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내남자
2018.03.24
9.5 희대의 망작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유일한 수확이라고 하면 이구동성으로 마고 로비가 연기한 할리 퀸을 얘기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나마' 건진 수확이지 솔직히 말해 건지니 뭐니 언급할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도 아니었다. 이번에 본 영화에서 마고 로비는 할리 퀸 따윈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멋들어진 악녀 연기를 펼친다. 이제 마고 로비를 수식할 때 '할리 퀸을 연기한' 이란 말은 써선 안 되겠다. 할리 퀸과 토냐를 빈 말로라도 동렬에 놓을 수 없다. ...방금 악녀 연기를 펼쳤다고 했는데, 얘길 번복해 미안하지만 사실 그 말도 틀린 말이다. 미국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한 피겨 스케이터라는 타이틀보다 '은반 위의 악녀'라는 호칭으로 더 유명한 토냐 하딩의 일생을 그린 이 영화는 과연 그녀가 정말로 악녀였는가 나름대로 되짚어보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미국판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라 해도 좋을 것 같은데 이 영화도 실화라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지독히도 악랄하게 훈육을 가장한 학대를 가했던 어머니, 말보다 주먹이 앞선 인간 쓰레기 남편,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 없는 남편의 친구들 때문에 토냐 하딩의 스케이터로서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태어난 이래 만난 인연들이 어느 것 하나 그녀의 의지와 무관했던 걸 보노라니 - 남편 제프와의 애증의 관계는 반쯤은 그녀의 선택이긴 했으나 그래도 너무 가혹하게 시달렸다. - 내가 다 기분이 착잡했다. 특히 사람을 고용해서 경쟁 선수의 무릎을 아작냈다는 혐의 때문에 스케이터로서 무대에 오르지 못하다니... 영화 내용에 따르면 그녀로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건만. 모든 장면에 때리고 던지고 F 들어간 욕이 난무할 정도로 거침없고 수위가 높은 영화였는데 그런 만큼 가식이 없어 이야기에 몰입하기엔 수월했다. 가난하고 폭력적인 가정 환경과 이미지 때문에 토냐는 뛰어난 실력을 갖췄음에도 '미국의 대표'가 되기 매우 힘들었다. 그런데 이 얘길 바꿔 생각하면 이 영화 속 내용은 어떻게 보면 미국이 가장 숨기고 싶었던 얘기인 것 같아 외국 사람으로서 적잖이 흥미로웠던 것 같다. 이건 확대 해석일 순 있지만, 미국이 선진국이랍시고 되도 않게 문화적 우월성이란 걸 피력해왔던 - 애당초 있지도 않았던 걸 말이다. - 지난 날을 딱 잘라 부정하기 때문이다. 토냐 하딩이 미국 빙상 협회로부터 받은 불합리한 처사는 미국 사회의 축소판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 너무 멀리 가는 걸까? 엄살 그만 떨고 얘기하건데 마냥 틀린 말은 아니리라 본다. 최근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들이 연달아 개봉하니 한 사람의 영화 팬으로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이, 토냐>는 개인적으로 그 중 독보적으로 재밌었다. 이 영화의 도가 지나칠 만한 화끈함은 내용을 떠나 속이 다 시원했고 아까도 얘기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못지않게 비참한 얘기를 웃음으로 비트는 센스도 있어서 참으로 복합적인 감정이 일었다. 결국 토냐는 저지르지도 않은 죄의 죗값을 치르느라 고생 깨나 하지만 지금도 삶을 이어가고 있고 그건 다른 사건 관계자들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마치 비극이란 삶의 연속성 안에 오래 머물다 떠나는 불청객이란 식으로 말하는 듯해 어딘지 개운하기까지 했을 정도다. 이럴 수가 있나 싶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차원이 높은 스토리 텔링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 확고해지게 된다. 저지르지 않은 죄라... 엄밀히 말해 어디까지나 사건 관계자의 인터뷰를 토대로 만든 영화라 아주 객관적이고 사실 중심적인 내용이라 할 순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상상의 범위 안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면 우린 자연스레 토냐를 둘러싼 편협한 이미지를 벗겨낼 수 있게 된다. 한정적인 정보 안에서 찬양하고 깎아내리길 반복한 대중에게 욕을 서슴치 않고 뱉어낸 토냐, 그녀가 욕하는 모습을 보기 보다 왜 욕을 했는가 생각하면 그 답은 의외로 가볍게 나오지 않을는지 모른다. 언제나처럼 배우들 연기는 훌륭했다. 마고 로비는 최고였고 '하얀 늑대' 버키로 낯익은 세바스찬 스탠도 무능력한 쓰레기를 잘 연기해줬다. 이번 배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앨리슨 제니도 말할 것도 없고 그 외 션을 연기한 폴 월터 하우저는 대박이었다. CG 기술로 환상적으로 재현된 피겨 스케이트 연기도 멋졌고 스케이트 연기의 아름다움과 대조되는 폭력성도 만만찮게 인상적이었다. 이 영활 안 본 사람은 물론이고 이 영화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던데, 할리 퀸을 연기한 마고 로비가 나왔다는 식으로라도 추천을 하고 싶은 작품이었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은 김연아 선수 덕분에 피겨 스케이팅을 꽤 관심이 있기도 하니 보고 후회하진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으면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