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Non-Fiction)
코미디 / 2018

개요
코미디, 프랑스, 108분, 15세 이상 관람가, 2019.05.16 개봉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
배우
줄리엣 비노쉬
기욤 까네
빈센트 맥케인
크리스타 테렛
노라 함자위
파스칼 그레고리
로랑 포이트레노스
시그리드 부아지즈
니콜라스 부샤드
시놉시스
성공한 파리의 출판업자 알란과 그의 오랜 작가 레오나르도는 현대의 디지털방식을 받아 들이기 힘들어하는 아날로그적 사람들이다.
그들은 레오나르도의 새로운 작품으로 유명하지 않은 인사의 연애사건을 다시 소설로 쓰고 출간하려 한다.

알란의 아내 셀레나는 그 작품이 레오나르도의 걸작이라고 확신하지만,
알란은 그의 작품을 출간하기에는 지금 시대와 맞지 않는 이야기라 생각하는데..
96.3%
3.63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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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16

moviemon 님의 리뷰
2018.11.18 03:34:44
영화를 토론의 장으로 삼다 <논픽션>: 프랑스 영화의 교육적인 특징을 실천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최근 5년간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본다면 각본가로 참여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실화> (2017)를 포함해 각본과 연출을 모두 맡은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2014)와 <퍼스널 쇼퍼> (2016)에 주목할 수 있는데, 세 작품 모두 스릴러와 미스터리 장르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의 신작 <논픽션> (2018)은 이전 작품과 결이 다르다고 평가할 수 있다. <논픽션>은 제75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았으며, 코미디 장르에 해당하므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상대적으로 생소하다고 볼 수 있는 영화다. 영화는 현실과 분리된 가정법적 시공간 매체, 즉 픽션 중 하나에 속한다. 그런데,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픽션의 매체를 활용해 21세기의 현재와 미래와 밀접한 현실적인 문제 및 질문을 스크린 안에서 밖으로 던진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인물들의 대화들을 통해 관객들과 함께 디치털화, 오늘날의 출판산업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문제, 관계의 문제, 정보 자정 능력의 결여 문제 등 수많은 주제를 공유한다. 이는 영화의 여러 역할 중 하나인 '토론의 장'의 기능을 해냄으로써 결국 프랑스 영화의 교육적인 특징을 실천했다는 영화적 성취를 이룬다.

1. 영원한 진리와 같은 답은 없다, 그래도 계속 토론을 해야만 한다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이번에 <논픽션>과 같은 현학적인 영화를 만든 이유 중 하나는 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현대사회는 중요한 이슈로 4차 산업혁명에 주목하게 되었다. 사회 전반에 걸친 많은 분야들이 디지털화를 논하고 있거나 일부 분야는 벌써 디지털화를 진행 중이다. 디지털화로 인해 과거와 달리 사람들의 의식주 습관이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 근데 만약 이런 사회현상을 들여보는 일을 꺼려하고 구시대적인 트렌드만 고수한다면, 현대사회의 문제를 외면하기 쉽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그런 우려를 이미 자각하고 있었고, 공론장과 같은 영화로 자신의 고민을 표상했다. 특히, 극 중에서 대화 혹은 토론이 진행되는 공간을 집안, 카페, 바, 토론회, 블로그, 라디오 스튜디오, 서평회 등 다양하게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번 <논픽션>을 만든 목적을 강조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모든 대화의 끝무렵에 확인할 수 있는 분위기와 각 인물의 태도다. 매체가 발달되면서 언제나 누군가와 토론을 할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할 수 있지만, 토론을 할 때 감정을 온전히 분리하지 못한 나머지 대개 감정이 상한 채로 토론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논픽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토론을 할 때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자신들의 신념을 쉽게 접지도 않고, 자신의 신념과 다른 말을 해도 이를 인정하는 태도롤 취한다. 그래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만들어낸 토론의 장은 끊임없는 대화와 옅은 미소로 가득하다. 더 나아가, 카메라 시선을 대화 내내 어깨너머로 보여주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타성에 젖지 않기 위해선 토론을 하되 영원한 진리와 같은 답은 없으니 계속 자기 의견을 드러낼뿐더러 타인의 의견에도 경청해야 하는 태도를 강조한다.

2. <논픽션>이 제기하는 현대사회의 현상과 문제 Part1: 디지털화를 향한 맹목적인 신뢰와 문화산업의 위기

<논픽션>은 일상적인 부분에서 현학적인 부분까지 아우르는 현대사회의 현상과 문제를 지적한다. 우선 이 영화가 주요하게 관심을 갖는 현대사회의 현상은 '디지털화'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독자들의 독서습관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 심지어 누군가의 블로그 글이나 SNS 게시물을 보며 자신의 주관보다 타인이 제시한 기준을 자신의 기준인 것인 마냥 따르면서 온라인으로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것을 선호하는 흐름이 자리를 잡고 있다. 게다가, 알랭(기욤 까네)이 직면한 출판업계의 현실도 디지털화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긍정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디지털화 과정을 통해 편집과 유통의 과정을 간소화할 수 있으며 덕분에 판매 가격을 낮춤으로써 책을 향유할 수 있는 진입장벽이 낮아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지털화는 도리어 지식의 양극을 심화시킬 수 있다. 누구나 전자기기를 하나쯤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뿐더러 레오나르(빈센트 맥케인)의 아내처럼 여러 대의 스마트 기기를 소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디지털화된 자료를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디지털화는 모두가 지식을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을 부여하기보다 전자 기기를 소유한 이들에게만 이득이 되는 일종의 특권을 줄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닌다. 이뿐만 아니라 디지털화를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부분은 도서관의 전망을 어둡다고 당연하게 말하는 극 중 인물들의 태도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도서관을 단순히 책을 저장하는 아카이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뉴욕 라이브러리에서>처럼 도서관 역시 디지털화를 일부 수용하는 동시에 미래에서도 기능하기 위해 지역사회나 정부와의 협업을 통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는 복합 기관으로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무분별한 디지털화 추구는 '탈진실'이라는 문제로 확장된다. 탈진실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게 진실이고, 그런 믿음이 만들어낸 허구 세계에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디지털화 덕분에 굳이 멀리 이동하지 않고도 많은 정보를 검색할 수 있지만 탈진실에 묶여있다면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 문화가 쇠퇴하는 것은 당연하고, 정보의 범람에서 거짓 정보를 걸러내는 자정 능력을 기를 수가 없게 된다. 이처럼 디지털화와 얽힌 복잡한 문제들을 여러 주제로 토론하는 와중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다룬다.

디지털화를 향한 맹목적인 믿음에 대한 근심과 더불어 이 영화는 현재와 앞으로의 문화산업을 걱정하는 시선도 포함하고 있다. 극 중 셀레나(줄리엣 비노쉬)는 본인이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의 다음 시리즈에 출연하는 것을 굉장히 망설여한다. 이는 최근 드라마의 형태는 다양해지고 있지만, 소재나 서사는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에 독창성이 부족해지고 있는 현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드라마의 수가 점점 늘어날 뿐만 아니라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좋게 말해서 트렌드지만, 실은 콘텐츠 산업의 정체기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신선한 창작물이 등장하지 않는 상황은 제작자의 근심을 증가시킬뿐더러 배우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배우라는 직업은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 돈과 명예를 잡을 수 있지만, 대중으로부터 안 좋은 평가가 이어지는 순간 두 가지를 쉽게 잃을 수 있는 불안정한 직업이다. 또한 배우에게는 익숙한 배역을 계속 연기하는 순간 그 배역에 갇히게 되고 결국 앞으로 연기자로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위기가 항상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셀레나의 고민은 개인 혹은 특정 직업의 고민에 국한된 게 아닌 문화산업과 맞물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극 중 토론의 시작점이기도 한 출판산업에서도 문화산업의 위기가 드러난다. 기술 발달 덕분에 점점 많은 현대인이 블로그와 트위터를 포함한 각종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한다. 이 자체만으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트위터에 남긴 글이나 이메일을 모아 영화 <그녀>에서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가 대필 작가로 활동하면서 쓴 편지를 모아 책으로 출판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처럼 책으로 발간하자는 의견을 내놓는다면 바로 문제가 된다. 시류에 따른 적절한 아이디어일 수도 있지만, 사고를 이끌어내지 않고 단순히 읽고 소모해버리는 책만 양산하는 부정적인 현상을 야기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우려를 알랭의 입을 빌려 표명한다.

3. <논픽션>이 제기하는 현대사회의 현상과 문제 Part2: 삶에 관한 담론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꺼낸 삶에 관한 담론은 '관계'와 '모순적인 태도'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관계'에 대해 말을 꺼내자면, 영화는 현대인이 맺는 관계는 점차 비건설적이고 인스턴트 음식을 먹듯이 금방 오래가지 않아 끝내버리는 일종의 소진적 행위임을 꼬집는다. 반복적인 일상에 지루함을 느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데, 극 중에서는 불륜이라는 일탈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같이 있을 때는 쉽게 불타오르지만, 욕구가 어느 정도 해소되자 쉽게 꺼진다. 심지어 관계가 손쉽게 끝나는 것에 대해 화를 내기는커녕 묵묵히 받아들어거나, 이미 눈치를 챘기에 힘들지 않게 이를 수용한다. 이런 삶의 한 단면이 얼마나 우스운지를 셀레나, 알랭, 레오나르, 그리고 레오나르의 부인(노라 함자오위)의 만남이 발생하는 후반부 시퀀스로 그려낸다. 관계에 대한 지적은 '이미지 소비'에 관한 테마로 발전된다. 레오나르가 독자뿐만 아니라 지인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이유는 이 테마와 관련 있다. 그의 말처럼 한 사람의 성격과 존재는 스스로에 의해 정립되기도 하지만, 타인과의 만남 및 관계에서 비롯된 경험을 통해 정립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허락 없이 자신이 만난 사람이나 겪은 경험을 이미지로 무조건 사용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허구의 캐릭터로 재구성을 한다고 해도, 관계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재구성된 캐릭터에 해당하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이 매체에 의해 소비되고 있음을 눈치챈다. 따라서, 자신의 사생활이 자신도 모르는 사람에게 노출되었다는 사실에 두말할 것이 없이 불편해할 수밖에 없다. 이 테마에 덧붙여 말하자면, 이미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이미지는 타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람의 눈을 속여 인위적으로 형상화할 수도 있기도 한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레오나르의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어느 순간 관계에 대해 환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삶에 대한 또 다른 담론은 '모순적인 태도'라고 언급했는데, <논픽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군상의 모습이다.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는 간단한 이유는 현대인이 편안함과 혼돈을 아울러 추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우리는 E-Book이나 오디오북처럼 종이책보다 저렴하고 더 간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선호하는 소비자의 수요가 이전에 비해 늘어났음을 알고 있다. 게다가, 알랭처럼 식사하기 위해 직접 만들어 먹지 않거나 이동하지 않는 대신, 돈을 지불하면 서비스 형태로 쉽고 빠르게 음식을 소비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대인은 혼돈의 필요성을 논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혼돈의 상황 덕분에 무언가를 사유하고, 상대방과 토론하고, 이런 과정을 통해 혼돈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이전 문단에서 언급한 후반부 시퀀스를 통해 이와 같은 담론을 냉소로 승화한다. 각 인물은 이전 장면에서 보여준 대화와 달리, 후반부 시퀀스에서는 말과 다른 행동을 보이거나 혹은 상이한 말을 내뱉는다. 본인이 과거에 했던 말을 뒤집는 행위는 반성으로 해석하거나 자가당착이라고 양극단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논픽션>에서는 후자에 해당한다. 만약 인물들이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인정한다면 반성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후반부 시퀀스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인물들의 모습에는 인정은커녕 침묵과 은폐의 흔적만 남아있다.

결론적으로 <논픽션>은 오로지 토론을 위한 영화다. 그래서 수많은 대화가 쏟아지기 때문에 다소 지루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공론장을 계속 이동하고, 다양한 주제를 던짐으로써 쉴 틈 없이 또 다른 영화적 재미를 선사한다. 그리고 대화 속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각본을 즐기는 재미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8.11.28 22:11:01
이 글은 스포일러가 있다. 하지만 알아도 그다지 관람에 방해되지는 않을 듯 하다.



논픽션(Non-Fiction)이라는 조어를 제목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프랑스 출판업계의 이야기를 다룬다. <퍼스널 쇼퍼>의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만들었고 프랑스 특유의 느낌이 난다. 이때 프랑스 특유의 느낌이란 프랑스 영화의 그것이 아니라 프랑스라는 국가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뜻한다. 평소 프랑스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더라도 우리는 불어가 구불구불하고 흐느적거린다는 느낌을 주는 것을 잘 안다. 몽글몽글하니 귀여운데 막상 발음을 해보면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인상이 프랑스 영화에도 있고, 이 영화도 그러하다.



출판업계를 담은 이 영화를 소개하기 전에 불어에 대한 인상을 먼저 서술한 것은 이 영화가 대화를 중점에 두기 때문이다. 출판이 아니라 업계에 방점이 찍혀있는 이 영화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최근 출판계의 어떤 경향을 두고 벌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말하자면 출판이라는 서술적인 행위보다는 업계라는 사람들의 관계, 혹은 그 구술에 관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출판이라는 서술적 행위와 업계라는 구술적 관계라는 두 가지 층위로 분리되어 있으며, 그 층위가 서로 어긋나는 모습을 위트와 재치로 표현한다. 즉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코미디 영화다.



프랑스 특유의 구불구불하고 흐느적거리는 불어는 자칫하면 민감할 수도 있는 내용을 몽글몽글하고 귀엽게 담아낸다. 두 남자 레오나르(빈센트 맥케인)와 알랭(기욤 까네)은 서로 친하지만 출판업계에서 대립된 입장을 표한다. 레오나르는 작가인데 늘 자신의 사생활을 이름과 지명만 바꾼 채로 출판해서 논란이 있는 작가였고, 출판사 편집자이자 그의 친구인 알랭은 그런 그의 작품관에 반대를 표한다. 레오나르는 자신의 작품을 거절한 알랭을 욕하지는 않지만 서운해한다. 알랭은 레오나르의 작품이 뛰어나다는 걸 알지만 윤리적이지 않은 그를 서운해한다.



두 남자는 각자의 가정에 돌아가 작품을 거절당한/거절한 이야기를 자신의 아내에게 털어놓는데, 알랭의 아내 셀레나(줄리엣 비노쉬)는 좋은 작품인데 왜 거절하느냐고 넌지시 묻는다. 어찌 됐든 레오나르는 이참에 출판사를 옮겨 자신의 책을 출간하게 되고, 그의 문제작은 다시금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가 중반을 넘어갈 때쯤 우리의 머리는 복잡해진다. ‘사실을 서술할 권리’를 논하는 것처럼 보이던 이 영화에 불륜 관계가 침입하기 때문이다. ‘알랭의 아내’ 셀레나는 ‘알랭의 친구’ 레오나르와 바람을 피우는 관계였고, 레오나르의 소설 속에서 작가와 불륜을 저지르던 ‘그녀’는 바로 ‘셀레나’였던 것이다.



영화는 이 불륜관계를 설명하면서 ‘논픽션’이라는 테마를 우리의 역사의식과 결부시킨다. 이 글은 특별한 시각 없이 영화의 그런 의도를 따르려 한다.



서술적 행위와 구술적 관계



출판이라는 서술적 행위와 업계라는 구술적 관계. 이때 서술이란 손으로 하는 행위다. 펜은 손으로 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구술이란 입으로 하는 행위다. 발화는 성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의 차이점. 펜은 물질에 기록을 남기며 구술은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그래서 보통은 남기고 싶은 것은 서술하고 숨기고 싶은 것은 구술한다. ‘뒷담화’라는 단어는 그런 맥락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는 그 두가지 모두 네트워크 위에서 보존된다. 남기고 싶은 것도 숨기고 싶은 것도 모조리 기록된다. 마찬가지로 기록될 필요가 없는 것도 기록된다. 네트워크 위로 우리의 모든 생활이 옮겨가고, 정보의 양은 비약적으로 증대된다. 즉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을 살아간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도 알아야 하고,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다.



레오나르의 소설 속 등장인물은 스타워즈가 상영 중인 극장에서 오랄섹스를 즐긴다. 그러나 미하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이 상영 중인 극장에서 오랄섹스를 즐기는 커플의 모습은 ‘실화’다. 즉 레오나르는 상영 중인 영화의 이름과 자신과 불륜 상대의 이름만을 바꾸어 그대로 서술했다. 그리고 <하얀 리본>은 나치즘에 관한 영화다. 작중에서도 레오나르의 출간 간담회에 온 독자가 레오나르에게 “왜 나치즘을 비판하는 영화 앞에서 오랄섹스와 같은 저급한 행위를 했느냐.”고 비판한다.



그에 대해서 (레오나르가 아니라) 영화는 이렇게 답한다. 민주주의가 낳은 괴물의 꼬리를 차근히 탐독해가는 영화가 상영 중인 극장에서 ‘오랄섹스’를 한다는 것은 나치독일의 군중들이 ‘입’ 대신 ‘손’을 치켜들었던 것을 반대로 적용한 결과다. 오랄섹스는 손이 아닌 입으로 성기를 자극해주는 행위인데, 나치즘 산하의 국민들은 말(입)을 아끼면서도 손은 치켜든다. 그러니 어쩌면 오랄섹스는 나치즘을 비판하는 행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손을 이용한 서술과 입을 이용한 구술이 있다. 이 두 가지 기록을 오랄섹스에 적용해본다면 서술보다 구술이 주는 쾌감이 더 크다. 다시 말해서, 만약 손이 육체의 연장선이라면 육체는 행동하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입 대신 손을 치켜드는’ 것은 ‘말(구술)하지 않으면서 행동(서술)하기만 하는’ 것이 된다. 즉 나치즘이란 침묵하는 이들이 행동한 결과이며, 영화가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은 ‘비록 행동할 수는 없더라도 목소리를 잃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포에 저항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랄섹스와 같은 ‘구강의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라고 영화는 말한다.



말하자면 소설가인 레오나르는 서술자로서 구강의 쾌락을 잃은 사람이다. 소설가는 말보다 펜으로 말한다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는 구태여 <하얀 리본>이 상영 중인 영화관에서 보란듯이 ‘오랄 섹스’를 해야만 했던 것이고, 이러한 행위의 결과로 <하얀 리본> 속의 나치즘에 동조하는 이들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는다. 요컨대 팩션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나치즘에 동조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즉 입은 침묵하면서도 손은 하늘을 향하거나 누군가를 고발한다는 게 나치즘 산하의 병폐라면, 레오나르의 오랄 섹스는 그 병폐에 대한 은유로 기능할 수 있다. 레오나르는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으려 소설을 썼고, 그걸 대변하는 게 바로 오랄 섹스인 셈이다. 상처를 주는 것을 회개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오랄 섹스는 쾌락뿐만이 아니라 속죄와 치유의 테마도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들 수 있다. 오랄 섹스를 한 후에 소설을 쓴 것이지 소설을 쓰면서 오랄 섹스를 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에 관해서 영화는 모호하게 언급하므로 해석의 여지는 충분하다. 영화에서 레오나르의 도서 출간 이후에 셀레나가 찾아와 헤어지자고 말을 꺼낸 것을 보면, 아마도 레오나르는 팩션을 집필하면서 연애를 한듯하다. 그러니 레오나르의 오랄 섹스는 자신이 집필 중인 이 불륜 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되갚기 위한 ‘구술’이라 보는 게 합리적이다.



잊힐 권리의 자기 복제



나치즘이라는 하나의 역사는 잊고 싶지만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시대의 매체는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네트워크의 방대함을 기반으로 한다. 이른바 ‘잊힐 권리 Right to be forgotten’라고 불리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는 한번 퍼지기 시작하면 다시는 사라지지 않는 경험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대부분은 우리가 스스로 올린 셀프 카메라(Selfie)이겠지만, 몰래 카메라처럼 일방적인 관음의 결실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스스로’ 복제하거나 ‘일방적으로’ 복제 당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들의 역사 서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과거에는 나치즘이나 광주의 운동이 생존자와 목격자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전래되었다면, 오늘날에는 구태여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없이도 네트워크의 존재 자체가 그것을 ‘잊을 수 없게’ 한다. 과거의 사실 전파는 비디오테이프에 담은 영상 자료의 일부였으나, 오늘날의 사실 전파는 네트워크 속을 떠도는 생명체에 가깝다. 그것은 본래 사실보다 악화되거나 증대되기도 하면서, 혹은 ‘가짜’가 되어 사람들을 현혹하기도 한다.



다시금 레오나르의 소설로 시점을 되돌려보자. 레오나르는 자신의 추억을 잊을 수 없기에 팩션을 만든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추억이 잊히지 않았으면 해서 팩션을 만든 것일까? 아마도 보수적인 레오나르의 성향을 볼 때는 전자일 것이다. 그는 E-book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고 인터넷상에 떠도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인터넷 블로그에서는 그의 팩션이 사생활 침해라면서 큰 논란이 일고 있는데, 그는 그것을 출간 간담회의 청중을 통해서 뒤늦게 알게 된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불륜을 마음 깊이 간직하려고, 일종의 일기장과 같은 느낌으로 팩션을 만든 것일 테다. 그러나 영화는 E-book과 POD (맞춤형 소량 출판)를 언급하면서 레오나르의 사생활이 ‘온라인’에서 끝없이 퍼져나갈 수 있음을 경고한다. 기술 복제 시대의 사생활은 단순히 복제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생명력을 품고 네트워크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말이다.



즉 나치즘과도 같은 레오나르의 죄업은 인터넷상에서 끊임없이 기억되고 회자될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다시 말해서 죄는 더는 ‘말해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생명력을 지니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재생산’할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종류의 재생산일지는 알 수가 없다. 갓 태어난 아이가 선이 될지 악이 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어떤 방향으로 향하는지에 관해선 사회가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다.



레오나르와 셀레나를 둘러싸고 영화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화는 바로 그것에 관한 논의다. 디지털 시대의 잊힐 권리는 어떻게 자기 스스로 재생산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디지털 시대의 잊힐 권리



레오나르와 로르, 알랭과 셀레나는 부부인데, 레오나르는 셀레나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것을 소설로 쓴다. 그리고 알랭은 자신의 친구(레오나르)가 자신의 아내(셀레나)와 바람을 피운 후 쓴 ‘팩션’을 알아보지 못한다. 또한 레오나르는 불륜 사실을 자신의 아내(로르)에게 들키는데, 아내는 불륜 상대가 셀레나라는 것을 알고는 그냥 눈감아 준다. 셀레나는 이번에 출간된 레오나르의 소설이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이별을 통보하면서 이제는 남남이니 더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지 말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레오나르는 여전히 자신과 그녀의 이야기를 팩션으로 쓰며, 그 사실은 오직 자신의 아내(로르)만이 알고 있다.



이렇게 복잡한 관계 위에서 오고 가는 프랑스 출판 업계의 어떤 경향은 관계의 틈새 안에 정착하지 못하고 스크린 위를 떠도는데, 그러한 부단함은 오직 스크린 밖의 관객만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영화를 보는 우리의 시선은 일종의 역사를 보는 시선과도 같다. 역사란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되, 이후를 살아가는 이에게는 너무나도 쉽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는 우리도 그들의 복잡한 관계를 얼추 맞추어 보면서 각자의 죄를 저울에 매달아 보지만, 영화 속의 그들은 영화 속을 살아가기에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또는 어떤 죄를 지녔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관계가 결코 피상적이지 않음에도 피상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이 영화는 그래서 흥미롭다. 영화라는 매체가 영사기에서 흘러나온 빛이 스크린 위에 맺히는 것이기에 피상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역사는 실재하며 단지 우리는 그것을 누군가에게 ‘들은 것’처럼 여기는 것일 테다. (물론 이러한 피상은 본질이 없다는 플라톤주의는 아니다.) 이것이 역사의 피상성이고, 영화를 본 후 관객이 하는 것이 수다라면, 그것은 일종의 담론 재생산이며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서술적 영화와 구술적 관객인 셈이다. 이때 영화의 기본적인 성질을 떠올려 보자. 영화의 내러티브는 기본적으로 허구를 전제하면서도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관객을 현혹한다. 즉 영화란 허구이면서도 사실인 ‘기록’이다. 또한 서술적 영화가 역사라는 점에서, 역사는 그 자체로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 왜냐하면 영화를 본 구술적 관객이 그 역사를 보고는 자신만의 것으로 ‘재해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이 기록으로서의 영화, 사실주의라는 영화의 테마, 역사를 해석하는 후대인들의 태도에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거시적인 역사, 미시적인 개인



<논픽션>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에서는 ‘Faction’이라는 소재가 화두로 제시된다. 사실이라는 Fact와 허구라는 Fiction이라는 두 단어를 결합한 ‘팩션 Faction’은 실화에 기반했으면서도 각색이 첨가되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알 수 없는 작품을 뜻한다. 주로 ‘이 작품은 실제 사건에 기반하였음.’이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영화를 이런 장르로 분류할 수 있는데, 자칫하면 창작자가 실제 사건을 왜곡할 수도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레오나르의 경우는 그 방향이 살짝 다르다. 레오나르는 작품의 핍진성을 위해 자신의 연애담을 그대로 작품에 서술해 놓았고, 언론과 독자는 아는 사람은 다 알아보지 않겠느냐며 ‘그녀’의 사생활을 걱정한다. 즉, 실제 사건을 왜곡한 게 아니라 실제 사건이기에 문제가 된다.



굉장한 아이러니다. 우리가 보통 팩션인 작품을 볼 때, 사건 밖의 타자라는 점에서 관찰자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것이 역사라면 우리가 그 시기를 살지는 않았으니 어쩔 수 없이 관찰자가 된다. 그런데 소설가 본인의 이야기를 서술해 놓은 작품은 그 자신이 사건의 주체라는 점에서 당사자이고, 동시에 이야기 밖에서 그것을 서술해야 하니 관찰자이기도 하다. 레오나르의 소설은 그래서 문제가 된다. 지명과 실명을 바꾸어도 그것은 ‘작가’의 사생활이다. 작가는 자신의 사생활을 숨길 권리가 있고 또한 소설에 소재로 채용할 권리도 있지만, 그것이 작가의 주변 인물에 관해 서술할 ‘권리’를 포함한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는 이 영화에서 ‘주체가 주체의 사건을 타자화할 때 사건에 연루된 타자가 주체화되는’ 아이러니를 목격한다. 작가의 서술이 주변 인물의 모습을 모두 설명한다고 착각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 주로 역사를 각색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담론은 개인과 역사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시간이 흐르면 역사가 된다는 말은 반대로 생각해 볼 때 지금 이 순간도 역사라는 뜻이다. 그러니 역사를 서술할 권리를 개인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역사란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서술이다. 그러나 분명 그 시대를 살아가는 어떤 이의 삶도 있을 테고, 그것은 미시적인 관점일 테다. 즉 거시적인 것의 안에는 미시적인 관점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역사를 다룬 팩션은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개인의 이야기를 소화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때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시대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이야기이지, 누군가의 곁에 시대가 스쳐 지나간다고는.



우리는 역사를 다룬 팩션에서 나름 입체적으로 보이는 개인의 모습이 사실은 역사가 지닌 여러 방향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목격한다. 즉 그들은 역사의 의도대로 짜인 인형과도 같은 존재이다. 술자는 객관적인 시점으로 역사를 보여주려고 시대가 할 수 있는 여러 선택을 보여주지만, 결국엔 누군가의 주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술자를 포함한 우리가 기본적으로 역사 안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 이외의 선택을 보여주는 영화는 관객에게 호평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사를 다룬 작품은 반드시 역사의 진실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역사 안을 사는 우리가 역사의 밖을 볼 수는 없으니 역사 안을 진실이라 여기게 된다. 결국 우리는 거시적인 이야기가 펼쳐놓는 이야기를 미시적인 관점을 포함한 것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보자. 거시적인 역사는 실제 사건을 최대한 왜곡하지 않아야 한다. 미시적인 개인은 실제 사건이기에 문제가 된다. 왜곡하지 않거나 왜곡하지 않았거나, 둘 중 무엇을 택하든 간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진퇴양난에 빠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팩션이라는 단어가 Fact를 전재하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사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만약’을 속에 포함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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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항빈 님의 리뷰
2018.10.11 10:07:22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이번 작품은 대사량이 어마어마한 드라마로, 거의 영화를 핑계 삼아 혼자만의 100분 토론을 펼치는 듯이 각본을 써내려간게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어찌됐든, 두 커플이 겪고 있는 불륜 이야기도 탄탄하게 유지하며, 디지털 vs 아날로그에 대한 논쟁을 지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전개해 나아간다.

아사야스는 책 vs e북이라는 구도를 통해 현재 시대가 요구하는 문학과 텍스트 예술은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을 해본다. 사실 이 토론 자체는 꽤나 노골적이다. 영화는 시시각각 주인공들이 무엇이 문학을 위한 올바른 방향인지 토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 텐션이 떨어질 때 쯤엔 아예 이 토론에 생기와 색다른 관점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해 존재하는 조연들을 투입시킨다. 하지만 이 토론이 따분하거나 현학적이거나 오만하게 느껴지지 않고, 지적이고 유쾌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캐릭터들이 하는 주장과 그들의 성격과 행동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알랭은 종이책에 대한 애착이 있지만 출판사의 책임자로서 e북이라는 미래에 흔들리고 어느정도 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셀레나는 감수성이 풍부한 배우로서 예술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로르는 디지털 전문가로서 e북은 불가피하면서도 굉장히 이로운 미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와중에 트위터의 문학성, 현대 평론의 영향력, 예술의 경제성, 예술과 현실의 경계 등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노며, 아사야스의 캐릭터들은 굉장히 폭 넓은 예술에 대한 수다를 떤다. 아사야스는 이 인물들을 직업 관계, 사랑 관계로 꾸준히 한 공간으로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럴듯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적당한 멜로드라마 이야기를 설정하며, 인물 드라마와 지적 토론이 뒤섞인 훌륭한 각본을 하나 뽑아낸다.

사실 이 영화는 굉장히 난잡해 보일 수도 있다. 사랑과 문학과 정치와 예술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연속되는 전개는 몰입할 수 없어야 맞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탄탄한 연기를 바탕으로 하여, 캐릭터를 절대 소홀히 하지 않는 정성을 기울인 덕분에, 마치 프랑스판 '알쓸신잡' 같은 유쾌한 아무말 대잔치로 볼 수 있었다. 유머와 인간미가 가득찬 지적 대화로 급격히 변화하는 현대 시대에 대한 아사야스의 고민들을 엿볼 수 있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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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2 16:15:46
Non fiction, doubles vies... 논 픽션, 이중의 삶... 어느 것이 진짜일까?
아닐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되는 시기..
어느 것이 진정한 지식이고, 어느 것이 진정한 책인가? 그리고 결국 어느 것이 진정한 삶인가?

정보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어느 것이 진실인가?
가짜 뉴스? 사실 진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런 것들이 영화 속에서 나름 진지하게 논의된다.

정말 프랑스적 영화이다.
계속 등장하는 파리의 카페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 역시 이중적이다. 그래도 아직은 아날로그적 사유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뭔가를 지키고자 하는 것도 있다. 그러면서 디지털화되어 가는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압권은 막바지에서 쥴리엣 비노쉬가 배우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다시 배우로서 줄리엣 비노쉬를 얘기한다. 누가 진짜 줄리엣 비노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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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na09 님의 리뷰
2019.05.23 08:32:07
대세를 따라? 아니야, 옛 방식을 고수해? 당신이라면?
유럽 문화의 주역이자 예술의 나라 '프랑스'가 디지털 시대를 맞아 이런 설전을 벌일 줄은 몰랐습니다. 누구나 '예스'를 외칠 때 계속해서 '노'를 고집하던 프랑스가 인터넷이 가져온 변화의 바람에 무장 해체되었으니까요. 영화 <논-픽션>은 '올리비에 아사야스'감독의 신작으로 전자책과 종이책,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오가는 본격 토론 영화입니다.

​'알랭(기욤 까네)'은 전통 있는 출판사의 편집장입니다. 친구이자 작가 '레오나르(빈센트 맥케인)'를 만나 사심 없는 대화를 이어가는 중이죠. 글은 이미 죽었고, 권위도 내려놓을지 오래, 출처도 알 수 없는 가짜 뉴스가 판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인터넷에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읽는다는 변화를 주제로 논쟁 중 입니다.

또한,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시대를 사는 현대인은 그 간극을 메우지 못하면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푸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과연 140자 하이쿠 트위터나 문자, 블로그 포스팅, 이메일은 문학이 아닐까 맞을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미래학자조차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미래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이어 작가와 편집자의 대화도 이어집니다. 자전적인 소설이라도 윤리성은 있어야합니다. (누구나 알만한) 실명을 약간만 각색한다면 허구가 되는 걸까요? 누가 당신의 인생을 글로 써 돈벌이화한다면 어떨 것 같나요? 자기분석을 핑계로 남의 인생을 그대로 가져다 써도 되는 걸까요? 영화는 알랭의 출판 거절을 통해 작가적 도덕성을 꼬집고 있습니다.

편집장 알랭은 디지털 마케터 '로르(크리스티나 테렛)'와도 설전 중입니다. 종이 책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저렴한 가격, 킨들(리더기)하나에 수백 개의 책을 넣고 다닐 수 있는 휴대성 등. 이 매력적인 전자책을 들여놓으셔야 한다는 주장이 오고 가는 날선 자리. 비평가와의 비싼 점심보다 독자의 댓글 하나가 더 값어치 있다는 말은, 자만과 권위에 빠진 평론보다 취향을 분석해주는 알고리듬의 매력을 어필하고 있습니다. 대세는 감성이고, (허수이든, 조작되었든) 추천수와 트윗수, 팔로워 수가 높은 인플루언서는 이제 모셔야 할 VIP가 되었으니까요.

로르는 출판시장의 전자화가 악마의 출현이 아닌 유토피아라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이제 도서관은 책 창고일 뿐, 글은 가상현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을 거란 예측입니다. 관습과 개념을 파괴할 때 자유가 생기고 인류의 유산인 책을 오래도록 사유할 시장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주장, 어째 동의하시나요?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려면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

책은 흔히 예술이라고 하지만 팔려야 예술인지 아닌지를 평가받을 수 있고, 가감 없는 비평도 존중할 때 끊임없는 변화에 편승할 수 있습니다. 이제 대중의 생각과 말에 귀 기울여야 하며 눈과 귀를 닫는다면 사장되고야 맙니다.

영화 <논픽션>은 언제 어디서나 토론을 즐기는 프랑스인들의 지적 대화, 쿨한 관계를 가감 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전자신문이 나왔을 때 종이 신문, 잡지는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E-북이 활성 되자 더 이상 종이책을 팔리지 않을 거라 말했죠. 시장이 작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책을 읽고 지면을 봅니다. 그리고 글도 씁니다. 리더기, 스마트폰, 태플릿으로 읽고 오디오북으로 들으며, 트위터,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 쓰는 변화된 형태지만 말이죠. 정보는 넘쳐나지만 자기 영역 내 관심 있는 분야만 골라 읽을 뿐 실제 온도와 체감 온도는 다르다는 논리도 폅니다.

"이제는 책과 조용히 헤어질 수 있어!"


인터넷은 혁명과도 같았습니다. 인터넷은 PC를 떠나 스마트폰, 소셜네트워크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었습니다. 물론 독서 시장, 독자, 플랫폼의 변화를 가져왔죠. 영화는 21세기 형 출판에 대해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지며, 진짜와 가짜가 판치는 인터넷의 장단점도 논하고자 합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과도기를 겪고 있는 모든 분야에 적용해 볼 수 있는 주제이며, 글쓰기와 출판​에 대한 진부한 생각에 전환점을 주는 시대 반영적인 영화기도 하죠.

덧, 주인공 '줄리엣 비노쉬'를 향한 감독의 위트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하얀 리본>이 비틀어지는 재미를 느껴보길 바랍니다. 말, 말, 말로 이어지는 프랑스 영화의 지적 스타일을 즐기는 분에게 추천합니다. 아주 그냥 TMI.. 토론이 끝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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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in Job 님의 리뷰
2019.05.22 03:04:26
굳이 보이는 것 vs 애써 보이지 않는 것
#논픽션 #DoublesVies #CGcinema_제작사 #씨네블루밍_수입 #트리플픽쳐스_배급 #올리비에아사야스_각본연출 #줄리엣비노쉬 #기욤카네 #빈센트맥케인 #크리스타터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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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보니 영화제에서 관람한 영화를 극장에서 본 첫 영화...(영화제에서 본 영화중에 개봉한 영화가 없다...구나~) 정말 영화제 똥소니구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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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 님의 리뷰
2019.05.21 01:19:46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논-픽션>(2018, 원제 'Doubles vies')은 출판계에 종사하는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오늘날 책과 문학의 역할은 무엇인지, 그리고 시대의 변화를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을 던지는 영화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인식을 넓혀나가게 하고 동시에 지적 사유를 유도하는, 그러면서도 팽팽하고 첨예한 이야기인데, 이는 단순히 '전자책 vs. 종이책' 정도로 대답을 단순화할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영화 속 인물들이 주고받는 말들의 내용은 대부분 친숙하면서도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보거나 생각해봤을 법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그 자체로 아주 신선하거나 기발하거나 혹은 경탄할 만큼의 어떤 통찰을 담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문화산업과 콘텐츠 시장의 흐름과 그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서 <논-픽션>은 충분히 인상적이고 흥미로운 영화였다. 특별한 사건보다 오직 대화만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솜씨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도 하고. (20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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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DaSi 님의 리뷰
2019.05.20 15:12:57
변화를 두려워 하는 이들에게
소비 형태의 변화


현대의 영화시장은 극장이 아닌 다른 플랫폼을 통해서도 소비가 가능합니다. 넷플릭스가 보급되면서 영화를 더욱 쉽게 소비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영화는 극장에서 1차 개봉이 된 후에 2차로 VOD 시장을 거치는 순서였습니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자체적인 영화 제작을 함으로써 극장을 거치치 않고 바로 자사의 플랫폼으로 공개하는 영화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영화계에서는 이런 콘텐츠를 영화로 인정할 수 있느냐에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집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VHS나 DVD를 통한 소비만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발달하면서 소유하는 것이 아닌 실시간으로 소비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현재 DVD의 수요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특정 영화를 아주 좋아하거나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경우에는 소유하고 싶어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영화의 DVD를 구매하는 것입니다. 이 DVD에는 영화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 영상이나 기존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경험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음악계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음악은 영화에 비해 훨씬 이른 시기에 스트리밍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가수들 또한 물리적인 앨범이 아닌 디지털 싱글 같은 형식으로 음악 한 곡만 내는 현상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앨범은 아예 없어질 줄 알았으나, 최근 앨범은 아티스트의 팬들이 그들의 작품을 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었습니다. 앨범 안에는 음악만이 아니라 포토카드, 화보, 가사 집 등 기존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는 받을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합니다.



서론이 조금 길었습니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영화 [논픽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 [논픽션]의 원제는 이중적인 삶(두 개의 삶)으로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뜻을 가진 불어 제목에 대한 영어 제목인 [논픽션]은 나름 잘 지어진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면서는 이 영화의 제목으로 ‘팩션’이 조금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팩션은 Fact와 Fiction의 합성어로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 허구를 의미합니다. 기존에 사용하면 허구(Fiction)와 사실(Non-fiction)이 합쳐진 말, 두 가지 가치의 중간에 있는 말입니다.

영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 두 가지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모습의 그들을 보면, ‘팩션(Faction)’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논픽션’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더욱 와 닿았습니다. 단어가 포함하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논픽션이 더 넓은 범위를 품고 있습니다.

중학교 수학 시간에 배운 집합을 생각해보면, 픽션과 논픽션을 각 각의 집합으로 봤을 때 논픽션과 픽션의 교집합이 팩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논픽션은 하나의 집합이 아니라 픽션의 여집합입니다. 이 여집합에는 교집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죠. 즉, 논픽션은 팩션을 포함하는 단어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본질


영화 속에서는 여러 가지 가치적인 충돌이 등장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E북과 종이책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영화 초반에 인물들이 쉴 새 없이 대사를 쏟아내면서 각자의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 E북뿐만 아니라 블로그를 통해 글쓰기가 쉬워지면서 글쓰기에 대한 권위 및 신뢰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되어 가는 시기에 누구나 겪는 가치적인 혼란일 것입니다. 개인방송이라는 것이 처음 생겼을 때도 이러한 걱정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방송국에 유튜버나 스트리머가 출연할 정도로 많은 영향력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접근이 쉬워질수록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는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많은 사용자들이 직접 글을 쓰고 있지만, 그 글이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같은 글쓰기를 하고 있지만 누가 쓰느냐에 따라서 그 영향력이 다릅니다. 아무리 글쓰기가 쉬워져도 아무나 책을 낼 수 있어도 서점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E북이 간편해도 종이가 가지는 질감이 더 좋고, 글을 읽는 이해도나 피로도도 종이책이 훨씬 좋습니다. E북은 종이책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E북을 통해 읽은 책이 감명 깊거나 기억에 남는다면 사람들은 종이책을 사서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종이책은 E북과 달리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도 있고, 전기나 인터넷이 없어도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글의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E북이 생기면, 종이책은 E북을 통해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것입니다.



결국 매체는 변해도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영사기와 스크린을 통해 보던, TV나 핸드폰으로 보던 그 영화의 가치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받아들이는 감정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그런 여유가 없는 분들에게는 더욱 쉽게 콘텐츠를 접하는 방법이고, 이런 콘텐츠를 쉽게 접하다 보면 더 좋은 콘텐츠를 찾고자 하는 욕심이 생길 것입니다. 그 욕심은 더 상위의 콘텐츠를 소비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허구의 뿌리는 사실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논픽션]이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일부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란을 보았을 때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랑, 추억 등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추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극 중 소설가로 나오는 레오나르는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소설로 썼습니다. 사람들에게는 팩션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독자들은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하며, 타인과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는 것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생긴 기억 혹은 감정들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같이한 누군가와 공유한 경험이며, 저작권으로 따지면 공동 저작권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영화 속 독자들이 하는 이야기도 그런 점입니다.



예술에 대해서 배울 때 종종 듣는 말로 ‘예술가는 자신의 경험을 파는 사람이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이 겪을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설가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자신이 겪을 일이 바탕이 되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상생활에서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영화나 만화 및 소설 등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속 이야기로 생각해보면 그 이야기들은 모두 비난받아야 할까요?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혼을 했던 한 영화감독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에서 주인공이 처참하게 이혼당하고 이혼당한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그린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영화 속 상대 역할을 영화감독과 결혼했었던 상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결국, 스스로 깨달음을 얻게 되는 방식의 이야기 전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창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작품을 통해서 내가 얻게 되는 것 혹은 창작자가 스스로 반성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과정이 나타날 때 사람들은 인상 깊게 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 탓이 아닌 스스로 더욱 잘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방향으로 써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런 내용을 좋아하는 것은 타인을 비난하기는 쉬우나 자신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그 이야기에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다양할 것입니다. 사회 고발을 하기 위함도 있을 것이고, 단순히 재미를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특정된 누군가가 피해를 받게 되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속 독자들이 하는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일 것입니다.



쏟아내는 대사들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갈 수 있는 영화 [논픽션]은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도 저마다 다른 의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이 한 이야기와 모순된 삶을 살고 있기도 합니다. 항상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막상 일 할 때는 하기 싫어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모순적인 면을 조금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자신에게 멈추지 않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영화 [논픽션]은 지금의 우리를 만든 뿌리는 과거의 기억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한줄평 : 변화를 두려워 하는 이들에게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기행 님의 리뷰
2019.05.19 22:12:12
요 영화 재밌다 재밌어! 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전자책과 종이책, 오디오북 그리고 텍스트에 대해 떠드는 이야기. 그 안에 사람 관계나 태도를 담고 있다. 토론 좋아하는 나라에서 토론하기 좋은 주제로 말하니 영화내내 쉴 틈이 없음(귀가 따갑다).

실제 종이를 한장 한장 넘겨야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나로선 흥미로운 주제였다. 책 자체를 좋아하고 책을 읽는 시간을 좋아한다. 따라서 취미생활까지 경제적(효율적)으로 하고 싶지 않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려면 모든 게 변해야 한다’는 대사에 반박을 못하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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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네 님의 리뷰
2019.05.16 22:15:55
종이책이 사라지고 전자책의 시대가 와도 꾸준히 사랑받는 건 분명있다. 누군가에 논픽션처럼 가공되더라도 사랑의 본질이 변함없는 것처럼. ‘퍼스널 쇼퍼’의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사랑을 담은 영화입니다. 전작에 비해 가볍지만 토론거리는 더 풍부해졌습니다. 사건은 크게 셋으로 나뉘는데 종이책과 전자책의 대립, 사생활의 논픽션(허구)은 어디까지 인정해줘야 하는가와 맞바람 속에서도 부부의 신의는 지켜질 수 있는가 등으로 생각됩니다. 전자책의 등장은 다시 오디오북의 등장으로 쇠퇴해버렸으며 동의없는 논픽션은 누구를 위한 행복인가를 묻죠. 이는 돈벌이와 연결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는데 그에 비해 5인의 인물들의 상황은 생각보다 쿨하고 싱겁게 마무리됩니다. 서양에서만 볼 수 있는 쿨한 모습이라 해석의 여지는 있을 것 같습니다. LP나 폴라로이드 같은 클래식이 사랑받는 것을 보면 이들의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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