔을 때 지나온 통로로 사라의 집으로 간다. 그 통로는 MMORPG 속 포탈 역할을 한다. 사라의 집에 간 그는 사라와 거의 키스에 성공하지만 “선장”의 침입으로 실패한다. 그는 사라와 헤어지며 그 다음날 만나기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라도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등의 1950년대 미국 로맨틱코미디를 동경한 여자라는 점이다. 샘이 사라에게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샘은 그녀를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다.아니 어쩌면, 그런 면만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자신과 똑같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법을 모르니. 그날 밤 그는 다음날 사라와 섹스를 할 생각에 들떠집에 돌아온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차 주변에 어린 아이들이 있는 것을 본다. 샘의 자동차는 제임스 딘이 떠오르게 만드는 슈퍼카이며, 그에게는남성성의 상징이다. 그 때문에 샘은 자신의 차에 남근 모양 낙서를 한 어린애를 죽일 듯 팬다. 슈퍼카가 내포한 남성성을 그 스스로가 부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나중에는 그것을 빼앗기기까지 한다.)그러나 다음날 밤 사라가 사라지고,그는 사라진 사라의 방에서 사라가 남긴 물건과 그녀의 방에 남겨진 표시를 본다. 그는 그뒤 그곳에 누군가 들어오자 건물에서 나와 그들을 살핀다. 그들은 사라의 물건이 담긴 상자를 가져가고, 그는 그들을 미행하기 시작하며 각종 수신호들을 마주한다. 이때부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세계의 시공간이 사라진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겨우 5일뿐이다. 집주인이 그에게 5일 뒤 방을 빼라는 가압류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현실을 외면한채 그는 사라를 찾는 일에만 몰두한다. 샘은 이를 추리하지만 매 순간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모호한 상황에천한다. 그가 마주하는 맥락 없는 현실의 파편들을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가능성으로 확장된다. 즉, A라는 상황은 A가아니라, A`일 수도 있다. 관리인은 사라가 “밤새 이사를갔다”는 소식을 전하고 샘은 혼동을 느낀다. 영화는 이처럼 사건에 인과를 두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과를 열어둬 관객이 상상력을 동원해 그 서사를 같이 만들어가기를 권유한다. 사라가 밤새 이사를 갔다는 말은 신뢰할 수 없기에 우리는 몇 가지 선택지를 만들어둘 수 있다. 그 해적이 그녀를 납치해갔거나, 애초에 사라가 없거나 사라가 그를싫어해 떠났다든가 하는 몇 가지 선택지를 상상해낼 수 있다. 감독은 장면을 열어놓고 관객은 장면에 휘둘리며 의미를 찾는다. 어찌 보면 단순하다 할 수 있는 플롯구조지만 독자에게 혼동을 주며 플롯을 정리하기가힘든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소품들도 매 순간 같지만 다른 식으로 배치되어있다. 그 뒤 계속 임무를 얹어가는 플롯에 우리는 혼동을 느낄 수밖에 없다. 샘은 그날 밤, 그 누군가를 쫓아가다 파티에 가 사라를 찾는다. 이 파티의 이름은 ‘연옥’이며, 이는 세계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그곳에서 부자의 딸인 밀리센트 세븐스(캘리 헤르난데즈)를보고 예수와 뱀파이어 신부로부터 또 다른 파티에 초대받는다. 이야기는 계속 가지를 치고 뻗어나가고, 샘은 그 혼란에 여기저기 방황한다.
그날 밤 그는 부자 세븐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 사고를 당한 현장에 사라의 흔적들이 있다. 흰 모자와 죽은 비숑프리제가 그것이다. 이처럼 음모론의 코드가 하나씩 얹혀갈수록 세계는 풀리는 듯 더 풀리지 않는 아수라로 빠져든다. 그는 만화가를찾아가 자신의 이론에 더 확신을 가진다. 만화가는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며 성매매, 마약밀매, 사이비 단체, 개살인마 등 우리가 접해보지 못한 지하세계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 뒤 사람을 살해하는 부엉이키스의 존재를언급한다. 1달러 지폐에 표기된 부엉이키스의 눈은 사람들을 어디에서나 보고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다. 사람들은 그 부엉이키스의 흔적이 있는 지폐로 거래하며 그녀의 자장 아래 있다며 그는 암호와 계약서, 광고에 숨겨진 자본주의의 성적 암시가 인간의 무의식을 조종하고 자유의지를 막는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누구라도 그녀의 다가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죽을 거라 주장한다. 모든매스미디어에 잠재의식이 숨어있으며 그 코드를 풀어내려한다.
샘은 만화가와 헤어진 뒤 친구와 드론으로 여자를 관음하지만 자신이 드론으로 관음한 여자가 흘린 눈물을 본 뒤 더 이상 여자를 성적 대상으로보지 못한다. 그는 집에 돌아와 플레이보이지를 보고 자위하지만 실패한다. 여배우와 섹스하면서도 그게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는 사라를 찾는 데에만 열중한다. 샘은 나체인 부엉이키스의 위협, 대중문화의 신, 노숙자들의 왕, 밀리센트 세븐스를 만나 장애물을 극복해가며 사랑을 배워간다. 샘이 사랑을 깨닫는 순간의 장면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
그는 파티에서 만난 밀리센트 세븐스와 샘은 파티장을 나와 산책한다. 가로등의 불만이 켜진 어느밤, 둘은 손을 잡고 실버레이크 호수 근방 도로를 따라 걷는다. 세븐스는 그에게 같이 호수로 들어가자 말하고, 둘은 호수 정중앙으로 수영한다.그녀가 그에게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는 중이라며 섹스하는 척하자 말한 순간 총알이 날아온다. 그는 그녀를 구하려 잠수해,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그때 총알이그녀의 심장을 꿰뚫고, 그녀는 샘이 보던 <플레이보이>지의 표지에 나온 모델과 똑같은 포즈를 취한 채 죽는다. 포스터에나온 그 포즈다. 그는 그제야 <플레이보이>의 자장에서 벗어난다. 오로지 섹스만이 삶의 목표이던 그는, 그 욕망을 내면에서 죽인 뒤에야 사라를 찾고 그녀와 소통할 수 있게 된다.




미국-할리우드-일루미나티


토마스 핀천의 소설 <제 49호 품목의 경매>는 “미국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결하려, 음모론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에디파(오이디푸스를 연상시킨다.)의 이야기다. 그녀는 샌 나르시소라는 도시에서 W.A.S.T.E라는 우편제도를 쓰는 지하조직을 찾는다. 실종된 여자를찾는 서사는 히치콕의 유산이지만, 지하조직을 찾아다니는 것은 토마스 핀천의 <제 49호 품목의 경매>류의 영미권 포스트모더니즘소설의 유산일 것이다. 이런 서사를 다른 방식으로 차용한 작품이조던 필의 <어스>다. <어스>는 극우화된 미국정신, 트럼프시대의 강림을 보여줬다. 반면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그것을 가능케 한 미국 대중문화의 본질을 탐색하려 닻을 내린다.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미국이라는 국가의 한가운데로 관객들을 던져놓는다.


미국문화는 극한의 자본주의 사회다. 소비사회를 분석한 사회학자들은 미국을 문제적 국가로 진단했다. 예로 프랑스의 철학자 코제브는 미국을 동물화된 세계라 여겼다. 오로지 소비만이 존재해 먹고 소비하는 것만이 전부인 시대, 역사가 사라진 뒤틀린 사회가 미국이다. 그 미국을 상징하는 공간이 할리우드다.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이 진단들을 비꼬는 동시에 서사를 이끄는 추진력으로 삼는다. 바로 샘의 코드독해가 그것이다.

미국은 무엇이든 소비재로 만들 수 있는 사회다. 공산주의 혁명의 상징인 체 게바라가 자본주의의심벌로 변하듯 예수는 공장제 인디밴드로 생산된다. 성경의 예수가 아닌 밴드 리더로서의 예수는 이는 힙스터들의 새로운 신으로 섬겨진다. 자기 곡도 못 쓰는 밴드를 숭배하며 그것을 우상화하는 이 우스꽝스러운 시대에서 반항은 가능할까? 감독은 이를 부정하는 듯 보인다. 샘은 우상인 커트 코베인을 침대에 두고 그 아래서 여배우와 섹스한다. 그 커트 코베인만이 자본주의에 저항할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는 코드독해로 자본주의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코드독해는 그저 힙스터들의 놀음질에 불과한 예수와 세 뱀파이어 신부의 노랫말에 비밀을 밝혀낼 수 있는암호가 있다고 믿게끔 한다. 그가 코드를 뒤쫓아 마주한 사람은 대중음악의 신이다.

그는 커트 코베인이 사회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돈 받고 만든 상품을 부른 것에 불과하다며 그간 유행한 모든 대중음악을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코드로 분석한 샘을 비웃는다. 록음악마저 돈벌이의 일환에 불과했다. 감독의 입장에서 (예로 들자면 상품으로 기획된 아이돌과 그 팬덤현상으로부터 세계혁명의 가능성을 봤다는 책같은) 대중문화를 둘러싼 코드독해는 조소의 대상으로 읽힌다. 소비사회에 저항하는 아방가르드는 더 이사 불가능하다. 그 무의미에서 코드를 찾아내려는 사회가 미국이다. 샘은 그 코드찾기 놀이에 골몰해, 프랑스의 탈구조주의 이론을 수입해와 포스트모던이라는 명목 아래 자폐적 놀음을 했던 미국의 인텔리전트에 대한 메타적 패러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순간 혁명을 꿈꾼 모든 텍스트들은 소비주의의 전략 아래 잠긴다. 학문마저 이 소비주의 사회에서는 음모론으로 봉착된다. 오인과 오독의 가능성을 제거해버린 채, 유아적 세계관에 갇혀버린 채로.

<언더 더 실버레이크>는 거기서 한 층위 더 깊이 파고든다. 샘이 코드를 다 푼 뒤 금지구역에 갔을 때 마주친 것은 도를 닦는 듯한 부자들이다. 백만장자들은 죽은 척한 뒤 지하에 들어가다른 생을 사는 “승천” 작업을 통해 영생을 꿈꾼다. 그들의 사생활은 은폐되고 사라같이 계층상승을 꿈꾸던자들은 부자들과 함께 지하에 묻힌다. (이는 돈 때문에 결혼했다는 오래된 신파 스토리로 드러난다.) 이 선택지에도 들지 못한 사람들은 노숙자의 왕처럼 코요테를 따라 지상을 떠돌아다녀야할 운명으로 살아간다. 노숙자왕은, 그 지하세계를 인지하기에 더 이상 그 세계에 의욕을 잃어버린 자다. 샘이 노숙자를 따라간 끝에 나온 텅 빈 무덤은 이집트의 망자의 계곡처럼 더 이상 이전 세대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미국인의 공허한 정신세계일 것이다. 그 무덤에는 부자들만 묻힐 자격이 있고, 시대의 양심인 지식인은 묻힐 자격이 없다. 이처럼 텅 빈 기표인 자본주의의 영토에서 살아갈 것이냐, 영원한 방랑자로 살아갈 것이냐의 선택지에서 감독은 주제의식을 한 차례 더 비튼다. 노숙자왕은 샘을 잡아다가 고문해, 주머니에서 개사료를 꺼낸 뒤 그를 질책한다. 노숙자왕은 모두가 조심하라던개 도살자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샘은 개도살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이는 감독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샘은 아이들을 때리고 세븐스와 데이트할 때, 노숙자에게 욕을 갈긴다. 샘 같은 사람이 자신보다 더 약자인 자들을 도살하고 다니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감독은 이처럼 소비사회에 중독되어 서로를 대상화하고 증오할 수밖에 없는 세계를 다룬다.

세계는 더 이상 이론이나 코드로 설명할 수 없이 망가졌다. 루저세대는 방에 갇혀 게임을 플레이하며 세계를 견딘다. 사회를 어떻게든 규명하려는 루저의 목소리는 저기 할리우드 실버레이크 호수 아래로 가라앉는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9.09.03 17:41:49
빛나는 그들의 빛을 잃은 진짜 얼굴
영화를 보는 동안은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서 후기를 어떻게 쓰나 걱정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어질러진 생각의 파편을 모아 하나씩 고민해보니 감독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는 조금 알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말이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에게 공감하며 따라가야 하지만, 한 번 만난 여자를 찾으려고 집착하는 샘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작부터 반감이 있었다. 음모론에도 관심이 있던 모습이 점점 심해져서 나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러닝타임이 139분이지만 왠지 더 길게 느껴져 중반까지는 좀 지루했다. 코믹한 장면이 있어서 몇 번 웃었고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을 정도로 과하게 잔인해서 정신이 번쩍 들고, 선정적이면서 때로는 정말 더럽기도 했지만(영화에서 진짜로 그걸 볼 줄이야..), 비밀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졸지 않기 위해 살을 꼬집으면서 봐야 했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상징하는 의미가 곳곳에 등장해 해석의 여지가 필요한 영화였다. 옛날 미국 영화나 음악 등의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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