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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의 아이 (Weathering With You)
애니메이션 / 2019

개요
애니메이션, 일본, 112분, 15세 이상 관람가, 2019.10.30 개봉
감독
신카이 마코토
배우
다이고 코타로
모리 나나
혼다 츠바사
카지 유우키
히라이즈미 세이
바이쇼 치에코
오구리 슌
시놉시스
“그 빛 속으로 가보고 싶어”

도쿄에 온 가출 소년 ‘호다카’는 오컬트 잡지사에 취직한다.
연일 쏟아지는 빗방울과 함께 점차 삶에 지쳐가던 소년.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의 눈앞에 한 소녀가 나타난다.

“지금부터 맑아질 거야”

그녀의 기도와 함께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햇살이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그 여름날, 그 하늘 위에서 우리들은
세계의 형태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64.29%
2.99점
키노라이트 분포
30개
54개
별점 분포
리뷰
83

2019.10.11 17:51:56
어쩌면 더 나아질 신카이 마코토의 미래를 옹호하며,
내게 신카이 마코토는 애니메이션의 힘을 빌린 시네아스트다. 그는 <초속 5cm>까지 원래 1인 작업을 해온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립영화 감독이며, 성장과 사랑을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두고 그것을 운명론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다루려는 주제도 명확한 편이었다. 그의 데뷔작인 단편 <별의 목소리>는 미장센을 제외하면 흥미로운 작품은 아니었다.신카이 마코토는 8.6광년이라는 시공간을 관통해 만나는 두 연인을 제시했고, 이는 에반게리온 등과 별 다를 바 없는 영화였다. <초속 5cm>에 다다라 그의 세계관에 중력이 발생하며 그의 작품에 마력이 발생한다. <초속 5cm>가 그것이다. <초속 5cm>의 1부는 <별의 목소리>를 도쿄로 옮겨둔 파트였다. 문제는 그 뒤의 장면들이다. 두 주인공은 성장했지만, 서로에 대한 추억을 일상에 묻어버린다. 1부에서 누구보다 설렌 첫사랑을 나눴던 아카리와 타카키의 연은 시간의 흐름에 무참히 찢기고, 감독은 그들이 어떻게 그 뒤 패턴화된 일상을 견디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가는지를 다룬다. 지루한 일상에서 역지기처럼 불쑥 불쑥 차오르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설명 못한 채 살아간다. 성장하려면 첫사랑을 버리고, 첫사랑을 유지하려면 유아적인 세계를 붙잡고 그 자리에 머물러야한다. 이런 양립불가능성이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에서 반복된다. (이런 방식의 비관주의는 <언어의 정원>에서 한 차례 변화를 맞이한다. 선생과 나라는 관계에 안착하는 관계가 그것이다.) 그의 장점인 미장센은 매 순간에 마법같은 숨결을 불어넣는다. 상황을 왜곡해 묘사하는 대신 미세한 디테일을 복원하는 그의 작풍은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 두 사람을 둘러싼 풍경들을 불러내 신카이 마코토는 도시의 메마른 풍경과 자연의 날씨를 대비시킨다. 그 두 개의 풍경을 신화와 운명이라는 끈으로 엮어내 신카이 마코토는 이 둘을 만나게끔 만든다. 사랑은 실패하더라도, 인간과 자연은 한 화면에서 만난다. 이러한 점에서 신카이 마코토는 자신의 모티프를 붙잡고, 그것을 변화시켜온 감독으로서 의의가 있는 감독이다. <별을 쫓는 아이>를 제외한 그간의 작품들에서 신카이 마코토는 나름대로의 작품성을 확보해왔다. 그 뒤 <너의 이름은>의 급작스러운 성공 이후, 신카이 마코토는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제 2의 미야자키 하야오로 성장하기를 요구받는 중이다. 더 나아가 애니메이션의 영역을 넘어 기껏해야 아니메를 실사화하는 정도에 그치는 일본 영화계 전체의 샛별로 솟아올랐다. <날씨의 아이>를 만들기 전, 신카이 마코토는 <너의 이름은>을 두고 딜레마에 처했을 것이다. 그는 <너의 이름은>에 그 전까지 그의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들던 오타쿠 코드와 세카이계적 상상력을 들여왔다. (아마 <너의 이름은>의 흥행에 오타쿠 소비층이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만일 이를 되풀이한다면 오타쿠 코드 속 여성을 대상화하는 여성혐오적 프레임을 유지한다는 비난을 수용해야할 것이고, 오타쿠 팬층을 위한 코드를 삽입해 작품이 일반 대중이 수용할 수 있는 보편성에 가닿지 못할 것이라는 두 가지 난점을 지닐 것이다. <날씨의 아이>는 그 고민을 자각한 영화다. 신카이 마코토는 GV에서 <너의 이름은>이 개봉할 즈음에 곧바로 <날씨의 아이> 작업을 착수했다고 말한 적 있다. 그는 <너의 이름은>에서 못 다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싶었을 터이다.

<너의 이름은>은 그간 그가 만들어온 작품과 달리 성장영화일 수밖에 없는 영화다. <너의 이름은>에서 신카이 마코토는 <에반게리온>류의 아니메라든가 일본 라노벨에서 자주 쓰던 세카이계(セカイ系) 표현양식을 그의 작품에 차용한다. (<별의 목소리>도 이런 부류의 작품이다.) 이 세카이계는 주로 미성년이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세계(혹은 종말)와 직면하는 상황을 다루고, 끝내 두 남녀의 개인적 관계가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서사다. 타키와 미츠하가 (3.11 동일본 대지진을 연상시키는) 혜성충돌을 마주하는 설정이 그것이다. 오프닝에서 타키는 자신이 경험한 두 가지 사건을 아울러 “이상한 꿈”이라 고백한다. 래드 윔프스의 노래가 끝나자 타키와 미츠하는 서로 신체가 뒤바뀐 상태로 깨 거울 속 다른 나를 마주한다. 타키는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짝사랑하는 누나에게 호감을 표현하려 인터넷을 검색하는 소년으로 그 이전까지 여자를 경험해본 적 없는 사람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미츠하가 누나와 데이트를 끝마친 뒤 잠에서 깨면 타키는 어찌 반응할지 몰라 허둥댄다. 이처럼 숫기가 없고 무기력한 타키에게 재난과 여성의 신체는 예고도 없이 급작스레 마주한 것이기에 그에게 환상처럼 느껴진다. 둘이 서로 마음을 갖기 시작할 즈음 혜성충돌로 둘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타키는 그제야 미츠하와 자신이 시간이 엇갈렸다는 것을 알고 실제 인물이던 미츠하와 그녀가 살던 마을의 기록들을 모은 끝에 참상을 마주한다. 타키가 혜성충돌로 사라진 미츠하의 마을을 볼 때, 그의 표정은 처음으로 떨린다. 그 뒤 타키는 미츠하와 만날 수 있는 산 한가운데로 가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제야 “이상한 꿈”인 미츠하는 이름을, 혜성은 재난의 현장이라는 실체를 얻는다. 이 둘은 무스비라는 끈으로 묶인다. 끝내 산에서 서로의 목소리만 감지한 채 헤어진 둘은 먼 훗날에 만난다. 이는 <초속 5cm> 1부의 반복이지만 훨씬 큰 울림을 지닌다. 두 남녀가 실물로 만나 이름을 묻는 장면은 산 자와 죽은 자, 과거와 현재, 희생자와 그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나는 기적같은 순간이다. 이는 두 연인이 8.6광년의 시간을 넘어서 만나는 <별의 목소리>와는 다른 종류의 슬픔이다. 이처럼 신카이 마코토는 세카이계적 상상력만이 다른 세계에 속해있던 둘을 만나게 하는 유일한 끈이라 생각했던 듯 싶다. 이 작품의 괴력은 신파로 역사와 무관한 개인들을 억지로라도 역사와 마주하게 만드는 힘에 있다. 그때, 두 남녀의 개인적 만남은 무너진 일본사회를 봉합하려는 커다란 화합으로 귀결된다. 성장과 첫사랑을 동치시키고, 그것을 신파로 묶어내는 신카이 마코토의 기획은 순진무구할 뿐이다. 일본의 신화구조를 빌려온 이런 운명론적인 세계는 희망차보이지만, 어딘가 괴이하다. 바로 이 세카이계가 지닌 극우적, 도피적 상상력의 한계 때문이다. 일본의 서브컬처 비평가 오쓰카 에이지 세카이계적 상상력의 기원을 극우적이라 분석하고 2차대전 당시 문학을 그 기원으로봤다. 전쟁 당시 일본의 무기력한 청년들에게 전쟁은 본국 바깥에서 일어나는 쇼이자 환상이었고, 전쟁을 인간이 죽어나가는 실체가 아닌 게임으로 받아들인 굴절된 욕망이 세카이계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타키가 유독 무기력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가 곧바로 전쟁과 접하는 파시즘의 위험한 매혹이 세카이계의 시작이고 여기에 오타쿠 코드가 더해진다. <너의 이름은>은 소년이 환상이 아닌 실체로서의 여성을 만나는 과정을 다루지만, 그 여성이란 성적인 대상으로 소비되는 여성이다. 이런 <너의 이름은> 속 서투른 소년의 눈을 빌려 여성의 주체를 무력화시킨다. <너의 이름은>의 비판점은 여기에서 나온다. 여성은 침을 바치는 성적 대상화의 대상인 창녀이자, 세계를 구원하거나 망가뜨릴 수 있는 '미소녀'로서 성녀에 속한다. <너의 이름은>은 끝내 미츠하를 여자로 만나지 않는다. 미츠하는 여자의 모습으로 드러난 역사의 상흔으로 보인다. <너의 이름은>에서 역사가 순환하는 운명론적 세계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이 두 가지의 문제점이 <너의 이름은>을 관통한다. 세카이계의 상상력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획은 처음부터 자가당착에 봉착해있던 터였고, <너의 이름은>의 슈퍼히트는 그를 고민에 빠지게 했을 것이다. <날씨의 아이>에 다다라 신카이 마코토는 세카이계적 상상력을 단절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그의 선택은 이 세카이계의 상상력을 뒤집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가 <너의 이름은>의 동어반복이자 하위호환이라는 리뷰들에 전혀 공감할 수 없다. 이 작품은 제대로 읽히기도 전에 과소평가당했고, 그 때문에 신카이 마코토가 이 이후 얼마나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지 그 가능성을 부정당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날씨의 아이>에 개연성이 없다든가 내러티브가 엉성하다는 비판들은 뜬구름잡기에 가까운 수준이다. 오직 미장센과 음악만 취하고, 이 작품이 던지는 복잡한 질문을 저편으로 미뤄두는 태도는 이 영화를 더 오해하게끔 만든다. 물론 이 작품이 여성혐오적 쇼트를 반복한다는 비판은 마땅하지만, 그 여성혐오적 쇼트로 신카이 마코토가 최선을 다해 가닿으려는 자기당착을 지적하는 사람은 드물다. 세카이계를 그대로 쓴 것이 비슷해 보일지는 몰라도 <너의 이름은>과 달리 그 세카이계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날씨의 아이>는 <너의 이름은>보다 한 발짝 나아간 작품이다. <너의 이름은>보다 덜 사회적인 작품일지는 몰라도 <날씨의 아이>는 더 윤리적인 작품이다. <날씨의 아이>의 자가당착은 그런 점에서 신카이 마코토가 작가라는 점을 증명하는 듯 보인다. <너의 이름은>에서 보인 안온한 태도를 넘어서, <날씨의 아이>는 <너의 이름은>에서 보인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고 질문하는 듯 보인다. <날씨의 아이>들이 그 수많은 논란들에서도 <너의 이름은>보다 오롯이 빛나는 이유는 실패를 무릅쓰고서라도 무언가를 찍어보겠다는 의지를 보여서다. OST 가사처럼 "사랑 노래가 너무 많"고,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는 세상에서 무엇을 찍을지 고민하는 그의 고뇌가 담겨있다.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 쏟아진 치유의 서사의 정반대에 서서, 그는 상처가 치유될 수 없다는 측에서 재난을 서사로 소비하려는 세계를 비판한다. 그때 신카이 마코토의 세카이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영화가 제시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질문하지도 않으며 그저 무너지는 것을 응시하고 체념한다. <날씨의 아이>의 인물들이 경찰에 휘둘리고, 운명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인물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온 힘을 다해 망가진 세계에 체념하기. 그것이 신카이 마코토의 태도다. <너의 이름은>가 제공한 판타지보다 그 온 힘을 다해 체념하는 태도가 내게는 오히려 진실된 태도로 보인다. 그러나 여성을 성애화하는 폭력적인 쇼트들은 그 자신이 성립시키려던 윤리적 태도와도 어긋나는 기묘한 불일치감을 만들어낸다.

<날씨의 아이>는 <너의 이름은>과 마찬가지로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병원에서 암투병 중인 어머니를 돌보던 히나가 빛을 보고 밖으로 달려나간다. 이 시점에서 호다카도 (섬으로 보이는) 고향에서 빛을 보고 도쿄로 올라오기로 마음 먹는다. 빛을 따라 어떤 건물의 옥상에 도달한 히나의 모습을 비추며, 호다카의 나레이션이 끼어든다. "우리의 비밀"이라면서, "우리가 세계를 변하게 만들었"다는 그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무기력한 그의 실제 모습과는 정반대다. 오타쿠 코드가 만들어낸 이 나레이션과 주인공 목소리 톤의 불일치는 <날씨의 아이> 내내 이질감을 빚는다. 작은 사건에 과할 정도로 호들갑을 떨고, 모든 것들을 자신에 따라 왜곡되는 이 자의식이 과잉된 소년은 도쿄를 게임처럼 여기며, 자신이 태어난 터전을 있는대로 부정한다. 그 호다카의 모습은 누구한테도 소리치지 못하는 무기력한 모습이다. <날씨의 아이>의 오프닝은 이 호다카가 시골에서 가출해 도쿄로 올 때,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상황을 마치 VR게임을 하듯 접하는 모습을 보인다.(이는 앞서 말한 세카이계적 소년상과 동치된다.) 스가가 그를 구해주고, 그가 히나를 우연히 만나 관계를 시작하기 전까지 감독은 호다카가 지나다니는 도쿄의 풍경을 세세하게 비춘다. 히나와 호다카, 스가 등의 캐릭터를 소개하는 대신 호다카가 걷는 도쿄를 더 자세하게 보여주는 듯 싶다. 감독은 도쿄의 풍경에서 미성년자 성매매, 총기 매매, 가출 청소년 등 공권력의 권위가 무너진 일본 사회의 문제를 표상적으로 보여준다. 도쿄를 지나다니며 그는 중얼거리듯 "도쿄는 무서워"라든가, "어떤 것이 첫경험"이라 말한다.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는 설정이다. 시골이라는 곳이 사랑과 "맛있는 밥을 먹는"다든지 그 어떤 실제 경험도 불가능한 곳이라는듯. 이런 소년의 자의식은 사회를 맞딱트리는 순간 무너지며 그 범죄의 세계에 매혹당하고 만다. 호다카가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총을 실제라 의심하는 와중에도 그것을 주머니에 넣을 때 그의 미세하게 떨리는 표정에서 우리는 그 양면성을 읽을 수 있다. 도쿄는 누군가가 죽을 수 있는 "무서운 곳"이자 "첫경험"이 가능한 도시다. 이는 순진무구한 캐릭터로만 나온 타키와 다르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소년의 텅 빈 자의식은 <너의 이름은>을 기대하고 온 관객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준다. 그는 자신이 자주 들르던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히나를 거리에서 마주친다. 그녀는 맥도날드 아르바이트에서 잘려 미성년자 성매매 업소에 자청해서 가던 중이었다. 때마침 호다카는 자신을 때렸던 미성년자 성매매업소 호스트가 히나를 끌고 가는 것을 보자마자, 히나를 낚아채 어디론가 데려간다. 그때 호스트가 그를 때려눕힌 뒤 진실을 말해준다. "얘는 얘가 원해서 갔던 것"이라 소리치며 그의 뺨을 연신 후려갈긴다. 호다카는 그제야 총을 꺼내든다. 물리적 폭행이 아니라 자신이 여자를 구출해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의 환상을 파괴한 것이기 때문이다. 총이 이전부터 남성성을 표출하는 도구였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소년이 들이밀 수 있는 것은 그뿐이지만 그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총을 쏜 뒤에야 알아차려 소스라치게 놀란다. 우리는 여기서 왜 경찰이 먼저 호다카를 폭행한 남자가 아니라 총을 쏜 호다카만 문제삼고, 추적할까라는 의문을 지닐 수밖에 없다. 경찰은 나중에 호다카를 쫓을 때, 호다카를 먼저 추적한 남자에게 어떤 죄도 묻지 않는다. 이는 공적 시스템이 무너진 일본의 모습이자, 세카이계적 상상력에 도취된 소년을 추적하는 신카이 마코토의 시선을 동시에 환기시킨다. 어딘가 무기력하게 끌려다니고 도취되는 소년은 히나를 구하려 총을 버린다.

호다카는 그 뒤 스가의 사촌인 나츠미의 가슴을 관음적으로 관찰하고 스가의 애인이라 착각한다. "누군가의 애인을 처음 본"다고 가정한다. 이때 스가가 들어와 그의 작업을 소개한다. 음모론으로 점철된 기사들을 B급 잡지에 싣는 일이다. 그는 오로지 잘 팔리는 기사이기에 그것을 쓰고 자신의 작업을 엔터테인먼트라 취급한다. 호다카는 첫 취재에서 "맑음 소녀"가 있다는 무당의 말을 듣고, 의심한다. 그는 글을 써갈수록 스가와 비슷해지고 나츠미는 그것을 계속 지적한다. 스가와 그가 비슷하다는 점을 짚으며 나츠미는 스가와 그의 성장배경이 비슷하다는 말을 꺼낸다. 우리는 호다카의 미래가 스가일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의문을 갖게 된다. 나는 스가가 신카이 마코토 본인과 가장 비슷한 인물이라 생각한다. 스가는 사회문제를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한 음모론으로 설명하는 사업을 한다. 스가는 이처럼 호다카같은 소년들에게 사회의 부조리에 응당한 이유를 제공한다. 신카이 마코토가 영화 말미에 스가의 입으로 "세상은 원래 미쳐있으니까" 해결하지 말라던 말을 내뱉게 한 것은 그 자신이 하고픈 말이었을 것이다. 이전 세대가 일본 사회의 부조리를 찾을 방법이 없으려했지만 음모론자로 전락하고 사회를 구멍으로 바라보게끔 만든다. 호다카는 그들 밑에 살다가, 날씨를 맑아지게 할 수 있는 히나와 날씨가 맑아지게 하는 것을 빌미로 돈을 번다. 그들은 무엇도 해결하지 못한다. 히나가 맑음소녀로서 날씨가 맑아지기를 기원해 하늘이 환해질 때에도 빛이 드는 범위에서 "감정"이 나아질 뿐이지 사건이 나아지지 않는다. 개개인의 문제에 해결하는 그들의 돈벌이는 사회 구조 자체를 바꿔두지 못하며 구조의 폭력에 의해 결국 히나는 희생양으로 희생당한다. 그럼에도 호다카는 모두가 행복하다고 믿는다. 힐링은 기분이 나아진 상태를 말할 뿐이지, 무엇도 힐링하지 못한다. "원래 그런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인식으로 신카이 마코토는 호다카와 스가, 나츠미, 히나를 계속 사각지대에 몰아간다. 나츠미는 취업에 연거푸 실패하고, 스가는 자신이 살아남으려 호다카를 쫓아내고, 히나는 그녀의 동생과 아동복지법에 의해 고아원에 끌려간다. 호다카는 총을 지녔기에 추적당한다. 이런 지옥을 맴돌며 호다카는 자신이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의식 과잉인 소년은 환상에서 점차 깨어난다. 스가와 나츠미는 (미소녀 시뮬레이션에서나 보이는) 연인관계가 아니고,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여성"인 히나는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고아다. 그들은 터전을 떠나와 하늘이 분노해 눈이 내리는 거리에서 방황한다.(호다카가 맨 처음에 들고 다니는 J.D.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나온 일탈을 그는 그제야 이룩한다.) 그 방황 끝에 그는 날씨를 치료하려면 제물이 필요하고 그 제물이 히나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히나가 날씨가 나아지기를 바라냐는 질문에 그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다. 그날 밤 히나가 제물로 사라지고 호다카는 히나를 찾아나선다. 스가는 이런 둘의 사랑을 듣고 죽은 전처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스가는 호다카가 히나를 되찾도록 길을 터주고 호다카는 히나를 되찾아오지만 헤어지고 만다. 히나는 더 이상 맑음소녀가 아니고 이제 날씨를 치유할 법은 없다. 날씨를 치료해봤자 그들을 쫓는 시스템은 변화시킬 수 없다. 여성과 아이들이 그저 "기분"을 풀려고 하늘에 희생당한 세계의 본질은 절대 아름답게 표현될 거리가 아니다. 신카이 마코토가 도쿄를 물에 잠기게 한 뒤 "원래대로 되돌아왔"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너의 이름은>에서 희망에 찬 세계의 본모습이 그랬을테니까. 신카이 마코토가 <날씨의 아이>에서 신화적 상상력을 축소하고 유독 도쿄의 풍경을 개입시켜 현실을 유지하려는 이유가 여기에서 나온다. 우리가 희망이라 주장해온 것들의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 묻고 싶어했을 것이다.

<날씨의 아이>에서 논쟁적인 씬은 두 장면이다. 히나와 호다카가 처음 침대에 잠드려는 순간이다. 히나는 호다카에게 질문한다. "날씨가 맑아졌으면 좋겠어?"라는 질문에 호다카는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히나는 호다카에게 보라는 듯, 옷을 벗는다. 그때 히나는 호다카를 도발하듯 묻는다. "대체 어디를 보는 거"냐고. 그때 히나는 날씨를 맑게한 대가로 투명해지는 몸을 그에게 내비친다. 호다카는 울기 시작하며 히나에게 "나는 히나 너를 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때 호다카가 마주하는 히나의 몸은 2D의 픽셀처럼 보인다. 호다카는 그제야 자신이 성애화하던 여성의 몸이 2D의 만화처럼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마주한다. 그 너머에는 자신의 무의식에 깃든 환상에 의해 희생제물로 사라질 여성이 있다. 이 씬에서 성적인 대상으로 여성을 혐오하는 시선과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성녀로 추앙하는 시선이 겹친다. 호다카는 그 혐의를 부정하고 "너의 이름"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너의 이름은>이 이름을 부르며 끝나는 데 비해 호다카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은 공허하기만 하다. 이처럼 <날씨의 아이>는 관계에 있어 사랑도, 진심도 만나보지 못한 호다카(로 표현가능한 오타쿠적 소년)의 첫사랑 판타지를 실패로 만들어 사회를 마주볼 시간에 여성을 판타지로 소비한 그들의 시선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이질감을 빚게 만든다. 이는 신카이 마코토가 그 자신을 마주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이는 신카이 마코토가 그간 여성을 패티시즘화한 방식과 맞닿는다. <너의 이름은>의 여성의 타액을 소비하는 방식, <언어의 정원>에서 선생을 마주보는 방식을 예로 들 수 있다. 여성을 인간으로 보기보다 도피처로 삼는 성녀로 만드는 패티시즘을 극복한 뒤 호다카는 처음으로 현실과 마주한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고공낙하하는 장면에서 둘은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다. 호다카는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다.

<날씨의 아이>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이제 개인의 차원에서 이뤄진다. 아이들의 연대는 미장센만 더 나아지게 할 뿐 어떤 시스템도 바꿔내지 못한다. 사랑도 성장도 성취하지 못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지옥이다. 맑음소녀라는 음모론적 상상력은 사회를 해결할 수 있는 합리적 근거가 될 수 없다. 세상이 망가지는 가운데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유아적 세계로 도피해 사랑하는 것뿐이다. 마지막에 호다카가 (아주 우연히) 히나를 만나 "우리가 세상을 바꿨어"라 말하는 순간 호다카가 서있는 곳은 비가 내리고 있으며 히나가 서있는 곳만 꽃이 피어있다. 감독은 비 내리는 도쿄와 히나라는 희망을 만나게 하려했으나 호다카의 외침은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꿨다라 했을 때 그 우리가 히나와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이 영화는 무엇도 바꾸지 못한 실패를 바꿨다고 우기는 실패가 될 것이다. 그 우리가 일본 사회라면 그들이 그들의 포옹은 양극화된 일본사회를 응시하는 결과물로 작동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꿨다"라는 것이 다른 의미로 진짜 세상을 바꾼 것이라면, 그들은 자의식 과잉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런 이중적 의미에서의 실패는 <날씨의 아이>가 <너의 이름은>으로 무엇도 성취하지 못했다는 것, "너무 많은 사랑 노래"들 속에서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실패는 서투른 전달로 실패하고 말았다. 계속 무기력할 호다카와 스가의 표정처럼.

이 작품을 이리도 길게 설명한 것은 이 작품의 호불호를 떠나, 그 실패의 의의를 제대로 직시해보자는 데에서 왔다. 이 작품은 <너의 이름은>의 판타지로부터 시작된 재난을 서사로서 치유하려는 움직임들이 과연 의미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뒤 <초속 5cm>에서 보인 세계관를 끌어와 새로운 발걸음을 내민다. 상흔을 마주보는 데에서 새로운 치유가 시작될 수 있으며, 오타쿠처럼 폐쇄된 세계관(혹은 환상)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사회 속 자아로 인식하는 일이 먼저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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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ish 님의 리뷰
2019.10.10 22:23:38
영상 - 맑음
그 외 - 폭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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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리 님의 리뷰
2019.10.11 17:44:48
전작의 반복과 변주 사이
섬마을에서 살던 호다카(다이고 코타로)는 가출해 홀로 도쿄에 도착한다. 그는 도쿄로 오는 배에서 우연히 만난 스가(오구리 슌)의 오컬트 잡지 회사에서 일하게 된다. 스가와 회사 직원인 나츠미(혼다 츠바사)와 일하던 호다카는 유흥업소 직원들에게 붙잡혀가는 듯한 히나(모리 나나)를 구해주게 된다. 여름 내내 비만 쏟아지던 도쿄에서 히나가 하늘에 기도를 하면 날씨가 잠시 맑아진다. 우연으로 시작된 둘의 인연은 히나가 ‘맑음 소녀’라는 것이 밝혀지며 동업자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던 중 호다카는 ‘맑음 소녀’에 얽힌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된다. <날씨의 아이>는 <너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이다. 전작을 통해 흥행은 물론,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후 일본 서브컬처를 지배해온 ‘세카이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끌어왔던 그는 <날씨의 아이>를 통해 세카이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꺼내온다.


<날씨의 아이>는 <너의 이름은.>과 상당히 유사하다. 청소년인 소년과 소녀의 로맨스, 두 사람을 중심으로 세계가 회전하는 듯한 쇼트(전작보다 이번 영화에 배로 많이 등장한다), 거대한 자연재해(혜성 추락과 끝나지 않는 폭우), 두 주인공이 세계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아이디어 등이 고스란히 반복된다. 소녀를 상실한 소년이 소녀를 찾아 모험을 강행한다는 플롯 구조마저 전작과 유사하다. 특히 세카이계에 속하는 작품들에서 반복되어 온 멸망이나 종말의 테마가 두 영화에선 자연재해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게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를 반영하고 있다. 신카이 마코토는 <너의 이름은.>에서부터 이 테마를 자신의 중심점으로 잡으려는 모양이다. 때문에 <날씨의 아이>는 나쁘게 말하면 전작의 반복이며, 좋게 말하면 전작의 변주이자 변화이다.


전작 <너의 이름은.>은 분리된 두 평행우주의 접촉이라는 테마를 지니고 있었다. 다른 차원에 속해 있던 소년과 소녀는 머리끈이나 쿠치카미자케 같은 소재를 통해 연결되었다. 반면 <날씨의 아이>는 평행우주를 연상케 하는 묘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비’라는 소재를 통해 단일 우주 안에서 퇴적되고 있는 듯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히나의 지표로써 등장하는 맑아진 하늘 아래 남은 물웅덩이나, 후반부 거대한 재해의 묘사는 접촉으로 인한 연결과 구원이라는 전작의 테마와 구별된다. 도리어 <날씨의 아이>의 테마는 하나의 공간 위에 퇴적된 것들, 그리고 그 위에 최종적으로 올라서게 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일본(특히 도쿄)의 역사나 환경에 대한 이야기까지 꺼내려한다. 영화 내내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기도의 시점 숏들과 끝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신카이 마코토가 <날씨의 아이>를 통해 하려는 이야기가 명확해진다. 이 지점에서 <날씨의 아이>는, <너의 이름은.>이 <신 고지라>와 유사한 전략을 택한 것과는 반대로, 3.11 이후의 일본 영화 중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나 구로사와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 혹은 소노 시온의 <두더지>와 같은 전략을 꾀하고 있다. 이미 등장한 재난을 취소하거나 피해자를 구원하려 하기보단, 이미 벌어진 재난, 퇴적되어 세계가 되어버린 재난 위에서의 삶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물론 둘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선택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답을 내릴 수 없다.


다만 <날씨의 아이> 또한 <너의 이름은.>을 비롯한 신카이 마코토의 전작, 혹은 현재 일본 서브컬처계 전반에 걸쳐 있는 불편한 지점들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피해자, 제물, 구원 대상으로써의 여성 캐릭터를 내세우고, 동시에 일본의 무속신앙이나 신화 등을 차용하여 여성의 신체를 신화화한다. 여성에 대한 양면적인 태도는 영화 내내 등장하는 여성의 몸을 훑는 호다카의 시점 쇼트-그놈의 가슴 집착-들을 통해 드러난다. 머리끈과 같은 전작의 모티프가 이번 작품에 와서 반지와 수갑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은 일종의 퇴행을 보여준다. 두 요소가 상대방을 구속하는 방향으로 향하지 않았다는 지점과는 별개로 말이다. 또한 일본 수사극의 클리셰를 그대로 가져온 것만 같은 일본 경찰의 묘사, 갑작스레 등장하는 추격전이나 불법 총기, 미성년자 성매매, 소녀가장과 아동보호소와 같은 요소는 꽤나 당황스럽다. 어쩌면 <날씨의 아이>가 신카이 마코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상한 영화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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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mon 님의 리뷰
2019.11.03 23:23:47
오타쿠를 위한 로리타 코드만 어찌한다면 다음 작품을 기대할 수 있을 텐데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를 성찰하고자 하는 일본 영화가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 <날씨의 아이> (2019)도 사회 성찰 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 감독은 화려한 작화로 일차원적인 환상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판타지에 기대면서 버텨내면 누군가를 혹은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이라는 이차적인 환상을 구축한다. 하지만, 감독은 후반부에서 층위적으로 형성한 판타지를 완전히 비틀어 버린다. 쉽게 말하자면, 스스로 환상을 만들어내고, 스스로 이를 무너뜨린다. 대단히 염세적이면서, 감독은 ‘일본 사회=공생 사회, 지역 사회, 공동체 사회’라는 일본 현 정권이 억지로라도 지켜내려는 이미지를 과감히 부순다. 자국민이라면 표출하기 힘들 목소리와 태도다. 다만, 이런 결말에도 <날씨의 아이>를 보며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타쿠를 놓지 못한 듯한 감독의 태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타구에게 볼거리를 안기기 위해 집어넣는 로리타 코드는 전작에 비해 더 강화되었다. 결말만 놓고 보면 감독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미성년의 가슴과 노출에 집착하는 이미지를 꾸준히 생산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탄식하게 된다. 또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식으로 ‘총기 사용’을 택한 건 솔직히 말해서 감독에게 신중히 물어보고 싶은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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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1 01:02:50
너의 하늘의 날씨는.
나의 하늘은 너의 하늘과 같을까? 날씨에 따라 사람의 기분이 변한다. 기분을 넘어서 그날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비가 오는 도쿄, 적적하고 우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존재하는 가운데, 맑음 소녀가 나타났다.

맑음 소녀의 의미는 상당히 크다. 사람의 기분을 좌지 우지 할 수 있는 날씨를 움직이듯, 그녀는 존재만으로도 남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행복은 모든 사람과 나누게 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맑음 소녀 히나는 맑은 존재다. 그러나 현실은 폭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상황을 영화에서는 끊임없이 반복을 하며 맑은 날과 비 오는 날을 대비하고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전작들을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로맨스를 다루되, 그 로맨스가 아닌 풍경의 로맨스를 다루는 것을 볼 수 있다. <날씨의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날씨'라는 것을 통해 사람의 기분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고 그 날씨를 통해 배경과 환경의 로맨스를 펼치고 있다. 오로지 날씨만을 통해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어려워서인지, 신화와 풍속까지 나오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기에는 결과적으로 판타지적인 요소를 넣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판타지적인 요소가 등장하면서 흥미롭게 다가올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지만 '판타지적 허용'을 너무나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도 있다.

우주, 바다, 하늘 끊임없는 미지의 공간에 어떤 것이 존재할까? 계속해서 바다로, 우주로 나아가는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하늘에 관심을 보이는 <날씨의 아이>는 하늘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하늘의 세계가 정확하게 깊이 있게 나오지 않고 일종의 신화처럼 느껴지게 하는 부분이 존재하기에 <날씨의 아이>가 다소 아쉽게 다가온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날씨의 아이>는 날씨를 통해 어떤 것을 보여주고자 했는가? 상당히 애매한 것은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에 날씨를 넣은 지극히 평범한 영화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음악의 과 남용을 통해 뮤직비디오처럼 느껴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음에도 적절한 타이밍에 강한 음악을 넣어 위험을 최소화시킨 것을 볼 수 있다.

즉, 장점은 날씨를 표현한 풍경의 로맨스를 가지고 있지만 다소 평범하게 느껴질 수 있는 연출적인 면에서 <언어의 정원>(2013), <너의 이름은.>(2016)에 비해 떨어지는 느낌이 강할 수밖에 없다. 히나와 호다카의 로맨스 역시 강력하지 않다. 애절하게 느껴질지는 몰라도 강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호다카 주변의 캐릭터들에게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요소도 많이 떨어진다. 기본적으로 호다카의 존재 자체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캐릭터라기보다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형적인 캐릭터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날씨의 아이>는 날씨를 강력하게 표현했지만 다른 요소들에서 허점이 너무나 많게만 느껴진다. 이 허점들을 채우기 위해 음악으로 가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기에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위기까지 느껴지지만 그러기에는 '날씨'가 아직까지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2019.10.10 메가박스 코엑스 MX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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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 님의 리뷰
2019.10.10 22:58:56
언제나처럼 예쁜 도화지에
원래 그리던 소년 소녀 한 쌍을 담았네

마흔 여섯의 중년은 아직도
여자 가슴을 보고픈 소년의 마음에
그저 달아나고픈 열여섯 사춘기에
어른들은 이해 못한다는 성장통에
사회의 피상 아래를 들추지 않으려는 외면에

예쁜 도화지에 수채화 한 폭 그리려다
감정을 너무 많이 담아서 종이가 울어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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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님의 리뷰
2019.11.12 08:24:13
묘한 끌림이 있는 영화
#💧날씨의아이 후기(약스포)💧 1. 마동석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MCU의 대열에 합류한 마당에, 신카이 마코토도 MCU가 가능하겠다 싶다.
날씨의 아이는 실상 마코토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

영화 내내 흐르는 귀에 익은 곡들.
반가운 전작의 캐릭터들.
다시봐도 반가운
'너의 이름은'속의 주인공들과 배경음을 '날씨의 아이'에 잘 녹여냈다.
감독이 천재면 이런 점이 좋은걸까.
앞으로의 작품들에서 그는 본인의 작품세계를 어떻게 엮어 나갈련지.
미루던 다른 작품들도 봐야겠다. 조금씩 본 언어의 정원이나 전작들도 영향을 끼쳤음은 당연한 사실.
1-1. '이거 미묘하게 표절곡 같은데? 어디서 들었더라' 했더니 감독이 신카이 마코토고 그 전작에서 들었던 것이었다.

2.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매력적이다.

장발미남 나기선배...최고.
어른의 시각에선 '그만 집에 가자ㅜㅜ'싶은 남주는 적당히 바르고
적당히 재밌고 적당히 막나가고.
뭐랄까..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이 세상에 없을 법한 캐릭터랄까.
물론 어른의 시각으로 보다가도 어느새 주인공들이 이끌어가는 극에 몰입되어, '애들 좀 냅둬라ㅜㅜ' 모드가 된다는게 이 작품의 힘.

3. 극장에서 비가 내리는 일본에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할정도로 엄청난 퀄리티의 작화를 자랑하지만, 뭔가 한 번에 휙 휘어잡는게 없다는 사실은 아쉽다.

다만 잠깐 언급했듯이 캐릭터 하나하나가 살아있어서, 관객들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주인공들의 삶에 대해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을 것.
그 후 그들이 행복하게 살지 어떨지 말이다.
3-1. 사실 그래서 쿠키영상이 있을 줄 알았으나 없다. 머릿속에서 쿠키영상 무한 생성 중.
3-1. 귀엽고 사랑스러운 장면들이 정말 많다.
4. 결론. 괜찮습니다. 볼만합니다. 무난합니다. 한 방은 없지만 나쁘지 않습니다. 소소한 말장난들이 재밌습니다.

Ps. '너의 이름은'을 좋아하지 않지만 좋아한다. 라고 주절주절 써내려갔던건 지운다.
그래도 간단히 남기자면,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며 당황했을 '그 빻음(?)'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이 작품에서는 충분히 이해갈 만한 수준.
너의 이름은은 어느정도 사고가 확립된 고등학생 부터 권하고 싶다면, 날씨의 아이는 초등학생 부터도 무난할 듯.
덧붙임) '너 내 가슴 봤지?'라는 류의 대사가 두어차례 나온다. 한 번은 성인 여성이 남주(만16)에게. 또 한 번은 같은 미성년자 여성이 남주에게. 그리고 남주는 실제로도 봤다. 그러나 그는 본인의 행동이 옳지 않음(?)을 안다. 부끄러워할 줄 알고 그걸 인정한다. '그래서 뭐 어쩔래. 니가 파인 옷을 입고 있었잖아'같은 개소리를 하지 않는다. -반면 '너의 이름은'에선 남주인공이 얼굴을 붉히며 가슴을 주무르는걸 꽤나 오래 보여주지. 여주는 당장 화장실 가서 마주해야할 남자의 성기를 부끄러워 하는 모습만 그려지지만.- 투머치하게.- 이 정도의 성적호기심은 굳이 남녀의 문제가 아니다. 남주에게 '적당히'와 '있을법하지만 현실에 없는 캐릭터'라는 수식어를 준 것은 이 까닭. 영화 속 주인공은 보고 말지만 현실 속 (일부) 애들은 범죄(최소한 성희롱)를 저지르지. 가슴관련한 저 대사와 상황을 두고 여자들이 뭐라그러면 이해하겠는데, 왜 (일부)한남들은 왜 자신들의 행동은 돌아보지 않고 손가락을 놀리는거지....?
도대체 (일부)한남들은 무슨 자신감으로 일본의 성문화를 비판하는가. 자국 문제에 그렇게 나서서 비판해주세요. 이 사람들아ㅜㅜㅜㅜ 제발.... Ps. 또 하나의 뻘생각. 문화적 자부심이 강한 국가들의 영화를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모든 재난은 그 나라들에서만 일어나니 '한국은 언제나 안전하겠다'싶다.


+아이맥스 1회차 하고 다음회차를 바로 예매해 재관람 했다.
두번째 세번째 모두 지루하지 않았다.

#715영화#영화추천#날씨의아이#영화날씨의아이#신카이마코토#날씨의아이시사회#코엑스메가박스#MX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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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9 22:58:26
빛의 언어술사 신카이 마코토가 그려낸 '상실의 시대'
빛의 언어술사 신카이 마코토가 그려낸 '상실의 시대'. 재난과 경제위기에 맞서 다포세대 아이들에게 전하는 따스한 위로.


한핏줄 영화 - 초속 5센티미터, 너의 이름은, 언어의 정원

p.s. 환경오염과 기후변화가 가져올 대재앙에 대처하는 자세. 아름다운 영상미와 대자연에의 경외감,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로서의 자격 충분. 스토리의 개연성은 '너의 이름은'에 못 미치지만 초현실주의와 리얼리티의 데자뷰 황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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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님의 리뷰
2019.11.03 01:46:12
구름 위로 증발한 너와 나의 연결고리
#1. 너와 나만의 세계

신카이 마코토 월드를 설명하는 단어는 '세카이계 (セカイ系)-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 설정이나 과정 없이 세계의 운명이나 세상의 종말 등의 추상적이면서 거대한 문제와 직결되는 작품군'이다.

신카이 감독의 과거 작품을 세 가지 키워드로 압축하자면 1. 멸망 직전의 세계 2.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는 사춘기 소년 소녀 3. 그 둘의 관계에만 집중된 서사이다. 예를 들자면 데뷔작 <별의 목소리>는 우주 전쟁에 참가한 소녀와 지구에 남은 소년의 장거리 연애를,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는 전쟁으로 인해 남북으로 분단된 일본을 배경으로 소녀를 구하기 위한 두 소년의 모험을, <너의 이름은.>은 3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혜성 충돌로부터 마을을 구하는 소년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2. <너의 이름은.> 속 혜성 충돌 모티프가 관객의 마음을 울린 이유

일관된 작품 세계로 인해 '개연성 부족' '공감되지 않는 스토리'라는 혹평을 들은 신카이 마코토지만 <너의 이름은.>만큼은 달랐다. 위에서 설명한 세카이계의 요소는 모두 가져가되, '자연재해'라는 키워드를 집어넣어 관객과 소통하려 했기 때문이다.

3.11 동일본 대지진이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는 신카이 감독은 <너의 이름은.>을 통해서 자연재해로 상처 입은 이들의 마음을 치유하고자 했다. 작중 3.11이라는 사건이 언급되진 않지만, 미츠하가 살고 있는 시간이 3.11이 일어난 2011년이라는 점에서 관객은 3.11을 연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재난 극복기에 청춘 러브 코미디라는 장르를 입힌 덕분에 아픔을 직접 건드리지 않으면서 웃음과 감동을 건질 수 있었다.

#3.<날씨의 아이>가 잊은 것은 현실 세계와의 연결고리

<날씨의 아이>는 지금까지 신카이 마코토가 시도해 온 모든 것들의 집합체다. 이전 개봉한 총 6편의 엑기스를 뽑아 한 작품에 집어넣다 보니 끔찍한 혼종이 탄생하게 된 것뿐. (타키와 미츠하는 왜 등장하는 것이며 여성의 몸을 성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여전했고, 철없는 소년의 고백기는 오글거린다. 어떤 장면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와 하쿠가 손을 잡고 하늘을 나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름다운 작화와 개연성 없는 스토리를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는 최고의 작품이지만 <너의 이름은.>처럼 관객이 살아 숨 쉬는 세계와의 소통을 기대했다면 실망하기 쉽다. <너의 이름은.> 속 혜성 충돌은 3.11이라는 사건을 상기시키며 '만약 3.11을 겪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라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한편으로는 현실과는 반대로 재해로부터 마을을 구하고 다시 만난 타키와 미츠하의 모습은 희망을 주기도 한다. (한국 관객의 경우 혜성 충돌 모티프에 세월호 사고를 대입한 이들이 많다)

<날씨의 아이> 역시 <너의 이름은.>을 따라 재해를 막는 소년 소녀의 감동 서사를 따른다. 히나와 호다카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폭우로부터 세계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들이 돈을 버는 방법은 그다지 아이스럽지 못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비로부터 도시를 구하는 장면 또한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3.11과 같은 현실세계와의 강한 연결고리가 결여됐기 때문이다. SF요소가 가미된 액션 영화를 보는 기분이랄까. 관객과 소통하려 했던 의지는 어디 가고 다시 세카이계의 틀에 갇힌 듯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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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 님의 리뷰
2019.11.02 22:53:28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대신 여러 일본 애니메이션(특히 지브리와 본인의 전작)의 파편들이 겹쳐보인다. 뛰어난 자연 표현의 이유만으로 영화의 완성도가 상승하진 않는다, '라이온킹'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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