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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 (Joker)
범죄 / 2019

개요
범죄, 드라마, 스릴러, 미국, 123분, 15세 이상 관람가, 2019.10.02 개봉
감독
토드 필립스
배우
호아킨 피닉스
로버트 드 니로
프란시스 콘로이
브래트 컬렌
마크 마론
쉐어 위햄
빌 캠프
재지 비츠
시놉시스
고담시의 광대 아서 플렉은 코미디언을 꿈꾸는 남자.

하지만 모두가 미쳐가는 코미디 같은 세상에서 맨 정신으로는 그가 설 자리가 없음을 깨닫게 되는데…
89.94%
4.18점
키노라이트 분포
17개
152개
별점 분포
리뷰
123

2019.09.26 21:25:19
'조커' 간단 리뷰
1.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칭송받을 수 있지만 대다수의 경우에서 그것은 '차별' 당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우리나라에서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겪는 일이기도 하고 지체 장애가 있는 사람들, 성소수자들도 일상에서 '개성'이라며 인정받는 것보다는 차별당하고 무시 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가정이나 학교 혹은 직장에서 차별 당하고 무시 당한 존재들은 그것에 좌절에 무너지거나 그것을 극복한다. 다만 아주 소수의 경우로, 차별 당한 존재들은 괴물이 되기도 한다. 영화나 소설 중 많은 이야기들은 이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대체 "괴물은 멀리 있지 않다"는 말을 한다. 토드 필립스의 영화 '조커'는 히어로무비 역사상 최고의 빌런으로 손꼽히는 조커를 우리의 일상 곁으로 끌어내린다. 가히 무자비한 짓이라고 볼 수 있다.

2.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직업은 '출장 광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신병원에서 지내다 나왔고 어머니 페니 플렉(프랜시스 콘로이)의 집에 얹혀서 지낸다(우편함에 적힌 집주인 명의가 페니 플렉이다). 광대(혹은 코미디언)라는 직업은 앞서 말한대로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 슬프거나 아픈 일이 있어도 늘 웃어야 한다. 심지어 광대는 울고 있어도 웃는 표정이고, 반대로 웃고 있어도 우는 표정이다. 다시 말해 광대는 늘 차별에 노출돼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예능 토크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코미디언들이 길을 걷다 초등학생들에게 반말로 이름 불리는 경우를 여럿 들을 수 있다(과장되기도 했겠지만 영 일어나지 않는 일은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TV에 나와서 웃음을 주는 직업들에게 이는 숙명과도 같은 일'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넓은 범주에서 '차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조금만 과격한 시대에 살았다면 무명 코미디언도 길을 가다 나쁜 아이들에게 이유없이 얻어 터질 수 있다.

3. 아서는 광대라는 위치에 걸맞게 뭐든지 반대다. 남들과 웃음코드도 다르고 출구로 들어가려고 한다. 일부러 왼손으로 글씨를 쓰고 괴롭거나 슬플때마다 웃는다(병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분명 다수와 다른 사람이며 그 때문에 무시당하고 얻어터진다. 그동안 조커의 매력은 이런 아이러니에서 있었다. 끔찍한 짓을 하면서 웃고 공포와 혼란을 조장하지만 정작 본인은 춤을 춘다. 영화는 이런 아이러니의 기원을 '광대'라는 분장에서 찾고 있다. '배트맨'이나 '다크 나이트'를 보면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던 대목을 영화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때문에 영화 '조커'는 지극히 예상 가능한 이야기다. 유약했던 아서 플렉이 어떻게 영화 사상 최악의 빌런으로 거듭나는지 보여주는게 이 영화의 목적이다. 그가 광대라는 점과 주목받고 싶어한다는 점, 그리고 웨인 가문에 대한 분노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마지막은 배트맨 영화들에서 언급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영화는 그것들을 찾아가는데 현미경을 가져다 댄 것처럼 아주 성실하다.

4.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충실하게 짜여진 캐릭터와 함께 그것을 표현해내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다. 이 영화는 배우가 영화 그 자체인 작품이다. 호아킨 피닉스는 목소리와 표정뿐 아니라 몸짓과 골격 하나까지 완벽하게 아서 플렉,(a.k.a. 조커)이 된다. 눈은 울면서 입만 웃거나 눈은 화내면서 입은 미소짓는 표정들은 가히 압권이다. 여기에 굽은 어깨뼈나 기이하게 패인 갈비뼈는 캐릭터의 기괴함을 더 잘 표현해준다. 정말 "이 배우는 뼈도 연기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리고 아서 플렉을 지나 조커에 이르렀을때 변화도 놀랍다. 영화 내내 "이토록 유약한 남자가 어떻게 조커가 될까" 궁금했다. 그런데 아서 플렉이 조커에 이르는 과정은 일종의 '해방'이다. 어깨뼈를 짓누를 정도의 차별적 시선과 갈비뼈를 패일 정도로 만드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정말로 남들과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다름이 아니라 '윤리·도덕적으로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호아킨 피닉스는 이 모든 것,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는 해방을 모두 연기해낸다. 가히 놀라운 연기다.

5. 상업영화적으로 생각하자면 조커를 더 조커답게 할 대항마(빌런)는 반드시 필요할 수 있다. 록키(실베스터 스탤론)에게는 이반 드라코(돌프 룬드그렌)가 있고(혹자들은 '아폴로' 얘기를 하는데 나는 이반 드라코다) 슈퍼맨에게는 렉스 루터가 있다. 서도철 형사에게는 조태오가 있고 마석도 형사에게는 장첸이 있다. 강백호에게는 서태웅이 있고 하니에게는 나애리가 있다. 주인공이 있다면 그를 돋보이게 할 빌런은 있는 것이 좋다.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이끄는 방법이다. 그런데 '조커'에서는 그런 대항마가 없다. 토마스 웨인(브레트 컬렌)조차 조연에 불과하고 브루스 웨인은 아직 꼬마다.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니로)의 역할도 크지 않다. 이 영화에는 오직 조커만 있다. '빌런이 있다'는 발상은 앞서 말한대로 상업영화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상업영화적인 것'을 포기했을까? 그저 어려운 길을 갔다고 보는게 맞다. 빌런을 포기하고 조커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해한다. 그와 동시에 "너희 중에도 조커가 있다"며 조커를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이보다 무시무시한 저주가 있을까?

6. '조커'는 정치적 해석의 여지가 많다. 영화는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의 고담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대는 빈부격차가 심하고 가진 자들의 오만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 있다. 혼돈과 불안의 도시 고담은 '배트맨'에도 등장한 대목이다. 그 시대에 대해 영화는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본다. 혼돈과 불안의 시대에서 무정부주의적 행동은 더 가까이 다가올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폭탄처럼 잠자코 있다가 뇌관을 건드리기만 하면 겉잡을 수 없이 터질 것이다. 분명 이것을 두고 '(부자) 트럼프 시대에 대한 경고'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만 다소 구차해보여서 거기까지 가진 않겠다. 빈부격차와 프롤레타리아의 분노는 정말로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시절부터 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이다(조커가 등장하는 과정이 '모던 타임즈'를 참고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7. 결론: 영화 '조커'가 나온다고 했을 때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좋아하는 캐릭터를 봐서 반갑긴 했지만 조커의 매력이 반감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커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크나이트'에서처럼 '이유없이 미친놈'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조커'를 계기로 '이유있는 미친놈'이 됐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유가 있어도 미친놈은 미친놈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했고 조커의 매력을 더 배가시킨 것은 배우 호아킨 피닉스의 힘이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히스 레저의 조커마저 지워버리게 만들었다. 이제는 히스 레저의 조커를 떠나보내도 될 것 같다.


추신1) 만약 사람들이 "영화 '조커'를 아이맥스로 보는게 좋은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가능하면 큰 화면가 짱짱한 사운드에서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영화 '조커'는 스케일이 큰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한 개인에게 집중하는 영화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불안, 분노, 좌절, 광기 등 오만 감정에 온전히 몰입하는데 큰 화면과 짱짱한 사운드는 큰 도움이 된다. '조커' 덕분에 아이맥스의 새로운 활용 가치를 알게 됐다. 그리고 한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스펙타클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추신2) 끝내주는 노래가 많이 나온다. 예고편 영상에도 들어간 지미 듀란티의 'Smile'도 그렇고 엔딩크레딧 때 흘러나온 'Send in the Clowns'도 좋다. 그런데 후자에 나온 곡은 김연아의 쇼트 프로그램 음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대결은 지금부터다. '조커'를 보면서 김연아를 떠올릴까, 아니면 김연아를 보면서 '조커'를 떠올릴까. 그게 궁금해서 이 글을 쓰기 전에 김연아 소치 동계올림픽 경기영상을 찾아봤다. ...그래도 아직은 김연아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동구리 님의 리뷰
2019.10.02 22:38:08
사유 없이 폭력을 다루는 유해함
*스포일러 포함



“현실의 일이나 사상이 담길 수는 있지만, <조커>는 80년 전과 마찬가지로 가상의 인물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가장 심기가 불편한 부분은 백인 남성에 대한 비뚤어지고 다른 기준이다. 백인 남성이 300명 이상을 죽이는 <존 윅 3: 파라벨룸>을 보며 관객들은 웃고, 통쾌해하고 함성을 질렀다. <조커>를 다른 시선으로 보는 이유가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다." 토드 필립스 감독의 말이다. 그가 <조커>에서 <택시 드라이버>와 <코미디의 왕>의 오마주를 등장시키며 존경의 뜻을 내비치기도 했던 마틴 스콜세지는 자신의 영화 속 인물과 사람들이 동질감을 느끼는 것에 대해 “자신은 관객들이 그 영화들의 주인공에게 몰입할 줄 몰랐다”라고 이야기한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과 같은 가시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조커>가 실패작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틴 스콜세지는, 물론 마초적이며 폭력적이고 정신분열적인 남성이 등장하는 영화를 계속 만들어왔지만,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에 관객들이 과몰입하는 것을 경계했다. 특히 <택시 드라이버>의 개봉 이후 벌어진 모방범죄 사건 이후 이러한 경계심이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반면 토드 필립스는 이러한 경계심이 없다. 물론 영화감독이 영화 밖에서 벌어지는 모방범죄 사건을 영화 제작 과정에서 예방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마틴 스콜세지나 <다크 나이트 라이즈> 상영 때 벌어진 ‘조커’ 모방범죄 사건 이후 <조커> 북미 개봉의 여파를 염려하는 언론들처럼 경계심을 갖는 일은 영화가 폭력, 범죄, 마초적 남성성, 테러 등을 어떻게 담아내야 하며, 그것과의 거리두기를 어떻게 시도할 것인가에 대한 사유를 가능케 한다. 하지만 <조커>에는 이런 사유가 없다. 토드 필립스 감독의 발언은 영화에서 폭력을 어떻게 보여주는지에 대한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존 윅>이나 <조커>나 어차피 영화라는 가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두 사례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뉴욕과 같은 현실 속의 공간들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세계는 완전한 창작물이다. 후자의 경우 고담이라는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사용하지만, 그곳에서 벌어지는 폭력들은 현실의 폭력들에서 가져온 것이다. <조커>의 맹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조커>는 마치 자연재해처럼 갑작스레 고담을 뒤덮은 절대악으로서의 조커를 그려온 앞선 영화들과는 다른 노선을 취한다. 이번 영화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이라는 개인이 어떻게 조커라는 희대의 악당이 되었는지, 그 기원을 탐색하는 작품이다. 아서는 코미디언을 꿈꾸는 광대이다. 그는 광대 분장을 하고 폐점 세일을 홍보하거나 아동병원의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한다. 동시에 코미디언의 꿈을 놓지 않기 위해 조크 노트를 적기도 한다. 또한 그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 그는 정기적으로 상담사를 찾지만 별 효과는 없다. 그리고 그는 몸이 불편한 노모와 함께 살고 있다. 고담의 재벌 토마스 웨인(브래트 컬렌)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했던 노모는 금전적인 도움을 바라며 편지를 쓴다. 그리고 아서는 수많은 이들에게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폭력을 당한다. 폐업 세일을 홍보하던 아서는 길거리의 청소년들에게 광고판을 빼앗기고 폭행을 당한다. 술 취한 지하철의 화이트칼라들은 그를 비웃는다. 상담사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광대들을 관리하는 회사의 사장은 어처구니없는 사유로 그를 해고한다.

<조커>는 123분 동안 아서 플렉이 놓인 위치가 폭력의 한가운데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영화가 묘사하는 대로라면, 아서는 분명 폭력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그리고 아서는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의 폭력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영화가 덜컹거리기 시작하는 것은 이 부분에서 시작된다. 아서가 저지른 첫 살인, 토마스 웨인의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세 명의 백인 남성 화이트칼라를 죽인 이후, 아서의 광대 분장은 일종의 상징이 된다. 이것은 일종의 자본에 대한 혁명과도 유사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아서의 마지막 살인은 그가 존경해오던 코미디언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 니로)이다. 머레이는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 서 웃기만 하는 아서의 영상을 자신의 쇼에서 공개하며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그 이후에 아서를 쇼에 출연시킨다. 아서는 그 자리에서 세상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음을 토로하고 머레이를 총으로 쏜다. 그의 이 두 살인(그 사이에 다른 살인들도 존재하지만)은 고담에서 벌어진 폭동의 기폭제가 된다. 아서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으며 시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폭동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아서가 어느 정신병동에 수감되어 상담을 받고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아서는 상담사에게 “아주 큰 조크가 생각났다”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아서는 모든 폭동이 마무리되고 복수의 살인사건의 범인으로써 체포된 것일까? 혹은 그가 말한 ‘큰 조크’가 그 장면 직전까지 벌어진 영화의 모든 사건이 그의 머릿속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인가? 사실 이것을 판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영화의 중후반부 즈음, 아서의 애인처럼 보이던 소피(재지 비츠)는 사실 아서가 스토킹 하던 옆집의 여성이었을 뿐, 아서와는 제대로 대화도 해본 적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 장면에서 아서가 정신착란을 겪고 있으며,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을 실제라고 여긴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지점부터 영화가 보여주는 대부분의 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에 대한 의심이 간다. 이 지점을 통해 영화가 아서 플렉이라는 캐릭터를 동원한 인셀 (INvoluntary CELibate, 비자발적 독신주의자) 케이스 스터디라는 알리바이가 주어지는듯하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 병동 복도를 걸어가는 아서의 걸음걸이엔 붉은 발자국이 남아 있다. 아마도 자신을 상대하던 상담사의 피일 것이다. 아서는 결국 사람을 죽였다. 그 장면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아서의 뇌 속을 탐험하는 듯한 환영이던, 정신병동에 수감되기 전 그가 실제로 저지른 일인지는 중요치 않다. <조커>는 관객으로 하여금 아서 플렉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며 영화 내내 그만 보게 한다. 종종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로 그로테스크하게 과장된 아서의 몸동작을 로우 앵글로 담아내며 그의 불행에 관객이 동참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아서 플렉을 따라가는 동안 관객의 시야에 다른 캐릭터의 입장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영화 내부에는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아서의 행동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던 인물인 머레이는 그에게 죽임을 당한다.


결국 <조커>에는 아서 플렉을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토드 필립스는 아서라는 폭력적인 세계 안에 관객을 깊숙이 집어넣는다. 때문에 <조커>는 인셀에 대한 케이스 스터디와 향후 배트맨이 활동하게 될 세계관에 대한 인트로, 조커라는 악당에 대한 단순한 기원담의 영역에만 머무는 영화가 아니게 된다. 물론 이 영화가 관객이 조커에 동참하도록 하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몇몇 관객이 자신과 조커를 동일시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영화는 관객이 조커에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충분히 조성하고 있다. 이는 폭력에 대한 성찰과 사유 없이 조커라는 폭력의 이미지에만 심취한 토드 필립스의 계산착오이며, 기원담이 불필요했던 미지의 절대악에 대한 탐구를 스콜세지의 영화들을 비롯한 온갖 클리셰 범벅으로 스케치해 놓은 것이 불과하다. 때문에 <조커>는 감독이 스스로 드러낸 사유의 부재가 영화를 얼마나 납작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케이스일 뿐이다.


p.s. 토드 필립스는 DC 다크 유니버스(DC코믹스의 빌런이나 안티히어로 캐릭터들의 영화화)를 제안했다지만,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웨인 부부의 사망 장면은 너무나도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속 같은 장면을 연상시키기에, 만약 <조커>가 성공한다면 DCFU 세계관에 은근슬쩍 편입시키려는 시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moviemon 님의 리뷰
2019.10.03 00:40:44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자 완성된 음지에서의 정서적 정화
코믹스 영화 최초 제76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의 영예를 안은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 (2019)는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트라우마나 콤플렉스를 밖으로 배설해 정화한다는 카타르시스의 정신분석학적 정의를 ‘조커’ 캐릭터로 풀어낸 작품이다. ‘조커’의 기원은 원작에서 공식화된 탄생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에 토드 필립스 감독은 본인이 생각하는 다면적인 ‘조커’를 구상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불명확성으로 가득한 ‘조커’의 정체성이 자리를 잡고 감정이 정화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펼쳐낼 수 있었다. 또한, 영화 속 시대적 배경을 코믹스 속 세상에서 벗어나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안팎으로 들끓었던 미국의 상황을 고려해 1981년 고담시로 설정했는데, 이는 ‘조커’로 재탄생하기 전 ‘아서 플렉’과 관련된 설정과 맞물리며 이 영화가 제공하고자 한 카타르시스를 더욱더 극적으로 일으킨다.

영화 <조커>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공공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된 고담시의 상황을 뉴스 매체로 전달하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과 그의 어머니 ‘페니 플렉(브래트 컬렌)’처럼 사회적 약자를 더 소외시킬뿐더러, 이 상황 자체가 ‘아서 플렉’의 상황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아서 플렉’은 어머니가 붙여 준 ‘해피’라는 이름처럼 세상에 웃음과 기쁨을 줄 수 있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꿈꾸며 광대로 벌이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스탠드업 코미디를 진행하는 클럽을 방문한 ‘아서 플렉’이 계속해서 군중이 웃음을 터뜨리는 지점으로부터 엇나가는 지점에서 웃음을 짓는 장면을 고려한다면, 그의 웃음은 어딘가 기괴하다. 게다가, ‘아서 플렉’이 한 번 웃음을 터뜨리면 멈추지 못하고 몇 분 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은 그의 웃음이 성장 과정에서 생긴 트라우마나 콤플렉스에서 기인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영화 <조커>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은 ‘아서 플렉’이 어머니처럼 망상에 의존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본인이 과거에 ‘토마스 웨인(브래트 컬렌)’과 사랑하는 관계였으며 ‘아서 플렉’이 그의 아들이라는 망상에 집착한다면, ‘아서 플렉’은 두 가지 망상에 젖어 있다. 하나는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 니로)’의 프로그램에 방청객으로 갔다가 우연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그와 포옹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망상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이웃인 ‘소피 두몬드(재지 비츠)’와 데이트를 하며 호감을 느끼게 되는 망상이다. 전자의 경우 ‘아서 플렉’이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지만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고담시가 힘들어지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공공 서비스조차 받지 못한 상황으로 인해 망상에 사로잡혔으며, 후자의 경우 가족이나 동료로부터 느끼지 못한 애정이 망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와 같은 망상은 ‘아서 플렉’이 무의식적으로 자아를 더 불투명하게 만들었을뿐더러,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비극의 검을 더 깊이 위치시킨다.

하지만, ‘아서 플렉’은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었던 어머니의 고백이 망상이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본인 역시 자기 망상을 자각하게 되며 현실을 깨닫는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한 ‘아서 플렉’은 자기 내면으로 향해 있었던 비극의 방향성을 지금까지 타인을 향해 바깥으로 설정되어 있던 웃음과 행복의 방향성과 맞바꾸며 새로운 목표를 설정한다.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된 ‘아서 플렉’은 더는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대신 ‘조커’로 불리기를 바란다. 다시 말하자면, ‘아서 플렉’은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는 삶을 청산하고 ‘조커’라는 정체성을 비로소 확립했다. 이는 이전까지는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유령처럼 오가던 ‘아서 플렉’이 ‘조커’로 재탄생한 후 불편한 걸음걸이 대신 쾌활한 걸음으로 뛰어다니는 장면이 뒷받침한다. 또한, 엔딩 시퀀스는 웃음을 한 번 터뜨리기 시작하면 한동안 멈출 수 없는 질병도 ‘아서 플렉’의 망상이 만들어낸 상상의 질병이었지만, 이제는 ‘조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실질적 웃음으로 승화되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따라서 영화 <조커>는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된 후에도 자신이 뿌리내린 음지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자기 자신을 거리 두며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정서적 정화를 해낸 모습을 그려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제트별 님의 리뷰
2019.10.02 23:35:55
정당화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나의 것을 빼앗아간다. 그냥 열심히 일을 했을 뿐인데. 그러면, 그래도 되는가? 괴롭히지 말라고 한다. 그냥 웃음을 주려 했을 뿐인데. 그러면, 그래도 되는가? 내 말은 전혀 믿지 않고 나의 잘못이라고 단정 짓는다. 정말로 나의 잘못이 아닌데. 그러면, 그래도 되는가? 자신들의 행동은 생각지 않고 웃고 있는 나를 밀어붙인다.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왔을 뿐인데. 그러면, 그래도 되는가? 말을 하라고 해놓고 나의 말을 하나도 듣지 않는다. 그동안 계속 내 안의 것들을 털어놓았는데. 그러면, 그래도 되는가? 나의 소중한 존재를 함부로 이야기한다. 그저 포옹이 필요했을 뿐인데. 그러면, 그래도 되는가? 내 존재를 비롯하여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 어쩔 수 없다고 여겼던 것들이 부정당했다. 정말로, 그럼에도, 그렇게 믿고 살아왔는데. 그러면, 그래도 되는가? 사람들이, 세상이 화에 가득 차있다. 그저 가장 기본적인 예의를 바랄 뿐인데. 그러면, 그래도 되는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영화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사람들이 계속해서 화를 내고, 또 화를 내는 건, 그리고 그가 그렇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마치 악을 정당화시키는 생각이 박힌 영화가 아닌가 하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말도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는 없겠다. 허나 ‘그가 그렇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라는 선 이전에, 그를 가두는 궁극적인 원인, 즉 ‘그가 갖게 된 질병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었다’라는 선이 존재한다. ‘그의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게 아닌가’라는 칼을 꽂으려면, ‘그의 질병 원인도 정당화하려는 것인가’라는 칼 또한 반대편에 꽂아야 한다. 영화는 그렇게, 심도 있게 저울을 놓는다. 그의 시선을 따라 ‘어쩔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펼치는 것 같으면서, 빼먹지 말고 주목해야 하는 일종의 성역 또한 풀어놓는다.

아서와 조커를 보듯 질병과 범죄의 선은 분명히 긋는다. 어른들은 웃지 않지만 아이들은 웃는다. 어른들이 그렇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을지 몰라도, 아이들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음을,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함의 여지를 꼭 쥐어놓는다. 그 쥠 안에는 그렇게 되지 않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그의 어린 시절의 예시가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코미디언은 웃겨야 하는데 넌 웃기지 않고, 웃을 일이 아닌 일엔 웃지 말라고 따끔하게 타박을 주면서, 항상 웃어야 한다고 그를 ‘해피’라 부르는 그녀의 모순은, 아닌 척하지만 누구보다 맞고, 어쩌면 정당화라는 말을 가장 손쉽게 이익으로 이용하는 기득권의 행태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였다. 해서, 그런 기득권을 향한 발사가 통쾌했음을 부정하진 못하겠다. 다시 돌아와서, 그럼에도, 아서가 후천적으로 쏟아낸 정당화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발을 떼어놓고, 당신은 그를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 그전에, 이해한다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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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항빈 님의 리뷰
2019.10.03 00:17:20
'조커'는 DC 코믹스의 대표적인 빌런인 조커에 대한 오리진 영화이지만, 개인적으로는 DC의 캐릭터들과 세계관을 빌려 쓴 심리 스릴러라고 보는게 좀 더 맞는 것 같다. DCEU와는 동떨어진 영화로 제작되며 개봉 전 예고편부터 영화제에서의 반응들까지 여러모로 이슈가 된 이 영화에 대해 나름 기대는 컸다.

보통 오리진 스토리들은 주인공의 탄생 과정을 다루기 때문에 각 캐릭터의 오리진들은 약간의 변주는 있을지 언정, 대부분 흐름은 비슷하다. 하지만 조커의 오리진은 불명확하다. 그는 배트맨의 안티테제로서 존재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면서 사실 조커의 탄생이 아닌 그냥 한 살인마의 탄생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DC의 세계관과 DC가 그동안 쌓은 대중문화에서의 업적을 맥락으로 삼았을 뿐이다. IP의 영화 외적인 요소들 덕에 이 영화는 완전히 미쳐버린 한 사람이 자신의 위험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주인공의 뒤틀린 시선으로 전개할 수 있는 상업적인 플랫폼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극 중 등장하는 '모던 타임즈'부터 '아메리칸 싸이코', '택시 드라이버', 그리고 물론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같은 작품들이 많이 떠오르는 영화였지만, 무엇보다 제일 많이 영향을 받은 듯한 영화는 아무래도 '코미디의 왕'이었던 것 같다. 특히, 로버트 드 니로의 캐스팅 자체 때문에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크 나이트' 삼부작은 번외로 치면, 이런 영화들의 공통점은 삭막해져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립되고, 버려지고, 외면당하여, 끝내 미쳐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현대인의 외로움이나 고립보다는, 어쩌면 좀 더 보편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는, 아웃사이더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게 맞을 것 같다. 이 영화 같은 경우는 불우한 환경과 정신질환, 그리고 이런 그를 철저히 파괴하려는 듯한 세상으로 인해 벼랑 끝에 내몰리는 주인공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가 묘사하는 고담시는 모든 것이 붕괴하고 있고, 악취가 풍기는 듯하면서, 약육강식의 야생과도 같은 도시다. 주인공의 집이나 일터 뿐만 아니라, 화장실, 지하철 역까지 모두 더럽고 어두침침하고 음산하다. 이는 실제 주인공이 살고 있는 환경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주인공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적대적이고, 어지럽고, 부도덕한 세기말 (아마 그래서 시대상도 80년대 부근으로 잡은 듯하다) 과도 같은,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 말이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 끔찍한 고담시의 풍경을 잔혹하게 그리며, 관객을 주인공의 클로즈업과 춤의 풀숏 안에 가두며 그와 함께 이 디스토피아에서 같이 미쳐가는 경험을 선사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전략이 통하려면 주연배우의 활약이 필수다. 그리고 호아킨 피닉스는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대표적인 영화판 조커들인 잭 니콜슨이나 히스 레져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전 조커들은 조커라는 완성된 빌런을 연기했기 때문에, 완전히 광기와 혼돈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힌 정체불명의 괴물을 카리스마 넘치고 굉장히 위협적인 불꽃 같은 존재로 그렸다면, 호아킨 피닉스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인물을 표현했다. 아직 그는 전설적인 조커가 되진 않았으나 그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리고 그 길로 인도하는 다양한 점화 장치들이 이야기 곳곳에 배치되고 소개되며, 관객은 언제 이 폭탄이 끝내 터질지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게 된다. 호아킨 피닉스의 아서 플렉은 이미 고통 속에 절규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도움을 못 받고, 사랑도 못 받고, 관심도 못 받고, 그저 쓰레기와도 같은 존재처럼 취급받는 그가 결국 어떻게 타락하는지를 호아킨 피닉스는 관객의 손을 잡고 한발짝 한발짝 그 길을 인도한다. 눈빛, 표정 연기, 대사 전달 같은 섬세한 연기들부터, 어딘가 뒤틀린 듯하게 구부정한 앉은 자세, 이상한 걸음걸이와 뜀박질, 그리고 자신의 광기에 심취한 듯한 춤 동작에서 호아킨 피닉스는 완벽하게 자신만의 조커가 됐음을 볼 수 있었다. 여기에 다양한 웃음 소리를 통해 주인공의 오싹하고 불쾌한 심리 상태를 암시하기도 하는 동시에, 자신만의 웃음을 못 찾은 미성숙 조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결국 호아킨 피닉스의 웃음 소리가 조금씩 하나가 되가며, 결국 그가 그토록 원한, 하지만 너무나도 끔찍한 웃음 소리를 찾게 되는 과정인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이 영화를 둘러싼 논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북미 평론가들 위주로 이 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논란이 베니스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영화나 게임의 폭력성이 실제 범죄를 부추긴다는 주장은 오랜기간 동안 있었으나, 결국에는 다소 과장된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오랜만에 그 논란을 재점화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폭력의 축제라서 논란이 된 것이 아니다 (이보다 폭력적인 영화는 넘치고 흐른다). 이 영화가 논란이 되는 지점은 관심을 받기 위해 극단적인 폭력을 저지르면 원하던 관심을 쟁취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 행동이 옳다고 정당화하진 않지만, 온 세상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폭력을 휘두르면 다시 자신에게 눈길을 돌릴 것이라고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시사점이 진심으로 불쾌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한달에 한번 꼴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나는 미국 같은 나라에서 이것을 이슈화하는 것은 나름대로 정당한 반응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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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 님의 리뷰
2019.10.02 22:09:53
"일단 총을 쏴라, 그러면 유명해진다"
[조커]는 광대 부업을 뛰는 코미디언 지망생 아서 플렉이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우리에게 친숙한 - 혹은 그 이름만 빌린 - 악당 조커로 추락하는 과정을 다루는 영화다. 침체되어 서민의 분노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고담시를 비추는 영상미와 그 가운데서 서서히 조커로 변모해가는 정신이상자 아서 플렉을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DC 영화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축에 속한다. 토드 필립스는 [코미디의 왕], [네트워크], [택시 드라이버], [모던 타임즈], [위대한 독재자]를 생각나게 하는 연출을 오가며 불타는 도시와 영혼을 표현해낸다.

그러나 아서가 폭력과 살인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선악의 경계를 넘어 완전한 범죄자로 전락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토마스 웨인으로 대표되는 고담시의 부유층을 상대로 분노를 터뜨리는 서민들의 상징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한 사람의 변화를 보여주는 범죄 드라마인지 정치적 함의를 담은 사회 영화인지 그 구분을 무너뜨리고 전체적 메세지가 모호해지는 위기에 처한다. [브레이킹 배드]와 [하우스 오브 카드]가 하나의 드라마로 엮였다면 그 완성도가 위대할지언정 그 드라마가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 누가 말할 수 있었겠나? 더욱이 아서의 가족과 웨인 패밀리의 관계에 관한 플롯이 섞여들어가면서 영화는 더욱 혼돈에 빠진다.

아서가 조커라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동안 영화는 오히려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폭력을 다루는 영화가 도덕적으로 그래야 하는것처럼 악한 주인공을 관객들로부터 유리시키는데 실패한다. 조커가 시위대에게 구세주, 혹은 상징처럼 떠받들어지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자신이 세상에 의해 괴롭힘당한다고 느낄 사람들, 아서처럼 폭력으로 복수하고 힘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이 방향은 맞지 않다고 말할 책임에서 손을 떼버린다. 아서가 그저 복수하기 위해, 관심받기 위해 벌인 짓과 우연하게 혁명을 선동한 것을 섞어버리는 순간 영화는 사회적으로 유리되어 폭력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파간다 영화가 되어버린다.

트럼프의 선거 보좌관 로저 스톤은 "아예 유명하지 않은 것보다 악명높은 것이 낫다"라는 말을 했다. 조커 역시 마케팅 단계에서부터 위험한 영화라는 초기 평가를 자랑스럽게 내걸며 이 말을 실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영화 속의 조커 역시 그 말에 공감할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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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님의 리뷰
2019.10.15 19:25:41
조커
01.

슬펐다. 잔인하고 무서운 영화지만,

관람 종료 후에 든 생각은 ‘슬프다’ 라는 것 뿐이다.

영화 <조커>가 만들어진 세상이 슬펐다고 해야할까 조커가 만들어져서 슬프다고 해야하는 것일까



02.

이 모든 생각을 하기 전에 한가지 짚어볼 것이 있다.

DC는 왜 빌런인 조커를 영화했을까.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들이 도산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유니버셜 스튜디오가 만든 다크 유니버스의 시작을 흉내내어 시장개척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DC는 악당인 조커를 영웅으로 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03.

감독 토드 필립스는 조커라는 캐릭터를 갖고옴에 있어 조커가 등장한 시기를 배트맨이 탄생시킨 이전으로 설정한다. 팀버튼의 <배트맨>에서의 조커라는 캐릭터는 조커라는 악당이 되기 전에, 브루스웨인의 부모를 죽인 것인다. 그 이후 배트맨이 먼저 등장한 후에 조커가 되어 다시 나타나는 것으로 설정된다. 감독의 이런 설정, 히어로와 악당이 없는 고담시의 모습을 가만 들여다 보면 그곳에는 빈익부와 부익부가 존재하는 사회와 그 속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부자들은 자선행사에서 찰리채플린의 <모던타임즈>를 보며 웃고, 가난한 이들은 파업과 시위를 이어간다.



이런 상황속에서 영화 <조커>의 아서 플렉은 머레이 프랭클린 쇼에 나가 이야기한다. 코미디는 아주 주관적인 것이며, 사람들은 언제나 불친절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머레이 그도 자신에게 불친절했다며 그를 총으로 쏴버린다.

TV쇼에서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조커가 된 아서 플렉은 시민들의 환호를 받는다. 광대를 넘어서 고담시를 대표하는 시민들의 영웅이 된 것이다. 조커가 한 행동과 생각이 훌륭하다는 것이 아님을 시민들은 알았을 것이다. 그저 그들의 분노를 들어주고 표현해낼 창구가 필요했을 대중에게 사회적 시스템과 권력자들은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했다. 대신 조커라는 인물이 나타나 다른 방식으로 풀어낼 방식을 찾은 것이다. 일종의 카니발이겠다. 이 후 카니발은 종료된 후 사회는 제 기능을 잃어갔을 것이고 그런 토대의 영양분 속에서 배트맨은 성장하여 등판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고담시의 영웅은 조커였다.



04.

아서플렉은 정말 아픈 사람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서플렉은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이라고 대답해주고 싶다.

아서 플렉은 어릴적 머리를 다침으로 인해 이유없이 웃는 병이 생긴다. 하지만 그가 행복해하며 웃었던 적은 없다. 그가 엄마 페니플렉을 죽인 이후에 웃는 것들은 보통 사람들이 웃는 이유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무례한 사람들을 죽일수 있는 자유를 찾았고, 행복한 척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서플렉은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는 영화속에서 네번의 상상을 한다.

머레이 쇼에 나가 머레이와 대화하는 장면이 처음 등장하는 상상이다. 자신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머레이와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장면인데, 머레이 쇼가 시작되기 전에 슈퍼 쥐가 등장했다는 뉴스가 나오는데, 머레이는 그것을 코미디 소재로 사용한다. 뉴스를 보고 난 후에 시작된 프로그램쇼를 보며 머레이와의 만남과 연결지어 상상한 것이다. 그 후에 코미디 클럽의 무대에 선 후에 같은 층 여자와 데이트, 엄마가 쓰러진 후 자신의 곁에 있어준 여자를 상상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토마스 웨인과의 만남후 냉장고에 들어가 자살하는 장면이 상상하는 장면으로 영화속에 삽입된다. 이 장면 모두 아서플렉이 행복해지고 싶어서 상상하는 장면들이다. 자살이라는 선택이 차라리 나을 정도로 아서플렉의 상황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05.

영화 <조커>는 중의적이다.

조커는 광대짓을 하는 삐에로의 이미지와 카드게임에선 가장 강력한 패라는 의미를 갖는다.

웃음을 주고 싶어 삐에로 분장을 하며 살아가는 아서에게 고담시는 무례하고 불친절하고 누구하나 안아주는 사람이 없다. 그런 그가 고담시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됐다.



DC는 조커를 배트맨, 슈퍼맨과 같은 히어로처럼 상징적이고 강력한 인물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인물은 팀버튼의 악당 조커가 돈을 뿌리며 카퍼레이드를 하면 그를 추앙하며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생기던 문제가 지금에도 마찬가지로 문제로 남아있음을 말이다.



06.

‘그게 바로 삶이야’ 라고 말하는 것이 조롱처럼 느껴졌다. 그건 삶이 아니야, 삶을 이루는 것들 중 하나 뿐이지. 삶은 그렇게 짧지 않아라고 답변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슬펐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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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님의 리뷰
2019.10.06 00:25:01
착한 짓을 하면 등신이 악한 짓을 하면 영웅이 되는 미친 고담 시티
DC에 별 관심 없는 내가 <조커>를 보고 딱 떠올린 영화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 (1976)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둘 다 로버트 드니로가 나옴)

고담시와 70년대 미국 뒷골목은 더럽고 쓰레기로 가득하며 이분화된 사회 구조로 인한 심각한 빈부 격차에 시달리고 있다.

최상위층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은 각자의 직업을 찾아 입에 풀칠을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꿀 수 없는 사회 구조에 절망하고 분노를 배출할 상대를 찾는다. <택시 드라이버> 속 '트래비스'는 사창가 포주를 그리고 조커는 정치인과 코미디언을 타겟으로 정하고 도덕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그들을 처리한다.

두 영화 모두 인간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도덕적 가치 판단을 잣대로 그들의 행동을 바라보아야 하나 도시 속 사람들이나 관객 모두 그들을 영웅 취급한다.

광기를 품기 전까지 눈길도 주지 않는 썩은 사회 구조는 미쳐 날뛰는 캐릭터에 개연성을 부여하고 우리는 거기에 끄덕이며 박수갈채를 보낸다. 여러모로 미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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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hia 님의 리뷰
2019.10.02 02:28:09
전율 경악 소름 격정 완벽
미쳤다.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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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님의 리뷰
2019.11.12 19:43:40
출발점과 과정은 달라도 정점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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