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소마 (2019) - 키노라이츠
미드소마 (Midsommar)
드라마 / 2019

개요
드라마, 공포(호러), 미스터리, 미국, 스웨덴, 147분, 청소년 관람불가, 2019.10.03 개봉
감독
아리 에스터
배우
플로렌스 퓨
잭 레이너
윌 폴터
윌리엄 잭슨 하퍼
아치 매더퀴
빌헬름 브롬그렌
율리아 랑나르손
안나 아스트롬
이사벨 그릴
리브 미에네스
비요른 안데르센
군넬 프레드
시놉시스
한여름, 낮이 가장 긴 날 열리는 미드소마에 참석하게 된 친구들.
꽃길인 줄 알고 들어간 지옥길,
축제가 끝나기 전까지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
83.33%
3.41점
키노라이트 분포
18개
90개
별점 분포
예고편
리뷰
54

2019.07.12 01:20:31
오컬트 자체는 공포스럽지 않다는 것을 몸소 입증. 하지제, 지역 풍습 등에 관심이 많다면 흥미로웠겠지만 관객은 주인공들처럼 논문을 쓰는것도 아니고 암시조차 주지 않은 단서들을 파헤쳐가며 영화를 보지 않는다. <유전>에서의 적절한 완급 조절은 온데간데 없고 늘어지는 서사와 이해할 수 없는 상징들로 가득 찬 욕망의 결과물을 본 듯 하다. 이미지적으로 훌륭하고 뇌리에 남는 부분들은 분명히 존재하나, 두시간반을 채우기에는 흡입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 치디 아나곤예... 이쯤되면 논문은 그만써야...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9.07.07 23:54:44
'미드소마' 간단 리뷰
1. 영화가 낯선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굳이 CG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엄청나게 사랑하는 고전 판타지 영화 '네버 엔딩 스토리'도 CG가 없던 시절에 시각효과와 미니어처만으로 전에 볼 수 없었던 세계를 만들어냈다. 낯선 세계는 상상만 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만들어 낼 수 있다(가장 편리한 방법이 CG긴 하다). 그렇다면 낯선 세계에 대한 원초적인 감정을 이야기해보자. 남자라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누구나 겪는 군입대 상황. 가족의 보호, 친구와의 자유분방함을 떠나 통제된 공간에서 규율을 지키며 생활하게 된다. 그 낯선 공간에 처음 당도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떠올려보자. 실감이 나지 않는 며칠(하루나 이틀)이 지나고 나면 그제서야 엄습해오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그곳은 가족의 보호도 없고 자유분방함도 없다. 자신의 일을 온전히 해내지 못하면 돌아오는 것은 무한한 갈굼과 눈칫밥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때 찾아오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2. 아리 에스터 감독의 '미드소마'는 완벽하게 낯선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공간에 들어간 직후, 카메라는 절대 공간을 나가지 않는다. 관객조차 공간 안에 가둬버린 것이다. '미드소마' 속 공간은 대단히 묘하다. 언제라도 나갈 수 있을 것 같지만 나갈 수 없다. 아무도 외지인을 위협하지 않지만 그들은 극한의 위협을 받는다. 대니(플로렌스 퓨)의 어두웠던 세계와 달리 이곳은 지나칠 정도로 밝고 환하다. 어둠은 없지만 외지인들은 누구보다 깊은 심연에 빠져있다. '미드소마' 속 인물들은 낯선 공간의 일상과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 의식과 일상이 외지인들에게는 공포가 된다. 그 경계는 그리 두껍지 않다. 이 사실만으로 '미드소마'의 공포는 좀 더 가깝게 다가온다. 이 마을은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최근에 믿게 된 사실: 잘 만든 공포영화는 '공포' 본연의 감정에 충실하다. 리메이크된 '그것'이나 아리 에스터의 '유전', '바바둑', '팔로우' 등 최근 "잘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은 공포영화들은 '공포'라는 감정이 어디서 찾아오는지 탐구하고 있다. 때로 그것은 아이콘처럼 상징성을 갖기도 하고 미지의 세계로부터 찾아오기도 한다. 그것은 찰나의 감정이 아닌 깊고 오랜 것이기도 하며 반대로 찰나에 찾아와 주저앉아 있기도 하다. '미드소마'의 공포는 '차이'로부터 찾아온다. 차이, 서로 같지 아니하고 다르다. 그게 대체 무슨 공포가 될까? '차이' 그 자체는 공포가 되지 못한다. '차이'가 성립하려면 나와 상대방이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차이의 양쪽에서 힘의 균형이 깨지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나와 상대방은 다르다. 그런데 상대방은 다수이며 그들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간단해진다. 상대방의 다른 점을 온전히 받아들이거나 그 자리에서 도망치거나(나의 다른 점을 상대방에게 설득시킬 수 있는 길은 없다. 힘이 없으니깐).

4. '미드소마'는 설득시킬 수 없는 차이를 마주한 순간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우리 삶 속에서 꽤 빈번하게 일어난다. 앞서 언급한 군입대의 상황도 마찬가지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일, 해외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일, 혹은 회사를 옮기는 일. 모든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두근거림, 설렘 등으로 포장됐지만 사실 그것은 '공포'다. 이 공포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질서에 적응하거나 도망치는 일이다. 그런데 '미드소마' 속 외지인들은 둘 중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고 그들의 질서에 녹아들려 하지 않았다(물론 오랜 시간이 흘러 후자에 이른 사람도 있다). 그만큼 이 마을의 사람들은 위협적으로 굴지 않았다. 이것은 마을의 의식 중 등장한 첫 번째 죽음과도 연관이 있다.

5. 외지인들이 이 마을에서 '첫 번째 위협'이라고 느꼈을 장면은 절벽 장면이다. 여기서 외지인들은 노년의 남녀가 절벽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죽는 모습을 마주한다. 그리고 마을의 장로는 놀란 젊은이들에게 "우리만의 풍습이다. 그 분들도 기쁜 마음으로 떠나셨다"고 설득한다. 만약 이들이 절벽에 스스로 몸을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목을 메달거나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등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방식의 죽음을 맞았다면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행한 '첫 번째 죽음의 의식'(여기서 실패하면 나무망치를 들고 '두 번째 죽음의 의식'을 행한다)이 절벽에서 스스로 몸을 내던지는 것인 만큼 "원하지 않으면 죽을 일은 없다"고 설득시키기 좋다.

6. 여기까지 읽으면 혹자는 "마지막 장면에서 마을 사람들은 종교의식을 빌어 살의를 드러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마을 장로들은 펠레(빌헬름 브롬그렌)에게 외지인(=재물)을 데려오느라 수고했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 죽을 사람을 꼬셔온 사람에 대한 감사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의 가치관에 그들은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닌, 신에게 바쳐지는 '숭고한 영혼들'이다. 애시당초 생명에 대한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기에 이들은 살인이 나쁜 행동이라는 인식이 없다. 이것은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에서 임모탄 조(휴 키스-번)에게 기도하고 목숨을 던지는 워보이들과 같다. 생명에 대한 기준과 가치 자체가 다른 셈이다. 그렇기에 이들에 대해 "악의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7. 그런데 여기서 대니의 마지막 표정이 재미있다. 5월의 여왕이 된 대니는 재물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남자친구였던 크리스티안을 선택한다. 크리스티안은 그들의 의식에 의해 다른 여자와 성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대니는 이 모습을 목격하고 오열했다. 이후 상황은 대니가 재물로 크리스티안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의식을 위한 것으로 포장할 수 있지만 대니의 마지막 미소는 그게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그렇다면 이 마을의 구성원 중 처음으로 '살의를 품고 사람을 죽인 자'가 탄생한 것이다. 이것은 '악의가 없다'고 말한 내 주장에 균열을 낸 것이며 영화 내내 보여준 이 집단의 모습에도 반전을 준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의식에서 재물로 지목된 남자가 몸에 불이 붙자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다. 결국 의식은 허상이라는 것이다.

8. 가장 무서운 살인마는 어떤 녀석일까? 나는 '살의를 드러내지 않은 살인마'가 제일 무섭다고 생각한다. 누가 봐도 사람 죽일 것처럼 생긴 녀석과 바퀴벌레 하나 못 죽일 것 같은 녀석 중 후자가 살인마라면 상대방은 대응도 해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미드소마'의 사람들을 후자에 가깝다. 140분 넘게 꽁꽁 살의를 감춘 마을 사람들은 마지막 5분에 이르러 머리카락보다 얇은 틈으로 "널 죽일 생각이 있었어"라며 살의를 드러냈다. 이것은 대니의 미소와 마지막 사내의 비명에서 드러난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홀로코스트'의 식인종 집단보다 '미드소마'의 마을 사람들이 더 무섭다.

9. 결론: 공포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리고 공포는 얼굴을 감추고 있다. '미드소마'는 얼굴을 감춘 공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과거 고문을 일삼는 수사집단의 고문방식 중 하나는 '악랄한 형사'와 '좋은 형사'가 교차로 등장하는 것이다. 악랄한 형사는 고문과 폭력으로 압박하고 좋은 형사는 회유와 설득을 진행한다. 이 경우 수사대상은 이들이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생각하게 된다. 어느 쪽을 생각하건 배신당하기 마련이다. 이때 찾아오는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꽤 심각하다. 이것은 정신적 고문으로 꽤 효과가 있다고 한다. '미드소마'는 이런 식으로 관객을 옥죄는 영화다. 영화 내내 낮이라고 속지 말자. 이곳의 낯은 도시의 밤보다 더 무섭다.


추신) 리뷰를 쓰면서 어느 순간 '과제'처럼 떠안게 된 것: 기호와 상징을 정하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글 쓰는 것을 지양하자. 내 글이 어느 순간부터 기호와 상징에 전복돼 해석만 하려고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글쓰기에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지만 자칫 편협한 글쓰기가 될 수 있다. 매번 이 방식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다행히 '미드소마'에 이르러서야 나는 기호와 상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흐름을 쫓고 분위기를 봐야 한다. 여기에 기호와 상징을 정한다면 한도 끝도 없이 무한대로 불어날 것이다. 만약 어떤 리뷰어나 유튜버가 이 영화에 대해 '해석'이라며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다면 그 사람은 아주 높은 확률로 '헛소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애시당초 해석이 불가능하고 해석할 필요가 없는 영화가 있다. '미드소마'는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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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 님의 리뷰
2020.01.11 23:48:56
"스웨덴엔 그런 문화가 있나보군요"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미장센과 카메라워크를 고집하며 참신한 느낌을 주는 아리 아스터 감독의 연출이지만, 이 영화가 어디로 갈지도 모르겠고 그게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2시간 반의 러닝타임은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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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민 님의 리뷰
2019.07.26 11:35:23
애써 부정해온 욕망을 기어코 파헤쳐버리는 심리적 호러 영화
-엄습하는 운명-

대니는 두 가지 불안을 안고 있다. 첫째는 가족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대니는 조울증을 앓는 동생에게서 꾸준히 불길한 문자를 받는다. 대니는 문자를 보며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감을 받지만, 별일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애써 그 예감을 무시하려 한다. 그러나 그녀의 불길한 예감은 실현되고 만다. 대니의 동생은 곧 부모님도 자신과 함께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문자를 보내고, 그 날 대니의 가족은 모두 죽어서 대니에게 크나큰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둘째는 주변 인물의 시선에 대한 위기의식이다. 항상 동생을 의식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대니는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에게 자주 의존했다. 크리스티안은 그런 대니를 부담스러워했고, 크리스티안의 친구들도 대니를 불편해했다. 대니는 친구와 통화를 하며 남자친구가 자신을 싫어할까 봐 불안하다고 토로한다. 크리스티안은 대니가 불안정한 상태일 때 마음 놓고 기댈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한다.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살아가던 대니는 스웨덴에 있는 펠레의 마을로 가는 크리스티안 일행의 여행에 동참하기로 한다. 크리스티안의 친구들은 여행에 끼겠다며 나타난 대니를 피해 자리를 옮긴다. 대니도 그 사실을 알기에 여행길에 오르는 그녀의 마음 한편이 무겁다. 그런데 모두가 대니를 피할 때 유일하게 대니에게 공감해주고 대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여행의 주동자인 펠레다. 펠레는 대니에게 공감하고, 그녀를 초대할 수 있어 기쁜 기색을 대놓고 보인다. 그녀와 즐거운 대화를 나눌뿐더러, 자신도 부모님을 잃어보았기에 그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는 둥 그녀의 심부를 자극하는 말까지 한다. 그 말은 부모님에 대한 대니의 트라우마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잔인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에게 공감해줄 사람을 갈구하던 대니의 욕망을 달콤하게 충족시켜준다.

<미드 소마>는 예상하기 쉬운 영화다. 이는 <미드 소마>의 서사가 클리셰로 들어차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의 본심을 꾸준히 암시하고 구현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전부 알고도 어쩔 수 없이 지켜봐야만 하는 무력감을 선사한다. 마을의 문화를 조사해서 논문으로 쓰려던 조쉬는 마을 경전을 찍기 위해 규율을 어기고 죽는다. 전반부 내내 여자 이야기만 하던 경박한 친구 마크는 수상한 여자를 따라가 죽는다. 여자친구에게서 해방되고 싶어 했던 크리스티안은 마을 여인 마야와 성관계를 맺는다.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해줄 사람을 원했던 대니는 자신을 불편해하던 모든 사람이 거세된 마을의 구성원이 된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기 한참 이전부터 등장인물에겐 저마다의 끔찍한 운명이 주어져있었다. 그들이 처음부터 욕망을 향해 내달리지 않는 것은 자라오면서 배운 사회윤리적 통념 때문이다. 크리스티안은 여자친구와의 의리 때문에 마야와 관계를 맺는 것을 주저한다. 대니는 남자친구가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해도 남자친구를 저버리고 펠레와 마을을 선택하지 못한다. 윤리적 통념에 어긋나는 자신의 흉한 본심을 짐짓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드 소마>는 인물이 어떻게든 모른 척하던 본심을 긴 시간에 거쳐 기어코 파헤치고 만다. 실현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가차 없이 실현되고 관객들은 그 과정을 아무것도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한다. 이때 아리 애스터가 관객의 무력감과 고통을 배가하기 위해 선택하는 연출적 수단은 다가오는 끔찍한 운명의 지연이다. 가령, 절벽에서 노인이 떨어지는 씬에서 관객들은 절벽을 비추는 롱숏과 손을 베는 선혈의 이미지, 절벽 위에서의 아득한 부감 숏을 통해 노인들의 죽음을 예감할 수 있다. 한데 노인들은 바로 뛰어내리지 않고 지독하게 긴 의식의 과정을 밟는다. 한 명이 뛰어내려 죽고, 예감은 확신이 된다. 그런데 노인 한 명이 죽고도 씬은 끝나지 않고, 나머지 한 명이 또 절벽 위에 선다. 심지어 그는 절벽에서 뛰어내려서 죽지 못한다. 관객이 미리 보았던 망치를 든 사내가 죽지 못한 노인을 향해 걸어간다. 관객의 감정을 끝도 없이 배가하는 짓궂은 장난. 이때 떨어져 죽는 노인을 지켜보는 인물들은 사건에 개입할 수 없는 관객과 같은 처지에 있다. 끔찍한 사건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인물들의 표정이 스크린에 구현된다. <미드 소마>에는 이런 지독한 리액션 숏이 많이 있다. 곰이 불타는 그림을 두 눈으로 보았는데도 아무것도 못하고 곰 안에 들어가게 되는 크리스티안의 눈빛. 곰 탈을 쓰고 자신의 주변을 휘감아오는 불을 지켜보기만 하는 크리스티안의 눈동자. 제물이 된 크리스티안을 지켜보는 대니의 망연자실한 표정. 불타는 신전 안에서 불을 지켜보는 마을 주민.


-추레한 본심-

절벽에서 떨어지는 노인을 본 대니는 충격을 받고 마을을 떠나려고 한다. 그때 펠레가 짐을 싸는 그녀를 잡는다. 펠레는 대니에게 크리스티안은 좋은 녀석이지만, 그가 너에게 안식처가 되어주냐고 묻는다. 대니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펠레는 대니를 이해한다고 말한다. 자신 역시 부모님을 잃었다고, 그러나 자신은 상실감을 느낄 틈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가 부모님이 죽자마자 마을에 들어와 모두를 가족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미드 소마>의 무대가 되는 마을은 극단적인 파시즘적 매혹을 품고 있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가족이고 동질적 구성원이다.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잠을 잘 때도 프라이버시가 없다. 섹스를 하면 옆에서 수많은 사람이 함께 신음소리를 내며 공명(共鳴)하고, 오열을 하면 마을 구성원이 함께 슬퍼한다. 한 사람이 운다고 해서 모두가 함께 땅이 꺼질 듯이 분노하고 오열하는 모습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대니의 트라우마와 결핍을 해소하는 이 부자연스러운 이미지는 과장된 집단 감성으로 가득 차서 기괴하다. 예견된 일이 거의 다 일어난 후에 대니는 결국 크리스티안을 저버리고 펠레와 키스를 한다. 그녀는 그토록 원했던 가족을 얻었다. 미소를 짓는 그녀의 해괴한 모습. 저마다 내밀한 욕망을 품고 있는 관객들은 그런 부류의 욕망이 이미지로 생생하게 새겨지는 것을 보고 섬찟함을 느낀다. 그 순간 관객이 느끼는 것은 자신의 추레한 본심이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듯한 공포스러운 감각이다. <미드 소마>가 우리에게 끔찍하게 와닿는 것은 말초적 공포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애써 부정해온 욕망이 끝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에 대한 심리적 공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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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lue 님의 리뷰
2019.07.13 00:42:02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며칠 전 용기 내어 챙겨봤던 <유전>. 오히려 그게 독이었던 것일까. <유전>이 생각보다 깔끔하고 흥미로운 지점이 많았기에, <미드소마>가 담고 있는 게 다소 많아 버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영화의 중반부까지 가졌던 기대감과 어느 정도의 확신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잃어버렸던 건지 잘 모르겠다. 아마 대니가 5월의 여왕이 되고 나서부터 약간의 실소를 터뜨렸던 문제의 배드신까지, 너무 버겁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고. 동공지진의 연속이었달까. 길을 잃은 채 영화 속에서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지만 묘하게 재밌어서 너무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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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리 에스터 감독의 ‘공포 영화’가 마음에 든다. 내가 생각보다 공포 영화를 잘 보는 사람이었던 건지 아니면 이 감독의 이런 색깔이 좋은 건지 구분할 능력은 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왠지 그냥, 좋은 것만은 분명하다. <유전>을 곱씹으며 그리고 <미드소마>의 초반 대니의 아픔을 가만히 지켜보며 확신을 가졌다. 그저 어떤 시각적 징그러움이나, 청각적 자극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놀라게 할 생각이 아니라 그는 영화 속 인물의 트라우마를 통해 관객에게 진심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는 보호받지 못한 채, 어쩌면 안쓰럽게 방치된 채 또 다른 이름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의미의 ‘공포 영화’라면, 나는 세상의 어떤 영화보다 아리 에스터 감독의 영화가 제일 무섭다고 확언하겠다. <유전>의 ‘애니’가 자신의 엄마에게 느꼈던 그 공포의 기억을 어느새 자신의 아들에게 되풀이하고 있었다는 것은, 결국 그 트라우마조차 ‘유전’되었다는 것은 내게 슬픔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했었고 <미드소마> 속 대니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 역시 이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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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유전>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적인 공간의 구분이 없었기에 이야기의 흐름이 쉽게 이해가 되었고, 그에 따른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기에도 버겁지 않았다. 하지만 <미드소마>는 대니의 개인사와 연인 사이의 감정싸움, 친구들끼리의 다툼, 새로운 문화와의 충돌 등 끊임없이 끼어드는 다양한 소재들이 영화의 커다란 중심을 조금씩 흔들어놓는 느낌이 들어서 정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에서 꽤 많은 죽음을 듣고, 목격하는 대니가 끝없이 슬픔을 표현하다가 마지막엔 결국 웃음을 보인다던지, 그들 부족의 문화에서는 결국 ‘사람을 포함한 만물은 모두 순환한다’고 생각한다는 것 등 다양한 중심 주제를 흐트리지 않고 지켜가는 것이 보이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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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준에서 아쉬운 점이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와 동시에 감독님의 차기작이 기대되는 것 역시 아주 확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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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18:19:32
인싸들이 또 우리 것을 빼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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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 애스터의 <미드 소마>는 그의 두 번째 작품이지만 그렇게 얕은 소산으로 이루어진 영화가 아니다. 이는 물론 그가 이전에 수편의 단편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귀인하는 중고 신인으로서의 노련함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아리 애스터라는 감독의 영화가 우리가 아는 어떤 것으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지적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장르영화라면 장르영화, 예술영화라면 예술영화에도 속할 수 있는 이 범주에서 우리는 그를 표현할 단어로 컬트라는 문장을 찾아내고야 만다. 그리고 이때 컬트라는 단어가 소수의 팬에게 발굴되어 열광을 얻는 것을 뜻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컬트라는 딱지를 그에게 붙이기 미안해진다. 왜냐하면, 아주 분명하게도 우리가 생각하는 컬트의 범주는 그렇게 긍정적인 것에만 걸쳐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아는 컬트는 작품성은 제하고서라도 대중성이 그리 뛰어난 무언가가 아니다. 하지만 대중성이 곧 작품성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는 대중성이 상대적으로 없는 컬트를 주류에서 벗어난 것, 일종의 하위문화로 생각해왔다. 따라서 우리는 아리 애스터의 영화를 두고 그런 물음을 던져보게 된다. 컬트라는 장르가 하위문화를 대표하는 것인가. 또는, 우리가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려면 단순히 관심과 인기라는 요인 말고는 어떤 것을 주된 홍보요인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1.





인터넷 등지에서 소위 말하는 하위문화를 아싸들의 문화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주류의 바깥에 속한다고 느끼는 이들이 주로 소비하는 하위문화가 그들에게 자기 정체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문장으로 보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 현상은 그들이 말하는 하위문화라는 게 소수에게만 먹혀드는 코드가 아니라 소수에게만 유통되는 코드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쉽게 말해 소수에게만 유통되었을 뿐 소수의 취향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터넷 공간에서 소수 문화의 소비자들은 그들이 향유하는 것들이 단지 집단의 국소적인 공간에 따른 것뿐임에도 그런 공간 안의 문화를 즐기는 것 자체가 자신을 히치적이고 컬트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분야로 보면 홍대의 인디 뮤지션이 영원히 무명으로 남아야 자신만 아는 ‘나만의 작은 ~’으로 남을 수 있기에 지지하는 뮤지션의 성공을 기원하지 않는 뒤틀린 팬심이 이에 해당할 텐데, 인터넷 문화의 경향에서 두드러지는 건 그렇게 국소적으로만 포진하던 인터넷 문화가 양지에서도 인기를 끌 때 그것을 향유하던 이용자들이 거세게 반발한다는 점이다.





“인싸들이 또 우리 것을 빼앗아갔다.”고 그들은 장난스럽게 한탄한다. 이 문장은 진지하게 사용되기보다는 유머에 가까운 성격이기에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발언의 기저에 자신들이 소유한 문화라는 키치적이고 컬트적인 무언가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들이 인터넷 문화를 아싸의 것으로 남겨두려 한다는 공간의 인식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발견되는 중대한 사안은 인싸와 아싸라는 두 개의 분류가 공간의 용법으로 확대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인싸와 아싸라는 단어가 ‘내부자(insider)’와 ‘주변인(Outsider)’이라는 두 개의 용례에서 파생되었음을 고려해볼 때, 인터넷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만 남겨두려는 폐쇄적인 성향은 어떤 면에서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의 그라운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다시 말해서 언더그라운드라는 공간에는 이미 주변인이라는 이름만이 남았을 뿐 소속자에게 그 본질은 주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아싸라는 소속감은 얼핏 보았을 때 정말로 이상한 말이다. 아싸라는 그라운드는 주류가 아니기에 점조직의 형태로 포진해있으면서도 물 밑으로는 점조직의 형태로 연결된 형태를 띤다. 아싸들의 문화가 현실보다 인터넷에서 더 활발한 소통의 형태를 띄는 것도 그런 연결 방식이 이유일 테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화의 연결 방법이 인터넷 문화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은밀한 것이지만 익숙하게 알려진 것이라는 아싸라는 문화적 방식 자체는 일루미나티와 같은 현실의 몇몇 단체에서도 유사하게 관측된다. 여기서 방점은 일루미나티가 아니라 몇몇 단체라는 용어를 선택하는 우리의 기준이다. 점조직으로 포진해 있는 개인들이 하나의 이상향을 향해가는 모습은 그것이 물 위에서 이루어질 때는 그다지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물 아래에서 줄곧 진행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언더그라운드의 것들이 그라운드로 여겨지는 해당 공간에 대해 사람들은 두려움이나 호기심, 둘 중 하나의 감정을 느끼게 되며 그 과정에는 일루미나티라는 음모론이나 ‘인싸들의 아싸 문화 절도’라는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때 해당 문화를 향유하던 원거주민은 자리를 피해 떠나지만 현실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과는 달리 점조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응집하는 게 용이하다. 예컨대, 단단한 지반에 구멍이 뚫려 그 아래에 있는 모래더미로 대지가 가라앉을 때 형체를 유지하는 건 지반이 아니라 지하의 모래더미인 것처럼 말이다.





2.





다시 영화로 돌아와 보면 <미드 소마>의 공간은 내부자와 주변인(외부인)으로 나뉘어 있음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친구들이 스웨덴으로 떠나는 여행은 표면적으로는 기분전환이라는 형태를 취하지만 그 속에는 인류학 조사라는 목적이 담겨있다. 이 대목에서 주인공 남자 무리와 한 명의 여자친구는 서로 다른 그룹에 속하게 된다. 성별로도 나눌 수 있겠지만 남자 무리의 주된 목적은 인류학 조사를 위해 떠나는 것이나 그런 친구의 옆에 동행하는 것이니 영화 전체의 이야기로 보면 그들은 내부자 그룹에 해당한다. 반면 한 명의 여자친구 대니 아더(플로렌스 퓨)는 그런 남자들로부터 정신적으로도 거리감이 있는 상태고 여기에 영화는 그녀의 모든 가족을 배제해버리는 방식으로 그런 거리감에 장력을 불어넣는 단 하나의 끈을 남자친구와의 고리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니까 영화는 남자친구 크리스티안 휴즈(잭 레이너) 그룹 안으로 대니를 편입하는 방법으로 영화의 도입부를 내부자 안으로 들어오려는 외부자 구도로 설정한다.





내부의 안으로 들어오려는 무언가라기보다는 앞서 말한 것처럼 주변인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휴즈와 대니라는 두 명의 그룹이 있기도 하지만 휴즈와 대니가 스웨덴의 마을 공동체 안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실제 공간에서의 분리가 이루어지기도 하니 말이다. 이때 그들 무리에서는 연구자 신분으로 마을을 방문한 이도 있다는 점에서 무리 전체는 단순히 방문객에만 불과하지 않고 조사자라는 신분도 겸하게 된다. 그러니까 무리라는 형체만 보면 하나일 테지만 역할이라는 분류로 보면 그들에게는 두 개의 공간이 주어진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분류에서도 대니는 소속된 지점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좀 전에 대니가 내부자 그룹에게 초대를 받아 스웨덴 공동체에 초대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방문자도 조사자도 아닌 내부자 그룹에 딸려온 사람이라는 제 3의 주변인으로만 존재한다. 그들은 초대를 받아 갔고, 이는 주변인이라는 단어가 초대라는 허가가 있을 때만 비로소 안으로의 출입권한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또한 스웨덴 여행 사실을 들킨 휴즈가 대니에게 마지못해 여행을 권하는 것도 불청객을 초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마을 공동체 입장에서 대니는 예상치 못한 손님인 셈이 된다. 이러한 대목은 대니가 영화 전반에 소속되지 않는 인물로서 영화의 주인공인 이유를 설명해준다.





상태로 따져 묻자면 대니는 세상과 점점 멀어지는 지점 어딘가에 놓여있다. 남자친구와는 이별을 앞두고 있고 가족은 제 곁을 떠났으며 이 두 개의 것 말고는 대니가 어떤 것과 연결되어 있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대니의 휴즈 그룹 이외의 인간관계는 초반에 잠깐 통화하는 여자친구 한 명뿐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대니의 정체성은 확실하지 않거나 불안정해 보이는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가 대니의 시선으로 진행되지만 정반대 편에서, 휴즈의 시선으로 대니를 바라보는 형식이었다면 우리는 대니라는 인물이 정말로 실존하는 것이었는지를 의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니라는 인물이 이 영화에서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할 만큼의 연결고리가 영화 초반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게 대니가 휴즈에게 무서울리만치 집착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고, 스웨덴의 마을 공동체 안에서 대니와 휴즈 커플이 점점 멀어지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영화는 도입부에서 제시하던 혼란스러운 커플의 마지막 감정을 공동체라는 우회지를 통해 종언을 선고해버린다. 마을 공동체라는 우회지를 통해 대니는 휴즈와의 안전한 이별을 수행할 수 있었고 이제 영화 전반에 자리하던 혼란은 사라진 듯 보인다.





3.





영화에서 신성한 장소로 언급되는 삼각형 모양의 노란 건물이 어딘지 모르게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떠오르게 한다면, 아니 그것이 마치 일루미나티의 은밀한 상징처럼 보인다면 우리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컬트적인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생각할 테다. 그렇지만 일루미나티라는 게 실체라기보다는 그 이름 그대로의 상징에 더 가까운 상황에서 음모론이라는 비현실적인 현실의 요소에 대해 우리가 말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본래도 그렇지만 점조직으로 알려진 일루미나티라는 음모론이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유머 소재에 더 가깝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할 무렵에도 그것은 점조직의 형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고, 비유하자면 언더그라운드에 있던 것은 그라운드로 올라와도 그 형질이 변하지 않은 셈이다. 그런데 과연 일루미나티라는 음모론이 있던 곳이 언더그라운드라고만 볼 수 있을까. 일루미타니하면 비밀결사라는 말이 여전히 떠오르지만 그 누구도 비밀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 상태를 두고서 그라운드가 된 언더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미드 소마>가 자기만의 화법을 완성해나가는 방식도 그것과 유사하다. 영화 안에 일정한 법칙을 지정해두고 그곳으로 관객을 인도하는 방식을 취하는 몇몇 영화에서는 세계의 강한 왜곡이 두드러지는 현상으로 관찰된다. 설득력을 준다기보다는 현혹이거나 강탈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한 자장의 영향 안에서 우리는 스웨덴 마을 공동체라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현실의 측면에서도 영화 밖에서 알던 것을 버리고 완전히 이질적이고 새로운 공간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주변인의 신분으로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자리를 옮긴 곳에서 여전한 주변인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건 아무래도 우리가 그곳에 제대로 동화될 수 없다는 사실, 해당 공동체로부터 다시 나오게 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어서일 테다. 예컨대 우리가 영화관에 관객으로서 찾아왔다는 점이 그곳을 여전한 언더그라운드로 남게 하는 것이다.





어떤 광경이 펼쳐지든 간에 우리는 아무런 의문 없이 그에 납득해버린다. <미드 소마>의 공간이 우리가 사는 곳과 살지 않는 곳을 명확히 분리함으로써 논리적으로 자유 혹은 방종이 될 수 있는 책임감의 유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영화를 보는 관객이 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그들에게 여행이라는 행위 또한 여행을 보는 행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이는 영화에서 마을로 오가는 간격이 타임머신처럼 묘사되는 게 환각 약물 때문이라는 점에서도 영화라는 매체가 무엇을 보여주는지에 대한 은유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니가 초원에 누워 한껏 취하고 눈을 떠보면 어느새 마을에 와있다. 예컨대 바깥세상에서 안쪽 세상으로 향하는 중간 과정이 생략된 셈인데, 이는 공간의 전환에 있어 중간지대가 없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시각이 정보를 전달함에 있어 세상과 자신이라는 단지 두 개의 것만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믿음과 의심이라는 두 개의 극단 사이에서 고민하는 대니와 휴즈 커플에게서 대니가 휴즈에게 보내는 믿음은, 휴즈가 대니에게 보내는 불신과 접합되는 지점에서 벌어지는 것들이 스웨덴 마을 공동체라는 공간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여전히 낯인 이곳은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런 비현실을 횡단함으로써 그들은 이미 현실에 대한 의무와 과오를 뒤로 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미 한번의 역전을 겪은 이 세상에서는 언더그라운드였던 것들이 그라운드로 자리하기에 그라운드에 대한 의무는 곧 현실에 대한 의무와 과오를 다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마을 공동체의 미드 소마 의식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은 가차 없이 제거된다. 마을의 절벽에서 72세를 넘은 노인이 떨어지는 의식이 거행될 때 비명을 지르는 두 명의 남성은 (설사 자신의 금기에 대한 대가라 하더라도) 영화 안에서 제거당하며, 순서에는 차이가 있지만 종국에 단 한 명의 생존자로 남은 건 내부에도 주변에도 자리하지 않던 대니이다.





4.





대니에게는 마을 공동체가 대니의 전부라고 보아도 무방한데 반대로 휴즈에게는 이 영화 속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그에게는 이어나가야 할 학업이 있고 여자친구 이외의 다른 여자가 있으며 그것이 해피엔딩이든 배드엔딩이든 간에 열린 세계로의 열린 결말을 추구할 의향이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간에, 들어갔던 의문의 순간만큼 나올 때도 의문의 순간을 거쳐야 한다는 불문율을 지키려고 한다고 볼 수 있다. 넓은 범주에서 보자면 그러한 분리와 순간에 관한 판단은 죽은 노인의 머리를 한 번 더 내리치는 절벽 의식에서도 간접적으로 언급된다고 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마을 사람들은 죽은 노인의 이름을 따서 새 아이에게 붙이는 것으로 환생이라는 하나의 고리가 성립한다고 말하지만 그 중간의 인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상세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노인이 죽고 훗날 아이가 태어났을 때 노인의 이름을 붙여준다면 그 사이의 공백에는 노인이라는 혼령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다르게 보면 이는 대니와 휴즈가 처한 헤어진 것도 만나는 것도 아닌 이상한 상황으로도 볼 수 있을 테다. 그런 맥락에서는 대니의 시선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영화의 마지막이 대니의 시선으로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영화 자체가 의문과 의문 사이에 자리하는 믿을 수 없는 미싱링크인 셈이다.





무엇보다 작중에 등장하는 두 인물의 전공인 인류학은 해당 풍습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직접 방문하는 방식으로 주된 자료 수집이 이루어지는 학문이기도 하다. 공간 안으로의 진입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때 공간 안으로의 진입이라는 말은 공간의 안팎을 분리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낳기도 한다. 어느 선을 넘으면 내부자의 공간으로 진입하게 되는지, 혹은 어느 선 밖에 있어야 주변인으로만 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은 인류학이라는 학문이 본질적으로는 인간이 형성한 공간에 대한 탐구를 진행하는 일을 주된 업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인류학에 대한 시선은 우리와는 다른 무언가, 타자에 대한 호기심으로 접근해 어떤 면에서는 호의라기보다는 불쾌한 쪽의 경이에 호도되는 경향이 있기도 했다. 쉽게 말해 인류학의 연구 대상은 인간을 학문으로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열광하는 특정 범위를 발굴해내는 식으로 컬트화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컬트의 대상이 굳이 하위문화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런 맥락으로 영화를 보면 바깥 자리에 들어온 안쪽의 사람들이 바깥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이 사뭇 신기하게 느껴진다. 주류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따라 달라지는 사안이지만 안과 밖이라는 두 개의 세상이 인싸와 아싸라는 두 개의 용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 바깥 세상에서는 마을 공동체가 다소 이질적인 문화이지만 오히려 이곳에서는 그들이 마을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변인이다. 그리고 이 주변인들은 도심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끝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벤야민식의 방랑자, 빔 밴더스의 독일과 짐 자무시의 미국이 다소 낯설지만 익숙하게 흥겨운 장소인 이유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휴즈와 휴즈의 친구는 마을 공동체를 바탕으로 논문을 쓰는 것을 두고서 갈등을 빚지만, 결국에 우리에게 중요했던 사실은 논문이라는 실적으로도 절도되지 않을 마을 공동체의 운명과 시련에 관한 주객전도, 그 젠트리피케이션에 관한 흥미로운 단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영화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신들의 깊은 욕망>과 비슷한 구석이 많다. 이마무라 쇼헤이 영화의 금기와 서열에 관한 선이 주로 불쾌에 관한 감정을 자아냈지만, 후기작으로 가며 불쾌의 성질이 희망 혹은 희열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도 <미드 소마>에서의 대니가 겪는 감정이 그런 종류의 오르가즘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여기서 지적 하나, 오르가즘은 순간 의식이 끊어진다는 점에서 죽음과 유사하지만 죽음과는 달리 그 뒤의 예후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명백히 다르다. 그 대목에서 이 영화는 대니가 오르가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듯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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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알못 님의 리뷰
2020.01.10 18:13:55
뭔가 특별할 것 같은 고어스런 연출과 불안한 시선들. 하지만 하나하나 해부하면 금방 눈치챌 수 있는 복선들. ‘유전’보다 자극적이나 밀도는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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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1 23:34:42
때로는 그에 상응하는 고통만이 상실의 감정을 잊게 한다. 버텨낼 수 없는 감정들 속에서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어지고, 낯선 고통 속 나와 함께 울어주는 사람들을 안식처로 여기게 된다. 대니가 우는 시늉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구원의 실마리를 얻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혼돈 속에서 복받쳐 울음을 터뜨렸을 때 수 명의 여성들은 둘러싸고 함께 곡을 한다. 주변의 괴로운 죽음들과 그 상실의 감정을 달래기라도 하듯이. 대니는 더 목청껏 서럽게 운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환히 웃는다. 지옥이라도 좋으니 마음의 안식처를 필요로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가 조금 슬프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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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QLSIXNA 님의 리뷰
2019.10.16 22:10:50
세 시간을 긴장하면서 봤다. 세 시간을 긴장시키는 흡입력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유전도, 미드소마 원 개봉판도 보지 않았었는데, 이 영화가 끝나고 당장 유전을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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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크 님의 리뷰
2019.10.09 16:06:35
겹겹이 쌓인 어둠이 광야의 빛을 마주할 때 터지는 최초의 웃음, 혹은 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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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나오는 ‘순환’. 채우기 위해 비우는 사람들. 미드소마가 대니를 초대하며 시작한 축제는 대니가 미드소마를 초대하면서 끝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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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질감들이 스크린을 뚫고 넘치는 것이 좋았다. 울렁울렁 아지랑이가 피어나면 미드소마의 하얀 열기가 느껴졌다. 전개가 빠르지도 않고 음악이 몰아치지도 않아서 더 미치는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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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페리아>는 외부에서 미지인인 소녀가 들어와 모두를 물리치고 어머니의 자리를 꿰차는 구조를 지닌다. 캐릭터와 공간을 비롯한 설정, 전개가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지점이 있어서 생각났다.(둘다 두 번은 못 볼 영화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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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봤던 영화 중에서 ‘철저히 남근의 역할로만 사용되는 도구적 남성 캐릭터’의 묘사가 제일 노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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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맥베스>의 플로렌스 퓨가 아직도 선명하다. 연기하는 캐릭터마다 찰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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