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전후 기성세대의 자기변명

1.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더 이상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던 때가 있었다. 정확히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 그의 작품을 보지 않았다(그래봤자 세 작품이다). 내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본 순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부터 거의 역방향이었다. 그의 70년대 작품은 별개의 영역으로 두더라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시작된 그의 작품은 꽤 일관된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역방향으로 감상하면서 느낀 점이기 때문에 정방향으로 간다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의지는 생기지 않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세계는 오직 그 자신만의 것이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을 다양하게 보지 않았던 나에게 이건 마치 정형화 된 값과 같았다. 그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정점과 같았다. 그래서 더 이상 그의 작품을 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2.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18년전 작품이다. 개봉 당시 이 작품을 본 관객들은 적게 잡아도 이제 30대 이상이 됐을 것이다. 말 그대로 과거 세대의 작품이지만, 여전히 어린 관객들에게 많이 회자되고 있다. SNS에서는 이 작품에 대한 여러 이야기와 해석들이 나온다. 나는 SNS의 그 해석들을 본 게 전부였다. 그렇게 보면서도 "봐야겠다"는 의지가 생기진 않았다. 그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거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러다 여유가 생겨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재생했을 때 나는 "이거 꽤 새로운 작품이군"이라는 생각을 했다. 작품 자체가 센세이션했다기 보다는 SNS에 이 작품을 이야기한 사람들이 꽤나 스포일러를 감추고 있었다는 의미다. 3.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동화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이전까지 그의 작품이 가진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이 영화에서 전쟁을 대하는 태도는 조금 각별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전쟁이 배경이었던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모노노케 히메'도 전쟁 중이었고 '붉은 돼지'는 무려 1차 세계대전을 노골적으로 등장시킨다. 돌이켜보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다른 작가들보다 전쟁을 노골적으로 자주 다루는 편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에게 '전쟁'이 주는 혼란스러움은 여러 극적 효과를 이끌어내기 좋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전쟁은 이야기를 쓰는 일종의 '치트키'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1941년생이고 일본인이라는 점은 흘려보내기 어렵다. 사실상 그는 전쟁세대이기 때문이다. 4.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전쟁은 배경으로 등장한다. 유럽을 연상시키는 가상의 나라와 가상의 시대를 배경으로 오랜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주인공 소피(바이쇼 치에코)에게 전쟁은 배경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하울(기무라 타쿠야)과 만나게 되고 전쟁은 소피에게 조금 직접적인 것이 된다. 하울이 전쟁에 개입하는 것은 특정 이념을 지지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는 왕궁의 마법사가 돼라는 제안도 거부하고 자유롭게 떠돌기를 원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그는 자연친화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문명의 극단에 이른 왕궁의 함대와 그 문명에 기대는 초자연적 마법사들. 하울은 그 어디에도 속하기를 거부한다. 전쟁은 이념과 이익을 기반으로 한다. 하울은 사실상 그것들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하울을 자연친화적인 존재로 보기에는 그의 '움직이는 성'이 지나치게 문명적이다. 성은 마치 '하울의 군함'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이 이야기는 온통 저주받은 존재들만 나온다. 황야의 마녀의 저주를 받은 소피, 허수아비가 된 왕자 등. 그렇다면 하울도 문명의 저주를 받은 것이었을까? 이 이야기의 해피엔딩은 성이 완전히 박살나고서야 이뤄진다. 그리고 성에 있는 하울은 대부분 지쳐있거나 억지로 행복한 모습이다. 5. 하울을 온전히 '전쟁에 반대하는 자'라고 정의내리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에게도 군함이 있었고 어떤 명분을 가지고 있건 그는 내내 비행하면서 전쟁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전쟁 세대에 대해 '외부의 압력에 의해 전쟁에 참여한 세대'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어떤 전쟁의 어떤 병사건 전쟁에 직접 참여한 자는 명령에 의해, 거대한 국가적 질서에 의해 전쟁에 참여한다. 그들 각자에게 책임을 묻는 게 어쩌면 틀린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전범국가라면 마음의 짐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선대에서 속죄를 하는 것은 후대가 짊어질 짐을 덜어주는 일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이 패망할 당시 4살이었다. 원자폭탄을 맞고 폐허가 된 히로시마의 소식을 어떤 형태로든 들었을 것이다. 어리고 철없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일에 대해 '우리는 피해자'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의 필모그라피 내내 전쟁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전범국가가 할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반전(反戰)'을 외치는 것보다 '속죄(贖罪)'를 먼저 해야했다. 6.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느냐와 별개로 이야기가 합리적이지 못하다. 예를 들어 황야의 마녀가 저주를 걸어서 소피가 갑자기 할머니가 된 장면을 보자. 멀쩡한 젊은 처자가 갑자기 할머니가 됐다면 당연히 당황스러울 수 있다. 그건 남자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와중에 소피는 대단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대처를 한다. 이 장면에서는 소피가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게 오히려 합리적이지 못한다. 그 장면의 소피에게서는 어떠한 '멘붕'도 찾기 어려웠다. 영화는 내내 이런 장면의 연속이다. 소위 '말도 안되는 전개'의 연속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야기가 점점 판타지로 갈수록 나의 이성적 사고조차 마비돼서 합리적이지 못한 전개를 크게 개의치 않게 됐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전쟁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제외한다면 어느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전쟁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전쟁의 피해를 본 국가의 관객 입장에서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7. 결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기가 막힌 작화와 판타지스런 이야기, 끝내주는 음악 등 여러 요소가 관객의 뇌리에 남은 영화다. 만약 나도 이 영화가 개봉했던 시기에 봤다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애시당초 나에게 동심 같은 건 없었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지금은 정말 동심이라는 게 남아있지 않다. 그런 상태에서 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전범국가에서 태어난 전후 기성세대의 자기변명처럼 들릴 뿐이다.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손절했어야 했다. 추신1)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봤을 즈음, 곤 사토시의 작품들을 보기 시작했다. 1998년작이었던 '퍼펙트 블루'를 보고 느낀 충격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오랜 갈증을 해소해주는 것 같았다. 그가 오토모 가츠히로와 오래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 내 취향은 이쪽이었구나"라고 느꼈다. 곤 사토시의 필모를 쭉 보고 나서(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나는 더 이상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는다. 그만큼 강한 충격을 주는 작품을 만나기는 불가능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추신2) 사람들은 영화를 보다가 '발암캐릭터'를 꼽고는 한다. 나는 거기에 왜 아직도 소피의 이름이 없는지 모르겠다. 합리적이지 못한 이야기만큼, 소피의 여러 행동들은 "대체 쟤가 왜 저러나"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한다. 추신3) 노인공경과 노인학대 사이 그 어디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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