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트별 님의 영화 <조커> 리뷰 - 키노라이츠
범죄 / 2019

2019.10.02 23:35:55
정당화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나의 것을 빼앗아간다. 그냥 열심히 일을 했을 뿐인데. 그러면, 그래도 되는가? 괴롭히지 말라고 한다. 그냥 웃음을 주려 했을 뿐인데. 그러면, 그래도 되는가? 내 말은 전혀 믿지 않고 나의 잘못이라고 단정 짓는다. 정말로 나의 잘못이 아닌데. 그러면, 그래도 되는가? 자신들의 행동은 생각지 않고 웃고 있는 나를 밀어붙인다.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왔을 뿐인데. 그러면, 그래도 되는가? 말을 하라고 해놓고 나의 말을 하나도 듣지 않는다. 그동안 계속 내 안의 것들을 털어놓았는데. 그러면, 그래도 되는가? 나의 소중한 존재를 함부로 이야기한다. 그저 포옹이 필요했을 뿐인데. 그러면, 그래도 되는가? 내 존재를 비롯하여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 어쩔 수 없다고 여겼던 것들이 부정당했다. 정말로, 그럼에도, 그렇게 믿고 살아왔는데. 그러면, 그래도 되는가? 사람들이, 세상이 화에 가득 차있다. 그저 가장 기본적인 예의를 바랄 뿐인데. 그러면, 그래도 되는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영화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사람들이 계속해서 화를 내고, 또 화를 내는 건, 그리고 그가 그렇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마치 악을 정당화시키는 생각이 박힌 영화가 아닌가 하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말도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는 없겠다. 허나 ‘그가 그렇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라는 선 이전에, 그를 가두는 궁극적인 원인, 즉 ‘그가 갖게 된 질병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었다’라는 선이 존재한다. ‘그의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게 아닌가’라는 칼을 꽂으려면, ‘그의 질병 원인도 정당화하려는 것인가’라는 칼 또한 반대편에 꽂아야 한다. 영화는 그렇게, 심도 있게 저울을 놓는다. 그의 시선을 따라 ‘어쩔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펼치는 것 같으면서, 빼먹지 말고 주목해야 하는 일종의 성역 또한 풀어놓는다.

아서와 조커를 보듯 질병과 범죄의 선은 분명히 긋는다. 어른들은 웃지 않지만 아이들은 웃는다. 어른들이 그렇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을지 몰라도, 아이들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음을,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함의 여지를 꼭 쥐어놓는다. 그 쥠 안에는 그렇게 되지 않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그의 어린 시절의 예시가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코미디언은 웃겨야 하는데 넌 웃기지 않고, 웃을 일이 아닌 일엔 웃지 말라고 따끔하게 타박을 주면서, 항상 웃어야 한다고 그를 ‘해피’라 부르는 그녀의 모순은, 아닌 척하지만 누구보다 맞고, 어쩌면 정당화라는 말을 가장 손쉽게 이익으로 이용하는 기득권의 행태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였다. 해서, 그런 기득권을 향한 발사가 통쾌했음을 부정하진 못하겠다. 다시 돌아와서, 그럼에도, 아서가 후천적으로 쏟아낸 정당화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발을 떼어놓고, 당신은 그를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 그전에, 이해한다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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