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라씨에이
2024.05.05
8.0/속절없이 당하는 대신 후회 없이 감당해 내고자 재현해낸 예의 그 춤사위, 죽이려 덤벼든 게 아니라 살고자 버둥거렸던 한따까리 후의 고된 퇴근길.
8.0/속절없이 당하는 대신 후회 없이 감당해 내고자 재현해낸 예의 그 춤사위, 죽이려 덤벼든 게 아니라 살고자 버둥거렸던 한따까리 후의 고된 퇴근길. / 극심한 충격과 혼란과 공포로 넋이 나간 채 거리를 헤매던 중년의 얼굴을 한 디지털 성범죄의 흔치 않은 피해자. 끝끝내 굳게 다져져서는 끔찍한 공장에 다시금 나타나 그들을 존재만으로 압박하고 춤사위로 짓누르며 기어이 감당해낸 오롯한 나, 정순. / 사건 직후 며칠 간 빛과 동력을 잃은 채 멈춰있던 정순의 집과 세탁기는 조금씩 새어들어오는 햇살을 동력 삼아 다시금 서서히 가동되기 시작하며 예전의 그 소소한 활기를 되찾았고, 희망과 생기를 잃은 채 천천히 죽어가는 듯했던 정순 또한 그 일이 분명 나의 일임을 되새기며 의지를 다지고 마음을 몇 겹씩 코팅한 뒤 밀린 집안일을 처리하고 운전석에 앉을 수 있었음. / 솔직히 이야기나 연출적인 면에서 그렇게 막 엄청 뛰어나다고까지 생각되진 않는 편임. 부족함이 크게 엿보이진 않으나, 눈에 띄게 돋보이지도 않는 준수한 무난함이랄까. 주인공 정순과 딸 유진 등의 메인 캐릭터들의 묘사가 좋았던 반면, 가해자 쪽을 비롯한 일부 캐릭터들의 묘사는 다소 작위적, 노골적이란 느낌이 들기도 했고, 긴 시간을 할애해서 다져놓은 담백하면서 몰입감 있던 전반부 덕에 후반부 들어 궁지에 몰리는 정순의 처지와 감정 등이 더욱 극적으로 대비되지만, 사건이 벌어진 직후 영상이 퍼지고 정순이 고립되기까지의 과정은 다소 전형적인 공식에 따라 얼렁뚱땅 묻어가는 양상으로 흘러가는 등, 전반적으로 소소한 장단점들이 섞여있는 느낌이었음. 허나 적어도 정순이란 인물의 묘사와 소재 및 주제를 짚어내는 선구안은 상당했고, 무엇보다 뛰어난 배우들이 제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최적의 판을 깔아놓았단 점에서 영화는 충분히 찬사 받아 마땅함. 그 위에서 좋은 의미로 날뛰어준 김금순과 윤금선아를 비롯한 배우진들의 호연은 단연 빛났고, 그러한 호연을 이끌어 냈다는 점이 영화의 가장 커다란 수훈이라 할 수 있겠음. / 전작 <울산의 별>에서 투박하고 무뚝뚝한 걸음걸이와 말투로 세모입을 한 채 윽박을 지르거나, <작두>와 <잠>에서 범상치 않은 무당 역할을 맡아 강렬한 카리스마를 뽐내던 김금순 배우는 이번 영화에선 순하고 무던하니 살짝 푼수끼도 보이고, 오지랖도 부리며 소녀 같은 모습까지 갖고 있는 대한민국 어딘가에 분명 있을 법한 중년의 아줌마이자 누군가의 엄마 그 자체였음. 굳이 따지자면 지금껏 좀 억세거나 무뚝뚝한 역할들을 더 많이 맡아온 느낌이라 아무래도 그런 류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편이었는데, 이 영화 속 정순을 보며 역시 기존의 이미지와 판이한 모습 또한 얼마든지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임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음. 직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아들뻘 관리자에게 수모를 당해도 큰 일 아니라는 듯 금새 텐션을 회복하는 친근한 일상의 모습, 영상이 유포되고 충격과 공포에 잠식되어 한동안 폐인처럼 지낼 때의 암울하고 침울한 피해자의 모습, 그러다 다시금 의지와 희망을 찾고 출근해서 당당하고 단단하게 가해자들을 압박하는 온전한 정순으로서의 모습까지, 하나의 영화 속 한 줄기로 쭉 이어지는 이야기 안에서 정말이지 극과 극의 변화를 보여주는데, 그 모든 모습들이 완전했음은 물론, 변화의 순간 역시 물 흐르듯 굉장히 매끄러웠음. 배우의 연기가 이야기 및 연출이 미처 채우지 못한 빈 틈 하나하나까지 옹골차게 채워준 느낌이었음. 언제부턴가 김금순 배우가 나오는 영화에선 연기에 대한 칭찬과 감상을 입이 마르도록 하게 되는데, 그만큼 믿고보는 배우들 중에서도 탑티어로 각인돼가고 있는 것 같음. / 딸 유진을 연기한 윤금선아 배우는 당장의 내 모습이 겹쳐보이기도 하는 현실 속 자식 세대 그 자체를 소름 끼칠 정도로 리얼하게 표현해줬음. 지독한 사건을 겪고 무너져내린 엄마를 마냥 눈물로 위로하고, 감싸주고, 대신 싸워주는 전형적인 바람직한 자식상보다는 현실 속 아들, 딸이라면 분명 저러겠다 싶은 모습을 보여줬음. 폐인처럼 넋이 나가서 칩거하고 있는 엄마가 너무 안타깝고 걱정되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결혼과 직장 등, 당장 눈 앞에 닥친 대소사 및 일상을 과감히 내려놓진 못한 채로 중간에서 당황하고 어물쩍거리다 끝내 엄마의 상처를 본인이 처리해야 할 업무쯤으로 받아들이고 후딱후딱 해결하려 듦. 당연히 마음 아프고 걱정되지만 극한의 절망을 맞딱뜨린 엄마를 대체 어떤 식으로 위로해야 할 지 몰라 일단 위험한 일이라도 벌이지 못하도록 주방에서 날붙이들을 치우고, 가장 힘든 게 누구인지 잘 알면서도 본인이 생각하기에 엄마가 안타깝고 답답한 선택을 하고 있으니 외려 엄마를 향해 짜증을 내고 모진 말을 뱉기도 함. 내가 저 상황이었으면 정말 나도 영락없이 저랬을 것 같다 느꼈고, 기본적으로 준수하게 만들어놓은 캐릭터에 윤금선아 배우가 현실감과 사실성을 불어넣어준 덕에 굉장히 공감되고 와닿았음. 한편, 14년 전 다소 초라한 행색이긴 해도 천하의 원빈이 도움을 구하러 찾아가는 옛 동료를 연기했던 배우 조현우는 여기선 징그럽고 어리석으며 파렴치하기 그지없는 배 나온 중년 아저씨의 정석을 연기해줬음. 본인을 은근 깔보고 무시하는 젊은 놈들에게 대항하는 대신 굴종의 뜻으로 정순의 영상을 헌납하고 끼리끼리 어울리게 된다는 흐름 자체는 솔직히 매끄럽지 않고 조금은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런 식의 잘못된 선택을 하기 직전 조현우 배우가 보여줬던 영수의 분노와 난처함, 망설임 등이 뒤섞인 표정은 뭐라도 저지르긴 저지르겠다 싶은 것이어서 그럭저럭 납득할 수 있었음. /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정순과 영수가 대치할 때가 인상적이었음. 영수가 그래도 조금은 반성의 기미를 보이는구나 싶던 찰나에 정순의 동정심을 파고 들며 슬그머니 자기 처지를 어필하고 선처를 구하려 드는데, 그 비굴하고 파렴치한 모습을 면전에서 마주한 정순의 뒷통수와 표정에서 어이없음, 황당함을 넘어 허망함, 환멸까지 느껴지는 듯했고, 두 배우의 연기 합이 절정에 치달았구나 싶어 기억에 남았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