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참치 님의 영화 <기생충> 리뷰 - 키노라이츠
드라마 / 2019

2019.05.31 02:44:25
한국영화라는 ‘장르’, 봉준호 영화의 ‘이상함’
개인적으로 봉준호의 영화를 보면서 매번 생각하는 게 있는데, 그건 바로 영화가 이상하다는 점이다. 영화가 ‘이상’해서 좋지 않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상하다는 ‘단어 자체’에 나는 의구심을 품는다. 분명 이런 시나리오와 쇼트는 이상해야 마땅한 구성인데, 그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게 너무 ‘이상하다.’ 그러니까 마치, 짜파구리(작중에도 등장했던) 같은 게 그의 영화다. ‘이게 뭐지?’ 싶다가도 막상 한입 물면 ‘아 맛있네’ 소리가 나오는 작품. 내가 듣기로 다른 사람들은 이를 두고 ‘장르의 마술사’라고 부른다고 한다는데, 그 표현이 딱 적절한 듯싶다.



하지만 나는 장르의 마술사라는 표현에 대해 이견이 있다.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그것을 바라보려 한다. 영화를 잘 만든다는 테크니션적인 측면이 그런 이상함을 자아낸다면, 반대로 그것들의 원재료가 이상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즉, 이상한 재료를 썼기에 이상한 음식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그런 이상함이 영화의 맛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핵심은, 그게 한국사회라는 텃밭에서 자라났다는 대목에 있다.


도대체 정(情)이란 게 뭐길래



봉준호의 영화가 한국사회에 대한 여러 은유를 품고 있다는 것은 여러 부분에 걸쳐 논해진 바가 있다. 그 은유의 정도 차이는 있지만, 최소한의 맥락을 다들 하나씩 포함하고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런데 그런 은유를 품은 영화들이 영화적으로 기묘하게 맞아 떨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딘가 모르게 그런 재료들 또한 ‘기묘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괴물>에서 미군 부대와 한강, 아버지와 딸이라는 재료들은 단순히 미군이 한강에 뿌린 독극물 사건뿐만 아니라 탱크에 깔려 죽은 두 소녀까지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다. 또한, 한국 사회 바깥으로 나아가면 베트남 전에서 고엽제를 맞아 고국으로 돌아와 고생을 겪는 참전용사의 모습이 바로 그곳에서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딸이라는 후자는, 영화 밖에서 현서(고아성) 구하기를 응원하는 우리의 모습이, 현서 또래의 소녀들이 죽은 사실에 분노했던 우리의 모습과 유사해보이는 것 같다는 나의 조심스러운 견해다. 해당 사건의 2002년과 영화가 개봉한 2006년은 각각 월드컵의 열기가 한창이었다는 점 또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일조한다. 다만 대표적인 차이점을 꼽자면 괴물/탱크라는 공식에서 현서는 깔리는 게 아니라 집어 삼켜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이런 맥락에서 현서가 괴물에게 깔릴 뻔했던 영화의 도입부 시퀀스에서 그녀는 이미 명계로 넘겨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대입해야만 우리는 아직 죽지 않은 소녀가 명계에서 현세로 탈출하려는 몸부림을 투영할 수 있다. 이때 한강은 스틱스 강에, 다리 아래의 괴물 소굴은 저승이라는 큰 범주를 은유하는 게 된다.)



우리는 그런 은유가 한 군데에 버무려지는 모습을 목격한다. 장면 하나를 인용해 표현하자면, 딸아이 현서의 장례식장 장면이 그런 게 잘 드러내 보인다. 이 장면에는 합동 장례식장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가족 앞으로는 사타구니를 긁는 아버지(송강호)가 있고, 뒤에서는 자동차를 빼달라고 소리치는 직원이 있다. 그런 앞과 뒤의 초점 사이로는 정부 관계자들이 이리저리 쏘다니며 말뿐인 위로를 건네고 있다. 이 시퀀스 하나에서 우리가 연상하는 텔레비전 속의 사건은 수 개에서 수십 개일 테다. 사실 그런 사건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든 간에, 매번 해결되지 않은 구도를 들고 오니 기시감이 들 수밖에 없고,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괴물>의 장례식 장면에서 폭소를 터뜨리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건 이상하니까. 이상한데, 정말로 많이 봤던 장면이라는 점이 ‘더’ 이상하니까. (심지어, 장례식장 안에서 그들이 보고 있는 것 또한 ‘텔레비전’이다. 거기에는 정부의 거짓발표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 말인즉슨, 봉준호 영화의 이상함은 단지 영화 내부에서만 귀인하는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 밖에서 끌려오는 텔레비전 안의 뉴스 사건들이나, 배우 자체의 이미지 또한 그런 이상함을 자아내는 것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나는, 그러한 이미지가 별개의 것이면서도 하나의 영화에서 유기적으로 어울린다는 점에 ‘이상하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옥자>에서처럼 CG로 구현한 옥자의 겉모습이 아니라, 옥자가 강원도 산골자락에서 풀을 뜯어먹는 게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점. 또는 <플란다스의 개>에서 케이크 아래에 촌지를 깔아 넣으면서, 케이크가 안 들어가니 그 위에 얹혀진 딸기를 집어먹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다는 점. 정확하게는, 그런 게 원래는 자연스러우면 안 되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이게 영화적 테크닉의 요인인지 아니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원래 그런 건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된다.



<박쥐>나 <마더>에서 신부/뱀파이어, 어머니/살인자가 한군데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우리는 위에서 나열한 단어를 어떤 것으로 치환할 수 있는지를 잘 안다. 영화 전체가 하나의 통합체라면, 그런 어머니라는 계열에 모성애를 넣고 그게 다시금 한국사회의 정(情)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때 그런 정(情)은, <박쥐>에서는 일본가옥에서 마작을 하는 기묘한 모습 사이에 달라붙고, <마더>에서는 국민 어머니(김혜자)와 국민 미남(원빈)이라는 배우의 이미지에 달라붙는다. 우리는 여기서 그런 기묘함 사이를 잇는 게 정(情)이라는 접착제라는 점에서, 한국사회를 이루는 집단의식이 정(情)이라는 점에서, 한국이라는 집단을 이루는 것들은 개별적으로는 기묘한데 그걸 억지로 이어놓는 게 정(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도대체 정(情)이란 게 뭐길래 이토록 비참하게 하는 걸까. <마더>에서 모정이 광기로 바뀔 때 그런 물음이 던져진다. 다르게 말하면, 같은 ‘광기의 어머니’라도 이것은 한국사회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모정이다. 따라서 이것은 정말로 ‘한국영화’다. 또는 <박쥐>에서 김옥빈과 송강호가 왜 그런 감정선을 갖는지를 떠올려 보아도 좋겠다. 몸에 담긴 정이라던가, 인간적으로 부대꼈던 정이라던가, 이 동네에 유일한 뱀파이어로서의 정이라던가.)


나와 너, 아마에(甘え)와 정(情)



<기생충이> 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한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직접적인 비교대상은 아니지만, 작년에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을 예시로 들며 그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느 가족>에는 ‘일본적’이라는 것과 ‘일본성’이라는 게 분리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그런 분리가 수상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도이 다케오가 말하는 일본성 중에, 일본인의 아마에(甘え)라는 개념은 한국인의 정(情)처럼 일본인이 아니라면 알기 힘든 문화다. 도이 다케오에 따르면, 아들이 어머니 앞에서 한없이 어려지고 싶은 것은 일본의 아마에(甘え)에 해당한다. 이때 주체가 되는 쪽은 아들인데, 이것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번역하면 이런 말이 되기도 한다. ‘주체는 늘 타자로부터 무언가를 갈망한다’. 그런데 아들은 심리적으로 어머니의 일부이므로, 이 맥락에서 주체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타자에만 의존하게 된다. 쉽게 말해, ‘나’는 ‘나와 너’ 사이 어딘가를 둥둥 떠다닌다는 게 아마에의 개념이다. 바로 이렇게 우리는 일본인들이 일본 사회를 자신처럼 여기는 모습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된다. 즉, 일본 사회에서는 ‘나’를 이해하려면 ‘내가 속한 집단’을 이해하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어머니가 아들에게 하염없이 주고 싶은 감정은 한국의 정(情)에 해당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넘어가도 될 듯싶다. 한국사회에서 ‘나’는 곧 ‘너’고 ‘너’는 곧 ‘나’다. 말 그대로, “우리가 남이가? - 그럼 우리가 남이지 그럼 뭡니까.” 요컨대, 한국영화에서의 불안감은 그 두 가지 대상 간에 계급과 같은 차이가 있을 때, 동등하지 못한 결합에서 벌어지는 잡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나는 그런 불안감이 봉준호 영화의 주된 주제라고 말하고 싶다. 그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서술하도록 한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이유를 두고 어떤 설명을 덧붙일 수 있을까. 이런 감정에는 딱히 이유가 필요하지가 않다. 아니, 애초에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건 원초적이니까. 따라서, 그런 원초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비유될 수 있는) 문화가 그들만의 고유한 것이라는 점이 세계 무대에서 일종의 아이덴티티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생각해볼 수가 있을 테다.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을 따라할 수는 있어도, 왜 어리광을 부리는지 이해하지는 못할 테니까. ‘일본적’이라는 건 ‘일본풍’ 건물이나 정원처럼 손쉽게 따라할 수 있지만, ‘일본성’이라는 문화까지 완벽하게 따라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보면, 어느 날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행동거지까지 부자처럼 바뀌는 건 아니다. 부자들의 아이덴티티는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자랐기에 당연한 것들 천지인데, 그런 건 따라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기생충>에서도 그런 부분이 냄새를 통해 은유된다. 아무리 인텔리 연기를 해도, 반지하에서 살아왔다는 그들의 본질 자체가 변하지는 않는다. 그 죽을 듯한 무말랭이 냄새는 실제로 방안에서 무말랭이를 건조하기에 나는 게 아니라, 형체 없고 소리 없는 인식표인 셈이다.)



여기서 내 견해는, 그런 요인이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게 영화의 아이덴티티를 잘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다. 외국인으로서는 (따로 배우지 않았다면) 전혀 알 수 없는 게 그런 요인인데, 그런 걸 모르고 보아도 자국의 문제를 비추어볼 수가 있다. 하나의 영화가 단지 영화 속 나라의 문제로만 읽히지 않고, 어느 ‘관객’에게나 ‘개인적인’ 면모로 호소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모든 관객에게 사적으로 읽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모든 이들에게 ‘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런 면모가 다수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가 있겠다. 이것이 <어느 가족>이 칸에서 성공한 요인이다.



(하지만 일본성이라는 게, 외국인들이 일본 소식을 접한다고 해서 익혀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해, 민족성(民族性)과 같은 문화의 근본적인 뿌리를 이해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라깡의 말처럼 ‘타자의 불이해성’에 근거한다. [주체는 타자를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나라는 이름의 타자조차도.] 같은 맥락으로, 아마에에서의 어머니와 아들 또한 ‘그럼에도’ 타자이기에 닿을 수가 없다. 그러니 영원한 어리광일 수밖에.)



마찬가지로 <기생충>에서는 ‘한국적’이라는 것과 ‘한국성’이라는 것이 분리되어있다. 여기서 ‘한국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접할 수 있는 뉴스에 근거한 여러 담론을 뜻한다. 따라서 평소에 뉴스만 자주 보았다면, 외국인이라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표면적인 지점이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자꾸만 드러나는 물의 이미지와, 한국에만 존재하는 반지하라는 기괴한 주거형태가 결합될 때, 그것은 밀폐된 공간에 쏟아져오는 물의 이미지, 즉 ‘세월호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물론 그것은 단지 하강하는 물과 밀폐된 공간이라는 이미지로만 조합해낸 것이기에 바르게 대응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이 한국사회의 ‘동시대’를 지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아닌 듯 말 듯 세월호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은, 세월호를 말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세월호를 떠올리는 우리를 비추어 보기 위해 성립한다. 요컨대, 한국인의 정(情)이라는 걸 떠올려 보면 좋겠다. 나는 너, 너는 나. 다시 한번 반복, 이 시대는 너의 시대, 바로 우리의 시대.



(나는 이것이 <어느 가족>에서 기키 키린 여사가 놀러간 바닷가에서 ‘동일본 대지진’을 떠올리는 맥락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지점들에 대해서, 우리가 덧붙이는 어떠한 상상도 허용될 수가 있을 테다. 현실에서는 나누지 못할 이야기를 끌어내는 게 영화의 역할이기도 하고, 상상이 아니라면 이 사회에 속하지 않은 이들[외국인이라던가, 이 이야기를 생각해보지 않던 우리라던가]이 이 영화에 자신을 대입하는 것은 불가할 테니 말이다. 일본인에게는 ‘우리의 시대’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외국인에게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의 ‘우리’를 떠올리게 하는.)


선을 넘을 듯 말 듯, 너 와 나 사이에 그인 금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해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서의 아마에라는 게 ‘나 아닌 듯한 나’, ‘내가 아니고 싶은 나’, 즉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먼저 가정해두자. 반대로, 봉준호 영화에는 정(情)이라는 게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보는 나의 시점에서는 ‘너는 나, 너는 나’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영화에서 봉준호가 ‘너와 나’를 응용하는 방식을 엿볼 수가 있다.



먼저 ‘너와 나’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 엄마와 아들이 다른 인격체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기생충>과 다른 봉준호의 영화들을 데려와보고 싶다. 맥락이야 어떻든 간에, 나는 이 영화에서 운전기사 역할을 하는 송강호의 모습이 <택시기사>를 떠올리게 한다고 생각한다. <택시기사>가 보여주는 것들 중에 역사(담론)을 제외하고, 그 영화에서 송강호가 왜 광주로 향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과정, 광주 사람에 대한 정(情)이 바로 이 자리에 소환되는 것은 아닐지. 그렇다면 송강호가 <기생충>에서 ‘선을 넘을 듯 말 듯’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인디언들의 파티)에 선을 넘어버리는 것(칼을 들고서)은, 광주로 향하는 게 금기시되었던 <택시기사> 속의 풍경들을 떠오르게 한다. 다른 방향이지만, 분명 그 영화에서도 송강호는 선을 넘었었으니 말이다.


또는 최우식이 등장하는 <마녀>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따져보아도 좋겠다. 먼저 나는 <마녀>라는 영화가 사회적 문제를 말하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다만, 개인적으로 주장을 해보자면 나는 그것이 ‘한국형 영웅서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줄로만 알았던 주워 온 아이가 알고 보니 이상한 프로젝트의 실험체였다는 충격적인 진실 앞에서는, “저한테 왜 그러세요?”라는 대사가 선행으로 던져진다. 말하자면 평범하던 소녀가 갑자기 특별한 소녀로 바뀌고, 그런 소녀에게는 온갖 폭력과 방해가 쏟아진다. 일상을 파괴하려는 시도가 자행된다. 그리고 이 영화가 등장한 시기에 한국 사회의 여러 목소리가 우후죽순으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우리 사회에 갑작스럽게 침투해온 목소리에 ‘특별함’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그것을 ‘이물질’로 취급했던 우리를 돌아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는 아니지만, 근래에 <걸캅스>나 <캡틴 마블> 같은 영화에 ‘특수함’이라는 낙인과 ‘이물질’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려는 모습은 다소 부끄럽다. <마녀>의 주인공이 특별한 ‘소녀’이듯이, 그 영화들 또한 페미니즘 ‘영화’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영화를 영화로 평가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에 속하지 않은 이들[외국인이라던가, 이 이야기를 생각해보지 않던 우리라던가]이 영화에 자신을 대입하는 것은 불가할 테니 말이다”. 동의여부는 부차적인 문제다.)


<기생충>에서 박소담의 모습이 <마녀>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건, 여러 방면에 다재다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평범한 이가 갑자기 특별한 존재로 올라서는 서사는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특별한 재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 이걸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일상 중에 특별한 날은 있다. 또 이런 표현은 어떨까. 같은 사회를 살아가고 우리는 모두 같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우리가 있다고. 말하자면, 이것은 신분상승의 욕구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신분상승의 욕구가 봉준호가 말하는 계단의 이미지에 맞아 떨어진다는 점은 소름이 끼칠만한 지점이다. (그가 존경해 마지 않는) 김기영으로부터 귀인한 이 계단에서 신분상승의 욕구를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오히려 박소담을 통해 일상과 비일상, 단체 속의 특별한 개인, 너와 나라는 정(情)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어느 한 쪽이 특별해지고자 노력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부정교합을 찾아내는 것은 ‘그보다 더’ 쉬운 일이다.


영화에서 혈연지연을 통해 그들이 취직하게 된다는 점 또한, 한국 사회에서 정(情)이라는 게 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분명 ‘우리’는 아닌데, ‘너’와 ‘나’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주체로 기능하는 아주 기괴한 형태. 이것을 두고 기생충이라고 부르지 못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 한국사회의 배면에 기생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 모두가 한국이라는 우리의 일부이고 주체이다. 여기에 나는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봉준호의 일부가 아니라 봉준호의 영화 전체이자 주체라고 생각한다. 그 유명한 삑사리는 두 말할 것도 없고, 봉준호를 찬찬히 보아왔던 사람이라면 그의 영화에서 드러나던 여러 이미지를 다시금 목격하게 될 테니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gjwW20UmO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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