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9
경계선 (Border)
판타지 / 2018

개요
판타지, 멜로/로맨스, 스릴러, 스웨덴, 덴마크, 108분, 청소년 관람불가, 2019.10.24 개봉
감독
알리 아바시
배우
에바 멜란데르
에로 밀로노프
요르겐 토르손
앤 페트렌
스텐 륜그렌
시놉시스
출입국 세관 직원인 ‘티나’는 후각으로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기묘한 능력과 남들과는 조금 다른 외모로 세상과 쉽게 어울리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 앞에 수상한 짐을 가득 든 남자 ‘보레’가 나타나고, 그는 ‘티나’ 자신도 몰랐던 그녀의 특별한 모습을 일깨워주기 시작하는데…
95.89%
3.8점
키노라이트 분포
3개
70개
별점 분포
리뷰
47

moviemon 님의 리뷰
2019.10.23 18:35:43
수많은 논쟁점을 늘어뜨려 놓고 스크린 안팎을 세차게 뒤흔드는 수작
제71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분에서 대상의 영예를 안았던 영화 <경계선> (2018)은 외관상 오드 판타지 로맨스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영화 <논-픽션> (2018)처럼 수많은 논쟁점을 관객에게 제시할 뿐만 아니라 주체적인 사고를 유도하는 토론의 장과 같은 작품이다. <경계선>은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영화 <렛 미 인> (2008)으로 유명한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동명 단편 소설을 각색해 만들어졌지만, 알리 아바시 감독이 원작의 기본 설정에 본인의 상황과 연관 있는 사회문제, 미래사회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 등을 더하며 심오해진 작품이다. 다만, 디지털화, 오늘날 출판 산업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문제, 정보 자정 능력의 결여 문제 등을 리얼리즘 영화의 계열로 풀어낸 <논-픽션>과 달리, <경계선>은 난민 문제를 포함한 각종 사회문제에 라틴 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접근한 작품이다.

알리 아바시 감독은 이란 태생의 영화감독으로 처음부터 영화를 전공했던 건 아니다. 감독은 유년시절을 이란에서 보낸 후 20세가 되던 해 덴마크로 유학을 떠났고, 스웨덴에서 영화를 공부하기 전까지 전공을 여러 번 바꾸면서 유럽 내 많은 국가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감독은 이란, 덴마크, 스웨덴 등 어느 국가에서든 외부자의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따라서 감독의 삶 자체가 어느 한쪽에 소속되지 못한 채 경계선 위에 표류했으며, 감독은 그런 외부자의 시선에서 정상성과 비정상성 간의 충돌 문제를 <경계선>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우선적으로 다룬다. 영화는 벌레를 만지작거리는 ‘티나(에바 멜란데르)’를 클로즈업 숏으로 담아내며 시작한다. 오프닝 시퀀스만 놓고 보면 이와 같은 ‘티나’의 행동을 분석하기 어렵다. 그러나 ‘보레(에로 말로노프)’를 만난 후 벌레를 잡아먹는 ‘티나’의 모습을 연결해서 본다면, 벌레를 만지작만지작하는 ‘티나’의 행위는 지배적인 사회규범을 의식하며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본능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임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티나’가 자신을 염색체 결함을 가진 인간이라고 소개한다는 점은 지배문화가 설정한 정상성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외부인의 의식적인 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알리 아바시 감독은 첫 번째 문제를 심화하며 유럽, 특히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의 난민 문제를 꺼내 든다. 북유럽 신화 속 트롤을 모티프로 삼은 ‘티나’와 ‘보레’의 종족이 인간과 비슷한 존재로 묘사되었을뿐더러, 그들의 조상이 1970년대에 정신병원에 갇혀 지냈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난민이 단순한 타자가 아니라 인간 비슷한 존재로 취급받는 현실을 암묵적으로 그려낸다. 또한, ‘티나’가 상당히 먼 거리를 감수하면서까지 매일 직장과 거주지를 오가는데, 이는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영화 <더 스퀘어> (2017)처럼 난민을 인간과 비슷한 존재로 취급할 뿐만 아니라 사회 변두리로 밀어내는 공동체의 모순과 폐쇄성을 스크린에 재구성한 것이다. 무엇보다 외부인의 위치에서 윤리성을 철저히 배제한 채 과거에 자기 종족이 당한 고통과 수모를 그대로 되갚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새로 정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려는 ‘보레’의 행태를 보여줌으로써 혐오가 또 다른 혐오를 양산하는 현대사회의 파괴적인 경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근데, <경계선>은 단순히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토론을 유도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세상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범죄를 고발하는 역할까지 맡는다. 출입국 세관 직원인 ‘티나’는 후각과 관련해서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 오프닝 시퀀스가 끝난 후 나오는 첫 번째 검문 장면에서 후각만으로 상대방의 감정을 읽는 듯한 ‘티나’의 모습을 미디엄 숏으로 담아낸다. 하지만, 이런 추론은 두 번째 검문 장면에 의해 반박된다. 두 번째 검문 장면에서 ‘티나’는 후각만으로 스마트폰 케이스 뒤에 아동 포르노 영상물이 담긴 USB를 숨겨서 입국하려는 한 남성을 적발한다. 이를 통해 ‘티나’가 후각으로 상대방의 감정이나 내면을 감지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지닌 윤리성 및 도덕의 감정을 판단할 수 있다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하여 '티나'의 능력과 후반부로 갈수록 점차 드러나는 아동 포르노 제작 및 유포 관련 범죄에 관한 사실을 엮어 고려한다면, ‘티나’와 ‘보레’의 첫 만남이 사랑의 출발선이 아니라,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비윤리적이고 추악한 사회문제를 고발하기 위한 시발점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끝으로 젠더 이슈의 측면에서 <경계선>은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는 미래사회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규명할 것인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를 위해 알리 아바시 감독은 우선 ‘티나’와 ‘보레’의 종족에 특이한 설정을 부여한다. 두 사람이 속한 종족의 여성은 남성의 성기를 갖고 있는 반면, 남성은 여성의 성기를 갖고 있다. 성관계를 맺는 행위 자체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이므로 감독은 숲 속에서 성관계를 갖는 두 사람의 장면을 상당 시간 노출함으로써 이와 같은 가정법적인 상황이 미래사회에서 실제로 발생한다면, 인간은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성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관객에게 묻는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을 고안했다면, 이때 인간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지 질의한다. 게다가, 밤에 숲 속에서 아기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보레’의 모습을 담아낸 시퀀스와 아이를 품은 ‘티나’가 느끼는 감정이 부성애인지 모성애인지 알 수 없는 시퀀스를 활용해 감독은 만약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아기를 낳는다면, 현재 알려진 인간에 관한 정의와 젠더 관련 이슈가 유지될 수 있겠냐고 굉장히 도발적인 자세를 취한다.

따라서 <경계선>이 제71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분에서 대상을 받았을 당시 평가가 극명히 갈릴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시각적인 요소만 놓고 봐도 <경계선>은 대단히 낯선 작품이지만,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다양한 논쟁점 때문에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거로 다가온다. 특히, 알리 아바시 감독이 젠더와 관련된 민감한 이슈를 도발적으로 건드리다 보니 <경계선>은 뜨거운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화들 중 한 편일 테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선우 님의 리뷰
2019.09.22 20:35:18
정직한 제목. 로맨스라기보단 티나의 휴먼 드라마, 또는 성장담이랄까.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무겐 님의 리뷰
2019.11.13 18:07:05
세상이 규정한 가치와 경계를 뒤흔드는 낯설고 도발적인 작품.
파격적인 서사와 분위기로 어느 영화에서도 느끼지 못한 강렬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리디 님의 리뷰
2019.11.12 15:26:00
외로운 사람들에게 바치는 신선한 스토리의 동화
영화 제목과 주인공이 부합한다고 보았던 이유는 그녀 자체가
티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어쩐지 부유하는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일하는 곳인 출입국 관리소 역시 떠나는 사람과 오려는 사람이 혼재하는 곳이고 티나의 사생활 또한 사람들과 못섞이는 것은 아니지만 마을과 떨어진 집에서 거주하는 것 등으로 보았을때 주변환경과 보이지 않는 거리가 있는 인물임을 유추할 수 있다.그러나 보레라는 수상한 사람이 등장하며 티나는 변화를 맞게 된다.
보레는 티나와 비슷한 외모에, 맨손으로 식사를 하고 벌레를 먹는다.티나는 그를 보며 자유로움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그녀가 원했던 것에 대해 좀 더 자신있게 행동하게 된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9.11.12 11:10:46
'경계선' 초간단 리뷰
1. 영화가 가진 많은 순기능 중 하나는,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살인기계와 싸울 수도 있고 판도라 행성도 가볼 수 있다. 꿈 속의 꿈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고 슈퍼히어로가 돼 세계를 구할 수 있다. 수백년전 유럽으로 떠날 수 있고 위대한 정치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자유롭게 상상하고 그것을 스크린에 옮길 수 있어서 가능한 일들이다. 현대의 영화(만화, 문학 등)는 상상의 한계가 눈에 띄는 수준이다. 인류가 탄생한 이래 끊임없이 상상하고 그것을 글과 그림으로 옮겼던 탓에 이미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상상은 구현됐다. 특히 문명이 발달하고 그에 따른 기록매체도 발달하면서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상상력은 박제됐다. 때문에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는 거의 다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2. 알리 아바시의 영화 '경계선'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은 아직도 상상하지 못한 세계가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는 신화적인 세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유사했던 영화들의 관습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 결과 전에 본 적 없는 낯선 영화를 탄생시킨다. 이 영화는 제목값을 그대로 하고 있다. 인간과 트롤의 경계에 선 주인공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영화 역시 판타지와 리얼리즘 영화의 경계에 서 있다(그러면서도 20세기 에밀 쿠스트리차 영화의 그것과 다르다). 그리고 익숙한 영화와 낯선 영화의 경계에도 서 있다. 사실 가장 낯선 영화는, 아는 영화도 아니고 모르는 영화도 아닌, 그 중간에 선 영화다. 이 영화는 면(面)이 아닌 선(線) 위에 있다. 그곳은 아주 좁은 곳이다.

3. '경계선'은 말 그대로 인간세계에 사는 트롤 티나(에바 멜란데르)의 이야기다. 그녀(라고 부르는 것 또한 인간의 관점인)는 자신이 가진 특수한 능력으로 알맞는 직장을 찾아 일하고 있다. 어느날 그의 능력으로 감지되지 않는 남자(라고 부르는 것 역시 인간의 관점인) 보레(에로 밀리노프)가 나타난다. 티나는 보레에게 두려움과 관심을 갖게 된다. 이 이야기는 소위 '이방인의 정체성 찾기'로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영화들을 많이 봐왔다. 당장 생각나는 영화는 '라스트 사무라이'나 '하이랜더' 정도다. 이들 영화는 낯선 나라에 떨어진 서양인이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거나 불멸의 존재가 필멸의 존재들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어쨌든 다 인간이라는 의미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낯섦'을 구축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의미다.

4. 좀 더 극단적인 예로 '혹성탈출'이나 '스피시즈'처럼 외계에 떨어진 지구인, 혹은 지구에 떨어진 외계인을 담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말 그대로 '경계에 선 영화'다. 인간이라는 익숙함과 '인간이 아닌' 낯섦의 경계에 서야 한다. 그래서 '경계선'은 극단적인 차이와 익숙한 차이의 중간에 서 있다. 이 영화는 왜 이토록 모든 것의 경계를 고집하고 있을까? 그 답은 '라스트 사무라이'나 '하이랜더', '혹성탈출'같은 영화에는 없다. 애시당초 인간은 트롤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트롤 역시 인간을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레가 저지르는 짓은 정말로 트롤의 세계에서 정의일 수 있다. 트롤의 이야기를 보면서 인간 관객인 나는 인간의 정의와 가치관을 잠시 접어두게 된다. 그것은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닌 낯선 것을 낯설게 보기 위한 시도다. 영화는 인물들 사이에서나 영화적 태도 모두 '다른 것은 다른대로' 내버려둔다.

5. 나는 영화의 이같은 태도가 우리 사회의 차별에 대한 포용이 아닌가 생각해봤으나 결말에 이르러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다른대로 내버려둔 만큼 차별과 포용, 이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것은 그저 다르고 낯선 이야기다. 어쩌면 이야기가 의도한 것은 딱 거기까지인지 모르겠다. 붉은색 페인트와 푸른색 페인트를 마주보고 끼얹은 다음 이것을 초고속 카메라로 찍으면 두 색깔이 부딪히면서 낯선 모양이 생긴다. 그것은 두 액체가 부딪히는 찰나에만 관찰되는 것이며 그것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초고속 카메라가 필요하다. 이 영화는 그 순간의 선(線)을 기록하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 말 그대로 '경계선'은 판타지 영화이며 유사 장르영화가 갈 수 있는 가장 낯선 세계를 구현하는데 집중한다. 가장 낯선 것은 인간세계를 판타지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판타지 세계로 인간이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두 세계의 가장 오나벽한 중간에 서는 것이다.

6. 그래서 이 영화가 가진 유일한 미덕은 '가장 낯선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과 그 낯선 세계를 마주했을 때 받아들이는 태도를 확인한 것 정도다. '경계선'을 마주했을 때 '인간'인 관객의 반응은 몇 가지로 나뉠 것이다. 이 영화를 거부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해했다는 것은 '경계선'과 트롤들의 이야기를 인간인 관객의 가치관 안으로 가져와서 이해하는 경우다. 관객의 종(種)은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어떤 관객들은 나처럼 인간의 가치관을 잠시 내려놓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선사하는 낯선 세계를 경험하는 합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해를 포기하고 체험을 선택한 방법이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7. 결론: 어쨌든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 이상은 달리 할 이야기가 없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최재혁 님의 리뷰
2019.11.08 14:44:29
관련된 모든 신화적 모티프를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철저히 현실에 발딛고 있다.'행복한 라짜로'에 이어 이런 영화를 한 해에 두 편이나 만날 줄이야.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9.11.08 13:27:17
신화를 말하기 위해 감각을 요구하는 영화
우리가 이 영화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영화의 제목 그대로다. 하지만 정말 그대로는 아닌데 그 이유는 ‘경계선’이라는 단어가 많은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면 이것은 선에 관한 문제일 것이며 조금만 돌아가 보면 선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경계선이라는 한국어 단어가 경계와 선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선이 곧 경계라고 생각하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선을 넘는 것이 곧 파멸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 선이 무형의 무언가라면 경계를 가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테다. 이를테면 우리가 흔히 ‘선을 넘는다’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이는 주로 넘지 말아야 할 금단의 영역을 설정하는데 사용되고는 하지만, 선을 넘어야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되기도 하므로 누군가에게 이것은 필히 겪어야 할 진통이기도 하다. 이때 선이 경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걸 넘을 필요가 없다. 경계가 아닌 선은 그저 직선에 불과할 뿐이다. 예컨대 이것은 선을 전제로 경계를 논하는 영화다. 그래서 경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그럼에도 선은 필요하다. 그게 선을 측정하는 일이든 아니면 선을 만드는 일이든 간에 말이다.



선을 전제로 해두었으니 다른 부분을 살펴보고 싶다. 감각에 관한 이야기다. 기본적으로 감각이란 어느 한 지점이 명확하게 단절되지 않는다. 이 선형적인 흐름은 신경의 전달체계와도 관련이 있는데, 우리가 무언가를 느낄 때는 ‘느끼는 중’이지만 어느 순간 그게 끝나고 나면 ‘언제’ 느끼지 않게 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이것이 리니어, 감각의 선형성을 뜻한다. 그러니까 이 선형성에는 시작과 끝을 면밀히 잘라 물을 수 없는데 이게 작중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어버린 티나(에바 멜란데르)의 모습에 해당한다. 그리고 티나가 자신의 과거에 접근하며 알게 된 사실은 자신에게 꼬리가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꼬리의 의의는 그녀가 도착한 마지막 정체성의 지점이라는 점에 있다. 예컨대 꼬리가 잘렸다는 건 트롤이라는 정체성을 잘린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녀의 인생을 하나의 선에 빗대어 볼 때, 안주할 곳이 잘려나가면서 선형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꼬리를 두고 일종의 출발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꼬리를 잘린다는 건 삶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감각과 삶의 공통점은 꼬리가 잘림으로써 선형성을 얻고, 그렇게 명확하지 않은 흐름 안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점이다. 이게 트롤이라는 종족이기에 감각이 예민한 게 아니라, 티나이기에 감각이 예민하다는 점을 설명해준다. 이에 대해서는 이하의 신기한 도식을 언급해야 한다. 티나의 꼬리가 트롤로서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이라는 가정하에, 티나가 트롤임을 깨닫는 건 꼬리의 정체를 발견한 대목이므로 이 꼬리는 트롤로서의 각성을 뜻한다. 그런데 사실 이 꼬리는 트롤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지닌 것이므로 꼬리를 잘린 걸 발견했다 해도 그것이 트롤 정체성의 종결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이 두 가지 문장을 보고도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당신은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이 꼬리가 트롤이라는 단어를 대변한다면, 엉덩이 위의 흉터가 절단된 꼬리의 흔적임을 확인받는 순간은 과연 트롤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일까 아니면 절단되는 순간일까. 예컨대 이는 시작과 단절, 양쪽으로 바라볼 수 있고 그렇기에 이는 원형을 그리게 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삶이라는 하나의 선형성에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리니어다.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곳에 남겨진 것만이 있을 뿐이고 그것은 현재이다. 여기에 추가로 ‘현재에서 떠올리는 것’과 ‘현재에서 상상하는 것’이 있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말로 지칭되곤 한다. 허나 지적해두어야할 건 그런 시간과 기억의 문제가 선형적이라는 점이다. 어디까지가 과거이고 현재이고 미래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티나가 떠나온 곳, 트롤이라는 종족이기에 감각이 예민하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의 기본 전제는 현재라는 순간, 선형적으로 이어진 현상이다. 덧붙이자면 이건 티나가 갖는 감각이라는 것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영화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감각은 아무래도 후각인데, 냄새는 연기의 형태로 자주 묘사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듯이 시작과 끝이 희미하다. 게다가 후각은 우리가 영화에서 유일하게 느끼지 못하는 감각이기도 하다. 거울 뉴런이 가능케 하는 스크린이라는 거울에서의 몇몇 효과들, 통각이나 시각이나 촉각이나 청각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지만 오직 후각만큼은 우리가 느낄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티나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없다. 이는 스크린이라서가 아니라 스크린이 후각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스크린은 관객과 영화 사이를 절단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곧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후각은 티나의 꼬리가 만들어내는 서사적 선형성과 유사한데,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는 감각과 신체라는 두 개의 도식이 있다. 여기서 감각의 면은 앞서 말한 후각의 심상을 뜻하는데 신체는 조금 다르다. 이 영화에서 신체란 트롤이라는 북유럽 신화의 한 면모를 대변하고 다른 것을 제쳐놓고 말하면 결국에는 신화이다. 신화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비범한 신체이며 이는 나와 타자를 구분 짓는 게 외견상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신체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티나의 직업이 세관원이라는 점을 보여줄 때, 검문을 당한 남자가 티나의 외모를 추하다고 욕하는 장면이 삽입됨으로써 우리는 눈으로 확인한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일종의 확인사살이자, 이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라고 그는 못 박아두는 것이다.



조금 미안하지만 이렇게 그녀는 영화 공인 추녀가 되었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고 새로 등장하는 보레(에로 밀로노프)라는 남성은 티나와 엇비슷한 외모를 지님으로써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그 동질성이 확인되고, 이차적으로는 티나가 보레에게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음으로써 그 동질성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를 도식화하면 관객에게는 신체가 티나에게는 후각(감각)이 남는다. 이때 신체는 나와 타자의 거리가 눈으로 확인된다는 점에서 가시적이고 이는 경계가 된다. 반대로 감각은 나와 타자의 거리가 오로지 자신의 주관을 따른다는 점에서 불가시적이고 이는 선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이전에 알아본 것을 대입해보면 ‘감각을 전제로 신체를 말하는 영화’가 된다. 다시 한 번 변용을 거치면 이것은 신화를 말하기 위해 감각을 요구하는 영화가 된다.



신화는 연대기이기도 하다. 오래전 영웅의 이야기를 현세의 영웅이 이어받고, 그 현세가 시간이 흘러 먼 과거가 되고, 이런 식의 반복이 이루어져 지층이 된다. 어쩌면 이것이 영화라는 시간에 대한 연대기적 서술의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이 영화에서 트롤이라는 신화적 존재는 그녀의 부모님 대에서 수가 많이 줄어들었는데 이는 영화가 시작되기 이전이다. 여기에는 그녀의 말마따나 세 살 무렵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기억의 모호함이 자리한다. 세 살 무렵의 일의 기억나지 않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자신이 떠나온 태초의 시간을 잊게 되었다는 점이 이 영화의 시간을 설명해준다. 이 영화가 시작되기 이전이 그녀의 부모님대라고 생각하면, 본편이 시작된 후로는 오로지 그녀의 시간일 텐데 말하자면 그녀의 삶은 곧 영화다. 그리고 영화라는 게 물질적으로 기록되는 매체라는 점에서 이 기억은 모호해질 수가 없는데 이는 영화가 신체에 붙잡혀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티나가 기억을 잊었다는 건 신체를 잊었다는 것이며 그 신체는 바로 트롤의 그것이다. 즉 그 ‘신화’는 바로 티나이다.



이제 잠시 초점을 담론으로 돌려보자. 자신이 신화적 존재임을 깨닫는 영웅 서사는 어느 곳에서나 굉장히 흔하다. 인간 사회에서 자신은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를 반문하고, 그 원인이 남들과는 다른 출생의 비밀이라는 점을 깨닫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이 신화의 현대적 변용이 소수자 문제와 같은 다름의 가치를 역설하는 것이 되기도 했었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그렇게 풀어나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풀어가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담론보다는 경계와 선이라는, 감각과 신체의 문제가 더 흥미롭기 때문이다. 실은 현대 사회에서 소수자 담론의 대부분은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감각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어쨌거나 범주는 겹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왜 그들의 주된 감각인 후각을 영화 밖의 우리가 느낄 수 없는지에 대해 물을 수 있고, 그런 질문이 던져질 때 이 영화는 비로소 담론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곳에는 당신이 눈으로 본 것 이외에 남겨진 무언가가 여전히 자리한다는 뜻이다.



영화는 이 대목에서 이미지의 세계로 넘어간다. 물과 숲, 이것은 아주 오래전에 있던 아담과 이브의 에덴 동산으로 탈바꿈하며 티나와 보레를 하나로 잇는다. 여기서 물은 액체의 형태로서 끊임없이 흐르는, 그래서 시작과 끝이 모호하다는 점에서 시간의 물화로 지칭된다. 또한 숲은 그런 시간을 담은 공간으로서 인간 세상의 반대항, 도로 한복판에 동물이 튀어나올 때 우리는 도로가 인간의 영역이고 숲은 자연의 영역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예컨대 티나가 즐기는 산림욕은 일차적으로는 트롤이라는 신화적 존재가 신화적 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이차적으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눈으로 확인할 만큼 분리되어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티나가 숲 한복판에 있는 호수에 들어가 알몸 상태로 지내는 장면과 집안에서 동거인과의 섹스를 거부하는 면은 명백하게 인간계보다는 자연계에 귀의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며, 감각 도식으로는 모든 게 딱 잘라 표현되는 인간계에서 벗어나 선형성을 띠는 자연계를 신봉하는 것이다.



이때 등장하는 건 티나의 직업이다. 자연계의 모호함은 살기 위해 얼마나 먹어야 하고 얼마나 머무러야 하는지 등의 기준이 확립되어있지 않기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곳이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시간이 담긴 ‘시원적’인 공간이라는 점에 귀인한다. (당신은 여기서 장 자크 루소를 떠올려도 좋다.) 이 상태에서 자라온 태초의 인간은 사냥감이나 재배 곡물을 분배하는 문제에 부닥쳤으며 이에 등장한 것은 법과 국가이다. 공교롭게도 티나의 직업은 세관원으로서 세법에 어긋나는 물품을 검열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그런데 여기서 티나가 문제 해결책으로 사용하는 것은 후각을 비롯한 감각이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자연계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는데, 이는 우리가 티나의 산중 목욕 장면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시간이 ‘물화’로 지칭된 물이라는 질료가 바로 그 시간의 형질이기 때문이다. 이 물의 수질을 떠나서 인간 세상에서는 마시는 물이 페트병에 담겨있고 집에서 사용하는 물도 사용한 만큼 돈을 내야 한다. 즉 인간계에서는 모든 것이 기록되고 규합되며 그렇기에 티나의 직업은 세관원, 이윽고 그녀는 경찰 수사에 협조하게 된다.



티나가 산림욕을 평소에 즐겼던 걸 보면 아마 그녀는 트롤로서의 정체성을 느꼈던 것 같다. 예컨대 그녀는 본능적으로 감각을 추구한 것이다. 왜냐하면 감각이 그만큼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때 그녀의 앞에 보레라는 낯선 남성이 찾아오는데 누가 말하지 않았어도 본능적으로 같은 종족임을 그녀는 직감한다. 이 과정의 설득력은 영화가 표방하는 감각인 후각을 우리가 느낄 수 없다는 점과 맞물려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그녀는 그냥 감각이 발달한 것이고 그게 트롤이라는 존재이니 말이다. 그리고 보레를 만나 자신의 짝을 찾았다고 생각한 그녀는 아주 중요한 한마디를 듣게 되는데, 이는 위로의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배반의 목소리이다. 먼저 보레가 그녀에게 건넨 말을 살펴보자. 보레는 티나에게 “당신은 평범하다.”고 말한다. 물론 이는 인간을 기준으로 한 말이 아니라 트롤을 기준으로 한 말이다. 티나는 자신은 어려서부터 남들과 달랐으며 이게 자신을 특별하게 하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반면 보레는 그런 티나에게, 당신은 인간으로서는 특별하고 트롤로서는 평범하므로 종국에는 평범한 것이 된다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함정이 숨어있다. 보레는 티나가 트롤의 삶을 택할 것이라고 미리 추측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긋나게 된다.



행여나 헷갈릴 사람들을 위해 이미지의 교차를 여기에 적어두자면, 자연의 시간은 감각이며 이는 도시의 공간이 신체라는 신화를 부르는 것과 대치된다. 그리고 이 영화는 감각을 전제로 신체를 말하기에 양측은 반대항이 아니라 대립항이며, 따라서 신화를 말하기 위해 감각을 요구하는 그들의 모습은 도시를 설명하려면 숲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 부분이 티나가 평소에 숲으로 나다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때 보레는 도시를 떠도는 이로서 숲으로 귀의하는 이이기도 한데, 티나에게 먼저 다가온 점은 그가 방랑자라는 점이다. 같은 트롤로서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보레의 모습은 티나에게 있어 무근본의 신호가 아닌 자유의 상징이었다. 예컨대 보레는 고전적인 맥락에서 신화적인 존재였으며 영화는 보레가 티나에게 트롤로서의 자긍심을 세워주는, 일종의 사제관계를 취한다. 그러니까 이 사제관계는 마치 옛 신화에서 선대 영웅이 후대 영웅에게 자신의 비법을 모두 알려주는 것처럼 보이며, 우리가 알다시피 영화는 티나가 그걸 거부하고는 인간계에 여전히 머무르는 것을 보여준다. 즉 티나는 자신이 동경하는 숲, 그 무한한 시간의 흐름에 소속을 동경하지만 동시에 그런 무질서보다는 인간계의 혼돈-질서를 택한다.



이에 따르면 보레는 신화적 맥락에서 티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떠나가는 추방된 이이다. 어느 신화에나 주인공 영웅에게 금기를 전수하고 자신은 사라지는 이가 있는데, 이를테면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이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물론 이게 정확한 비유는 아닐 것이다만, 보레의 말처럼 트롤에게는 인간의 기준이 필요 없고 그렇기에 이는 티나를 시간의 영역으로 완전히 끌어당기려는 카오스라는 이름이 된다. 예컨대 티나가 자신을 트롤이라 정의하면서도 여전히 인간 세상에 어울려 살기를 원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티나의 이상은 무질서는 자유이지만 방종이기도 하며 그렇기에 자신은 (그것이 배반일지언정) 질서를 택한다는 것이다. 이때 잠시 영화의 아름다운 면을 살펴보면, 영화는 티나와 보레의 운명적인 결합 장면을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그려내는데 이는 옛 그리스의 인간상(그리스인들은 태초에 인간이 남녀 한 쌍으로 한몸이었다고 믿었다.)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염색체상으로는 자웅동체인 두 사람이 한데 만나면 그 육신은 어느 특정한 성이 두드러지지 않게 된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카오스라는 이름이 무(無)라는 혼돈이 아니라 본래의 것이라는 맥락으로 돌아감을 확인하고, 그렇지만 그런 혼돈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영화의 전반적인 논리이다.



보레라는 이름의 혼돈이 있다. 티나는 처음에 그가 태초의 무언가, 트롤인줄로만 알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보레와 함께하고자 했다. 그러나 보레는 본래가 아니라 혼돈에 불과했다.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는 트롤이라는 신화적 시간을 전수해오는 보레라는 이름의 혼돈을 티나가 거부하기 어려웠겠지만, 보레가 자신이 쫓는 아동 포르노 사건의 연루자라는 점을 깨달았을 때 그것은 배제해야 할 속성이 되었다. 예컨대 그녀에게 무질서한 것, 시작과 끝이 딱 잘라 정해지지 않는 것은 이제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세관원으로서 도시의 따분한 삶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던 그녀의 모습에서 굳이 ‘왜’ 한적한 시골에서 사느냐는 물음이 제거되는 셈이다. (인물들은 묻는다. 왜 이리 으슥한 곳에서 사느냐고.) 물론 이에 대한 답변은 인적이 드문 자연 한복판이어서겠지만, 그런 무질서함을 대변하는 보레가 도심 한복판에서 일종의 ‘바이러스’의 형태로 다가옴으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한다.



티나가 통로에 서서 지나가는 이를 쳐다본다. 이 중에 한 남자가 아동 포르노가 담긴 메모리 카드를 휴대폰 뒷면에 숨기고 있었는데 티나는 이를 감쪽같이 알아챈다. 아동 성범죄가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최악의 범죄로 지탄받는 걸 고려하면 이 남자는 바이러스 취급을 받아도 무방한데, 영화는 이 남자를 보여준 다음 시퀀스에 동일한 구도와 절차로 보레를 등장시킨다. 외모지상주의를 따르면 보레의 추한 얼굴 또한 그가 수상한 이로 여겨지게 하는데 일조한다. 그렇기에 관객인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좀 전의 성범죄자 이미지를 보레에 투사하게 되는데, 이는 물론 진실이었지만 적어도 중반부까지는 그게 오해인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이 장면에서 티나는 자신의 동족을 만났다는 감정에 흔들려서 악의 냄새를 맡지 못했거나, 또는 자신과 같은 냄새를 처음 맡아보았기에 악의 냄새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 영화가 주로 다루는 후각을 스크린 밖의 우리가 느낄 수 없고, 그렇기에 이게 더더욱 신화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은 영화의 형식에 관한 것이므로 더 말할 것은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흔히 가난한 이들에게 어떠한 ‘냄새’를 투사하고, 그것을 일종의 비유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담론으로 연결될 수 있다. 홀아비 냄새, 노인 냄새, 동물의 누린내, 이하 기타의 냄새는 씻을만한 여유가 없거나 그것에 관심이 없는 자기관리에 소홀하고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그런 가축에 비견될 만한 사람이라는 도식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지의 세계에 진입하기 전에 담론의 세계를 둘러보았는데, 이미지의 세계를 둘러보고 난 후에도 담론의 세계로 왔다. 그러니 이에 따르면 우리는 담론에서 이미지로, 이미지에서 담론으로 귀의하는 셈인데 이게 작중 티나의 행적과 비슷하다. 첫 번째로 티나는 도시에서 숲을 갈망하는 이이며 그러나 도시에서의 삶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에 대한 증거로 보레가 자신을 따라 유람선에 올라타라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보레를 따라가지만 경찰을 대동해 보레를 붙잡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도시에서 숲으로, 신체에서 감각으로, 신화에서 시간으로, 담론에서 이미지로 외도한다고 보아도 좋을 테다.



감각을 전제로 신체를 논하는 영화, 선을 전제로 경계를 논하는 영화. 정리하면 선으로서의 감각과 신체로서의 경계이다. (당신은 여기서 줄리안 크리스테바를 떠올려도 좋다.) 작중에는 두 명의 양성구유가 등장하고 두 사람이 한데 합쳐 서로에게 약점인 성과 강점인 성을 맞물린다는 점에서 이는 합일을 통해 비로소 하나(시원적 의미에서의)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들여다보고 싶은 건 영화라는 신체에 관한 논의이다. 영화가 기본적으로 우리 현실과 분리된 곳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경계를 형성한다면, 우리가 영화를 보며 이입하게 되는 건 무엇인가. 시각, 감정, 청각, 이런 감각이 몰입을 돕고 덕분에 우리는 스크린으로의 경계를 넘어간다. 허나 단언컨대 이는 밀입국이 아니다. 영화에는 국적이 없고 단지 종족만이 있을 뿐이니 말이다. (그게 이곳이 국경이 아닌 세관인 이유이다.) 예컨대 이는 같은 종과는 교배가 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늑대와 개의 교배가 가능하듯이 영화와 현실의 교배가 가능하며, 그것이 작중에서는 인간과 트롤이라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로 나타난다. 허나 일반적인 타자 담론은 아니다. 이곳에서의 타자 문제는 우리가 세계에 품은 이미지에 얽혀있다.



도시에는 선이 있고 숲에는 경계가 있다. 작품은 어디까지나 티나의 시선을 따라가기에 숲을 탐하지만 종국에는 도시로 귀결된다. 그러니 우리는 어쩌면 이 부분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티나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어 부모를 겁박하는 장면을 보면 티나가 도시를 증오할 만도 한데 그녀는 그러지 않는다. 단지 그녀는 기억을 잃어가는 부모를 동정하면서, 어차피 말해보아야 다 잊을 것이라는 둥 말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아버지가 기억을 잃기 전에 비밀을 밝힌 게 다행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때 서사에서는 보레가 홀로 낳은 무성생식 태아가 등장하는데 이건 마치 혼돈이 낳은 무언가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체인질링(changeling)이라는 북유럽 신화의 요인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큰 범주에서 인간계의 시작과 자연계의 시작을 맞바꾸는 행위로 생각해보면 다르게 볼 구석이 있다. 어느 생물이나 아기(새끼)는 삶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보레의 아이는 결핍된 삶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치이다. (장치라는 무례한 표현을 부디 용서하시길) 예컨대 보레는 양성구유라는 비정상적인 염색체 조합을 가진 이로서 결핍되거나 결여된 존재이다.



이때 영화라는 매체의 성격을 생각하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숲으로 넘어가는 것과도 같다. 왜냐하면 숲은 곧 경계이기 때문이다. 빨간 모자가 건너야 하는 그런 부류의 경계, 말하자면 작품 안에서 티나의 모습은 영화관으로 일탈하는 영화계 사람처럼 보인다. 그리고 티나가 영화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종국에는 영화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점은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이다. 반대로 보레는 영화로부터 태어났다는 점을 근거로 관객이 영화에게 가한 폭력처럼 영화도 관객에게 폭력을 가해야 한다면서 숲이라는 경계를 넘어와 인간계를 떠도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 영화가 말하는 신화는 다름 아닌 영화의 그것이 되면서 스페인 내전의 기억이 숲으로 향하며 벌어지는 판의 미로를 대동하게 된다. 이 숲, 영화라는 장소에는 혼돈이 자리하며 그곳에서 튀어나온 신화적 존재가 당신을 가르칠 것이지만 당신은 그에 완벽하게 끌려가면 안 된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하며 종국에는 그가 우리에게 가하는 복수를 역으로 고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의 결말로 넘어가 볼까. 보레는 자신이 그동안 세상을 떠돌았던 것처럼 경찰에 구속되지 않은 채로 물속에서 살아남는데, 이 영화에서 물이라는 게 시간의 시원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그가 살아남은 건 우연이 아니다. 그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보레가 티나와의 관계에서 낳은 아이가 핀란드에서 온 엽서가 동봉된 어느 요람을 통해 전해졌다는 점으로 확인된다. 우선 살아있지 않으면 아이를 낳지 못할뿐더러, 보레가 평소에 말했던 동족들이 사는 핀란드 땅에서 보내온 이 편지는 마치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갔노라고 말하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다르게 보면 티나에게 보레는 경계를 넘어선 어느 구역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처럼 보일 테고, 아마도 이는 티나가 보레와 근본적으로 결합할 수 없는 이유였을 테다. 예컨대 질서와 무질서는 한 자리에 공존할 수 없고 그렇지만 무질서는 늘 질서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를 두고 성악설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혼돈으로부터의 도주, 그렇지만 우리는 늘 혼돈을 그리워하는 배반의 심리를 지니고 있다고 말이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변예찬 님의 리뷰
2019.11.04 12:44:17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된다
<경계선>은 '평이 좋은 익숙하지 않은 영화'치고는 굉장히 친절한 영화다.
끊임 없이 복선을 던져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타 영화들과 달리 '설마 이렇겠어?'라고 생각 한 부분들이 실제로 눈앞에서 펼쳐졌을 때 관객은 충격에 빠지게 된다.
소설이 우리의 상상력를 자극한다면, 영화는 우리의 상상력을 눈 앞에 그대로 보여 준다. <경계선>은 이런 영화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잘 활용한 영화다. 영화가 아니라면 우리는 이러한 충격을 살면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
(스포일러)
.
.
일반적이다, 정상적이다 라는 말은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
일반적인 것이라는 경계는 모두에게 통용되는 것일까.
우리 모두 정상의 범위안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는 트롤이라는 신화를 빌려와서 경계선에 있는 소수자들을 낯설게 하여 표현하지만,
실제로 경계선에 걸쳐 있는 소수자들은 트롤처럼 우리에게 낯선자들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자들이다. 넓게 생각해보면 나 또한 사회에서 요구하는 경계에 걸쳐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소수자와 나는 크게 다른 사람이 아니다. 사회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
소수자에 대한 영화가 정말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경계선에 걸쳐 있는 소수자들의 삶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 또한 어떠한 자에게 소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수자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그들의 삶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정말 정말 정말 쉽지 않겠지만.
(소수자들 뿐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 조차 힘든 일이니ㅠ 그래도 그래도. 노력해보자)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9.11.03 23:25:18
독특한데 흡입력있는 영화
다른 사람들보다 못난 외모와 신체에 대한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티나 그런데 티나에겐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능력이 있었다
사람들이 가진 감정에 대한 냄새를 맡는 능력이 있어 수상한 사람 정말 잘 잡아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우연히 본인과 닮은 사람을 만나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티나에게 벌어지는 이야기가 매우 흡입력 있게 전개되었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최솔라 님의 리뷰
2019.11.03 13:18:22
인간다움의 경계선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비밀번호 재설정
새로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비밀번호 재설정
개인정보 취급방침 에 동의합니다.

문의 및 제안
소중한 의견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뷰 신고
편파적인 언행
인종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정치, 종교 등
욕설 및 음란성
타인에게 모욕감이나 수치심을 주는 언행
개인 안전 보호
개인의 사적인 정보, 특정 개인에 대한 강도 높은 비방, 혐오 발언
도배 및 광고
영화를 보지 않고 남긴 것이 분명한 리뷰
스포일러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