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
1
기생충 (PARASITE)
드라마 / 2019

개요
드라마, 한국, 131분, 15세 이상 관람가, 2019.05.30 개봉
감독
봉준호
배우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최우식
박소담
장혜진
이정은
박명훈
현승민
정현준
시놉시스
전원백수로 살 길 막막하지만 사이는 좋은 기택(송강호) 가족. 장남 기우(최우식)에게 명문대생 친구가 연결시켜 준 고액 과외 자리는 모처럼 싹튼 고정수입의 희망이다.

온 가족의 도움과 기대 속에 박사장(이선균) 집으로 향하는 기우. 글로벌 IT기업 CEO인 박사장의 저택에 도착하자 젊고 아름다운 사모님 연교(조여정)가 기우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두 가족의 만남 뒤로,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99.18%
4.46점
키노라이트 분포
1개
121개
별점 분포
리뷰
96

CineVet 님의 리뷰
2019.05.31 00:34:53
희비를 외줄타듯 넘나드는, 참으로 시의적절한 우화
<기생충> 스포 없는 간단 후기
-
봉, 미쳤습니까?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이라도 라는 듯한 걸작의 탄생.
-
<기생충>을 향한 내 기대가 낮았다고 하면, 부모님께 장학금 타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심한 거짓말이다. 기대치가 없거나 낮았던 영화들 말고, 기대치가 하늘을 뚫었던 영화임에도 기대치를 웃도는 영화가 있다. "혹시 <기생충>이 바로 그 영화냐"라는 질문을 당신이 한다면,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
봉준호 감독이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일타쌍피의 장인'이란 것이다. 대중적인 재미와 예술적 완성도 모두 A급으로 보장하는 장르 영화 감독이라니, 불가능해 보이지만 이를 가능케 하는 감독이 바로 봉준호다. 필자가 호평한 영화들 중 재밌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난감한 녀석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기생충>은 과감하게 '오지게 재밌다!!!'라고 말할 수 있다. 봉준호 감독님, 제가 좋아하는 영화 함부로 추천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보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봉테일'이란 별명은 괜히 붙은게 아니라는 것이다. 능숙하게 설계된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변태적 정교함에 짜릿해진다. 서사는 인과를 따라감에도 예상하기 힘든 신선함으로 넘쳐난다. 각종 설정 및 배경은 직관적으로 말하는 바가 확실하면서, 사물과 행적들 간의 대구 관계는 예술적이다. 기발한 유머부터 에너지와 스릴로 넘쳐흐르는 절정까지, 이성으로 즐기다가 감성의 영역으로 관객을 끌어오는 능숙한 솜씨는 <살인의 추억> 때부터 여전하다.
-
또 하나 얘기하고 싶은 것은 '굉장히 한국적이면서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보다보면 한국인만 웃고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들이 넘쳐난다. 입시 관련 유머, 인물들이 마시는 주류의 브랜드 변화, 실패한 특정 프랜차이즈 언급 등... 황금종려상 수상작을 우리 정서로 고스란히 즐길 수 있다니 이건 축복이다. 동시에 이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할 수 있던 까닭은 '보편성'에 있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들의 정서, 사회적 문제, 배경 설정 등은 결국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아쉽게도 아직까지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봉감독의 영화는 <살인의 추억>이다. 하지만 그 다음이었던 <마더>보다 <기생충>이 더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보면서도 몇 번을 감탄하고, 몇 번을 휘둘렸는지. 롤러코스터를 타듯 관객을 뒤흔드는 감독의 솜씨에 찬사를 보낸다. 절대 스포없이 보기를. 이 영화를 처음보는 모두가 온전히 이 영화를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9.05.31 02:44:25
한국영화라는 ‘장르’, 봉준호 영화의 ‘이상함’
개인적으로 봉준호의 영화를 보면서 매번 생각하는 게 있는데, 그건 바로 영화가 이상하다는 점이다. 영화가 ‘이상’해서 좋지 않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상하다는 ‘단어 자체’에 나는 의구심을 품는다. 분명 이런 시나리오와 쇼트는 이상해야 마땅한 구성인데, 그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게 너무 ‘이상하다.’ 그러니까 마치, 짜파구리(작중에도 등장했던) 같은 게 그의 영화다. ‘이게 뭐지?’ 싶다가도 막상 한입 물면 ‘아 맛있네’ 소리가 나오는 작품. 내가 듣기로 다른 사람들은 이를 두고 ‘장르의 마술사’라고 부른다고 한다는데, 그 표현이 딱 적절한 듯싶다.



하지만 나는 장르의 마술사라는 표현에 대해 이견이 있다.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그것을 바라보려 한다. 영화를 잘 만든다는 테크니션적인 측면이 그런 이상함을 자아낸다면, 반대로 그것들의 원재료가 이상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즉, 이상한 재료를 썼기에 이상한 음식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그런 이상함이 영화의 맛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핵심은, 그게 한국사회라는 텃밭에서 자라났다는 대목에 있다.


도대체 정(情)이란 게 뭐길래



봉준호의 영화가 한국사회에 대한 여러 은유를 품고 있다는 것은 여러 부분에 걸쳐 논해진 바가 있다. 그 은유의 정도 차이는 있지만, 최소한의 맥락을 다들 하나씩 포함하고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런데 그런 은유를 품은 영화들이 영화적으로 기묘하게 맞아 떨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딘가 모르게 그런 재료들 또한 ‘기묘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괴물>에서 미군 부대와 한강, 아버지와 딸이라는 재료들은 단순히 미군이 한강에 뿌린 독극물 사건뿐만 아니라 탱크에 깔려 죽은 두 소녀까지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다. 또한, 한국 사회 바깥으로 나아가면 베트남 전에서 고엽제를 맞아 고국으로 돌아와 고생을 겪는 참전용사의 모습이 바로 그곳에서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딸이라는 후자는, 영화 밖에서 현서(고아성) 구하기를 응원하는 우리의 모습이, 현서 또래의 소녀들이 죽은 사실에 분노했던 우리의 모습과 유사해보이는 것 같다는 나의 조심스러운 견해다. 해당 사건의 2002년과 영화가 개봉한 2006년은 각각 월드컵의 열기가 한창이었다는 점 또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일조한다. 다만 대표적인 차이점을 꼽자면 괴물/탱크라는 공식에서 현서는 깔리는 게 아니라 집어 삼켜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이런 맥락에서 현서가 괴물에게 깔릴 뻔했던 영화의 도입부 시퀀스에서 그녀는 이미 명계로 넘겨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대입해야만 우리는 아직 죽지 않은 소녀가 명계에서 현세로 탈출하려는 몸부림을 투영할 수 있다. 이때 한강은 스틱스 강에, 다리 아래의 괴물 소굴은 저승이라는 큰 범주를 은유하는 게 된다.)



우리는 그런 은유가 한 군데에 버무려지는 모습을 목격한다. 장면 하나를 인용해 표현하자면, 딸아이 현서의 장례식장 장면이 그런 게 잘 드러내 보인다. 이 장면에는 합동 장례식장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가족 앞으로는 사타구니를 긁는 아버지(송강호)가 있고, 뒤에서는 자동차를 빼달라고 소리치는 직원이 있다. 그런 앞과 뒤의 초점 사이로는 정부 관계자들이 이리저리 쏘다니며 말뿐인 위로를 건네고 있다. 이 시퀀스 하나에서 우리가 연상하는 텔레비전 속의 사건은 수 개에서 수십 개일 테다. 사실 그런 사건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든 간에, 매번 해결되지 않은 구도를 들고 오니 기시감이 들 수밖에 없고,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괴물>의 장례식 장면에서 폭소를 터뜨리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건 이상하니까. 이상한데, 정말로 많이 봤던 장면이라는 점이 ‘더’ 이상하니까. (심지어, 장례식장 안에서 그들이 보고 있는 것 또한 ‘텔레비전’이다. 거기에는 정부의 거짓발표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 말인즉슨, 봉준호 영화의 이상함은 단지 영화 내부에서만 귀인하는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 밖에서 끌려오는 텔레비전 안의 뉴스 사건들이나, 배우 자체의 이미지 또한 그런 이상함을 자아내는 것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나는, 그러한 이미지가 별개의 것이면서도 하나의 영화에서 유기적으로 어울린다는 점에 ‘이상하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옥자>에서처럼 CG로 구현한 옥자의 겉모습이 아니라, 옥자가 강원도 산골자락에서 풀을 뜯어먹는 게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점. 또는 <플란다스의 개>에서 케이크 아래에 촌지를 깔아 넣으면서, 케이크가 안 들어가니 그 위에 얹혀진 딸기를 집어먹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다는 점. 정확하게는, 그런 게 원래는 자연스러우면 안 되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이게 영화적 테크닉의 요인인지 아니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원래 그런 건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된다.



<박쥐>나 <마더>에서 신부/뱀파이어, 어머니/살인자가 한군데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우리는 위에서 나열한 단어를 어떤 것으로 치환할 수 있는지를 잘 안다. 영화 전체가 하나의 통합체라면, 그런 어머니라는 계열에 모성애를 넣고 그게 다시금 한국사회의 정(情)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때 그런 정(情)은, <박쥐>에서는 일본가옥에서 마작을 하는 기묘한 모습 사이에 달라붙고, <마더>에서는 국민 어머니(김혜자)와 국민 미남(원빈)이라는 배우의 이미지에 달라붙는다. 우리는 여기서 그런 기묘함 사이를 잇는 게 정(情)이라는 접착제라는 점에서, 한국사회를 이루는 집단의식이 정(情)이라는 점에서, 한국이라는 집단을 이루는 것들은 개별적으로는 기묘한데 그걸 억지로 이어놓는 게 정(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도대체 정(情)이란 게 뭐길래 이토록 비참하게 하는 걸까. <마더>에서 모정이 광기로 바뀔 때 그런 물음이 던져진다. 다르게 말하면, 같은 ‘광기의 어머니’라도 이것은 한국사회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모정이다. 따라서 이것은 정말로 ‘한국영화’다. 또는 <박쥐>에서 김옥빈과 송강호가 왜 그런 감정선을 갖는지를 떠올려 보아도 좋겠다. 몸에 담긴 정이라던가, 인간적으로 부대꼈던 정이라던가, 이 동네에 유일한 뱀파이어로서의 정이라던가.)


나와 너, 아마에(甘え)와 정(情)



<기생충이> 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직접적인 비교대상은 아니지만, 작년에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을 예시로 들며 그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느 가족>에는 ‘일본적’이라는 것과 ‘일본성’이라는 게 분리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그런 분리가 수상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도이 다케오가 말하는 일본성 중에, 일본인의 아마에(甘え)라는 개념은 한국인의 정(情)처럼 일본인이 아니라면 알기 힘든 문화다. 도이 다케오에 따르면, 아들이 어머니 앞에서 한없이 어려지고 싶은 것은 일본의 아마에(甘え)에 해당한다. 이때 주체가 되는 쪽은 아들인데, 이것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번역하면 이런 말이 되기도 한다. ‘주체는 늘 타자로부터 무언가를 갈망한다’. 그런데 아들은 심리적으로 어머니의 일부이므로, 이 맥락에서 주체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타자에만 의존하게 된다. 쉽게 말해, ‘나’는 ‘나와 너’ 사이 어딘가를 둥둥 떠다닌다는 게 아마에의 개념이다. 바로 이렇게 우리는 일본인들이 일본 사회를 자신처럼 여기는 모습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된다. 즉, 일본 사회에서는 ‘나’를 이해하려면 ‘내가 속한 집단’을 이해하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어머니가 아들에게 하염없이 주고 싶은 감정은 한국의 정(情)에 해당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넘어가도 될 듯싶다. 한국사회에서 ‘나’는 곧 ‘너’고 ‘너’는 곧 ‘나’다. 말 그대로, “우리가 남이가? - 그럼 우리가 남이지 그럼 뭡니까.” 요컨대, 한국영화에서의 불안감은 그 두 가지 대상 간에 계급과 같은 차이가 있을 때, 동등하지 못한 결합에서 벌어지는 잡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나는 그런 불안감이 봉준호 영화의 주된 주제라고 말하고 싶다. 그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서술하도록 한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이유를 두고 어떤 설명을 덧붙일 수 있을까. 이런 감정에는 딱히 이유가 필요하지가 않다. 아니, 애초에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건 원초적이니까. 따라서, 그런 원초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비유될 수 있는) 문화가 그들만의 고유한 것이라는 점이 세계 무대에서 일종의 아이덴티티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생각해볼 수가 있을 테다.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을 따라할 수는 있어도, 왜 어리광을 부리는지 이해하지는 못할 테니까. ‘일본적’이라는 건 ‘일본풍’ 건물이나 정원처럼 손쉽게 따라할 수 있지만, ‘일본성’이라는 문화까지 완벽하게 따라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보면, 어느 날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행동거지까지 부자처럼 바뀌는 건 아니다. 부자들의 아이덴티티는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자랐기에 당연한 것들 천지인데, 그런 건 따라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기생충>에서도 그런 부분이 냄새를 통해 은유된다. 아무리 인텔리 연기를 해도, 반지하에서 살아왔다는 그들의 본질 자체가 변하지는 않는다. 그 죽을 듯한 무말랭이 냄새는 실제로 방안에서 무말랭이를 건조하기에 나는 게 아니라, 형체 없고 소리 없는 인식표인 셈이다.)



여기서 내 견해는, 그런 요인이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게 영화의 아이덴티티를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다. 외국인으로서는 (따로 배우지 않았다면) 전혀 알 수 없는 게 그런 요인인데, 그런 걸 모르고 보아도 자국의 문제를 비추어볼 수가 있다. 하나의 영화가 단지 영화 속 나라의 문제로만 읽히지 않고, 어느 ‘관객’에게나 ‘개인적인’ 면모로 호소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모든 관객에게 사적으로 읽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모든 이들에게 ‘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런 면모가 다수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가 있겠다. 이것이 <어느 가족>이 칸에서 성공한 요인이다.



(하지만 일본성이라는 게, 외국인들이 일본 소식을 접한다고 해서 익혀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해, 민족성(民族性)과 같은 문화의 근본적인 뿌리를 이해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라깡의 말처럼 ‘타자의 불이해성’에 근거한다. [주체는 타자를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나라는 이름의 타자조차도.] 같은 맥락으로, 아마에에서의 어머니와 아들 또한 ‘그럼에도’ 타자이기에 닿을 수가 없다. 그러니 영원한 어리광일 수밖에.)



마찬가지로 <기생충>에서는 ‘한국적’이라는 것과 ‘한국성’이라는 것이 분리되어있다. 여기서 ‘한국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접할 수 있는 뉴스에 근거한 여러 담론을 뜻한다. 따라서 평소에 뉴스만 자주 보았다면, 외국인이라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표면적인 지점이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자꾸만 드러나는 물의 이미지와, 한국에만 존재하는 반지하라는 기괴한 주거형태가 결합될 때, 그것은 밀폐된 공간에 쏟아져오는 물의 이미지, 즉 ‘세월호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물론 그것은 단지 하강하는 물과 밀폐된 공간이라는 이미지로만 조합해낸 것이기에 바르게 대응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이 한국사회의 ‘동시대’를 지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아닌 듯 말 듯 세월호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은, 세월호를 말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세월호를 떠올리는 우리를 비추어 보기 위해 성립한다. 요컨대, 한국인의 정(情)이라는 걸 떠올려 보면 좋겠다. 나는 너, 너는 나. 다시 한번 반복, 이 시대는 너의 시대, 바로 우리의 시대.



(나는 이것이 <어느 가족>에서 기키 키린 여사가 놀러간 바닷가에서 ‘동일본 대지진’을 떠올리는 맥락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지점들에 대해서, 우리가 덧붙이는 어떠한 상상도 허용될 수가 있을 테다. 현실에서는 나누지 못할 이야기를 끌어내는 게 영화의 역할이기도 하고, 상상이 아니라면 이 사회에 속하지 않은 이들[외국인이라던가, 이 이야기를 생각해보지 않던 우리라던가]이 이 영화에 자신을 대입하는 것은 불가할 테니 말이다. 일본인에게는 ‘우리의 시대’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외국인에게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의 ‘우리’를 떠올리게 하는.)


선을 넘을 듯 말 듯, 너 와 나 사이에 그인 금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해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서의 아마에라는 게 ‘나 아닌 듯한 나’, ‘내가 아니고 싶은 나’, 즉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먼저 가정해두자. 반대로, 봉준호 영화에는 정(情)이라는 게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보는 나의 시점에서는 ‘너는 나, 너는 나’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영화에서 봉준호가 ‘너와 나’를 응용하는 방식을 엿볼 수가 있다.



먼저 ‘너와 나’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 엄마와 아들이 다른 인격체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기생충>과 다른 봉준호의 영화들을 데려와보고 싶다. 맥락이야 어떻든 간에, 나는 이 영화에서 운전기사 역할을 하는 송강호의 모습이 <택시기사>를 떠올리게 한다고 생각한다. <택시기사>가 보여주는 것들 중에 역사(담론)을 제외하고, 그 영화에서 송강호가 왜 광주로 향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과정, 광주 사람에 대한 정(情)이 바로 이 자리에 소환되는 것은 아닐지. 그렇다면 송강호가 <기생충>에서 ‘선을 넘을 듯 말 듯’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인디언들의 파티)에 선을 넘어버리는 것(칼을 들고서)은, 광주로 향하는 게 금기시되었던 <택시기사> 속의 풍경들을 떠오르게 한다. 다른 방향이지만, 분명 그 영화에서도 송강호는 선을 넘었었으니 말이다.


또는 최우식이 등장하는 <마녀>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따져보아도 좋겠다. 먼저 나는 <마녀>라는 영화가 사회적 문제를 말하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다만, 개인적으로 주장을 해보자면 나는 그것이 ‘한국형 영웅서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줄로만 알았던 주워 온 아이가 알고 보니 이상한 프로젝트의 실험체였다는 충격적인 진실 앞에서는, “저한테 왜 그러세요?”라는 대사가 선행으로 던져진다. 말하자면 평범하던 소녀가 갑자기 특별한 소녀로 바뀌고, 그런 소녀에게는 온갖 폭력과 방해가 쏟아진다. 일상을 파괴하려는 시도가 자행된다. 그리고 이 영화가 등장한 시기에 한국 사회의 여러 목소리가 우후죽순으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우리 사회에 갑작스럽게 침투해온 목소리에 ‘특별함’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것을 ‘이물질’로 취급했던 우리를 돌아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는 아니지만, 근래에 <걸캅스>나 <캡틴 마블> 같은 영화에 ‘특수함’이라는 낙인과 ‘이물질’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려는 모습은 다소 부끄럽다. <마녀>의 주인공이 특별한 ‘소녀’이듯이, 그 영화들 또한 페미니즘 ‘영화’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영화를 영화로 평가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에 속하지 않은 이들[외국인이라던가, 이 이야기를 생각해보지 않던 우리라던가]이 영화에 자신을 대입하는 것은 불가할 테니 말이다”. 동의여부는 부차적인 문제다.)


<기생충>에서 박소담의 모습이 <마녀>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건, 여러 방면에 다재다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평범한 이가 갑자기 특별한 존재로 올라서는 서사는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특별한 재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 이걸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일상 중에 특별한 날은 있다. 또 이런 표현은 어떨까. 같은 사회를 살아가고 우리는 모두 같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우리가 있다고. 말하자면, 이것은 신분상승의 욕구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신분상승의 욕구가 봉준호가 말하는 계단의 이미지에 맞아 떨어진다는 점은 소름이 끼칠만한 지점이다. (그가 존경해 마지 않는) 김기영으로부터 귀인한 이 계단에서 신분상승의 욕구를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오히려 박소담을 통해 일상과 비일상, 단체 속의 특별한 개인, 너와 나라는 정(情)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어느 한 쪽이 특별해지고자 노력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부정교합을 찾아내는 것은 ‘그보다 더’ 쉬운 일이다.


영화에서 혈연지연을 통해 그들이 취직하게 된다는 점 또한, 한국 사회에서 정(情)이라는 게 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분명 ‘우리’는 아닌데, ‘너’와 ‘나’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주체로 기능하는 아주 기괴한 형태. 이것을 두고 기생충이라고 부르지 못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 한국사회의 배면에 기생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 모두가 한국이라는 우리의 일부이고 주체이다. 여기에 나는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봉준호의 일부가 아니라 봉준호의 영화 전체이자 주체라고 생각한다. 그 유명한 삑사리는 두 말할 것도 없고, 봉준호를 찬찬히 보아왔던 사람이라면 그의 영화에서 드러나던 여러 이미지를 다시금 목격하게 될 테니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gjwW20UmOLs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9.05.30 18:34:18
이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포인트는 관객의 위치다. 늘 계획하는 법을 교육받아온 우리는, 반지하와 마당있는 집 그 사이 어딘가에 아직도 살고있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동구리 님의 리뷰
2019.06.01 00:26:54
수직의 선으로 그어진 계급
*스포일러 포함



봉준호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그는 언제나 장르영화감독이었다. 다만 여러 장르들을 독특하고 과격하게 비틀었을 뿐이다. 범인이 잡히지 않는 범죄 스릴러(<살인의 추억>), 과학자나 군인이 주인공이 아닌 괴수물(<괴물>), 범인이나 경찰이 아닌 엄마가 주인공인 범죄 스릴러(<마더>) 등이 그의 전성기를 장식하던 작품들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설명적이었던 <설국열차>, 주제에 함몰되어 장르영화적 동력까지 상실해버린 <옥자>는 만족감보단 아쉬움이 더 짙게 남았던 작품들이다. 그러던 중, 마침 황금종려상 수상 소식까지 가져온, 봉준호가 10년 만에 온전한 ‘한국영화’로 돌아온 <기생충>이 개봉했다. 봉준호는 언제나 국지적인 지역이나 사건을 다루면서 보편성을 획득하는 작가였다. 영화의 무대를 넓힌 <설국열차>와 <옥자>가 그의 전작들처럼 성공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위의 세 작품뿐만 아니라, <지리멸렬>과 <인플루엔자> 등의 단편과 장편 데뷔작인 <플란다스의 개>에도 해당된다. 그는 언제나 한정된 시공간을 배경으로 장르를 전복시키는 화법을 구사해왔다.


<기생충>은 코미디, 스릴러, 호러의 경계를 넘나 든다. 서울 어딘가에 위치한 반지하방과, 역시 서울 어딘가에 위치한 유명 건축가가 지은 호화로운 주택, 이 두 공간을 잇는 긴 수직의 선이 영화를 지탱하고, 이 선을 따라 장르들이 변화한다. 봉준호는 <하녀>, <충녀> 등 김기영의 영화에 등장했던, 그리고 <도쿄 소나타>나 <팬텀 스레드> 등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와 폴 토마스 앤더슨 등 또한 가져왔던 계단 이미지를 사용한다. 기택(송강호)의 가족이 사는 반지하방으로 내려가는 계단, 그 집에서 인근 카페의 와이파이를 잡기 위해 올라가야 하는 변기가 있는 역설적인 계단, 박사장(이선균)의 집을 들어가기 위해 올라가야만 하는 현관의 계단, 그곳의 지하실로 다시 내려가기 위한 계단. 수많은 계단들이 영화에 등장한다. 양극화, 이분화된 공간들은 계단을 통해 연결된다. 때문에 봉준호가 바라보는 계급은 멀리 떨어진 두 개의 점이 아닌, 기다란 수직의 선으로 연결된 스펙트럼이 된다. 고액과외, 운전기사, 가사도우미라는 이동수단을 타고 기나긴 수직선을 오가는 기택, 충숙(장혜진), 기우(최우식), 기정(박소담)은 도달할 수는 있으나 머무를 수 없는 위 쪽의 점을 탐한다.


그리고 이들이 위를 탐하는 순간, 역시 아래에서 수직선을 따라 올라온 존재들을 마주한다. 박사장의 집에서 원래 가사도우미로 일하던 문광(이정은)과 빚쟁이들에 쫓겨 그 집 지하벙커에 숨어 살던 그의 남편(김명훈)이 그들이다. 기택처럼 유행 따라 ‘대만 카스텔라’ 집을 열었다 망해 빚쟁이가 된 이들의 처지는 기택 가족이 처한 상황과 유사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싸운다. 수직선 맨 아래 같은 점에서 출발한 이들은 협력 대신 기생 가능한 자리를 놓고 싸운다. 싸움의 결과는 익숙하다. <설국열차>에서처럼 시스템을 박살 내는 판타지는 없다. 기생의 자리는 기생하려는 자로 계속 대체된다. 자꾸만 선을 넘는 아래쪽의 냄새는 싸움에 휘말리는 대상을 확장하지 못한다. 미완의 시도, 수직선을 유지하는 법, 제도, 언론. 수직으로 서 있는 ‘설국열차’에는 부수고 나갈 문이 없다. 문광의 남편의 지하벙커 자리에 기택이 들어서게 되는 엔딩은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기생의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계단을 올라가도 결국 계단을 내려갈 수밖에 없는 처지를 드러낸다. 때문에 <기생충>의 공간들을 ‘설국열차’를 수직으로 세운 것만 같다. 꼬리칸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를 기우가 대신하여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 칠 뿐이다.


하지만 <기생충>의 가족은 추락한다. 영화의 중반부, 이들은 비를 맞으며 박사장의 집을 빠져나온다. 폭우가 내리는 날, 카메라는 하수구를 향하는 물줄기를 보여준 뒤, 높은 지대에 있는 박사장의 집에서 기택 가족이 사는 반지하집까지의 먼 길을 오랫동안 보여준다. 물이 위로 솟구치는 법은 없다. 기택 가족은 물과 함께 자신들이 반지하집으로 하강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하강의 이미지 끝에는 물벼락을 맞은 동네 주민들이 집과 가게에서 허둥지둥 물을 퍼내고 있는 광경이다. 기택 가족 또한 허겁지겁 집으로 들어가 건질 수 있는 물건들을 건져낸다. 이 곳에서 위로 상승하고 있는 것은 변기에서 역류해 뿜어져 나오는 오물뿐이다. 모든 것이 쓸려 내려간 곳에서 나는 냄새, 박사장은 그 냄새가 계속해서 “선을 넘는다”라고 말한다. 기택, 기우, 기정, 충숙은 박사장이 말하는 선을 넘지 않는다. 아니, 박사장과 연교(조여정) 부부가 보지 못하는 부분에서만 선을 넘는다. 그 ‘선’이라는 것은 굉장히 유동적이다. 선이 그어지는 지점은 오로지 박사장과 연교 가족의 자의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들의 ‘선’은 그들의 ‘기분’이다.


다만 <기생충>이 이 지점을 비판하고 있는가, 혹은 기택 가족의 ‘직업 강탈’이 계급투쟁으로 이어지는가라는 지점에서는 의문점이 생긴다. <기생충>은 끊임없이 장르를 바꿔간다. 반지하집을 배경으로 한 코미디에서 시작해, 기우이 친구(박서준)에게 받은 요청을 바탕으로 세운 계획을 통해 기정, 기택, 충숙이 차례로 박사장의 대저택으로 입장하는 하이스트 영화로 변화하고, 문광이 다시 저택에 돌아와 남편의 존재를 알리는 순간엔 호러, 박사장 일가가 폭우로 귀가한 이후엔 히치콕스러운 서스펜스, 영화의 하이라이트에 다다라서는 슬래셔가 된다. 계속되는 장르의 변화 속에서 계급의 문제는 장르적 소재로 전락한다. <살인의 추억>에서 한국의 전근대적인 면모를 드러내거나, <괴물>에서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스릴러, 괴수물, 이들을 관통하는 봉준호 스타일의 코미디 안에 녹여낸 것에 비해, <기생충>은 이들의 표면을 영화에 가져오기만 한다. 오랜만에 ‘한국영화’로 돌아온 봉준호는 이제 연대에 대한 최소한의 희망마저 놓은 것일까? 하이스트 영화를 방불케 하는 기우와 기정의 계획과 대책 없는 기택의 무계획이 대립하는 것은, 바위를 칠 계란이라도 준비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맨주먹으로 바위를 쳐 자신부터 깨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봉준호는 기택을 지하실에 봉하고 기우에겐 냉소만을 남겨줬다. 봉준호가 한국이라는 시공간을 담던 송강호의 몸은 이제 최우식의 세대로 옮겨갈 준비를 하는 중이다. 그 사이에 연대는 없다. “아버지 건강하세요”는 “밥은 먹고 다니냐?”가 될 수 없고, 반지하집은 한강변의 매점이 될 수 없다. 그저 아버지에서 아들로(만) 이어지는, 무계획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계획으로 이어지는, 386세대에서 먹고사니즘의 세대로 이어지는 유산 밖에 없다. 그 유산은 계급의 문제를 절묘하게 회피하며 무기력을 동력으로 삼는 숭배와 혐오의 시대를 만들어냈다. <기생충>은 이 무기력을 장르영화의 활력으로 포장하고만 있을 뿐이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Greentea 님의 리뷰
2019.05.31 09:44:23
톱니바퀴가 세심한 부분이 맞물려 돌아가듯, 감정의 맞물림의 절정의 영화
작은 부분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어우러지는 톱니바퀴같은 영화이다.
다양한 감정들이 서로 맞물려 폭발하는, 시각적 그리고 심리적 충격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영화이다.
.
기생충은 '희비극'으로 홍보가 되는 것처럼, 기쁨과 슬픔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한다.

극 중 송강호의 대사인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영화의 계획을 예측할 수 없는 즉, 장르의 파괴성을 보여준다.
코미디에서 스릴러, 서스펜스로 변화하면서 이런 갑작스러운 장르의 간격의 충격이 슬프게 느껴질 정도로 다양한 심리적인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
기생충은 각박하고 서글픈 사회 속 '공존'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메인 포스터는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잖아요' 라는 말과 함께 주인공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돈이 없으면 서로가 서로를 당당한 사회적인 위치에서 인지할 수 없는, 누군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기생해야 하는 사회 속에서

눈으로 자신의 위치를 가릴수는 있어도 코,입,귀로는 자신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 마치 동물들의 잔인한 약육강식의 세계가 떠오르는 무섭고 잔인한 사회를 나타내었다고 생각한다.
.
기생충이라는 제목은 영화의 인물의 단면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이 사회에 느끼는 감정들 또한 나태난다.

우리가 인식하는 '충' 즉, 벌레는 어떨때는 무섭고 두렵고, 어떨때는 연민을 가지며 슬픔의 감정을 느끼고, 어떤 경우는 그 작은 생명체가 우습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사회도 우리의 위치에 따라 인식이 달라진다. 우리가 힘든 일을 겪을 때는 정말 이 사회가 무시무시해 보이고, 반면 일이 잘 풀리거나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이 사회가 마냥 완벽해 보인다.

또한 '기생충'이라는 제목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인식하는 이 영화의 장르성도 나타낼 수 있겠다.
.
오랜만에 보는 정교하고 완벽한 한국영화이다.
이제 봉준호 그 자체의 장르라는 말이 와닿을 정도이다.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를 한국에서 자막없이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행복하고 또 감사하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사과 님의 리뷰
2019.05.31 00:18:06
기생충
01.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봤다.

영화속 ‘기생충’이라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속에 살고있는 사람의 신분을 지칭하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영화 <기생충>은 고위층에 사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 살아가는 하층민의 이야기이며, 이것을 일종의 계급사회로 만들어 풀어낸다.



02.

영화는 ‘계단’이라는 소재로 그 계급의 신분을 드러낸다. 과거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또한 ‘계단’이라는 소재에 상징성을 담아 계급상승에 대한 욕망를 드러냈다. 김기영 감독님은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인간(하녀)의 욕구가 집주인의 잘못된 선택과 만나 파멸하는 이야기를 다뤘다며, 영화 <기생충>에서의 ‘계단’이라는 소재가 갖는 의미는 명징하다. 영화속 계단은 자본가와 하층민을 구별짓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이 김기영 감독과 봉준호 감독의 차이점이다.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기생충>의 세계는 신분상승 등을 통한 희망은 철저히 배제한다. 반지하 집에 사는 기택(송강호)의 식구는 절대 박사장(이선균)이 될수 없음을 알고있다. 이들은 박사장(이선균)의 집에서 (오직) 식욕(만)을 해결하려고 한다.

이것은 극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잘 살아보자!”라는 인간이 가질수 있는 희망을 극은 100% 제외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관객은 영화속 허구로만 볼수 있느냐의 연결성을 갖는 질문이 따라 올수밖에 없는 대목이기도하다. 이것은 어찌보면 미래의 세대에게 전달하는 우화가 될수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기생충은 기생충 답게 살지 않으면 가족은 붕괴되고 흩어지게 된다는 교훈을 주는, 마치 [탈무드]와 같은.



03.

영화 <기생충>는 계급에 대한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 하나의 이야기 결이 더있다. 그것은 가족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가족희비극이라 불리는 영화 <기생충>은 부자(父子)의 이야기일 것이다. 박사장, 그의 아들과 기택 그리고 그의 아들 기우(최우식)의 이야기 말이다.

<기생충>의 두 가장은 비슷하게 닮았다.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고, (no 계획일지라도) 계획이 있어야하며, 가정의 구성원을 지키기 위해(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 이미 전임 가사도우미(이정은)의 남편은 박사장에게 감사, 존경을 표하기 위해 계단의 불을 밝힌다. 그리고 이것은 모스 부호처럼 신호를 보내는 수단이 되는데 이것을 읽는 이들은 오직 남자 뿐이다. 더러 집의 안주인(조여정)만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바라보는데 그친다. 시작은 아들 기우(최우식)이 했고, 모든 가족이 동조했으나 그 댓가는 딸 기정(박소담)이 죽음이다. 심지어 아들 기우는 (괴롭겠으나) 웃음을 얻어고, 시간이 지나 아버지를 발견하게 된다.

영화속 부자(父子)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살짝 앞으로 돌아가보자,

전임 가사 도우미의 남편의 사건이 일어 날때, 기택은 왜 박사장을 죽인것일까?

사장 내외는 기택의 냄새를 싫어한다. 물론 앞에서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기택은 기생충처럼 여기저기 숨어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전임 운전기사를 해고 하고 위해 딸이 벗어놓은 속옷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섹스를 하는 사장 내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간과 아버지로써의 인격은 무너졌을 것이다. 기택의 가족은 집주인의 집에서 돈을 받은 것으로 고기와 부페를 가고, 그의 집에서 술과 음식을 먹는다. 유일하게 그집에서 해결하는 것이 식욕이다. 인간의 최소한의 생존욕구말이다. 여기에 불에 기름을 붓듯, 이재민이 된 날 기택의가족을 총 출동시켜, 비가온 것이 더 다행이라며 아들의 생일파티준비를 시킨다. 이 지점 등은 분명 기택의 생존영역이외의 아버지 혹은 인간이라는 영역에 대한 본능을 일깨웠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계급에 대한 불만과 욕심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인간적인 본능에 대한 것이 일어날 뿐이다. 아버지가 살인을 저지른 후에, 가족은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어 돈을 벌어야하는 (이룰수 없는)목표를 갖게 된다. 그래서 딸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04.

영화 <기생충>을 보며 계속 눈에 밟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돌과 물’이다. 이 두 소재는 왜 영화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우선 ‘물’이 등장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기택(송강호)의 집은 반지하다. 취객이 볼일을 보거나 구토를 하는 것을 볼 수 밖에 없는 위치다. 그리고 그들은 동일한 사람에게 그런 봉변을 지속적으로 당한다. 그리고 기택의 가족이 돈을 벌기 시작하자, 몹쓸짓을 보기만 하던 그들에게 용기가 생겨 그 취객에게 물을 뿌린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아들이 들고 나간 것은 ‘돌’이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그는 물을 들고 나갔지만, 물을 맞는 것은 아들 기우(최우식)이다. 이것은 아들 기우의 미래에 대한 복선일 것이다.

또 한가지 더 있다. 박사장(이선균) 가족이 캠핑을 가는 날, 기택의 가족은 그집에서 비가오는것을 바라보며 그 집의 음식등의 재산을 축내어 훔칠때 비(물) 는/은 공평하게도 주인집을 공격한다. 집주인은 캠핑장에서 돌아오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 물 또한 송강호의 가족에게 되돌아가는 꼴이 된다. 무사히 그 집안을 빠져나오고 난 후, 하염없이 계단으로 내려(추락)하는 중에 아들 기우가 우두켜니 서서 바라본 것은 젖어버린 신발과 자신을 밀어버릴듯 세차게 밀려내려오는 빗물이다. 그리고 그 물은 모이고 모여 기택의 보금자리로 돌아가 가족을 이재민으로 만든다.

필자는 ‘물과 돌’은 빈부의 차이를 말해주는 소품일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속에서 ‘돌’이 처음으로 등장하는경우는 기우의 친구가 부탁을 위해 선물로 집에 들고왔을때 부터였다. 부자에 대학교를 다니는 친구의 할아버지는 서재, 거실, 침실에 돌을 모아놓고 그것을 바라보며 기뻐한다. 그러나 하층민은 사람을 해치는 용도로 그 돌로 사용할 뿐이다. 물또한 마찬가지다. 부자에게 물(비)는 집으로 돌아와 쉬게 만드는 거슬리는 자연일뿐이다. 그러나 하층민에게 물은 부자의 집에서 쫓아내고, 타인을 쫓아내지고 못하고, 자신들을 이재민으로 만든 거대한 자연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한번 더 이야기하는 것같다. 돈이라는 권력이 주는 계급사회에서의 하층민은 ‘자연’조차도 제대로 누릴 권리는 없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들 기우가 이런 돌을 개울가에 놓아주는 장면은 특이하다. 그리고 그가 신자유주의시기에 대학과 꿈을 버리고 돈만을 벌어서 아버지가 갇힌 그 집을 사겠다는 희망이 놓인 장면은 그런 면에서 괴상하기까지하다.

어찌보면 아름다운 마무리 일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아버지는 타인의 집에 갇혀 오가지 못하는 신세이고, 여동생은 살해 당했고, 자신은 장애를 얻었고, 어머니 혼자 집을 이끌어가고있지 않는가. 심지어 아들인 자신은 아직 그 방에서 살아가고있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영화는 끝까지 꿈을 이뤄주지 않고 그들을 현실에 가둔채, 끝을 맺는다.

아들이 돈을 벌어 그 집을 사면 아버지는 계단을 걸어 올라오기만 하면된다. 이 계단을 오른다는 것은 신분상승과 물리적인 거리이동. 양자택일의 성질은 아니다. 영화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것을 보여주며 끝이 맺기 때문이다.





05.

영화는 세련됐고,날렵하게 비판하고 음침하다. 엔딩장면에서 희망을 줬으나 그것은 또다른 괴로움의 원인이 될수 있기때문이다. 필자는 봉준호 감독이 갖는 상상력이 점점 차갑고 괴로워진다는 생각을 한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우아한 님의 리뷰
2019.05.30 02:18:49
봉준호의 진화는 반갑지만 정점은 아니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무겐 님의 리뷰
2019.06.03 17:27:03
결코 숙주가 될 수 없는 기생충의 희망고문.
계급과 시스템 자체의 악마성을 노골적으로 파고든다.
문득 나에게 나는 냄새가 궁금해지는 처참함은 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타잔 님의 리뷰
2019.06.02 02:26:38
이렇게 재밌고 흥미로운데 예술적이기까지 한 봉준호 월드
가끔 좋은 영화 혹은 예술 영화들을 볼때면 생각한다. 정말 영화 예술이라는 장르에서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겠고, 지루하고 졸린데도 남들이 좋다고 하니 억지로 봐야 하는 영화들도 있다. 그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고 두시간을 버티고 얻어낸 것은 '봤따!'라는 팩트로도 만족스러울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기생충>은 그러한 지루한 영화가 아니다. 2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이 순삭되어 버리고 스크린에서는 눈을 뗄수가 없고,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상황들이 이어지면서 지금껏 봐왔던 어떤 영화들 보다 흥미롭다.


<기생충>은 정말 많다. 쓰고 싶은이야기도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해야 할 이야기도. 그러나 일절하고, 나는 <기생충>을 그렇게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 영화로 봤지만 이 글에서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봉준호가 그렇게 원하기 때문이다.


지하방을 사는 가난한 가족이 어느날 여차저차하게 되서 모든 가족들이 상상할 수 없는 부잣집에 취업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인해 그 '집'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의 에피소드들은 기존에 우리사회에서 쉽게 보여지고 읽혀지는 모든 편견들과 정형화된 이미지들은 이 영화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이제는 거의 모든 영화에서 반복되는 돈많은 사람은 나쁜 놈이고 가난한 사람은 좋은 놈이라는 정형화된 낡고 지겨운 이분법적인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면서 느껴지는 낯선 이질감이다. 그렇다고 그 이질감이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이질감이 아니라,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영화적인 체험이다. 그래서 영화속의 이 평범하고 특별할 것이 없는 캐릭터들이 새로운 존재감으로 부각되면서 영화는 아주 혁신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렇다 이것은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상황들과 캐릭터들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어렵지 않게 봐왔음에도 스크린앞에만 앉으면 언제나 그 현실과는 다르게 이분법적인 편견에 휩싸였던 스스로를 탓해야 한다. 그래서 <기생충>은 지극히 평범한 캐릭터들 일 뿐인지도 모른다. 단지, 그 평범한 캐릭터가 그동안 영화속에서는 보지 못한 캐릭터들 이였기에 기존에 익숙해진 것과는 다른 것에 쉽게 반응하는 우리들의 착각일지도.


영화속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뻔뻔하게 사기를 치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부자의 집에서 착취를 한다. 그럼 영화적으로는 그 가난한 사람들을 더 나쁜 놈으로 부각 해서 관객들에게 더한 자극으로 몰아가야 하지만, 봉준호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 인간은 쉽게 쉽게 적응하면서 변하는 모습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기생충>은 어느순간 부터 예측하기가 힘들어진다.


초반에 이어지는 가볍고 심드렁한 유모들이 등장하면서 즐거운 소동극의 패를 던지지만, 봉준호의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앞으로 다가올 시간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의 순간들 처럼 그렇게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이미 이야기는 어디로 어떻게 진행될지 알수 없는 상황이고, 영화속의 배우들의 말과 행동에는 이미 충분한 서사와 상황들이 하나의 허튼 장면들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이야기를 변주한다. 어느 순간 소동극의 패는 던져지고 갑자기새로운 패를 보이면서 돌변한다. 그것은 어쩌면 커다란 모험이지만, 언제나 장르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의 상상하에 진행되어야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의 허수를 봉준호 감독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관객들이 열광했던 반전이 있던 스릴러들이 장르적인 공식에 충실했지만, 이제는 그 어떠한 반전들도 희미해져 버린 한수가 되 버린 상황에서 그것보다 더한 반전은 결국 그러한 전형적인 장르영화의 파괴이고, 그 파괴야 말로 관객들이 가장 좋아하고 열광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장담하고 있었다.



즐거운 소동극의 위치를 밀실 스릴러로 옮겨탄다. 영화속에서 장르는 중요하다. 그만큼의 팬덤이 있기도 하지만, 여러가지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자칫 원하는 핵심을 벗어나 두가지의 이야기가 따로 놀아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경우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촘촘한 구성과 이야기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 하고, 그 이야기들을 충분히 엮을 수 있는 연출력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것들 두루 갖춘 영화나 감독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기생충>은, 아니 봉준호는 그러한 예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많은 사람들의 기준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는 극히 드믄 봉준호니까.



그래서 봉준호는 자신만만하다. 지금껏 보아왔던 봉준호의 영화도 충분히 자신만만 했지만, <기생충>을 보고 있으면 그의 자신감이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자신감은 혹자들은 자만감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아마도 이 영화를 보면 그것이 자만심과는 전혀 다른 자신감이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거의 한정된 '집'의 공간에서 벌어진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어떠한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소동극의 느낌보다는 후반부로 이어지는 장르변주로 인한 충격이 훨씬 더 강해서 그러한 소동극으로 느껴질 새가 없다. 한마디로 영화는 정신 없이 쉴틈없이 몰아쳐서 다른 것을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런 장르가 없었지만, 관객들은 그 몰아침에 기분좋게 동화되고 어느순간 외신 인디와이어의 평가처럼 '봉준호 감독 자체가 장르다 '라는 말에 순순히 동감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봉준호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살인의 추억>을 능가한다고 얘기하기는 힘들것 같다. <살인의 추억>의 각본과 송강호는 최고다. <기생충>은 그에 버금가는 각본이지만 송강호의 모습은 <살인의 추억>에 미치지는 못한다. 대신 최우식을 비롯해, 조여정과 이정은이 역대급의 모습으로 보조 하면서 전작에 못지 않은 탄탄한 연기들로 조율한다. 그래서 '능가한다' 보다는 '못지 않다'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그럼에도 <기생충>은 정말 많은 이야기꺼리가 있는 영화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곡성><우상>과 같은 무형의 추측들로 각자의 기준에 맞춰지는 어떤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봉준호가 왜 스포일러를 자제하는 손글씨를 썼는지도 어느정도 이해된다.



<기생충>은 충분히 '다른' 영화다. 그렇지만 그 '다른'은 영화적인 공간에 한정되어 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는 얼마든지 대할 수 있지만, 그 공간을 옮기는 과정의 영화라는 공간에서 한정되고 보편화 되었던 장르적인 방식에 얶매였던 관객들의 시각을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안내할 수 있는 영화다. 그것만으로 <기생충>의 영화적 성취는 충분히 놀랍다.


<기생충>에 대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더 많은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다. 영화속의 수직의 계급이 어떻고 사회적인 시각이 어떻고, 은유의 표현들의 세련됨과 그것에 맞물리는 감독의 생각을 논하더라도 이 글의 몇배를 주절 거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이야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저 12살의 나이에 영화감독이 되려고 마음 먹었던 어리숙한 영화광 소년이 마음껏 자신의 이야기를 소신있게 했다는 것이 다. 그래서 이미 많은 매체를 통해서 이야기 되는 <기생충>에 대한 어떠한 추측들과 이야기들은 어쩌면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때로는 과대포장되기도, 혹은 과소포장 되기도 할 것이다. 하긴 그런 것이 또 다른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러한 모든 것은 결국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좋은 영화의 탄생에 더 즐겁고 행복해서 하는 하나의 감사의 표시이지 않을까?



나역시 감사하고 있고 누가봐도 이렇게 즐겁고 재밌고 매력적인 <기생충>에 예술적인 감각까지 무장한 봉준호영화야 말로 정말 반칙이 아닐 수 없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9.05.30 10:03:27
'기생충' 간단 리뷰
※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스포주의!!


1. 겜블을 하면서 패를 다 까발릴 때는 주로 제정신이 아니거나 뭘 해도 자신이 있는 경우다. 이런 거창한 예를 들지 않더라도 화투를 치다가 바닥패에서 싼 것이 나왔을 때 그걸 가지고 있으면 이마에 붙이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그런 면에서 대단히 호기롭다. 부자가족과 가난한 가족이 등장하고 가족희비극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자신의 패를 거의 까발렸다. 이미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전부터 '기생충'에 대해 요르고스 란티모스나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떠올렸다(그런 분위기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 대목에서 이미 자신의 패가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영화는 자신의 패를 거의 까발린 듯 하면서도 '스포일러 조심'이라고 당부한다. 뭔가 더 보여줄 것이 남았을까. 영화가 나를 도발한다. 나는 그 도발에 순순히 응했다. 결과는 나의 완벽한 패배였다.

2. 우선 '기생충'의 시놉시스를 살펴보자. "전원백수로 살 길 막막하지만 사이는 좋은 기택(송강호) 가족. 장남 기우(최우식)에게 명문대생 친구가 연결시켜 준 고액 과외 자리는 모처럼 싹튼 고정수입의 희망이다. 온 가족의 도움과 기대 속에 박사장(이선균) 집으로 향하는 기우. 글로벌 IT기업 CEO인 박사장(이선균)의 저택에 도착하자 젊고 아름다운 사모님 연교(조여정)가 기우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두 가족의 만남 뒤로,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영화는 시놉시스에 대단히 충실하다. 이야기는 부잣집에 고액과외를 가게 된 기우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소동극'이다. 이 가족이 소동을 벌이는 동안 관객들은 "들키지 않을까"라며 조마조마하게 영화를 봐야한다. 그러나 이때의 '조마조마함'은 분위기가 전환되는 후반부에 비하면 애교수준이다.

3. 공개된 시놉시스는 이 영화의 딱 절반만 이야기하고 있다. 박사장의 저택에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면서 이야기의 분위기는 서스펜스 스릴러로 급반전된다. 이때도 '봉준호스러운' 엇박자의 유머를 잃진 않지만 마치 지상 500m 외줄 위에서 제기를 차면서 폴라포를 먹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영화는 진행된다. 이것은 에너지를 축적하는 과정이다. 언젠가 크게 터트릴 것임을 선언한 셈이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 관객들은 어렴풋이 짐작할 뿐, 어떤 형태로 분출할 지 알 순 없다. 그래서 이 영화의 긴장감은 더욱 커진다. 사실 이런 것들은 장르영화의 대단히 전형적인 공식이다. ①분위기를 뒤집고 ②갈등과 감정을 쌓다가 ③한 번에 확 터트리는 것. 이야기의 구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패턴은 뻔하다. 그러나 잊지 말자. 상대는 봉준호다.

4. 영화는 클라이막스를 위해 내내 떡밥(복선)을 뿌린다. 보통의 복선이라면 그것이 복선임을 금방 알 수 없지만 '기생충'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야 그게 복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기우가 기정(박소담)에게 "너는 이 집에서 살게 되면 어느 방을 쓰고 싶냐"고 묻자 기정은 "일단 살아보고 얘기하고 싶다"며 웃는다. 흔히 공포영화에서 '죽는 사람'을 말하는 이 공식은 아주 간단하지만 묘하게 비틀어졌다. 그 순간은 '공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박사장의 집에서 쫓겨난 문광(이정은)이 캐리어를 끌고 급하게 가다가 뒤를 돌아보는 장면 역시 나중에 일어날 반전의 빌미를 제공한다. 말 그대로 마블이 10년동안 뿌릴 떡밥을 100분만에 다 뿌리고 나머지 시간에 회수하는 방식이다. 이 2시간짜리 영화 안에서 그토록 치밀하고 꼼꼼하게 움직인다. 괜히 '봉테일'이 아니다.

5. '기생충'에서 특이할 점은 다소 과장된 대사들이다. 예고편에서도 드러났지만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아버지, 저는 이게 사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등이다. 주로 기택이나 기우의 대사가 이런 식인데 이는 등장인물 중 현실감각이 없는 인물들이 말하는 방식이다. 다른 예로 박사장네 아들 다솜 역시 인디언 놀이에 젖어 "오버~"같은 말들을 한다. 그리고 현실감각이 없는 인물들은 선의 양쪽을 모두 본다. 기택은 가족들 중 분노를 토해낸 인물이고 기우는 경계 너머에 처음 발을 들인 인물이다. 그리고 다솜은 박사장네 가족 중 유일하게 비밀을 목격한 인물이다. 자본으로 나눠진 계급의 양극단을 오고 간 인물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말투에서 드러난 셈이다. 그게 그렇게 비현실적인지 모르겠지만(그렇다면 너무 가혹하긴 한데) 영화는 "응, 그건 비현실적인 일이야"라고 말한다(문광의 말투도 꽤 과장됐다).

6. '기생충'은 키워드로 '해석'하듯 풀어보고 싶은 지점이 많다. 예를 들어 '냄새'나 '물', '인디언', '산수경석' 등이다. 최근 '어스'나 '우상' 등의 영화들에 대해 했던 것처럼 키워드를 두고 풀어보고 싶지만 영화는 아주 노골적으로 그것을 방해한다. 이는 기우의 대사 한 마디 "저는 이것이 상징적이라고 생각해요"(잘 기억나지 않지만 '상징적'이라는 단어는 들어갔다)를 통해 완성된다. 이미 영화에서 상징적이라고 못 박은 이상 그것을 상징적으로 정하고 해석하는 것은 영화에게 패배하는 기분이다. 때문에 내가 이 영화에 대해 키워드를 정하고 이해하려는 것은 '패배선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중 일부는 감독의 말을 인용해 직관적으로 이해할 것이고 다른 일부는 늘 하던대로 '상징적인 해석'을 시도할 것이다. 난 이미 영화에게 졌기 때문이다.

7. '냄새'는 감독의 말대로 '무례함'을 말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너 냄새나"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물은 '빗물'을 통해 표현된다. 박사장네 저택에서 물은 낭만을 즐기는 도구가 되지만 같은 시간 기택의 집에서 물은 생존을 위협하는 재난이 된다. '인디언'은 연교가 지향하는 '미국제'의 상징이자 착취 당해 죽어버린 민족이다. 영화 내내 연교는 어설픈 영어를 쓰고 미국제를 선호한다. 그녀는 '천박한 재벌'의 전형을 보여준다. 당연히 아메리칸 인디언이 당한 착취의 역사도 알지 못한채 문화콘텐츠로 인식할 것이다. 인디언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다. 인디언 덕후가 된 다솜이가 마주한 실체는 착취의 역사와도 다르지 않다. 나는 처음에 민혁(박서준)이 기우에게 선물한 산수경석이 '가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중간에 돌이 물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중국에서 시멘트를 가지고 만든 가짜 돌쯤으로 여겼다. 감독은 돌의 진위여부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으나 나는 여전히 그 돌은 가짜일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진짜건 가짜건 중요하지 않다. 희망의 실체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8. 나는 늘 '한국영화가 재벌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단순했기 때문이다. 마치 "보고 화내라"며 전시한 듯한 인상이었다. 그 맥락에서 벗어난 재벌이 '여교사'의 혜영(유인영)이었다.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자라서 모두가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믿지만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등장하면 가차없이 밟아버리는 식이다. '기생충'의 박사장과 연교는 '여교사' 이후 가장 완벽한 재벌묘사다. 박사장은 IT기업의 사장이다. 구체적으로 뭘 하는 회사인지 알 순 없지만 대충 저 정도 재력을 이룬 사람이라면 90년대 후반 벤처열풍에 뛰어들어 살아남은 '벤처 1세대'라고 봐도 될 것이다. 이들은 일반적인 재벌과 다르다. 대부분 자수성가형 재벌이라면 군사정권의 험한 시기를 가로질러 살아남아 '깡만 남은' 사람들이다.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하지만 회사를 지키는데는 성공했다. 반면 벤처세대들은 무한경쟁사회에서 밤잠을 설쳐가며 회사를 살린 사람들이다. 일중독이고 독하지만 비윤리와 부도덕은 조금 덜하다. 게다가 자수성가형 재벌인 만큼 안하무인한 성격도 갖지 않았다(이건 주로 곱게 자란 2, 3세대들에 해당된다). 박사장은 그 경계를 잘 타고 있다. 안하무인하진 않지만 자기가 이룬 것을 누리고 사는 일중독자다. 이렇게 디테일한 재벌묘사는 처음 봤다.

9. 연교에 대해 정확한 설명은 없지만 그녀는 재벌의 딸로 추정된다. 굴지의 대기업이라기 보다는 돈만 많은 졸부 정도다. 경영수업을 받을 일이 없기 때문에 부모와 주변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느긋하게 자랐다. 그러다 사교모임이나 적당한 파티에서 박사장과 만나 연애하다 결혼했을 것이다. 연교는 기택 집안 사람들의 말대로 '착하다'. 거의 호구에 가까울 정도로 눈치가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릴때부터 "우리 집이 세상에서 제일 안전해"라며 자랐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상상도 못할 것이며, 그것이 눈 앞에서 벌어졌을때 충격은 엄청날 것이다(연교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다).

10. '기생충'에서 꽤 소름돋고 슬픈 부분은 기택과 '문광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은 비현실적 사고를 하고 무능력하며 처참한 현실 앞에 놓인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의외로 그들의 과거는 흔한 이야기다. 자영업을 하다가 망해서 대리운전과 발렛파킹을 하다가 백수가 됐고, 혹은 자영업을 하다가 망해서 빚쟁이에 쫓기는 사람. 그 흔한 사람들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놓인 것은 "너희들은 이렇게 될 일 없을 것 같지?"라며 영화가 보내는 경고처럼 들린다. 기택과 '문광의 남편'이 처한 비현실적 상황은 '언덕 아래에 사는 서민'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그게 이 영화의 최대 공포가 아닌가 싶다.

11. 봉준호 감독은 제작보고회와 칸 영화제, 여러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 대해 "배우들이 다 한 영화"라고 겸손한 표현을 했다. 정말 배우들이 다 한 영화(혹은 '배우가 훔친 영화')라고 말할 순 없지만 이 배우들은 봉준호 감독이 깔아놓은 판 위에서 정말 신나게 뛰어논다. 제작보고회와 기자간담회, V라이브에서 배우들의 분위기가 유난히 화기애애해 보였던 것도 그 때문일거라 생각된다. 팀 분위기가 이토록 좋았기 때문에 훌륭한 앙상블이 나올 수 있었다. 봉 감독의 말이 맞다. 이 영화는 배우들이 다 했다. 그런데 배우들이 다 할 수 있게 멍석 깔아준 것은 봉 감독이 한 일이다.

12. 결론: '기생충'은 블랙코미디와 스릴러가 어우러진 크로스오버 장르영화다. 유쾌하게 웃다가 심장 졸이다가 놀라 나자빠지는 영화다. 그렇게 신나게 즐기고 극장을 나설 채비를 할 즈음 영화는 관객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 그런데 소름돋는 사실은, 사실 영화는 내내 관객의 가슴에 칼을 꽂고 있었다. 관객은 부잣집 동경하다가 자기 집 물에 잠기는 줄 모르는 기택의 가족처럼, 가슴에 칼 꽂히는 줄 모른채 낄낄대며 웃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에게 참 아픈 영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파서 몸부림 칠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부자는 금방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비밀번호 재설정
새로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비밀번호 재설정
개인정보 취급방침 에 동의합니다.

문의 및 제안
소중한 의견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뷰 신고
편파적인 언행
인종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정치, 종교 등
욕설 및 음란성
타인에게 모욕감이나 수치심을 주는 언행
개인 안전 보호
개인의 사적인 정보, 특정 개인에 대한 강도 높은 비방, 혐오 발언
도배 및 광고
영화를 보지 않고 남긴 것이 분명한 리뷰
스포일러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