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마침내 소설이 '쓰여지는' 순간

- <버닝>을 한 번 더 보는 것을 포기했다. 너무 에너지 소모가 많을 것 같았다. 한 번 더 보려했던 이유는 영화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후 관계들과 디테일들,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듯 뱉지만 뭔가 의미가 있는 것만 같은 대사들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영화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게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곡성> 같지만, <곡성> 같은 영화는 아니다. 그러니까 고양이가 실제로 있었는지, 해미는 어떻게 됐는지, 벤이 해미를 죽였는지, 벤은 진짜 비닐하우스를 태운게 맞는 건지 등의 수수께끼들을, <곡성>처럼 영화 속 숨겨진 단서나 떡밥을 찾아가며 퍼즐을 맞추는 영화가 아닌 거다. <버닝>은 해미가 얘기한 ‘판토마임’ 같은 영화다. “없다는 것을 잊는다.” 종수가 쓰는 소설도 실은 비슷한 특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소설을 읽는 순간, 영화를 보는 순간, 예를 들어 <어벤져스>를 보는 순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아이언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잠깐 잊는다. 그니까 무슨 얘기냐면, <버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차피 퍼즐이 맞춰질 수 없는 이야기이다. 아니 맞춰진다해도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다. ‘귤 까먹는 판토마임’에서 해미가 껍질을 다 까고 먹었든, 껍질째 먹었든 무슨 상관이냐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버닝>은 이창동 감독의 148분 동안의 판토마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 8년 만에 신작을 발표한 이창동 감독. 그리고 영 소설을 쓰지 못하는 종수. 종수는 세상이 너무 수수께끼라 소설을 쓸 수 없다고 답한다. <버닝>의 마지막은 드디어 소설을 쓰기 시작한 종수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이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조금 뜬금없지만, 나는 노트북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자기소개서를 쓰는 청년들이 떠올랐다. 우리 시대 청년들은 살아남기 위해, ‘리틀 헝거’를 채우기 위해, 모두 각자의 소설을 쓰고 있다. 하지만 모든 청년들이 원래부터 소설을 잘 썼던 것은 아니다. 전부 처음엔 종수처럼 소설을 쓰지 못하고 방황한다. 소설을 쓰지 않고도 포르쉐를 타고 다니는 금수저들을 질투하고, 알바를 하려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아 발걸음을 돌리게 되고, 할 수 있는 건 그저 좋았던 때를 떠올리며 실제로 혹은 머릿속으로 자위하는 것뿐이다. 그것 말고는 내 안의 조절되지 않는 분노를 해소할 길이 없다. 그러다 마침내 소설이 쓰여지는 순간은 내 안의 뭔가를 태워버렸을 때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상한 점들로 가득한 벤이라는 사람 자체를, 이 풀 수 없는 문제들로 가득찬 시험지 자체를 태워버리면, 청년은 나 자신에게 ‘없는 것들을 잊고’, 마치 있는 것처럼 소설을 쓸 수 있게 된다. <버닝>의 마지막 장면은 소설을 쓰지 못하던 청년이 일련의 사건을 겪은 뒤 드디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얼핏 희망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이 소년의 미래는 과연 밝을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선 청년들의 무수히 많은 소설이 쓰여지고 있다. 그 소설들로 이룩된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떨까. 그 사회가 집이라면, 혹시 그 집은 불 한 번 붙이면 간단히 타버리는 비닐하우스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