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2019) - 키노라이츠
98
11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The Truth)
드라마 / 2019

개요
드라마, 일본, 프랑스, 106분, 12세 이상 관람가, 2019.12.05 개봉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배우
까뜨린느 드뇌브
줄리엣 비노쉬
에단 호크
클레망틴 그르니에
마농 끌라벨
알랑 리볼트
크리스티안 크라에
로저 반 훌
루디빈 사니에
잭키 베로어
로랑 카펠루토
시놉시스
자신의 회고록 발간을 앞둔 전설적인 여배우 파비안느(까뜨린느 드뇌브).

이를 축하하기 위해 딸 뤼미르(줄리엣 비노쉬)가 남편 행크(에단 호크), 어린 딸 샤를로트와 함께 오랜만에 파비안느의 집을 찾는다.

반가운 재회도 잠시, 엄마의 회고록을 읽은 뤼미르는 책 속 내용이 거짓으로 가득 찼음을 알게 되는데…
92.31%
3.58점
키노라이트 분포
5개
60개
별점 분포
예고편
리뷰
36

오씨네 님의 리뷰
2020.01.14 20:22:57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2019>

새로운 가족이야기가 아직 더 남았을까.
의심을 머쓱하게 만드는 고레에다 감독의 일침.
엄마와 딸 사이, 미묘한 자존심 싸움과 노년기 삶의 회고.

내게 좋은 영화는 세 가지 공통점이있다.
1. 보는 내내 결말이 궁금하고.
2. 끝난 후에 잔상이 남고.
3. 일상에서 문득 떠오른다.

이 영화도 그랬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대부분 떠나지 않고 앉거나 서서 생각에 잠겨있는 관객분들을 보며 다시 한 번 고레에다 감독의 아우라를 체감한다.

문화적 다양성이 제아무리 큰들,
인간사와 가족관계의 애환은 대부분 일맥상통함을 알려주는 고레에다 감독. '가족 이야기가 뻔하지 않나.' 에서 100개의 가족이 있다면 100개 이상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극 중 영어와 불어의 경계가 아무런 의미가 없듯 은은하고 차분하게 설명한다.

냉정한 사람이라 평가받으며 살아가는 현대의 마음 여린자들에게 따뜻한 공감과 위로를 건네는 극 중 '파비안느' 는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두터운 방어기제를 만들도록 만든 당위성을 설득력있게 대변한다.


"기억은 믿을만한 게 못되더라고요."


☆ 4.5 / 5.0



#파비안느에관한진실 #고레에다히로카즈
#까뜨린느드뇌브 #줄리엣비노쉬 #에단호크
#베니스영화제개막작

#movie #film #cinema #instamovies
#영화 #영화스타그램 #무비스타그램 #영화리뷰 #추천영화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BQLSIXNA 님의 리뷰
2019.12.21 21:42:53
전반부는 감독의 자가복제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후반부로 갈수록 나아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히로카즈 감독 영화답지 않게 진부했고, 명배우들의 열연을 볼 수 있었던 것으로 만족했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9.12.20 13:01:30
있다 간 것이기에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는
1.



영화 비평에서 중요한 게 영화 안의 텍스트라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사실은, 기본적으로 영화란 우리 삶의 제언이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영화를 보는 상황이 그렇다. 만약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베네치아 영화제에 가서 보았거나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서 보았다면, 당신은 아직 안나 카리나가 살아있을 때 이 영화를 본 게 된다. 하지만 바쁘게 살다가 12월 14일 쯤에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다면, 당신은 안나 카리나라는 배우의 사망 소식을 품에 안은 채로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안나 카리나라는 배우가 죽었다. 당신이 영화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간에 안나 카리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굳이 사족을 덧붙이자면 우리가 영화를 공부할 때 배우는 역사상의 이들 중에 몇몇은 아직 살아있고, 지금 이 시기는 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때라는 점을 언급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는 꽤 기묘한 느낌을 준다.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로, 교과서에서 보았던 이들과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보았던 시대의 마지막 장이 지금 이 자리에서 끝난다는 점이다.



이 말을 요약하자면 결국에는 전설이라는 용어에 관한 게 된다. 보통 우리가 아는 전설들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데, 그런 이유로 아직 살아있는 이에게 전설이라는 칭호가 붙는 것은 엄청난 찬사가 된다. 이른바 ‘살아있는 전설’, 이것은 우리가 전설이 되고자 할 때 그 결과를 눈으로 목격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이기도 하다. 죽은 이는 말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를 다르게 말해 산 자에게는 기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오직 산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한다.



2.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주된 줄거리는 늙은 여배우와 젊은 딸이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이다. 작중에서 늙은 여배우는 살아있는 전설로 취급받으며 이제는 막 회고록을 쓸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딸에게는 그저 평범한 엄마에 불과하니 시시컬컬한 일로 늘상 대립하기만 할 뿐이다. 여기서 늙은 여배우는 이제 자신은 퇴물일 뿐이라며 자잭하는데, 그런 모습에 진심어린 위로를 건네는 건 오직 하나뿐인 딸뿐이다. 그러니 종국에는 모녀관계라는 가족주의적 테마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이 이야기는 모녀관계가 아니라 사제관계로 보아도 흥미로운 면이 있다.



회고록이란 살아있는 이가 지난 삶을 떠올리며 적는 게 기본 틀이지만, 이미 죽은 사람을 상대로 그를 추모하는 이가 작성해도 별 상관은 없다. 여기서 핵심은 그런 기록이 그렇게 객관적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주관적으로 작성했을 때 너무 사실을 크게 왜곡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삶에서 어느 정도는 숨기고 싶은 게 있을 수 있기에 저자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때 책을 보는 불특정다수의 독자가 아니라, 저자의 삶에 직접 연관된 이라면 그런 기록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을 테다.



영화가 파비안느의 회고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흩어보면, 대체로 그들은 가족임에도 가족처럼 대우하지 않아서 서운하다고 말한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가족 사이에서는 최대한 숨기는 게 없어야 하고, 가족에게만큼은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테다. 그런데 이 중에서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조금은 더 특별한 면이 있다. 일단은 어머니와 딸이라는 여성 간의 관계가 있고, 전설적인 배우와 그런 배우를 선망했던 배우 지망생이라는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관계는 각각, 스승으로서의 어머니와 제자로서의 딸, 배우로서의 어머니와 매니저로서의 딸이라는 독립항을 만들어낸다.



3.



사제관계라는 부모자식 사이, 지원자와 라이벌이라는 부모자식 사이. 이러한 테마는 그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서도 다양하게 변주되어왔다. 그렇지만 내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고레에다가 처음으로 찍은 해외 영화인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도 그러한 테마가 얼추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같은 감독이기에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 또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부모자식 사이는 거기서 거기라는 말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느낀 것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곁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무관심해지거나 모르게 되는 경향이 있다. 쉽게 말해, 집안에서는 너르고 편한 가족의 모습이지만 집 밖에서는 엄청난 스타이거나 거물인 때가 있다. 이는 자식이 부모의 직장생활을 모르는 것과, 부모가 자식의 학교생활을 잘 모르는 것과 유사하다. 즉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가족이라는 관계만이 남고 사회적 관계는 옅어지거나 삭제된다. 다르게 표현하면 가족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의 방패이거나 족쇄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때, 그 가족이라는 것을 일종의 이공간으로 볼 수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것들은, 그 테두리 바깥을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거나 다소 힘든 것들이 많다. 예컨대 ‘가족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의 범주는 생각보다 꽤 넓다. 그렇지만 그렇게 넓은 만큼 세밀한 관계의 밀도까지를 살펴보지 못한다. 이 부분이 영화 제목에서 말하는 진실의 정의와 맥락이 닿는다.



4.



전통적인 측면으로 보면 가족 중에서도 가족을 이끌어가는 리더의 지위가 있고, 핵가족화가 진행된 현재에 그 역할은 주로 어머니나 아버지 둘 중 한 명에게 주어진다. 가족 내에서는 파비안느가 그런 역할을 맡고 있다. 파비안느라는 사람이 가족이 편하게 지낼 공간을 만들어준다면, 반대로 가족들이 파비안느라는 사람에 대해 무언가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그 가족의 범주에는 파비안느가 포함되어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모양으로 보면 가족이라는 보따리의 매듭이 파비안느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이 담론의 영화적 변주를 실현해보자. 영화에서 스크린 안을 규정하는 것은 그것을 촬영하는 카메라다. 이 카메라는 다양한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지만, 편집을 통해 하나의 시선으로 고정된다. 예컨대 우리가 보는 영화는 사실 조각난 시공간의 모음집이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우리는 왜곡된 상을 그리도 자연스럽게 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때 스크린은 그런 왜곡이 벌어지고 묘사되는 이공간이 된다. 말하자면 스크린이라는 것은 가족의 정의와 닮아있다.



이 스크린이 아니라면 정당화되지 않을 일들은 많다. 또한 스크린이라는 것은 다양한 시공간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스크린은 당장은 한 면이지만 동시에 여러 각도로 존재한다. 이것이 영화라는 매체가 매체의 형식으로 심층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그림이나 사진의 단면성이 순간이라는 이름을 만들어낸다면, 영화의 심층성은 편린이라는 이름의 조각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컨대 위의 비유에 따르면 가족이라는 것은 이질적으로 조각난 상태이지만 그 안에서는 해당 사실을 눈치채기 힘든 울타리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족들을 견인하는 것, 하나로 갈무리하는 역할이 바로 파비안느이기에 이 영화의 카메라는 파비안느의 그것에 대응한다. 이런 가정으로 영화를 보다 보면 카메라가 스크린을 응시하는 방식이, 영화 안의 설정과 공명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테면 파비안느가 자신에 대해 쓴 회고록은, 영화의 관점에서는 카메라가 자신을 촬영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파비안느의 직업이 배우이기에 현실과 실재가 마땅히 구분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영화 또한 자신이 바라보는 게 현실인지 실재인지를 마땅히 구분할 수 없었기에, 자신이 있는 그대로 바라본 것을 솔직하게나마 적어둘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5.



현실과 실재의 관계는 다소 따분한 철학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우라는 직업이 그러하고, 가족이라는 관계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배우라는 직업으로 바라보는 가족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서 딸의 남편은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는데, 이 대목에서 딸이 꾸린 가족은 카메라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물론 이것만으로 사위가 밖으로 밀려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카메라 안에서도 중심으로 잡히지 않고, 언어로도 분리된다면 그것은 필시 의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영화는 엄마와 딸의 관계에 집중하고 싶었다는 게 된다. 파비안느의 남편조차도 카메라 안에 길게 등장하지는 않는다. 오직 파비안느와 딸만이 카메라 안에서 정중앙에 자리할 수 있다. 이 형식 자체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포커스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주변부에 무엇이 자리하는지를 목격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모녀관계이지만 사제관계이기도 한 이들의 모습에서는, 가족이라는 정의의 두 가지 형태가 도출된다. 첫 번째는 피로 이어진 가족이고, 두 번째는 마음으로 이어진 가족이다. 그리고 이때 피라는 게 유전자와 같은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연결이라면, 마음이라는 것은 비육체적이고 간혈적인 연결일 테니, 모녀 사이에 부재하는 것은 후자 쪽의 연결이다.



다시 말해서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연결이 영화에서의 가시이자 리니어라면, 우리가 아는 가족의 역사란 있는 그대로 보이는 듯해도 사실은 조각나있다. 우리가 가족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너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집 안에서의 이미지가 바깥에서도 동일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안과 밖이 같을 수도 있다. 집 안에서도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집 안에서는 편하게 지내되 집 밖에서는 사회생활을 위해 어느 정도는 격식을 차리기 마련이다. 영화가 가정하는 것은 그 두 가지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에 관한 잡다한 논설이다.



6.



본래라면 이 글은 여기서 끝났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 안나 카리나에 관한 이야기가 남았다. 우리가 알다시피 안나 카리나는 영화사의 한 시기를 풍미했고, 그 후로도 전설로 회자될 만한 배우였다. 그런데 여기서 안나 카리나에 대한 이야기는 배우로서의 연기만큼이나 인간으로서의 사설이 많았다. 소위 말하는 트리비아나 스캔들이라는 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안나 카리나라는 인간보다는 안나 카리나라는 소문 자체가 더 인격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예컨대 인간에게 그림자가 있다면 인간은 진실이라는 것에 대응될 수 있을 텐데, 본상 없이 소문으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카메라에만 포착될 때 존재하는 인간이 바로 배우라는 직업이다. 이렇게 나열한 문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배우의 존재란 배우라는 직업의 가치이다. 쉽게 말해 배우라는 인간과 배우라는 인격은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 카메라 앞에 설 때 배우라는 인격은 수면으로 올라온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카메라 밖에서까지 배우의 인격을 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삶 전체가 배우라는 인격일 경우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설 자리는 없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연기하는 쪽이 아니라 바라보는 쪽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어떻게 설명해도 결국에는, 영화를 두고서 거짓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스크린 안에 있는 배우의 모습은 기본적으로는 거짓이다. 즉, 기본적인 부분이 아닌 곳에서는 진짜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어떤 경우에도 진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가 처음으로 몸담은 곳이 바로 현실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현실에서 사라지는 것들은 현실에서부터 자신이 방문했던 곳으로 차례로 사라져간다는 것이기도 하다.



감상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배우는 작품 속에서 불멸한다고 말하겠지만, 냉정하게 보면 현실에서 죽은 인간은 작품 안에서도 점점 잊혀지기 마련이다. 이는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무관한 현상이다. 당장 수백 년 전의 그림을 보아도 우리는 그림 안의 이들이 누군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격은 지워지고 캐릭터만이 남는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겠지만 우리가 지금 심영이라는 인물을 언급할 때, 고자라니라는 단말마를 말하지 심영이라는 역사상의 인물을 지칭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7.



안나 카리나가 죽었다. 안나 카리나라는 배우가 죽은 게 아니라 안나 카리나가 죽었다. 안나 카리나는 죽음을 기점으로 서서히 잊혀질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가족이라는 게 그것과 비슷한 것 같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형제자매가 모이는 일이 그나마 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다들 잘 만나지 않게 된다. 사이가 서먹해지는 게 아니라, 그냥 만날 기회가 없다. 영화로 말하자면 카메라가 목격한 장소에서는 시선을 통해 특정한 담론이 피어나지만, 카메라가 떠난 자리에는 그 이전처럼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있다가 간 것이기에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모녀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생각할 테지만, 영화가 남기는 것은 그 후이다. 영화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를 보면, 그것을 말해주기라도 하듯이 영화에서 나왔던 파비안느의 모습이 다른 시점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영화 안에서는 파비안느 개인의 시점이던 것이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끝에서 파비안느를 기다리는 누군가의 시점으로 바뀐다. 이 사족에 대해 우리는 본편이 끝나고 나서이니 무시해버릴 수도 있다. 또는 맥락 그대로, 파비안느가 홀로 걸을 때 사실은 그녀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었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를 엮던 파비안느라는 매듭도 사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존재했다는 점이다.



배우로서의 파비안느가 있고, 어머니로서의 파비안느가 있다면, 파비안느라는 사람이 죽을 때 우리는 둘 중 무엇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 걸까. 둘 다 틀렸다고 보아야 한다. 그곳에는 파비안느라는 사람이 있다. 영화가 남기는 마지막 이야기는 그 두 가지 모두를 거부한 채로 남은 파비안느라는 캐릭터이다. 어느 산책길을 강아지와 거니는 노년의 여인, 본편에서는 근접해서 촬영했기에 강아지에게 말을 거는 것도 나왔지만 엔딩 크레딧에서는 그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그녀는 배우라기보다는 배경의 일부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 삶이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가족 안에서는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에 불과한 것들이 사회로 나가면 한 사람의 성인이다.



따라서 이 영화가 일본이 아닌 프랑스 영화로 촬영된 것은, 공간만이 아니라 공간에 담긴 사람들의 시간조차도 바꾸어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우리가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캐릭터를 지칭하는 것과 유사하니 말이다. 분명, 지구촌 시대에는 어느 나라의 어느 사람들이나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는 점을 깨닫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공간 자체가 갖는 정경은 가족의 시간에 대한 가장 직설적인 논설이 되는 것 같다. 인간사에서 가장 좁은 그룹의 형태가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남 일을 제 일처럼 여기게 되는 게 바로 가족의 범위이고, 이는 곧 우리가 여러 매체에서 보는 이야기를 가족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이 영화의 가족은 티브이 안의 가족들 모습은 무시하면서도 현실 모습을 두고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미디어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배우라는 직업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배우가 되고 싶어요라는 말은, 배우고 싶어요(Be Actress)라는 말로 줄여 쓰는 게 나을 것이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물들래 님의 리뷰
2019.12.17 12:45:55
카트린느 드뇌브의 인생작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새로운 영화, 기대를 안고 기다렸는데 드디어 개봉 박두
예매해 두고 세 배우의 명연기를 만날 시간을 고대하면서, 영화 장면 한 컷 한 컷이 영화를 더 기다리게 만든다.
특히 이마에 깊은 주름까지 멋진 에단 호크의 명품 연기 빨리 만나고 싶다,
카트린 드뇌브와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고...

20191127 수요일 문화의 날,
가장 좋아하는 영화관 씨네큐브에서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관람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그랬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조금은 마음이 밝아져서 돌아가는 길에 잠깐 어디라도 들렀다 갈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드럽고 따뜻한 영화다."
글쎄? 어디라도 들렀다 갈까 하는 생각은 없었고, 일찍 귀가해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차 한잔 마주하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하더라.
기대했던 에단 호크와 줄리엣 비노쉬의 모습보다도 영화의 제목처럼 파비안느에 관한 이야기여서일까? 파비안느로 분한 카트린느 드뇌브의 명연기가 유독 빛을 발하더라. 그녀가 이렇게 섬세하고도 깊이 있는 연기를 하는 배우였던가 싶을 만큼 그녀의 눈빛과 몸짓, 음색, 움직임 모두가 파비안느였다. 눈부신 배우는 없고 눈부신 파비안느만 보였다. 그래서 더 확 와닿던 명대사가 있었지. "나는 배우라서 진실을 다 말하지 않아."
"엄마, 이 책에는 진실이라고는 없네요."라고 말한 딸 뤼미르(줄리엣 비노쉬)에게 건넸던 표현이었지.

"엄마, 당신의 인생은 거짓 투성이네요."
거짓 투성이인 엄마 품에 안기는 뤼미르, 그녀를 진심을 다해 품어 안아주는 파비안느!
나는 인생에서 얼마큼의 거짓으로 치장하며 살아왔을까? 진실만으로 채울 수 없는 게 우리의 삶이지 않은가?
문득 스캇 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언급한 하얀 거짓말과 까만 거짓말이 떠오르네. 그 책이 어디 있더라? 펼쳐보고 싶다.
다시 한번 더 관람하고 싶다. 그러면 어디 잠깐 들렀다 가고 싶은 곳이 생길까?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9.12.14 10:37:43
인생의 말년에 접어든 여배우가 회고록 발간을 준비한다. 회고록을 미리 받은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그 내용에 실망한다. 딸에 관한 내용은 거짓이고 멀쩡히 살아있는 남편은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으며 항상 그녀의 곁을 지켰던 매니저 겸 비서에 대한 내용은 한 줄도 없다. 프랑스 영화의 역사를 함께했다 할 수 있는 대배우 카트린느 드뇌브를 주연으로 내세운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잔잔한 드라마와 진실과 연관된 미스터리가 묘한 결합을 이룬 영화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서구권 진출 작품인 이 영화는 그의 전작 <걸어도 걸어도>를 연상시킨다. <걸어도 걸어도>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오래된 갈등과 그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가는 구조를 통해 가족 간의 따뜻한 사랑을 그려냈는데,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도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부자 관계가 모녀 관계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또 두 작품 모두 손주가 등장해 갈등을 완화시킨다는 공통점이 있다.

모녀 관계인 파비안느와 뤼미르 사이 갈등의 원인과 미스터리의 중심에는 사라라는 여배우가 있다. 한때 파비안느의 라이벌이자 뤼미르가 어머니 대신 애정을 품었던 그녀의 존재는 뤼미르가 파비안느에게 지니는 불만과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상징한다. 이 오래된 갈등은 뤼미르가 회고록 발간을 축하하기 위해 미국에서 프랑스로 오면서 불이 붙게 된다. 그 책의 안에는 어떠한 진실도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파비안느가 진실을 담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최고의 여배우라는 점에 있다. 배우란 직업은 카메라 앞에서 거짓으로 연기를 해야 한다. 기분이 나빠도 웃어야 되고 반대로 좋아도 찡그릴 줄 알아야 한다. 그녀에게는 회고록 역시 대중에게 선보이는 '작품'과 같다. 작품 속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여배우의 모습처럼 스크린 뒤 '인간' 파비안느 역시 대중에게 보이는 모습이기에, 그녀는 완벽한 엄마이자 여자로 자신을 묘사한다.

이런 파비안느의 선택은 뤼미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긴다. 파비안느의 이런 교만은 촬영장에서도 두드러진다. 그녀는 자신이 작정하고 한 연기에 대해 OK 사인이 떨어지지 않자, 감독에게 분노를 표하기도 한다.

파비안느는 식사 자리에서 자신을 질책하는 뤼미르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네가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은 나를 용서할 것이다." 이 말은 카메라 안에 세월을 바친 그녀가 내세울 수 있는 자신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파비안느가 찍은 영화의 내용을 통해 조금씩 서로의 마음을 알아간다.

파비안느가 찍은 영화는 병에 걸린 어머니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우주로 향하고 가끔 딸을 만나기 위해 지구로 온다는 내용을 담은 SF물이다. 우주에서는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흘러간다는 설정 때문에 어머니는 늙지 않지만 딸은 늙어간다. 이 내용을 파비안느와 뤼미르의 관계에 대입하면, 파비안느는 스타라는 병에 걸려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는 어머니와 같다. 또 영화 속 딸은 우주에 간 어머니를 쉽게 볼 수 없고, 뤼미르 역시 영화에 어머니를 빼앗겨 외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파비안느는 노년의 딸 역할을 맡으면서 뤼미르의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젊은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어머니에게서 거리감을 느끼는 영화 속 딸처럼 회고록에서조차 자신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표현해주지 않는 자신에 대해 뤼미르가 느낄 야속함을 헤아리게 된다. 이는 촬영장에서 파비안느의 매니저 역할을 하는 뤼미르 역시 마찬가지다. 뤼미르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지닌 영화 속 딸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뤼미르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우주로 간 어머니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영화 속 딸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파비안느가 지닌 열망과 삶을 향한 열정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여기에 주변 인물들은 두 사람 사이의 드라마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뤼미르의 남편 행크는 3류 배우지만 자신의 꿈을 향한 의지와 믿음을 가지고 있다. 가족을 정성스레 돌보는 그의 모습은 파비안느로 하여금 가정에 충실한 삶 역시 행복을 위한 선택지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손녀 샤를로트는 파비안느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있는 뤼미르나 행크와는 달리 있는 그대로의 파비안느를 바라봐 준다. 파비안느는 샤를로트에게 '마법을 이용해 사람을 동물로 반들 수 있다'고 말하는데, 판타지적인 이 요소는 극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줌과 동시에 소소한 유머로 즐거움을 안겨준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에 모든 걸 건 파비안느는 사람을 대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다른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 내면에 접근하고 관계를 맺는 방법은 잘 모른다. 파비안느의 영화 인생을 곁에서 도운 비서이자 매니저인 뤼크는 이를 알기에 오랜 시간을 그녀 곁에 있었고, 뤼미르가 어머니에게 품은 오해를 해소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영화 속 어머니로 등장하는 마농은 극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서 갈등 해결의 열쇠가 되는 캐릭터가 된다.


영화가 그려내는 파비안느는 거짓 속에 살고 있지만 그 거짓마저 진실로 보이게 만드는 열정과 자신감을 지닌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위트와 진중함 사이를 넘나드는 드라마는 모녀의 관계를 때론 긴장감 있게, 때론 유쾌하게 그려내며 그들이 진심으로 엮일 때 가족이란 이름으로 탄생한다고 강조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첫 해외진출 작품에서 풍성한 드라마를 통해 자신의 장점을 가감 없이 발휘했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답게 사람 사이의 관계와 삶의 양태를 관찰하는 여전한 관찰력과 악인 없는 따뜻한 이야기 역시 인상적이다. 여기에 엔터 사업이 지닌 거짓과 허구성, 판타지와 SF의 요소를 적절히 버무리며 대중적인 색을 덧칠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공간이 바뀌어도 여전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감수성과 이야기의 마력이 존재하는 매력적인 드라마라 할 수 있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9.12.13 17:45:59
고레다 감독의 프랑스버젼
이라는 수식에 충실하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9.12.13 01:40:40
한 여배우(카트린 드뇌브)에 관한 빼어난 초상이자 연기를 통해 허구와 현실의 관계를 탐구하는 탁월한 메타 영화이자 결국은 관계에 관한 성찰을 녹여낸 고레에다표 가족 영화. 일본인이 프랑스에서 찍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물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수준의 연출력을 선보인 고레에다에게 찬사를 보낸다. 노년의 카트린 드뇌브를 이렇게 매력적으로 그려낸 작품은 드물다. 고레에다는 시종일관 경쾌하고 유쾌한 톤의 필치로 극을 전개하면서 줄리엣 비노쉬가 출연했던 <사랑을 카피하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에서의 극적인 설정, <보이후드>에서의 에단 호크의 캐릭터, 에릭 로메르의 <가을 이야기>에서의 알랭 리볼트의 캐릭터, 잉마르 베리만의 <가을 소나타>, <페르소나>, 존 카사베츠의 <오프닝 나이트>를 연상시키는 인물들의 관계 설정과 극적인 구조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면서 탁월한 균형 감각으로 그 모두를 아우르며 또 하나의 우아한 픽션을 완성한다. 영화 속에서 히치콕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흥미롭게도 죽은 사라에 대한 기억 속에 갇혀 있는 파비안느와 뤼미르가 등장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실제로 이 영화 속에서 유머를 유발시키는 <싸이코>나 <레베카>가 연상되기도 한다. 영화 속에 사라의 시점에서 인물들을 바라보는 것 같은 쇼트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연의 일치라고 한다면 신기한 우연이라고 봐야할 듯싶다. 가벼움 속에 사실은 가볍지 않은 삶과 예술(영화)에 관한 깊은 통찰을 담아낸 놀라운 작품이다. (2019.12.12, 12.13 재관람)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타누키 님의 리뷰
2019.12.12 21:52:08
천성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프랑스에 가서 찍은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봤는데 원제가 진실이기도 하고 뭔가 불안한 느낌이었습니다만 역시나 감독다운 영화였네요. 프랑스 배우들을 주로 써서 좀더 강렬한 터치가 느껴지지만 그래도 그의 작품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며 사람의 천성은 오래 볼 수록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인데 그러한 점을 잘 그려내주고 있네요. 그리고 그 또한 상호관계라는 것을~

감독의 팬이라면 당연히 추천드리며 프랑스 배우들 특유의 톡톡 튀는 맛이 가미된 작품이라 더욱더 좋았습니다.

배우의 본성이란~~ ㅎㅎ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DaDaSi 님의 리뷰
2019.12.12 18:14:32
배우와 가족 그리고 진실의 의미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1년에 한 작품씩 열심히 영화를 만드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프랑스에서 제작한 영화입니다. 특히나 이번 작품은 프랑스를 배경으로 프랑스 배우들과 함께 작업했다는 것에 더욱 의미를 가지는 작품이죠. 고레에다 감독이 과거에 연극을 위한 쓴 각본을 토대로, 카트린 드뇌브와 줄리엣 비노쉬가 각본 작업에 직접 참여하여서 함께 작업했다는 것에 더욱 의미를 둘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영화의 어느 지점까지는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프랑스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족이라는 코드가 가지고 있는 틀은 같지만, 그것만 가지고 이 영화가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라고 부르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이 있었죠. 물론, 이런 아쉬움은 영화의 후반부에 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해소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개인적인 감상은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물론, 기존 그의 영화들과는 다르게 유머의 빈도가 높아서 꽤 웃으면서 볼 수 있다는 것과 배우의 캐스팅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가 재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일본에서 찍었다면 더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랑스라는 배경이 주는 메리트가 크게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죠. 특히나 한국 관객에게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만드나, 일본에서 만드나 큰 차이가 없죠. 프랑스 영화의 느낌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반가운 일이거니와 일본 배우가 아닌 할리우드에서도 유명한 배우와 함께 작업을 한다는 것은 고레에다를 좋아하시는 관객분들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주 관객층인 프랑스 관객들은 이 영화를 상당히 좋아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프랑스는 유달리 예술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한국에서도 대중적으로 사랑받지 못한 예술 영화가 프랑스에 흥행하는 경우가 더러 발생하기도 합니다. 프랑스에서 열리는 영화제인 칸 영화제에서 한국 예술 영화들이 상을 많이 받은 것을 생각하면, 그 인기를 실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는 별개로 영화의 결말에 등장하는 메시지는 상당히 감명 깊었습니다. 저는 감독에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더욱 들었는데, 매번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주제와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의 퀄리티가 크게 요동치는 것도 아니죠. 모르긴 몰라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라는 코드보다는 인물들의 직업이 배우라는 점입니다. 영화의 시작은 극 중 대배우인 파비안느가 자서전을 발간하게 되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서 가족들이 모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딸인 뤼미르가 그녀의 자서전을 보고 한 말이 영화의 시작이 됩니다. 그녀의 책에는 진실이 담겨있지 않다는 것이죠.
영화 초반에 보여지는 파비안느의 캐릭터는 상당히 사고뭉치 같은 모습입니다. 한 마디로 지멋대로 사는 사람이죠. 배우인 자신의 사위에게 서슴없이 연기지적을 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연기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거나, 그 자리를 피해버리죠. 그리고 그 뒷수습은 언제나 뤼미르의 몫입니다.

영화는 크게 두 명의 인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파비안느와 그녀의 딸인 뤼미르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파비안느와 그녀의 손녀인 샤를로트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파비안느는 영화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보여줍니다. 적지 않은 나이를 가지고 있지만, 연기에 대한 확신보다는 불안함이 있는 인물처럼 느껴집니다. 대게 자신의 상태가 불안하다고 생각되면, 자기 방어 기제를 발휘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공격성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단점을 들추기 전에 타인을 공격해서, 그 시도를 차단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그녀가 한 이야기처럼 좋은 배우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쁜엄마와 나쁜 아내를 감수할 수 있다고 하죠. 이는 그녀가 배우라는 타이틀에 많은 부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샤를로트입니다. 생각해보면, 영화에 샤를로트라는 인물이 없더라도 이야기 진행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전개에 꼭 필요한 인물과는 조금 동떨어진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샤를로트가 영화에서 하는 역할은 인물들은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는 파비안느 마당에 있는 거북이와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거북이는 영화 내내 등장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느 순간은 없어졌다가, 갑자가 나타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런 거북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인물은 오로지 샤를로트입니다.
거북이와 샤를로트의 공통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같은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죠. 샤를로트는 인물들의 대화나 상황이 펼쳐질 때,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소리를 통해 상황을 인지하는 경우가 많이 등장합니다. 영화의 장면 중에서 행크가 기타를 치는 소리가 파비안느의 침실에서도 살짝 들리는 것과 같다 볼 수 있지요. 이는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은 가족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개봉했던 영화 [윤희에게]에서 등장한 윤희와 새봄의 사이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두 모녀는 서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서로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새봄은 윤희에게 쥰이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을, 윤희는 새봄이 담배를 피우고,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족은 서로에게 말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알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가정 내에서는 아이들을 보면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의외로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눈치를 채는 경우가 많죠. 이는 아이가 눈치를 보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죠.
이와 더불어 거북이를 피에르라고 부르며, 파비안느를 마녀라 칭하는 것 또한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샤를로트는 그런 파비안느가 진짜 마녀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파비안느가 해왔던 일입니다. 배우라는 직업과 관련이 되어 있죠.

배우라는 직업은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연기는 사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느껴지게 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상황은 연출이더라도 배우가 보여주는 감정은 진실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관객들이 그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는 것이죠. 저는 샤를로트가 영화의 관객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파비안느라는 배우가 진짜라고 마녀라고 믿는 것이죠. 그리고 파비안느는 그것을 믿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장황한 설명없이 영화의 한 장면으로 모든 설명이 가능합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들어가는 영상이 그렇습니다. 이 영상을 보고 저는 감탄을 했습니다. 그의 영화를 모두 보지는 못했지만, 제 기억 속에서는 그의 영화에 쿠키 영상을 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굳이 넣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영상이 연기인지, 진짜인지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죠. 이는 영화의 중반부를 넘어설 때부터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 쿠키영상으로 정리하는 것이죠. 저는 이 영상을 보고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이 아님에도, 그것을 사실로 보이게 하는 것이 배우의 힘이고, 배우의 연기를 통해 보여지는 것은 사실이 된다는 것이지요.


영화의 중반부까지 그의 개성보다는 프랑스 영화의 개성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지만, 그 이후에는 그의 개성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항상 비슷한 가족이야기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배우라는 직업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그 결과로 더 좋은 연기, 성장을 하게 되는 인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파비안느와 뤼미르 모녀는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닙니다. 하지만 샤를로트는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대부분의 가족은 샤를로트가 아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해도, 이해해주고 감싸줄 것입니다. 그리고 샤를로트는 가족들이 하는 이야기를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신뢰합니다. 그렇다면, 샤를로트가 성장을 해서 어른이 되면 이런 이해와 믿음은 사라지는 것일까요? 이해와 신뢰. 그것이 가족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것임을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제트별 님의 리뷰
2019.12.11 22:21:02
어쩌면 배우로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본심을 드러내는 때도 물론 많지만, 거의 대부분은 상황에 따라, 관계에 따라, 마음에 따라 적절하게 자신을 덧칠하여 주어진 현실 앞에 내보인다. 그렇게 쌓여 흘러온 ‘나’라는 매개체는, 다부짐과 위태로움의 시소에 앉아 이리저리 널을 뛰면서도, ‘진정한 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나름 묵직한 생각거리 안에 쑥 빠져 들어가기도 한다. 지난해 개봉했던 <완벽한 타인>을 보면서도 느꼈듯 ‘진정한 나’라는 게 꼭 거짓 하나 없이 솔직한, 투명한 날 것의 나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통상 비밀이 없는 온전한 내가 진정한 나라고들 하지만, 수많은 상황,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각자 저마다의 본심을 지니고 감추고 변형하며 타인 앞에 서는 내가 사실은 오히려 더욱 진정한 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그러한 판 안에서 마음의 고삐는 마음대로만 부려지지 않는 법이기도 해서, 우리는 그렇게 구축된 말과 행동 때문에 종종 후회를 하기도 하고, 남에게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래서 비극의 선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그 갈등을 꼭 좋고 나쁨의 잣대로만 가리킬 수 없는 이유는 살면서 봉합과 화합의 맛이 때때로 우리를 적시기 때문일 것이다. 상황과 관계의 삶이라는 판, 갈대 이상의 흔들림을 보여주는 마음, 게다가 언제나 제멋대로인 기억까지 합세하는 이 기막힌 콤비네이션을 대하고 있노라면, 우리는 꽤 대단하고 기특한 선방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엄마, 남편, 장모, 할머니, 친구, 그리고 배우로 살아가는 파비안느를 보며 생각한다. 어쩌면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가면을 체화하여, 그러니까 각각의 꽤 많은 역할을 해내고 있는 옹골찬 배우일 수도 있다. 거기에 바로 머리를 이어 붙이고 마농의 말을 생각한다. 그러한 삶 안에서도, 그저 그 순간을 음미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고.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비밀번호 재설정
새로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비밀번호 재설정
개인정보 취급방침 에 동의합니다.

문의 및 제안
소중한 의견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뷰 신고
편파적인 언행
인종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정치, 종교 등
욕설 및 음란성
타인에게 모욕감이나 수치심을 주는 언행
개인 안전 보호
개인의 사적인 정보, 특정 개인에 대한 강도 높은 비방, 혐오 발언
도배 및 광고
영화를 보지 않고 남긴 것이 분명한 리뷰
스포일러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