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시네도키
202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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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은 배주영이다. 주영은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을 때마다 아오이의 구절을 몇 번이고 읊는걸 좋아했다. “만약..어디선가 준세이가 죽는다면, 난 분명 그의 죽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두 번 다시 만나는 일이 없어도.” 한 때 주영도 크라쿠프 유학시절에 수영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수영, 너가 없으면 나도 없을거야.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너가 죽으면 나도 불꽃처럼 소멸하겠지.” 처음부터 한 몸이라는 것은 한낱 사랑 때문에 한 말은 아니었다. 성도 같은 배 씨였고 얼굴도 판박이었던 주영과 수영은 서로를 쌍둥이처럼 여겼다. 둘은 시간이 나면 곧장 영화 보는 걸 좋아했다. 둘의 취향도 비슷했다. 1인 2역, 닮은 사람, 그리고 빙의하는 (혹은 그러려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데드 링거, 프레스티지, 위대한 독재자, 테넌트, 포제션, 요요, 페어런트 트랩, 시네도키 뉴욕, 현기증, 토니 타키타니, 아사코, 율리시즈의 시선, 러브 레터, 싸이코, 클래식, 번지 점프를 하다, 태양은 가득히, 포도나무를 베어라, 등. 이제 주영은 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말한 것처럼 스스로 없어질 그럴 용기는 없었다. 수영이 떠난 자리는 곧 가뭄이 들기 시작했고 이번 봄에는 꽃이 피지 않았다. 적어도 수영과 뛰놀던 주영의 정원에는. 주영을 동정하던 해가 대신해서 실컷 울었다. 해의 눈시울이 한창 붉어졌을 무렵, 주영은 노을을 이불삼아 침대에 누워 수영이 남기고 간 mp3 플레이어를 들었다. 수영이 몇 년에 걸쳐 일일이 담아 놓은 곡들이 들어있었다. 주영에게는 전부 처음 듣는 노래들이었다. 낯선 멜로디와 가사였지만 익숙한 수영이 느껴졌다. 주영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플레이어 뒤에는 수영의 이름이 적혀져 있다. ‘배수영’. 그 아래에는 수영의 사진도 있다. 사진 속에는 사진 밖 주영의 얼굴을 어루어 만지는 수영의 눈길이 남아 있다. 플레이어에는 총 2만 곡이 수록되어 있었다. 주영은 들어있는 모든 노래를 들으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계산해 보았다. 2만곡이면 대략 70,000분, 1,166시간, 즉 49일 정도이다. 헤드폰을 끼고 가만히 누워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닮은 수영의 초상화를 어렴풋이 가슴팍에 그려본다. 계속해서… 아마 플레이어가 꺼질 때 까지? 그러다 교회의 종소리가 울린다. 창밖을 보니 한참을 울었던 해가 부끄러운듯 홍조를 띈 채 얼굴을 숨기려 든다. 그의 얼굴에서 세어나오는 녹색 광선이 보인다. 차가워진 지평선, 맞닿은 땅바닥 위에 터져 있는 홍시, 그 위에는 감나무가 있고 나뭇가지들이 앙상하다. 감나무의 소심한 그늘 아래 부엌 칼을 갈아주는 트럭이 주차되어 있고 그 앞에 아주머니들이 줄 서서 수다를 떨고 있다. 시장을 배회하던 개도 엄마 따라 나온 아이들 따라 모래 놀이터로 헥헥 거리며 달려간다. 수영이 떠났다. 그녀의 마지막 눈빛과 숨소리를 끝으로 주영은 장님과 귀머거리가 되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활기차게 빛나고 시끄럽다. 익숙한 명랑함들과 색깔들이 말을 걸어온다. 그저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조금만 더 들여 보기만 한다면… 주영은… 언젠가 크라쿠프에서 구병모 교수님이 주영에게 보낸 편지가 떠올랐다. “베로니크,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