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젠엔콩
2018.04.12
스포일러 주의!
사람은 살아가면서 무엇을 섬기고 살아갈까. 이 질문은 톨스토이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우리에게 물었던 것과 비슷하다. 소설 속 미하일이 발견한 것처럼 사랑을 섬기며 살아갈 수도 있다. 20세기가 시작되며 각 나라들은 국가 정체성을 발명했고, 이를 영토내에서 살고 있는 개개인에게 주입시키므로서 국민을 만들어냈다(국가가 전통이라는 가치를 강조하며 한 나라 사람간의 통일성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도 그 중 한 예시다. 그 전까진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개념보다는 보다 작은 단위의 지역에, 이를 테면 카탈루냐, 스코틀랜드, 바이에른 등등, 소속감이 더욱 강했다. 혹은 자신이 속한 영지의 영주에게 속해있다고 생각하거나. 그런데 이러한 개념은 유럽 역사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성립하는 것 같기도 하다. 동아시아 쪽만 하더라도 국가와 국민에 대한 의식이 근대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조선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던져가며 싸웠던 농민과 의병들이나 지방 영주들끼리 혈투를 벌이면서도 하나의 왕을 섬겼던 일본은 각자의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소속감이 강했다. 동아시아와 유럽의 차이는 군사부일체를 강조하는 유교문화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 계약적인 관계를 기초로 한 유럽 봉건제도에서 나왔을 것이다). 국가 정체성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20세기엔 많았다. 국가 부흥이라는 이름 아래 다른 민족을 탄압하는 경우처럼. 현대에 이르러서는 개인은 자신이 가진 신념을 따르며 살아간다. 좋아하는 브랜드, 사상, 아이돌, 영화감독, 작가, 등등은 각각 우리가 따르고(어떤 의미에선 섬기는) 있는 존재들이다. 프레디는 그 어느 것도 섬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지역 사회가 만든 규범도 그에겐 우스웠고, 군인으로서 가져야 할 애국심(으로 규정한 적을 아무 죄책감 없이 죽이는 행위)도 강하지 않았다. 그는 일반적인 상식에선 독극물로 규정되는 액체를 활용해서 칵테일처럼 만들어 마신다. 사진사라는 번듯한 직업을 갖지만 이 역시도 얼마 못가서 때려치고 만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떠돌던 그는 랭케스터를 만난다. 랭케스터는 최면을 통한 전생체험요법으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일종의 신흥종교집단의 우두머리, '마스터'이다. 프레디와 랭케스터는 서로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린다. 프레디에겐 섬기고 싶은 마스터로, 랭케스터에겐 자신을 온전히 믿어주는 친구로(랭케스터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론이 논리적으로 완결되어 있다고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 취약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공격받으면 흥분하곤 한다) 서로를 필요로 한다. 프레디는 랭케스터를 위해서 뭐든 한다. 마스터에게 도전하는 자를 찾아가 주먹으로 응징하고, 마스터를 체포하러 온 경찰에 맞서 싸운다(랭케스터는 겉으론 프레디를 말리지만 속으론 꽤나 만족해 하는 눈치다). 방황하는 프레디를 랭케스터가 받아들여준 것처럼 보이지만, 랭케스터 역시 프레디를 통해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결국 프레디는 랭케스터를 떠난다. 프레디에겐 누군가를 섬기는 것(혹은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둘의 이별에는 뚜렷한 갈등이 보이진 않는다. 이와 비슷한 관계를 그리는 영화에서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두 사람을 갈라 놓는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프레디의 회상 장면이나 호아킨 피닉스(프레디 역)의 표정연기를 통해 넌지시 우리에게 단서를 줄 뿐이다(그 미묘한 감정의 흐름은 집중하지 않으면 포착하기 어렵고, 이는 영화가 지루하다는 인상을 주게끔 만든다. 인물들의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이나 뚜렷한 대립이 없기 때문에). 프레디는 사진기로 랭케스터의 사진을 찍어 줄 때, 뷰파인더 너머로 전해진 랭케스터의 불안과 스스로에 대한 불확신을 발견한 것 같다. 믿고 따랐던, 자신을 옳은 길로 이끌어 주리라고 믿었던 마스터 역시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택시기사의 백미러, 사진사의 카메라 뷰파인더, 이발사의 의자는 내면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는 말처럼). 온 몸을 다해 믿고 따랐던, 자신을 옳은 길로 이끌어 주리라고 믿었던 마스터 역시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겠나. 프레디는 사랑했던 친구를 뒤로 한 채, 뱃사람다운 자유를 찾아 나선다. 두 사람이 이별한 시점에서 프레디가 마스터를 따랐던 그 시간은 무의미했을까. 그렇지 않다. 프레디는 마스터와 함께하며 성장했으니까.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마스터'의 테두리 내에서 사고하고 해석하려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프레디는 경험을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그가 군생활을 하면서도, 전역 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사진사로 일하면서도, 그러한 방식을 체득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 과정은 프레디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확립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실 그런 과정은 인간 모두에게 적용된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던 청춘의 빛나던 시간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만들었던 아름다운 추억, 구구단을 외우기 위해 공책에 쓰고 또 써서 저려왔던 손가락의 통증이 현재의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고 내 삶에서 유리되지 않는 것처럼 프레디가 마스터와 함께 한 시간 역시 유의미하다. 우리는 경험하고 또 경험하며 살아간다. 때론 한 집단에 경도되기도 하고 어느 사상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고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찬란히 빛났던 마스터에게서 녹슨 흔적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결국 그 곁을 떠나야 하는 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지나간 시간을 후회할 필요는 없다. 그 모든 경험은 다음 걸음을 내딛기 위해 단련한 근육과 같은 것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