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한쪽
2018.04.23
Three Billboards <쓰리 빌보드>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선, 영화의 첫 번째 장면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시퀀스에는 강간이나 살인, 정의나 관용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카메라는 단지 86년 이후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심지어 주인조차 있는지 몰랐던 광고판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이 영화는 미국 사회의 앵똘레랑스를 이야기하거나 처벌과 용서를 논하지 않습니다. How Come, Chief Willoughby? 밀드레드 헤이즈(Frances McDormand)가 세운 광고판을 접하게 되는 마을 사람들, 그녀의 아들 로비(Lucas Hedges)나 경찰관 딕슨(Sam Rockwell)은 이 광고판을 뒤에서부터 보게 됩니다. 이들이 보게 되는 첫 번째 질문은 '어떻게 된 건가, 월러비 서장?'입니다. 월러비(Woody Harrelson)는 좋은 사람입니다. 인종차별자 아니면 성차별자 밖에 없는 경찰서를 유지하고 있으며, 두 딸과 아내에게 충실한 남자입니다. 이는 <쓰리 빌보드>의 중요한 전제입니다. 주인공 밀드레드에게 지목된 월러비는, 악당이나 적대자가 아닙니다. 문제는 딕슨입니다. 딕슨은 전형적인 나쁜 경찰이자 주인공의 적대자로 보입니다. 하지만 딕슨의 행동에는 월러비라는 길잡이가 존재합니다. 레드(Caleb Landry Jones)나 밀드레드에 대한 악행은 월러비를 위한 것이지, 주인공에 대한 반동은 아닙니다. 딕슨의 태도는 월러비의 유서에 의해 쉽게 변합니다. 미주리주의 경찰들이 인종차별자나 성차별자 일지라도, 경찰의 역할마저 못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And Still No Arrests? 딕슨은 공권력을 이용해 흑인 고문합니다. 그리고 홧김에 사람을 창밖으로 던지기도 합니다. 밀드레드는 치과의사의 엄지손가락에 구멍을 뚫고, 경찰서에 불을 지릅니다. 하지만 이들은 처벌받지 않습니다. 마치 소녀를 강간한 뒤 불태워 죽인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이 정도의 폭력을 그냥 넘어가는 마을 사람들이, 광고판에 대해서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이들은 마을 밖에 광고판을 세운 것이 가장 큰 범죄인 것처럼, 그리고 밀드레드를 가장 나쁜 범죄자인 것처럼 대합니다. 이는 우선 평판 좋고 시한부 인생을 사는 월러비 서장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의 규칙을 따릅니다. 마치 처벌받아야 하는 범죄와 처벌받지 않아도 되는 범죄가 따로 있는 것처럼, 범죄임에도 해도 되는 행동과 범죄가 아님에도 해선 안 되는 행동이 따로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Raped While Dying. 광고판을 불태운 것은 경찰관 딕슨이나 아이다호에서 온 남자가 아닌 피해자의 아버지였습니다. 기억하기 싫은 것을 기억하게 만든다는 아들 로비의 말처럼 말입니다. 월러비는 남은 몇 달을 가족과 보내는 대신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을 택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밀드레드를 그렇게나 적대시하는 것도, 범죄를 처벌하는 것보다 나쁜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으면 결국 잊히게 됩니다. 그리고 잊힌 잘못은 반복될 뿐입니다. fin. 아이다호에서 온 남자는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이름으로 보호받는 범죄자입니다. 딕슨이 그를 죽이려 하는 것은, 정의감이 아닌 충동적 선택입니다. 딕슨은 레드에게 용서받았기에 밀드레드를 용서합니다. 하지만 딕슨이 홧김에 어머니에게 총을 쏘거나 아이다호 가는 길에 밀드레드를 죽이는 결말이었더라도, 허무맹랑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쓰리 빌보드>는 단지 세 개의 광고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책임을 씌우거나 누구를 대신 처벌한다고 잊히는 것은 아니고, 광고판을 불태운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불에 탄 광고판은 다시 세워졌고, 월러비 서장 덕분에 한 달쯤은 더 남아있을 것입니다. 바로 전 광고처럼 더 많은 세월 동안 세워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거기엔, 이 정도 했으면 그만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