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단백석
2019.04.27
정체화의 늪
흔히 10대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사회 안에서 자신이 있을 곳은 어디인지 찾을 때지요. 그리고 여기에는 정체화, 즉 자신의 정체성을 무언가로 정의하는 과정이 포함됩니다. 이는 어떤 아이들에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수순이겠지만, 또 다른 어떤 아이들에겐 자신이 보는 자신과 사회가 바라는 자신의 충돌로 혼란스러운 나날이겠지요. 고즈넉한 풍광을 배경으로 『하트스톤』은 시작하는데, 아이슬란드의 작은 마을은 전원생활을 꿈꾸게 할 만큼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아이들의 모습은 낭만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장기 아이들을 지배하는 건 아웃사이더에의 혐오를 통한 공동체화니까요. 성 경험을 가졌다는 소문이 도는 여자아이를 ‘걸레’라며 조롱하고, 폭력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남자아이를 향한 가장 큰 모욕은 ‘호모’입니다. 성 소수자임이 드러난 이웃을 손찌검하는 어른들 역시 다를 바 없지요. 주인공 토르는 이런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베스를 좋아하면서도 크리스티안에게 오묘한 감정이 드는 걸 느끼지만, 이 아이가 보아온 사랑은 부모의 모습이 전부지요. 집을 떠나 딸만큼 어린 여자와 산다는 아버지, 무기력한 삶 속에서 작은 만남을 추구하는 어머니... 토르에게 사랑은 선망하면서도 경멸하게 되는 양가감정의 결정체인데요. 여기서 오는 혼란은 토르의 마음이 베스와 크리스티안 중 어느 쪽을 향하는지로 연결됩니다. 토르의 방 창가에 늘어선 우람한 남성상의 장난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은 사회는 아직 체모조차 얼마 없는 소년에게도 마초적 남성성을 강요합니다. 감정을 저울로 잴 수야 없겠지만 이 강요된 남성성이 토르의 선택을 어느 쪽으로 기울게 했는지는 명백하지요. 그렇게 한 소년은 비로소 보편남성의 길에 들어서고, 다른 한 소년은 유일한 동반자에게서 버려졌다는 절망에 빠집니다. 크리스티안에게 혐오로 가득한 이 마을에서의 정체화는 한없이 빠져드는 늪과도 같습니다. 첫 경험에 자의가 얼마나 있었을지 모를 토르 역시 마찬가지구요. “오해하지 말고 들어. 게이라고 나쁜 게 아니야.” 토르의 두 번째 누나 하프디스가 크리스티안에게 전하는 위로입니다. 나름의 호의를 담은 말이겠지만, 동시에 시혜 가득한 시선이 드러나는 발언이기도 하지요. 애초에 좋고 나쁘고로 규정할 사안이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쁘지 않다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이는 ‘동성혼 합법화’와 ‘동성혼 법제화’의 차이와도 비슷합니다. 크리스티안이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좋거나 혹은 나쁜 존재가 아닌, 그저 나 자신일 뿐이니까요. 『하트스톤』은 퀴어영화면서도 사랑보다는 성장에 방점을 찍은 영화입니다. 험난한 정체화의 길 끝에서 토르와 크리스티안이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작고 무시무시한 마을을 떠나 두 명, 혹은 그 이상의 생존자가 재회할 날이 오길 고대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