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2017

2019.01.15 21:21:03
그 문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최근 이렇게 스타일리시한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단순히 스타일리시하다는 말로 이 영화의 특징을 환언할 수 있을까. 쇼트와 쇼트 사이의 세련된 단절, 빛과 어둠을 활용한 대비의 아이러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표정과 호흡으로 모든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인물들의 연기, 그리고 ‘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사람/시스템에 대한 냉소적인 조롱과 보이지 않는 것을 기어이 설명하려 하지 않고, 관객에게 채워 넣을 수 있도록 남겨두는 여유까지. 이 영화를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줄리앙(토마 자오리나)의 부모님인 미리암(레아 드루케)과 앙투앙(드니 메노셰)은 이혼했다. 줄리앙과 누나 조세핀(마틸드 오느뵈)은 함께 엄마 미리암의 집에서 살고 있지만, 양육권 문제로 전남편과 법정 공방이 벌어지게 된다. 미리암 측은 전남편의 협박으로 인한 아이들의 반감과 폭력 문제 때문에 접근금지 요청을 하지만, 앙투앙 측은 사실이 아니라며 맞선다. 결국 협박의 증거가 없다고 판단한 판사는 미리암의 접근금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심리는 종료된다. 그리고 앙투앙은 격주 토요일마다 미리암의 집으로 찾아가 줄리앙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한 가정의 아픔을 다룬다는 면에서 대단히 감상적인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의 아픔을 전시하며, 관객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이끌어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음악이 단 한차례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조세핀의 공연을 제외하고)은 이 영화의 지향점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있지 않다는 분명한 증거가 아닐까. 음악만이 아니다. 조명의 활용 또한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 인공조명을 받는 캐릭터는 그 누구도 없다. 방의 전등의 꺼지면, 인물들은 그대로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기게 된다.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이 등장하지 않아도) 오히려 이 영화는 대단히 비극적이고, (긴장감을 조성하는 음악이 나오지 않아도) 대단한 서스펜스적 스릴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공 되지 않은 일상의 소리에서 기인한다. 영화의 첫 시작이 암전 상태에서 웅성거리는 소리, 비행기 소리, 발걸음 소리 등이 나오는 것과 토요일, 앙투앙의 차 안에서 줄리앙과의 감정적 갈등이 심화될 때 등장하는 안전벨트 경고음 소리와 자동차 비상등 소리까지. 그건 아마도 감독 자비에 르그랑은 진정한 비극이란, 영화감독만의 인위적인 통제(음악적/연출적)에서가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과 순간들에서 비롯된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지극히 사실적이고 일상적이기에 관객이 느끼는 시리고 불편한 마음 또한 지독하게도 생생하기만 하다.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첫 장면은 창가에서 그 너머를 응시하는 판사에게 시선을 맞춘다. 이어 판사는 앙투앙과 미리암의 양육권 심리를 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한다. 미리암은 앙투앙이 조세핀에게 폭력을 사용했던 적이 있고, 여러 협박을 함으로써 아이들과 자신에게 큰 피해를 끼쳤다고 말하지만, 앙투앙 측은 그것이야말로 왜곡된 주장이라며 맞선다. 앙투앙은 조세핀이 다친 건, 자신이 때려서가 아니라 학교 수업 시간에 다친 것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신 역시도 아이들이 잘 되길 바라며, ‘부모’는 아이들의 울타리이므로 아버지라는 울타리를 빼앗는 것이 아이에게 옳은 것이냐며 반문한다. 상반되는 양측의 말을 듣고 참과 거짓을 판단해야 하는 판사는 ‘여기서 누가 더 거짓말쟁이시죠?’라며 인식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고야 만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에 있다. 그런 면에서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적극적으로 생략과 괄호 치기의 여백을 활용한다. 우리는 줄리앙의 일그러진 표정을 볼 수는 있지만, 그가 왜 앙투앙을 아빠가 아니라 ‘그 사람’으로 부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볼 수 없다.(영화에서 플래시백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앙투앙과 줄리앙이 이혼한 것은 알지만, 그 둘 사이에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이혼의 계기가 된지는 알 수가 없다.(역시 마찬가지로)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근거이자 동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보여주지 않음’을 화법으로 사용하는 이 영화를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어쩌면, 앞서 말한 판사의 시선은 영화를 보며 앙투앙과 미리암 사이의 잘잘못을 판단하던 관객 자신의 시선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역시 또 하나의 판사가 되어 뒤이어 펼쳐지는 앙투앙과 줄리앙의 모습을 보며, 어느 쪽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 내려야 하는 우리의 근원적 절망이 있는 셈이다.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바로 이 점에서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해야 하는 사람과 나아가 보이는 ‘증거’만으로 판단 내리는 사법 시스템에게까지 날카로운 창 끝을 겨누고 있는 건 아닐까.

민주사회의 사법 체계는 인류의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이루어진 결과물이므로 세밀하게 가지를 쳐나간 수많은 조목의 구속력으로 사회를 지탱한다. 그러나 이 법은 절차와 체계의 무흠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종종 일반인의 상식과 정의, 그리고 삶에 대해 어긋나는 결론을 내릴 때가 있어 절망케 한다. 이 영화의 후반부, 미리암의 집 문을 향해 총을 마구 쏘아대는 앙투앙의 광기를 우리는 아연실색하면서, 동시에 이 모든 일의 출발이 지나칠 정도로 무심하고 소극적이었던 사법체계로부터가 아니겠는가를 필연적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된다.

미리암과 줄리앙을 근거리에서 촬영하다가 갑자기 확 거리를 늘려버린 이 영화의 엔딩 쇼트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출동한 경찰에 의해 앙투앙은 포획되므로 상황은 인단락되었다. 내내 카메라는 미리암과 줄리앙 모자 바로 곁에서 그들을 비추며 그들의 아픔과 함께했다. 그러다 카메라는 갑자기 시선의 기준점을 옮긴다. 미리암과 줄리앙 바로 옆에 있던 카메라는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소리 없이 흐느끼는 미리암과 줄리앙을 비춘다. 이 시선은 맞은편 집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다가 경찰에 신고했던 이웃집 할머니의 시선이다. 그들과 함께하면서도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판단과 ‘보이는 증거’에 근거하겠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판사의 시선에 비해,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종합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은 내리기 어려웠지만, 적극적으로 위험에 달려들어 경찰에 신고하는 이웃집 할머니의 시선이야말로 훨씬 더 따뜻하고 나은 것이 아니겠는가.

‘누가 더 거짓말쟁이죠?’라며 판사는 질문하지만, 어떤 문제는 참과 거짓의 차가운 논리로 신중하게 다가가다 이미 커져버린 위험에 뒤늦게 후회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 영화가 겨누는 칼 끝은 결국 앙투앙의 일탈적인 행동 외에 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준다던 민주사회 사법 시스템이라는 ‘울타리’까지 놓여있다. 이 상황에서 미리암의 집 현관문이 앙투앙에 의해 너무나 쉽게 부서져버렸다는 사실은 얼얼할 정도로 현 사법 체계에 깊은 상흔을 남긴다. 한 개인의 일탈에 울타리가 부서져버린다면, 과연 그 울타리는 믿을만한가라는 근원적인 탄식인 셈이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라고 위로하는 경찰, ‘다 끝났어’라고 되뇌는 미리암. 이어 미리암은 옷을 추스르다가 조심스럽게 이 상황을 지켜보던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다. 이어 미리암은 삐걱거리는 문을 닫는다. 그러나 그 문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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