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재준
2024.04.19
가끔 삶은 죽고 싶은지 살고 싶은지 모르겠다. 그 순간 맞는 새로운 삶의 국면.
바디는 죽고 싶다. 자신의 자살을 도울 조력자를 찾는 그는 운전대 위에서 세상을 관망한다. 그저 죽을 수도 있지만 바디는 자신의 시신에 흙을 덮을 누군가를 찾고 있다. 자신을 구명해줄, 살해해줄 누군가를. 이처럼 바디의 자살계획은 너무도 허점이 많고 의지 박약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바디의 표정은 죽음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이중적 인간의 우울에 감독은 카메라를 들이민다. 3번의 인물을 차에 태운다. 규칙에 순종적인 군인. 어린 신학자. 박제사 노인. 규칙에 순종적인 군인은 자살 이야기를 듣자 그저 도망쳐버린다. 삶을 지속하든 스스로 끝내든 그는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에서 도망친다. 어린 신학자는 바디에 대한 이해보다 율법을 강조한다. 그리고 바디를 설득하지도 돕지도 못한 채 거절한다. 이처럼 바디가 차에 내려서 겪는 외면 세계가 아니라 감독이 내면의 세계로 상징 시킨 차에 이들을 태우면서 바디가 이런 것들을 생각했지만 어떠한 변화도 없었음을. 권태에 고통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탑승자 박제사는 바디에게 어떤 감정을 이끌어낸다. 이전의 씬에서 많은 흙이 덮어지는 시멘트 기계에서 바디는 스스로 투신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격렬한 충돌은 몸을 던지기에 좁은 창살로 반려되고 차에 오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박제사가 타 있다. 여기서 감독은 차이를 만들어내며 이 노인을 다르게 대우한다. 경험이 풍부한 그는 바디에게 새로운 시각을 이끌어내고 이전의 동승자에게 자신의 말을 계속하던 바디는 처음으로 듣기 시작한다. 이 수용의 태도 끝에 그의 체리에 대한 비유로 감독은 자살 시도에 대한 어떤 개념을 이끌어낸다. 그는 설득하려 했지만 갑자기 나온 체리처럼 자살이란 개념은 새롭게 정의된다. 그리고 바디는 박제사를 내려준다. 바디는 박제사를 내려주고 어떤 여자에게 사진을 부탁 받는다. 그리고 그들의 순간을 취해준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사진을 요청한 여자의 옆에 있는 남자는 영화초반 꺼지라고 욕을 얻어먹은 남자이다. 그에게 한 순간을 선물하다니. 바디는 어떤 결심을 하게 된다. 3번째로 차에서 내려 자신의 두 발로 달려 박제사를 찾는다. 이 과정을 난 바디가 다시 무언가를 할 의지가 있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리고 2번 돌을 던져달라고 하자 박제사는 3번 던지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3번의 반복은 이 영화가 어떤 노력 끝에 어떤 국면에 다달았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주인공은 뛰어노는 아이들. 도시의 노을 등. 이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풍경들을 마주한다. 그리고 4번째로 차에 내리자 바디는 어딘가에 도착한다. 삭막함 끝에 비가 오는 저녁, 바디는 자신이 판 구덩이에 눕는다. 그리고 구름이 지나가는 달을 보며 내일을 기다린다. 바디의 용기는 무엇일까. 죽음을 택하는 것일까? 새로운 부활을 택하는 것일까? 바디의 자살을 위한 여정은 어떻게든 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바디는 몹시 편안해보인다. 죽음과 삶 이분법, 그 이상의 영역에 이 영화는 놓여있다. 모두가 우울하고 권태를 느끼는 이유는 다르다. 그렇기에 감독은 자살을 택한 바디란 인물의 자살의 이유는 빈칸으로 뚫어놨다. 그러나 그들의 사회규범을 뛰어넘는 어떤 시도의 순간은 그들의 삶을 어떤 새로운 국면으로 도달시킨다. 삶의 새로운 모멘텀이 되거나 권태와 고통으로의 해방이 되거나. 과연 전지전능한 신은 왜 죄악이라고 하면서 인간이 자살을 할 수 있게 창조한 것인가? 애초에 우리가 스스로를 못 죽게 만들 순 없던 것일까? 감독은 자살에 대해 어떤 긍정도 부정도 택하지 않으며 새롭게 정의 시키고 있다. 신의 뜻에 따라 또는 거스를 때 보이는 체리의 향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