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m.blue
2019.03.24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초기작 <송곳니>를 이제야 보았다. <더 랍스터>, <킬링 디어> 그리고 최근에 너무나 재밌게 봤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까지, 가만히 곱씹어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길들여짐’에 대한 고민이었다. 자신의 지위(권력 구조), 관계 또는 상황 등 많은 경우의 수 안에서 그 환경에 길들여져 버린 사람의 이야기들을 주로 다루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_ 특히 <송곳니>는 그 ‘길들여짐’을 설명하기에 가장 최적화된 작품이라 볼 수 있겠다. 가족이라는 평범하고도 보편적인 관계에서 벌어지는 통제들은 이들을 결코 평범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사람들로 만들었다. 이미 다 커버린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든 생활엔 규칙이 있고 게임이 있다. 그 게임엔 보상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엄마와 아빠가 통제할 수 있는 선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로서 이들의 성장은 자연스러운 행위가 되지 못한다. 어떤 실수도 호기심도 용납되지 않는 성장은 그저 누군가에 의해 길들여지는 것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다. _ 그들은 이름이 없다. 영화 속에서 ‘이름’의 존재는 캐릭터의 정체성과도 같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순간 남매 중 그 누구에게도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그들의 송곳니가 빠져버리길 더욱 간절히 바라게 되었던 것 같다. 크리스티나를 통해 영화를 접한 큰 딸이 동생에게 ‘브루스’라고 불리며 쉴 새 없이 고개를 돌리던 모습이 뇌리에 강하게 박혔고, 영화 속에선 끝내 열리지 않은 트렁크 속에서 ‘브루스’가 바깥세상에 대한 기대로 두근거리고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사실 대저택 안에서 현실을 모른 채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나, 밖에서 마주한 냉혹한 현실에 맞서다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나 괴로운 건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자유’가 존재한다면, 적어도 작은 비행기 장난감 때문에 누군가를 상처 입혀야겠다는 생각은 못하지 않을까 싶어서 냉혹한 현실일지라도 맞서기를 응원하게 되었다. _ ‘좀비 2송이’가 핀 것을 보고는 해야 할 일도 잊고 가만히 서서 엄마를 부르는, 그 아름다움을 엄마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아들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본다.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한다지만 선택한 그 방식이 누군가의 사랑을 온전히 담아낼 그릇이 되지 못한다면 그 그릇은 깨뜨리고 다시 빚어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부모는 깨닫기나 할까. _ ‘학대’에서 더 나아가 ‘독재’에 대해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블랙 코미디가 확실했고, 침묵하거나 순종한다고 해도 형체 없는 본능은 언젠가 반드시 폭발할 것이라고 말하는 ‘다큐멘터리’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