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선우
2018.01.08
바즈 루어만의 미스테이크
바즈 루어만이 <위대한 개츠비>를 연출하기 이전까지, 총 네 편의 개츠비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이 중 무성 영화로 필름이 소실된 1926년 작과 2000년에 만들어진 TV 영화를 제외하고 남은 두 작품이 보통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1949년 작은 연기에, 미아 패로우가 데이지 역을 맡은 1974년 작은 각색에 상대적 비교우위를 가지긴 했지만 두 작품 모두 실패한 영화화라는 것에는 대체적으로 이견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위대한 개츠비>는 기본적으로 영화로 옮기기에 상당히 까다로운 작품이다. 소설 자체가 이야기보다는 피츠제럴드의 문장력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위대한 개츠비>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영미 문학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사실 네러티브와 플롯만 떼어 보자면, 작품을 둘러싼 명성이 다소 민망하게 느껴질만큼 상투적이고 진부한 로맨스 소설 아닌가. 많은 제작자와 감독들이 착각했던 지점 역시 거기 있었다. 겉보기엔 단순하고, 간결한 구조로 이뤄진데다, 읽다보면 인물들의 모습 또한 선명하게 그려지니, 마치 연출하기도 수월할 것 같았던 거다. 그러나 필치는 쉽게 간과할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연출의 대가라 할지라도 활자로 표현된 명문 앞에선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라, “그의 입술이 가 닿자 그녀는 그를 향하여 꽃처럼 피어났고, 상상의 육화가 완성되었다”와 같은 문장들을 대체 어떻게 스크린 위에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바즈 루어만도 선배들과 같은 길을 걸었다. 그 역시 원작의 줄거리만 뜰채로 간신히 건져내어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때문에 피츠제럴드의 깊이 있는 소설은 시작부터 그저 한 여자에 평생을 바친 순정남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로 축소되어 버렸다. 원작을 존중하려는 노력이 없진 않았지만, 이마저도 감이 문제였다. 강조되어야 할 부분들은 금세 지나가 버렸고(울프심과 개츠비의 아버지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은 아예 통으로 잘려나갔다), 가볍게 표현하고 넘어가도 될 대목에선 되레 지나치게 시간을 할애했다. 보는 내가 다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소설의 문장들을 원문 그대로 가져다 스크린에 새기는 후반부에선 감독의 자포자기한 심정마저 느껴져 마음이 짠했다. 예상했던 대로 미장센은 딱 <물랑루즈> 풍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위대한 개츠비>에선 그토록 과한 장식이 그닥 쓸모없다는 것. 3D 역시 불필요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본인 딴엔 방탕했던 재즈 시대 뉴욕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겠다는 의도였지 싶은데, 그랬다면 고증이라도 제대로 했어야 했다.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JAY-Z의 힙합 음악과 강남의 클럽들을 방불케 하는 파티의 분위기, 이건 1920년대의 미국이라기보다 완벽한 가상현실이었다. 이렇듯 연출이 MTV 스타일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리듬에도 문제가 생긴다. 원작 <위대한 개츠비>의 호흡은 전반적으로 동적이기 보다는 정적인 편이다. 한 공간에서 움직임 없이 펼쳐지는 대화들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 그런데 영화의 리듬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정신없이 빠르다. 닉의 네레이션에서조차 화면은 음악과 함께 급하게 편집돼 돌아가며, 촌스럽게 끼어드는 오버랩은 관객들이 대사를 음미할 수 있는 시간 자체를 빼앗아간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건 캐스팅이었다. 거의 모든 배우들이 배역과 잘 어울렸는데, 그 중에서도 데이지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미아 패로우를 봤을 때 느꼈던 실망감이 캐리 멀리건으로 인해 말끔히 씻어졌달까. 처음 데이지가 개츠비의 이름을 듣고 되묻는 장면(“Gatsby. What Gatsby?”)에서의 그 나른한 목소리는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쟁쟁했던 경쟁자들(아만다 사이프리드, 스칼렛 요한슨, 앤 해서웨이 등)사이에서 캐리 멀리건을 골라낸 담당자의 안목에 경의를 표한다. 바즈 루어만은 <물랑루즈> 같은 이야기를 <물랑루즈>식 스타일로 엮어낼 때 빛을 발하는 감독이다. 이를테면 캐서린 마틴이 심혈을 기울인 의상 미술이라든지, 개츠비의 저택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파티의 묘사 같은 것들. 그러나 그것들을 제외하고 나면, 루어만이 <위대한 개츠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에이, 뭐야. 결국 어장관리녀에 낚인 호구남 이야기네”. 극장 밖을 나가던 남자가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불만스러운 말투로 내뱉은 감상이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은 동의의 의미로 피식 웃었고, 다른 몇몇은 무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 그의 얼굴을 흘끔 쳐다봤다. “만약 피츠제럴드가 들었다면, 바즈 루어만과 저 사람 중 누구에게 유감을 표했을까?” 옆에 있던 동행인에게 내가 물었고, 대답을 들었다. 같은 생각이었다. P.S. 'Old Sport'를 '형씨'가 아닌 '친구'로 번역한 걸 봐선 김영하의 최근 번역 본을 참고한 듯한데, 왜 첫 문장을 그런 식으로 날렸는지 모르겠다. 아쉬운 마음에 첨부.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 한마디를 해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 속 깊이 되새기고 있다.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너같은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