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17

2018.12.09 14:33:56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가 서사적으로 실패해야만 했던 이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영화가 서사적으로 실패해야만 했던 이유



자비에 르그랑 감독은 이 영화의 충격적인 결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화의 경로는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 있었다. 법정에서 시작해 호러로 끝나는 것으로. 법정에서 내리는 판결이 가족을 진정한 비극으로 내모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씨네 21> 1161호) 감독의 말처럼, 법정에서 시작한 영화가 집안에서의 총질로 끝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는 영화 같은 일들이 많이 있지만, 이런 종류의 ‘영화’는 스크린에서도 불합리하게 느껴질 만큼 끔찍하기 때문이다. 장르 영화로 따지면 ‘실패’에 가까운 이 서사적 흐름이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은 우리를 숙고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 ‘실패’에 가까운 서사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네 현실에 옮겨오게 되었나. 아니, 그 반대로 물어야 한다. 이 ‘현실’은 왜 ‘실패’에 가까운 것처럼 묘사되어야만 했나.


끝나는 것과 끝나지 않을 것



영화는 이혼한 부부 앙투안(드니 메노셰)과 미리암(레아 드루케)의 법정 심리로 시작한다. 딸은 18세가 넘었으니 양육권 분쟁은 없고 줄리앙은 아직 나이가 어리니 누구에게 양육권이 돌아갈 것인가의 문제로 다툰다. 아버지 앙투안과 어머니 미리암은 2주에 한번 주말 동안 아버지에게 줄리앙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주인공 줄리앙(토마 지오리아)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줄리앙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를 오가며 그들 사이의 상처를 온몸으로 맞이한다. 영화는 자동차에 줄리앙의 가방을 던져 넣는 앙투안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쇼트 직후에 안전벨트를 메는 줄리앙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두 쇼트는 화면 내의 운동-이미지를 하나로 봉합함으로써 ‘짐짝처럼 취급되는 줄리앙’이라는 기표를 완성한다. 이때 우리는 ‘짐짝처럼 취급되는’이라는 모멸감이 아니라 ‘짐짝’으로써 바닥에 내팽겨지면서 받을 충격을 생각해보게 된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지점은 폭력적인 아버지와 학대받는 어머니라는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니다. 영화는 아버지의 총질이라는 충격적인 결말로 끝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어머니임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즉 어머니의 품 안으로 돌아간 줄리앙이 ‘짐짝’ 취급에서 벗어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미리암은 앙투안의 학대를 피해 줄곧 거처와 연락처를 바꾸어서 수중의 돈이 별로 없다. 제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아들에게 쓸 수 있는 돈이 많지 않을 테고, 어쩌면 줄리앙은 미리암이 아니라 할머니의 품에서 자라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미리암도 나쁜 부모여서 줄리앙을 다시금 학대할 수도 있다. 또는, 차후 재혼을 하게 된다면 미리암이나 그녀의 재혼 상대가 줄리앙을 ‘짐짝’으로 여길 수도 있다. 결국 이 영화는 제목처럼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다.



영화의 제목은 아주 다양한 방면으로 줄리앙을 압박한다. 영화의 중간에, 어린 줄리앙은 어머니의 거처를 알려주기 싫어서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도망친다. 앙투안은 도망치는 줄리앙을 쫓아가다가 이내 그만두고 돌아선다. 앙투안은 병원의 보안과장으로 일해서 어린 줄리앙을 쫓지 못할 정도로 체력이 달리지는 않으니, 의도적으로 추격을 그만둔 셈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추격을 그만두었을까? 어린 줄리앙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여운 줄리앙은 아직 초등학생이어서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혹은 자립의지가 있다고 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도망쳐서 할머니 댁으로 간다 하여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이 도주는 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줄리앙은 자신을 포기하고 자동차로 돌아가는 앙투안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다가 쭈뼛한 발걸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짐짝 같은 상황이다.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는 건, 내버리고 싶지만 내버릴 수 없는 것을 뜻한다. 그게 경제적인 이유이든 도의적인 이유이든 간에, 버려지고 싶어도 버려질 수 없는 현실은 어디까지나 ‘끝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꺼진 불씨가 아니라, ‘아직은 끝날 수가 없다.’라는 반강제적 현실에 가깝다. 요컨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감독의 의도는 영화의 마지막에 경찰이 왔음에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도 있지만, 끝나는 것과 끝나지 않을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되는 어떠한 문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가 있는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



끝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부부 관계다. 끝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자녀들이다. 법적으로 앙투안과 미리암의 관계는 끝났으나 두 사람의 피가 섞인 자녀 줄리앙은 그들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줄리앙이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는 한, 그들의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또한 끝나서도 안 된다. 자녀들이 독립한 후에야 비로소 이혼하게 되는 ‘황혼이혼’의 증가추세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황혼이혼은 여성들의 경제 및 사회적 지위가 높아져 가부장제로부터 탈피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자녀라는 공통분모가 사라질 시에 부부라는 이름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는 뜻도 된다. 마치 결혼반지가 그들 사이의 ‘고리’로 기능하듯이, 이 고리는 서로를 잇는 것이자 구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는 고리의 두 가지 기능을 모두 떠올릴 수 있을 듯하다. 앙투안은 의처증에 걸린 남편으로 가부장제의 억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앙투안은 딸 조제핀(마틸드 오느뵈)의 연애를 두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의 성적 억압을 휘두른다. 이때 딸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두고 아내를 불러들인다는 점에서, 집안의 폭력은 어머니에서 딸아이로 계승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는 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의 억압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폭력을 계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줄리앙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아직 어리지만 언젠가는 저런 괴물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줄리앙에게 있고, 그럼에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안티 오이디푸스적’ 신화가 그들 사이에 작용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라깡의 오이디푸스 개념을 비판한다. 자녀는 부모를 싫어함에도 닮을 수밖에 없다는 라깡의 주장에 수정표를 긋고, 위에서 아래로의 수직적인 계승이라면서 가정 내의 문제는 사회로부터 근원했다고 말한다. 요컨대 사회가 그들 가정을 보듬지 못한 것은, 제도적인 미비나 실천의지의 부족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득과 실을 명확하게 계산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줄리앙이 앙투안에게 느끼는 공포란 자신이 그처럼 폭력을 행사하는 사리분별 결핍의 괴물이 되리라는 게 아니라, 부모가 없다면 자신이 내쳐지게 될 사회가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억압하는 가정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자본주의 논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줄리앙은 아버지로부터 도망쳤음에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에게 어머니의 집 주소를 알려줄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로는 아버지의 총격이 어머니의 거처에 발사된다.



이러한 오이디푸스적 신화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우라노스의 거세를 떠올릴 수도 있다. 헤밍웨이가 작은 성기 콤플렉스로 낚시와 사냥을 즐겼다는 말이 있듯이, 모자를 향해 치켜세운 총구는 앙투안의 남성성이 결핍되어 있노라고 말하는 듯하다. 또한 가여운 줄리앙을 품에 안은 미리암의 모습은 이 공간 전체에 자궁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총격을 피해 욕조 안에 숨는 장면에서는 그러한 이미지가 더욱 확대된다. 정리하자면 바깥에서는 거대한 남근으로 ‘사정’을 일삼는 거세된 아버지가 있고, 안쪽에서는 자궁으로의 회귀를 통해 폭력세계로부터 보호받으려는 모자가 있다.



그렇다면 이때 남근은 무엇이고 자궁은 무엇일까. 이 영화는 폭력의 대물림이라는 오이디푸스 신화가 아니라, 부유한 아버지와 가난한 어머니라는 자본사회의 근본적인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즉, 자궁에 삽입되려 하는 남근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가 하층민의 마지막 쉼터를 빼앗아 감으로써 자신의 도덕적인 결함을 채우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태어났기에 출발점인 그곳은 우리가 그곳으로 회귀할 때에는 도착점이기도 한데, 자궁으로의 회귀를 택한 모자는 ‘최초이자 최후의’ 지점으로 돌아온 것인데, 그곳을 침탈당한다면 더는 갈 곳이 없을 테다. 그러니 어쩌면, 영화는 자본주의의 최하단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수탈행위를 멈춰야 하노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누구의 시선인가



이 영화는 예술성이 높지만 상업영화에 더 가깝다. 그리고 상업영화의 공식으로 보았을 때 기존의 것들과는 다른 구조를 취한다. (예술 영화라고 생각한다면 별수 없다.) 열린 곳에서 닫힌 곳으로 향하는 공포,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의 침묵, 자유로운 발언대가 억압의 굴레로 바뀌고, 삶은 죽음으로 바뀐다. 그런데 불특정 다수에게 이런 불쾌함은 그다지 달갑지 않다. 사람들은 위기에서 탈출해 새 삶을 찾는 이야기를 더 선호한다. 이를테면 수년간의 감금에서 탈출하는 <룸>(2015)이나 집안에 침입한 괴한들로부터 몸을 피하는 <패닉룸>(2002)이 있다. 여기에 판타지적인 요소를 조금 가미하자면 <큐브>(1997)나 <쏘우>(2004)가 된다.



사람들은 이런 영화에서 감금된 공간을 영화관이라는 지정좌석과 동일시하게 되고, 위기를 극복한 후 맞이하는 행복한 결말을 가슴에 품은 채 자리를 뜨게 된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총격이 끝나고 경찰이 들이닥치는 순간에 영화가 끝나버리니 관객은 여전히 ‘위기상황’인 셈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관객들은 여전히 ‘위기상황’ 속에 내동댕이 처져 있다. 스크린 속의 모자가 어두운 집안에서 밝은 경찰들을 맞이했듯이, 관객도 어두웠던 영화관에 ‘결말’이라는 밝은 조명을 맞이하게 된다.



이 영화의 결말로 돌아가 보자. 앙투안이 미리암의 집에 들이닥쳐 줄리앙을 향해 총질한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집에 들이닥쳐 ‘아들’을 향해 총질한다. 이들을 지켜보는 것은 맞은편 가구에 사는 어느 할머니다. 영화는 할머니의 신고로 경찰을 출동시킨 다음 공황상태에 빠진 미리암이 뒤늦게 신고했을 때 상담원을 통해 “이미 경찰이 출동했다.”라는 말을 전달한다. 그리고는 총질해대는 아버지가 출입문을 부수고 모자가 숨은 화장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경찰이 아슬아슬하게 도착한다. 말하자면 맞은편에 사는 할머니가 미리암보다 먼저 신고를 했기에 경찰이 제때에 도착한 셈이다. 이런 식의 서사구조는 아마도 누군가의 폭력을 목격했을때 보다 빨리 신고해야만 그들을 구할 수 있다는 ‘신고정신’을 독려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남겨진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누구의 시선으로 보아야 할까. 영화는 줄리앙을 주인공으로 진행되므로 줄리앙의 시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폭력행위를 신고한 이웃집 주민의 존재로 우리의 시선은 모호해진다.



영화의 마지막은 문틈 사이로 자신이 신고한 이웃집의 ‘결과’를 지켜보는 할머니의 시선으로 끝나는데,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제3자’의 시선으로 끝나는 게 된다. 그리고 제3자라는 점에서 할머니와 우리는 동일시된다. 우리는 스크린 밖에서 그들을 염탐하고 있었고, 할머니도 문 안에서 그들을 염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점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신고하지 않았고 신고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관찰자이자 방관자로서의 무기력함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우리와 할머니의 차이점이라면 할머니는 서사 안의 인물로서 경찰신고를 통해 서사에 개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영화는 이 지점에서 자신이 ‘신고정신’을 독려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애초에 영화 밖의 인물이니 신고할 수가 없고, 그 신고는 영화 속에서 이미 실행되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마지막 시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전히 ‘위기상황’을 마주한 채로 영화가 끝나버린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다. 이 영화의 위기상황이 일차적으로 가정폭력이라는 점에서는, 스크린이라는 미디어 매체 속에서 방영되는 여러 폭력의 굴레가 채널을 돌리면 금세 사라져 버리고 또한 시청자들도 그것을 금세 잊어버리게 된다는 ‘망각’의 슬픔을 떠올릴 수 있다. 요컨대 마지막 장면에서 할머니는 신고는 했어도 여전히 문안에 머무르며 그들 서사 안으로 개입하기를 망설이고, 경찰도 할머니가 이쪽을 염탐하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문을 닫아버린다는 점에서 두 공간 사이의 교류를 차단하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은 마치 미디어 매체에서 벌어지는 여러 폭력에 잠깐이나마 귀를 기울이다가 다른 화면으로 넘어가면 금세 그것을 잊어버리는 우리들의 아둔함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눈앞의 위기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금세 시선을 거두어 버리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 있었다



누군가는 사건에 개입하지는 않았어도 타인의 도움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몸이 약한 할머니가 경찰을 부르는 것 말고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고 결과를 확인하는 할머니의 염탐이 저쪽에서의 시선 차단으로 끝이 난 직후에 이 영화가 엔딩 크레딧을 맞이한다는 점이다. 즉, 우리뿐만 아니라 그들도 이쪽을 외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이쪽을 외면한 이유를 이차적인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이들의 문제를 ‘가정 내로’ 국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하나의 가정이지만 두 개로 분할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회에 존재하는 상류층과 하류층의 극단을 떠올릴 수 있다. 결국 이 영화는 ‘가정 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내의’ 문제가 된다. 그런 맥락에서 “프랑스에선 사흘에 한명꼴로 영화와 비슷한 상황에서 여성들이 사망한다.” (<씨네 21> 위와 동일)라는 감독의 인터뷰는 이 영화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참극은 단지 프랑스라는 사회에만 국한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어느 나라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가정 내의 폭력이고, 자본의 억압이다.



영화의 오프닝 직후 15분은 앙투안과 미리암이 각자의 변호사를 대동하고 판사 앞에서 심리를 진행하는 법정 시퀀스이다. 이들은 각각 자신의 변호사와 짝지어서 테이블의 양쪽 가장자리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두 커플의 정 중앙 맞은편에는 판사가 근엄하게 앉아있다. 말하자면 하나의 공간에서 서로의 주장이 오간다. 그런데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프레임을 제한한다. 카메라는 정중앙에서 살짝 뒤로 물러나 각자의 변호사를 제외하고 앙투안과 미리암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잡기도 하고, 반대로 각자 변호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즉 카메라가 어떻게 그들을 프레임화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공간은 같은 곳이기도 하고 다른 곳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이곳은 프랑스이면서도 프랑스가 아니기도 하다.



각자 변호사와 있는 장면에서는 서로가 법정의 양극단에서 원고와 피고로 앉아있는 듯하다가도, 변호사를 제외하고 부부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흡사 화해를 도모하는 부부클리닉처럼 보인다. 이렇게 분해와 화해의 가능성을 오가던 카메라는, 그들의 주장 중 어느 것이 옳은지를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게 하며, 이후로 벌어지는 서사의 흐름은 그런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아버지가 정말로 폭력적인지 혹은 어머니가 과민반응을 하는 건지 우리는 판단을 유보하게 된다. 모든 사건은 끝에 가서 진실이 드러나기에 끝까지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질 가능성은 없다. 영화에서 앙투안은 미리암에게 대화를 하자고 말하지만 끝내 진정성 있는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고야 만다.



이제 우리는 답할 수 있다. 왜 현실은 실패에 가까운 것처럼 묘사되어야만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감독의 말을 빌려 답하자면 “영화의 경로는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 있었다.“ 우리네 현실이 정말로 그렇기에 영화도 이렇게 묘사되었다. 현실에서도 불합리한 것은 스크린에서도 불합리하다. 자동차 안에서 앙투안과 줄리앙의 대화 장면이 어떻게든 앙투안 쪽으로 시선이 높아지게끔 설계되었듯이, 현실이라는 쇼트와 영화라는 리버스 쇼트는 기울어진 시선을 줄곧 유지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두 계급이 아무리 대화를 타진해도 그것은 원초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리라고 영화는 말한다. 또한 안티 오이디푸스적인 논의에서 자본의 영향 아래에 놓인 그들은 상류층의 하류층에 대한 총질이라는 비극으로 끝나게 될 테다. 이제 앙투안의 가부장적인 성격은 하류층을 지배하려는 상류층의 계급제도가 되고, 앙투안의 의처증은 계급적인 순결을 강요하는 상류층의 강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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