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은총으로 (2019) - 키노라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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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은총으로 (By the Grace of God)
드라마 / 2019

개요
드라마, 프랑스, 137분, 15세 이상 관람가, 2020.01.16 개봉
감독
프랑소와 오종
배우
멜빌 푸포
드니 메노셰
스완 아르라우드
에릭 카라바카
프랑소와 마르튜레
베르나르 베를리
조시앙 발라스코
줄리 뒤클로
잔느 로사
아멜리에 도우레
시놉시스
행복한 가정을 꾸린 알렉상드르는 유년시절 자신에게 성적 학대를 저지른 프레나 신부가 여전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는다.

알렉상드르와 같은 피해를 입은 프랑수아와 에마뉘엘은 더 이상의 고통을 막기 위해 ‘라 프롤 리베레(해방된 목소리)’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교회에 프레나 신부의 파면을 요구한다.

하지만 교회는 공소시효를 내세우며 범죄를 은폐하려하는데…
96.97%
3.85점
키노라이트 분포
1개
32개
별점 분포
예고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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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na09 님의 리뷰
2020.01.16 15:47:09
침묵의 사슬을 깨라, 연대가 가진 힘의 크기
저 깊은 구덩이에 묻어 버린 진실도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 영화는 안타깝게도 실화다. 십수 년 동안 가톨릭 사제가 아이들을 망쳐왔다. 그리고 교구는 사실을 알면서도 함구했다. 교구도 같은 편이었다. 가장 안전한 집이라고 생각한 교회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이다. 일명 ‘프레나 사건’으로 불이며 리옹 대교구 사제였던 ‘베르나르 프레나’신부가 1979년부터 91년까지 70여 명의 스카우트 아이들에게 성폭력을 가한 사건이다.

이는 가톨릭 국가 프랑스에서 매우 논쟁적인 문제였고, 상영 외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걱정 없다. 자국 내에서도 가장 도발적인 감독 ‘프랑소아 오종’이 영화화했기 때문이다. 실제 피해자들을 만나 면밀한 인터뷰를 진행한 것은 물론 교구와 주고받은 편지글을 인용하는가 하면 극영화지만 다큐멘터리처럼 구체적인 팩트도 놓치지 않았다. 또한 프레나 신부의 실명을 사용해 사실감을 높이는 반면 수치스러움은 더했다.

아이 다섯의 아버지 알렉상드르(멜빌 푸포)는 오늘 중대발표를 하려 한다. 어릴 적 자신은 교회에서 성추행 당했고, 그 사람을 고발한다는 내용이다. 결심한 계기는 프레나 신부가 다시 복직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 충격적인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버지는 말한다. “너희도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말거라”. 진실은 언제 어디서든 밝혀지게 되어 있고 희생이 따르겠지만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장면이다. 아버지와 남편의 고백, 한국이었으면 피해자 스스로 사건을 입에 올릴 수도 없으며 평생 혼자 감내해야 할 수치일 뿐이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주변의 시선을 피해 마음으로 품어줄 여력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금 프랑스의 성숙한 의식에 감탄하게 된다.

프레나 신부(버나드 베를리)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혐의를 인정한다. 다만 나는 병에 걸렸을 뿐이다.” 죄를 물으려는 사람, 사과를 받고 싶은 사람을 맥 빠지게 만드는 대답이다. 그것도 한없이 병약한 노인의 얼굴을 하고 뻔뻔하게. 본인은 끝까지 죄를 뉘우치기보다 환자라는 주장에 가깝다. 마치 대기업 회장들이 휠체어에 탄 채 담요를 덮고 나오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하지만 알렉상드르 사건의 공소시효는 만료되었고, 다른 피해자를 수소문한 끝에 ‘프랑수아(드니 메노셰)’를 만나게 된다. 꺼진 불씨를 살려 타오르게 하는 생생한 증언들이 되살아난다. 이에 탄력 받아 다음 타자가 숨을 불어 넣는 작업이 계속된다. 이들의 마음은 한결같다. 다시는 나와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프레나 신부의 처벌이다.

프랑수아는 미디어를 빌어 폭로하고 ‘라 파롤 리베레(해방된 목소리)’라는 단체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도 당했다며 진술하기 시작했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우리는 함께야’라는 연대감이 커진다. 그렇게 단체는 공소 시효가 남아 있는 또 다른 피해자를 찾아 나선다.

‘에마뉘엘(스완 아르라우드)’은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해 긴장감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만드는 인물이다. 불우한 가정사 때문에 심각한 학대를 받게 되었고 신체적 변화까지 겪었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심각한 트라우마로 남은 에마뉘엘까지 힘을 보태며 영화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간다.

한 신부의 장난질에 수많은 아이들이 짓밟혔고 신앙이 흔들렸다. 유년기에 받았던 상처를 애써 숨기고 살았지만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위로받고 힘을 합쳐나간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도 함께하면 해낼 수 있다는 연결의 중요성이 커진다. 모두가 고통 속에서 지난 세월을 속절없이 보냈다. 인생이 완전히 망가진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듯한 가정을 이루고 보란 듯이 잘 살고 있는 사람. 각자의 방법으로 이겨내고 있을 뿐 씻은 듯이 나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구는 이런 말을 한다. ‘신의 은총으로 공소시효가 지났습니다’라고. 이 말은 ‘신의 은총이 있어 다행이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교구의 흠을 덮으려고만 하는 집단의 이기심과 폭력성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영화 <신의 은총으로>는 관행처럼 여겨지는 가톨릭계의 부패를 들추고 있다.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들의 성범죄를 취재해 들춰낸 바 있는 <스포트라이트>와 다른 점이라면 피해자 당사자들이 직접 나선다는 데 있다. 항상 가장 논쟁적인 작품의 중심에 서있는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첫 실화 영화면서도 지금까지 작품들과 결이 다른 영화다. 취향의 호불호는 갈릴 수 있으나 메시지의 영향력은 한 방향이 아닐까 짐작한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피해자를 건조하고 담담하게 바라본다. 프레임 안에서 분노하기보다 차분히 대응하고, 자극적인 장면을 피함으로써 극대화되는 폭력을 마주하도록 구상했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준 것보다 더욱 큰 반향을 이루는 효과라 할 수 있다. 그들을 마냥 도와주어야 하는 약자로 그려내지 않은 점도 눈여겨볼만하다. 바위로 계란을 치기는 가능하다. 끊어지지 않는 단단한 침묵의 사슬이 어떻게 해체될 수 있는지 영화는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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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혁 님의 리뷰
2020.01.02 23:07:09
<스포트라이트>를 기대하고 갔는데 <120BPM>을 보고 나왔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상황을 재현하지만, 그들이 당한 사실을 단순히 영상으로 되풀이하지 않는다. 대신 어떻게 많은 피해자들이 일상적인 상황에서 평범한 방식으로 비극이 시작되었는지를 일깨운다. 기억하는 것은 쉽고 함께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말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므로 영화는 실패한 증언을 비판하는 대신 어렵게 시도한 용기들을 응원한다.

그들의 영화가 좋았던 또 다른 이유는 외부의 무시와 왜곡만을 폭로하지 않고 내부의 균열 역시 기록하기 때문이다. 정의를 위한 열정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피로와 견해의 차이를 모두 담아낸다. 치열하게 토론하며 과잉과 부족을 스스로 깎고 채워나가는 모습은 본인들의 주장처럼 과거의 청산도 현재의 보복도 아닌 미래의 발전을 위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의 불확실함은, 현실의 참담함은 얼마나 희망적인가. 긴 시간동안 그 정도의 결과밖에 얻지 못했다고 보지 말자. 그들은 긴 시간에 걸쳐 작고 확실한 결과를 얻어냈으며, 더 많은 이들에게 참여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기대를 배반하는 영화였다, 물론 좋은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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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트별 님의 리뷰
2020.01.19 21:48:51
당신은 정말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사회적 약속이라는 거대한 구조적인 틀부터, 사랑과 우정 같은 관계의 뿌리 모두 믿음의 토대 위에서 자라났고, 자라난다. 인간의 감정과 행동이 그러한 믿음의 자그마한 흠 하나로도 손쉽게 좌우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그 흠이 한 인간의 삶을 완전히 붕괴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의 결정체로서 유서 깊은 전통을 자랑하는 ‘당신’이 위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여지없이 절대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겠으나, 그 절대적인 것에게 이면이 존재한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 이면에 서서 예외라는 가면을 쓰고 사탄도 고개를 가로저을 추악함을 저지르는 당신의 대리인들이 여지없이 존재한다. 믿음을 양분 삼아 이룩한 터에서, 그 믿음을 도구 삼아 그들은 억압과 폭력을 잉태하여 손을 뻗는다.

‘어린 양’이라는 당신의 언어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다. 손을 뻗는 순간에도, 뻗은 후에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양의 목소리를 듣고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양들이 연대하며 공감과 고통과 균열을 느낄 때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고 움직여지지 않는 그들을 마주하며 이제 우리는 당연히 당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허나 그들을 움직일 당신의 움직임 역시 보이지 않는다. 영향력은 있는데 영향이 미치지 않는 당신의 아이러니에 분노한다. 은총이 언제부터 방아쇠를 달고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어두운 밤에도 당신의 터는 밝은 빛을 내뿜으며 저 높이 서있다.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까. 움직임이 없는 것도 당신의 뜻일까. 당신은 정말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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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1 21:37:16
1970년부터 약 40년간 리옹 교구의 프레나 신부가 보이스카웃 그룹에서 가한 아동성범죄 사건을 바탕으로 한 <신의 은총으로>는 두 가지 키워드를 통해 가톨릭의 위선에 대해 말한다. 침묵과 용서, 이 두 가지 키워드는 주께서 다 바라봐 주시고 있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 침묵의 대화를 나누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 피를 흘린 예수 그리스도처럼 타인을 용서할 줄 아는 관용의 자세를 갖추라 이야기한다.

독실한 신자 알렉상드르(멜빌 푸포)는 이런 가르침 앞에서 혼란을 겪는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을 성적으로 괴롭혔던 프레나 신부가 여전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이에 그는 교회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정식으로 항의한다. 하지만 돌아온 건 침묵하고 용서하라는 대답뿐이다. 알렉상드르가 원하는 건 두 가지다. 프레나 신부의 진심어린 사과와 그의 사제 자격 박탈.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프레나 신부와 오래전 일이니 용서하고 침묵하길 바란다는 바르바행 추기경을 비롯한 이들의 말은 알렉상드르를 더욱 괴롭힌다.

작품은 알렉상드르와 그 피해자들이 '라 파를 리베레(해방된 목소리)'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교구와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변형과 심화를 통해 담아낸다. 만약 이 작품이 시험지라 한다면 높은 완성도를 지녔다 할 수 있다.



먼저 변형의 지점에서 살펴본다면, 이 작품은 고발영화가 지니는 전형적인 패턴을 세 명의 주인공을 통해 매력적으로 비튼다. 알렉상드르에 이어 또 다른 성범죄 피해자로 등장하는 프랑수아(데니스 메노체트)는 그와는 다른 성향을 지닌다. 점잖게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알렉상드르와 달리 잊고 싶었던 기억을 끄집어낸 프랑수아는 폭주기관차처럼 달린다. 말 그대로 불도저 같은 그의 성향으로 사건은 급격한 진전을 이룬다.
이런 진전은 여전히 종교 내에 속하며 프레나 신부에게만 적대를 품은 알렉상드르와 달리 현재는 무교이며 자신의 고통에 침묵한 리옹 교구 전체를 고발할 계획을 지닌 프랑수아의 성향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세 번째 주인공 에마뉘엘(스완 아르라우드)은 그때의 기억 때문에 엉망이 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프레나 신부의 기사를 보고 발작을 일으키는 등의 모습으로 그때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준다. 그도 '라 파를 리베레'에 합류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알렉상드르-프랑수아-에마뉘엘 순으로 주인공이 바뀌는 전개는 호기심을 더한다. 아울러 관객들로 하여금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게 한다. 이는 하나의 사건을 깊게 파헤치며 미스터리의 실상을 알아내고 기나긴 법정 싸움을 통해 분노를 유발해내는 기존 고발영화와는 다른 진행이다. 여기에 문제를 바라보는 이 세 인물의 다소 다른 시각은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한다.



프레나 신부는 자신의 죄를 부인한 적 없다. 범죄 사실이 걸릴 때마다 죄를 인정했으며 그때마다 잠시 교단 외곽에 나가 있다 다시 돌아온다. 이런 점에서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지는 부분에서 큰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 이에 감독은 서로 다른 성향의 세 주인공을 통해 왜 그의 범죄가 40년 간 은폐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폐쇄적인 가톨릭의 성향 때문만이 아니다.

피해자들의 제보를 받던 알렉상드르는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과거 교단에서 일했던 여성은 조카들이 성범죄의 피해자란 걸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조카들은 가족이 이 사실을 알고 상처받고 무너질까봐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사실을 숨겼던 것이다. 이런 경험은 프랑수아의 것이기도 하다.

프랑수아가 성범죄를 당했다는 사실을 고백하자 그의 부모는 보이스카웃에 나가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친구들과 캠프에 가고 싶었던 프랑수아의 형은 화를 내며 신부는 어린 아이들만 건드리니 자신은 괜찮다 말한다. 이날 이후 형은 부모가 프랑수아만 신경 써주고 있다는 생각에 오랜 시간 피해의식을 지니며 가족 사이에 균열을 낸다. 또 알렉상드르의 부모는 '이미 30년 전 일인데 지금 꺼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란 말로 문제를 외면하려 한다. 종교를 향한 가족의 믿음과 가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은 침묵과 용서의 강요로 이어진다.

'라 파롤 리베레' 안의 갈등 역시 이런 부분이다. 처음에는 프레나 신부를 고소한다는 같은 목적으로 모인 이들은 그 방식에 있어 갈등을 겪는다. 교회 전체를 상대하려는 프랑수아의 과격한 방법은 반감을 사고 여전히 종교에 속해 있는 알렉상드르는 그 진심을 의심받기도 한다. 이외에 여러 가지 모습들은 과연 프레나 처벌 이후 이들이 진정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스스로 '얼룩말(지능이 뛰어난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이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에마뉘엘은 프레나 때문에 자신의 삶이 망가졌다 말한다. 하지만 같은 피해자인 알렉상드르와 프랑수아는 건실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이 차이는 프레나 신부 처벌 이후 에마뉘엘의 삶에 미묘한 영향을 끼친다. 다른 피해자들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면 되지만 에마뉘엘은 '라 파롤 리베레'가 삶의 전체이며 자신이 찾은 탈출구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갈등을 겪으며 에마뉘엘은 '나라는 존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을 반복한다.

<신의 은총으로>는 실화를 바탕으로 종교가 추구하는 방향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영화다. 과연 침묵과 용서는 개인의 삶에 있어 도움이 되는 것인가. 정의와 진실은 이루기 힘든 것이지만 그 앞에는 해방과 치유라는 빛이 있다. 그 길을 막는 게 종교가 말하는 침묵과 용서가 아닐까, 영화는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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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1 19:36:48
Tu crois toujours en Dieu?
언뜻보면 성범죄 피해자와 증언, 사건의 전개를 엮어놓은 이야기이지만 결국은 믿음에 관해 묻는다. 누군가의 신념과 믿음을 대표해 짊어진다는 건 그만큼 무겁고, 그래야만 하는 것임을. 쉬지않는 대사는 바로 믿음에 관한 토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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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1 09:36:18
누군가 `침묵은 금`이라고 했지만 그로 인해 사회 곳곳에 병폐들은 만만치 않게 쌓여있다. 그렇기에 시대에 따라 과거에 정설로 여겨졌던 개념들이 조금씩 바뀌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선 `침묵은 병`이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신작 <신의 은총으로>는 가톨릭 신부로부터 유년시절 지속적으로 성적 학대를 당했던 피해자들이 성인이 되어 그 신부와 가톨릭 내부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실화 바탕의 영화이다.


영화는 크게 세 명의 피해자들 알렉상드르(멜빌 푸포), 프랑수아(데니스 메노체트), 질(스완 아를로드)을 통해 전개된다. 여기서 각 인물에게 시간을 할애해 그들의 삶 속에서 유년 시절 당했던 성적 학대가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로 인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담담하게 담아낸다. 그리고 이따금씩 보이는 플래시백을 통해 공소시효가 지날 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고통스러운 상처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은 알렉상드르로 시작해 프랑수아 그리고 질로 바턴 터치를 하듯 영화가 구성되어 있다는 점과 점점 피해자 수가 늘어나며 이야기가 확장되어 간다는 점이다. 이렇게 영화는 전혀 안면조차 없는 이들이 하나의 사건을 통해 접점을 만들어 연대하는 모습을 통해 추악한 가톨릭 내부의 민낯을 강조하는 한 편 깰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침묵에 가린 진실을 밝힐 용기와 위안을 전한다.


그리고 가족들의 리액션은 인상적이다. 보통의 경우 이런 피해를 쉬쉬하기 마련인데 그들 가족은 오히려 그들의 선택에 힘을 실어준다. 물론, 갈등이 보이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오히려 가족 관계의 회복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피해자들에 한정된 이야기라 할 수 없다. 더욱이 성적 학대 사건이 아직 진행 중 아니 피해자들의 상처가 아물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사건이기에 또 아직 드러나지 않은 진실들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한정 지을 수 없다.


이렇게 영화 <신의 은총으로>가 피해자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관객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하느님을 모시는 사제(司祭)가 보인 부도덕한 행태에 반성하지 않는 가톨릭 내부를 고발하는 한 편, 법리적으로 죄의 공소시효가 끝났어도 긴 시간 침묵 당해 병이 돼버린 추악한 `진실` 앞에 그들을 구제할 방법이 없는 것인지를 묻는다.


그렇기에 그 방법을 찾기 위해 피해자들끼리 엇갈린 주장을 내기도 하지만 결국 모두가 바라는 것은 신의 은총으로. 즉, 걱정되거나 좋지 않던 일이 심하지 않거나 뜻밖에 잘 풀려 마음이 놓이고 흡족하게.란 의미를 가진 `다행히`란 단어로 수렴된다. 그리고 `다행히`가 제대로 수렴되려면 부조리 앞에 침묵하지 말라고 영화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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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들래 님의 리뷰
2020.01.09 15:08:41
신의 은총으로
씨네블루밍이 수입한 오종 감독의 신작 <신의 은총으로> 수작이었다. 그의 작품을 더러 보았지만 이 작품을 보면서는 이거 오종 감독거 맞아? 하는 느낌이었다. 작년 69회 베를린 영화제 화제작인 이유가 괜한 게 아니었다 싶을 정도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선호하는 편이라 이번 영화에 대한 기대가 컸다. 오종 감독이 참으로 민감한 소재를 바탕으로 세심하고 설득력있게 만든 작품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베르나르 프레나는 파문 처분 후 검찰 조사 중, 죄목을 인정해서 작년에 재판에 넘겨졌다고 하는데 이 영화에서 그의 실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 법원 역시 실명 사용과 함께 자국에서의 개봉을 허용했다고 한다. 이런 영화는 당연히 그래야 함이 마땅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아주 오래 전 스페인 영화 중에서도 비슷한 영화가 있었는데 제목이 나쁜 교육이었나? 맞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작품 나쁜 교육, 제목에 끌려서 관람했고 분노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런 일들이 끊이지 않은 채, 여전히 현재에도 벌어지고 있다는 생생한 증거들을 오종은 보여주고 있다.

영화란 참 그렇다. 비슷한 류의 영화를 보면 예전에 봤던 영화까지 소환해서 그 영화를 다시 추적하게 된다는 것, 영화가 지닌 장점이자 매력이다.

수도원에서 여성이 피해자로 압박받는 또 다른 영화가 있는데, 그 수도원을 탈출하는 내용의 유럽 영화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의 탈출 시도와, 그때 압권이었던 그녀의 표정!

각설하고 이런 현상이 프랑스에서 뿐이겠는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일들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세상에 알리는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성적 학대도 문제지만 그 일을 덮으려고 한 추기경의 행태도 용납하기 어렵다.

'자유로운 발언'이라는 단체를 결성해서 교회를 상대로 투쟁한 피해자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현재의 삶을 잘 살아가길 기도한다. 그리고 오종의 이번 영화를 통해 부디 이런 기가 막힌 현상들로 인해 피해자들이 최소화될 수 있길. 아니 한 명의 피해자도 발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왜 갑자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꺼내들고 싶어진 걸까? [신의 은총으로] 영화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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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윽 님의 리뷰
2020.01.08 21:34:04
신앙과 교리를 기본 윤리로 해야하는 성직자가 중죄를 저질렀을때, 심지어 가치관이 아직 정립되지않은 청소년을 상대로 성적 폭력을 행하였을때, 일반인의 범죄보다 오히려 더 악랄하다는 것을 여지 없이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실화를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이기에, 마음이 무거울수 밖에 없더군요.

그 기나긴 기간동안 이렇게 하나의 독사과가 자신의 독으로 수많은 어린 영혼을 파괴한 그 뻔뻔함이 무섭게 느껴집니다.

유럽의 직업군중에 밤죄피해상담사가 있는게 참 의미심장하네요. 확실한 사법체계의 단죄만이 피해자의 영혼에 위안이 된다는 단호함이 많이 와닿네요.

종교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를 오종감독이 연출한게 생소하지만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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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8 19:10:00
신의 은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
https://blog.naver.com/renorous/221764240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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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8 11:27:49
'신의 은총으로' 초간단 리뷰
1.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은 단순한 듯 보이지만 실체는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불가피한 가해자'도 있고 '악랄한 피해자'도 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인과(因果)는 아주 복잡한 과정을 가지고 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비난 받을 사람'과 '동정하고 위로해야 할 사람'으로 나누는 일은 어렵게 된다. 법은 때로 사회적 질서에 반하는 판결을 내린다. 이것은 본래 '억울한 가해자'에게 기회를 주고 '악랄한 피해자'가 득세하는 일을 막기 위함이다(그것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때문에 가해자를 벌하고 피해자를 위로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신(神)조차 그것을 똑바로 할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2. 프랑소와 오종의 '신의 은총으로'는 가톨릭 교단에서 아이들을 성추행한 사제를 벌하는 과정을 담은 '정의로운 영화'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국내 수입/홍보사는 그렇게 마케팅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그렇게 단순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홍보의 방향과 상당히 빗겨가고 있다. 영화에는 3명의 사람들이 순서대로 등장한다. 알렉상드르(멜빌 푸포)와 프랑소와(드니 메노셰), 에마뉘엘(스완 아르라우드)는 어린 시절 여름 캠프에 갔다가 프레나 신부(베르나르드 베를레이)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오랫동안 상처를 가진 알렉상드르는 교회를 통해 프레나 신부의 파면을 요구했으나 사건을 은닉한 교회로 인해 벽에 부딪히게 된다. 결국 알렉상드르는 경찰에 이 사건을 맡기고 피해자를 찾던 경찰은 프랑소와를 만난다. 프랑소와는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괴로워 하다가 비슷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라 파롤 리베레'라는 단체를 결성한다.

3. 이 영화가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대단히 흥미롭다. 알렉상드르는 말끔한 외모에 건실한 직장과 다복한 가정을 가지고 있다. 프랑소와 역시 행복한 가정과 아늑한 집을 가지고 있다. 에마뉘엘은 자상한 어머니를 돌보며 쿨한 여자친구와 살고 있다. 이들 중 누구도 어린 시절 성추행 때문에 삶이 망가지고 피폐해졌다는 인상을 주진 않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들은 당시의 기억을 묻어버리고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다. 성추행 피해로 고통받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다만 영화에 그들은 전화를 통해, 누군가의 말을 통해 전해질 뿐 영화에 직접 등장해 이야기를 이끌어가진 않는다. 즉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피해자들은 성추행 피해를 일정 부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4. 위 문장에서 에마뉘엘의 사례에 대해 추가 설명을 하자면 그는 성추행(=폭력)의 피해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자친구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마저 등장한다. 이 장면은 '성추행 피해에 따른 트라우마'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는 어릴적 부모가 이혼했고 당시 상황은 일방적인 폭력이 아닌 '싸움'이다. 이 장면 역시 여자친구를 일방적인 폭력의 피해자로 그리지 않는다. 두 사람은 폭력으로 상하관계가 나눠지지 않은 동등한 관계다. 게다가 폭력의 피해자가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설정은 어떤 이유에서건 '이 사람을 동정하지 마라'라는 의도로 읽히게 된다. 이는 알렉상드르의 다복한 가정이나 프랑소와의 아늑하고 경치 좋은 집과 다른 듯 보이지만 사실 같은 맥락이다.

5. 심지어 피해자들은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활발한 논쟁을 벌인다. 그들은 넓은 집에서 파티를 하고 농담을 주고 받으며 활발하게 미래를 도모한다. 이런 모습은 '가해자'인 프레나 신부와 대조적이다. 그는 늙었으며 영화의 대부분 혼자 있다. 특히 에마뉘엘과 대질신문을 하는 장면에서 프레나 신부는 가해자의 악랄함 대신 늙고 병든 모습으로 수세에 몰린다. 에마뉘엘을 어린 아이 대하듯 하다가 변호사에게 호되게 혼나는 장면이 이를 증명한다. 프레나 신부가 늙고 혼자있다고 그를 동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영화는 그가 젊은 시절 저지른 악행도 함께 보여줌으로써 그가 가해자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킨다. 즉 이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보편적 위치를 희석시키고 있다. 비난해야 할 가해자도 동정해야 할 피해자도 이 자리에는 없다.

6. 이야기가 중반이 지나고 영화는 피해자들이 가진 이면을 공개한다. 알렉상드르의 아내, 프랑소와의 형, 에마뉘엘의 아버지가 그것이다. 이들의 존재는 그들 각자가 가진 피해사실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 알렉상드르의 아내는 자신 역시 어린 시절 성폭행 피해자였기 때문에 남편의 활동을 응원한다. 프랑소와의 형은 동생이 피해자가 되고 부모의 관심을 독차지한 것에 대해 질투하고 있으며 에마뉘엘의 아버지는 아들의 성추행 피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를 비난한다. 이것은 성추행 피해와 함께 수면 아래서 끌어올려진 관계의 이면이다. 오랜 기간 가져온 트라우마는 이처럼 수면 아래 잠들어 있다 한순간 깨어난다. 이제서야 영화는 피해자의 보편적 위치를 정해두고 있다.

7.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자신의 위치에서 이탈시키진 않지만 보편적 관점에서는 벗어나있다. 결말에 이르러서 이야기는 사건의 이면에서 관망하고 있던 어떤 존재에게 접근한다. 바로 '신(神)'이다. 신의 대리인인 교황은 이 사건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추기경은 사건이 덮힌 것에 대해 "신의 은총으로"라는 표현까지 일삼는다. 그리고 알렉상드르와 프랑소와, 에마뉘엘은 환속을 할 지 여부에 대해 토론을 한다. 여기서는 의견이 갈라지게 된다. 이때 나는 이 영화가 '신(神)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야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누구도 동정하지 않고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섣불리 정의를 이야기하지 않을뿐더러 세상은 부조리하고 이면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는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다.

8. 신이 정의롭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 사건은 다수가 있다. 그때마다 신은 어디서 뭘 했는지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다. 결과적으로 신의 질서는 인간의 질서와 다르다. 죽을 것처럼 힘든 인간의 고통도 신에게는 별 것 아닌 일인 셈이다. 이는 마치 '설국열차'의 윌포드(에드 해리스)와 길리엄(존 허트)처럼 부조리 또한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동력과 같다는 논리다. 때문에 영화는 환속을 원하는 프랑소와와 에마뉘엘, 환속을 하지 않으려는 알렉상드르 각자의 명분을 존중한다. 사건이 있었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삶을 살고 있다. 아마 그들 모두 이 세상에서 '신의 은총'을 받긴 어려울 것이다. '신의 은총'은 신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9. 결론: '신의 은총으로'은 '두 교황'과 대립지점에 선 모양새다. 영화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교황에 대해 비난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두 영화는 다른 듯 하지만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신은 우리 주변에 있거나 하늘 높은 곳에 있다. 그리고 그는 어디에 있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즉 신은 먼 존재고 인간은 가까운 존재다.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 아니다. 신에게 정의구현을 바라지 말고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가 있다면 법으로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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