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힘없는 카메라를 그럼에도 놓지 않고 붙드는 일

(...) "곰이 있다면서요?" "우리를 겁 주려고 꾸며낸 얘기죠." 그러니까 <노 베어스>에서 '영화'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감정이나 희망찬 무언가를 심어주고 동기부여를 해주는 무엇이 아니라, 현실에 불청객으로 틈입하여 거의 훼방을 놓는 것처럼 비치는 무엇이다. 파나히가 제작 중인 영화 혹은 그 주변의 요소들(카메라에 담기는 사진을 포함)은, 영화 안의 박티아르와 자라에게도, 영화 밖의 솔두즈와 고잘에게도 영향을 준다. 억압적인 환경을 벗어나 제3국으로 도피하고자 했던 그들의 바람은 마을에 머무는 파나히의 의도와 관계없이 마을의 오랜 전통이자 미신인 것들, 그리고 국가 권력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좌절되거나 방해받는다. 마치 "거기 곰이 있다"라고 말하는 순간, 거기 실제로는 곰이 없다고 해도 어느 순간 곰이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출입을 꺼리게 되는 것처럼. 영화감독 본인이 영화 안에서 찍는 또 다른 영화가 영화 안팎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그동안 보이지 않았을지 모를 것들을 상기시키고 영화의 의도와는 다르게 불편한 일들을 낳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긴장을 넘어 거의 무기력을 낳는다. 파나히는 끊임없이 해당 사진의 존재에 대해 추궁받고, 파나히가 찍는 영화 속 주인공을 연기하는(그리고 실제로 밀입국을 꿈꾸는)남녀는 영화가 꿈꾸는 해피엔딩이 실제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반문한다. 곰이 없는 시대에도, 어디에나 곰이 있는 것처럼 여러 차례 마을 원로들에게 특정한 사진의 존재에 대해 질문받던 파나히는, 마을 촌장과 사람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또다시 사진에 대해 진술할 것을 주문받고, 그것이 "진실"한 것임을 확인시키고자 카메라에 스스로의 증언을 담을 것을 제안한다. 그러자 야곱(마을의 전통에 의해 원래 고잘과 결혼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남자)은 카메라를 믿을 수 없다며 코란 앞에 '선서'할 것을 요구한다. 수십, 수백 년을 강하게 뿌리내린 전통(종교, 미신 등을 포함) 앞에서 역사가 짧은 기술과 그와 비슷하게 역사가 짧은 문화예술은 어쩌면 별다른 힘을 갖지 못한다. 이것은 실제로는 곰이 없는 데도 특정 장소에 곰이 출몰한다며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는 <노 베어스> 속 한 에피소드와 닮았다. '없지만 있는' 것은 국경도 마찬가지다. 앞선 장면에서 자파르 파나히는 이미 국경을 밟았는데도 그곳이 경계임을 상기한 순간 어떤 힘에 눌린 것처럼 뒷걸음질 친다. <노 베어스>에서 자파르 파나히 본인이 처해 있는 환경, 그가 찍고 있는 영화, 그가 머무르는 마을의 사건은 상호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촘촘하게 어떤 방향으로 향한다. 곰이 없는 시대에도 어디에나 곰이 있는 것처럼, 아니 사라진 적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게 될 수 있다는 것. <노 베어스>를 통해 오늘날 관객이 생각하게 되는 건 한편으로 문화예술이 별로 힘이 없고 오히려 어떤 현실 상황을 나쁜 쪽으로 이끌게 될지도 모른다는 냉혹한 자각이다. 또 다른 쪽에서 자파르 파나히는 그럼에도 그것을 '진실'인 것처럼 인지한 채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 실제로 파나히가 솔두즈와 고잘의 사진을 찍었는지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다만 중요한 건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기록하고 그와 상응하는 만큼의 지속성을 갖고 끊임없이 반추하고 인식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일이다. 영화가 해피엔딩을 부여해 줄 수는 없지만, 누군가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힐 때 그것을 마치 보이는 것처럼 실재하도록 만들어주는 일이, 영화가 세상에 부여할 수 있는 어떤 진실이 아닌가 질문하듯이 말이다. 영화가 그 자체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 분투하는 그 과정 자체는 결코 쓸모없지 않다고. 그러니 우리는 어떠한 형태로든 두 눈으로 온몸으로 마주하고 있는 어떤 진실을, 희미해지기 전에 유형의 것으로 남겨둬야 한다고. <노 베어스>를 통해 자파르 파나히는 말하지 않는 순간에도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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