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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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5
관계의 자력과 지속 가능성
가스 타운을 차지한 디멘투스는 물자 협상의 자리에서 사실상 보급 물자와 퓨리오사를 교환한다. <퓨리오사>에는 세 종류의 인물이 있다. 임모탄은 혈통을 추구하고, 퓨리오사는 우정을 좇으며, 디멘투스는 이익을 따라간다. 임모탄 무리는 가문이라는 힘을 공유하고, 퓨리오사와 잭은 벗이라는 관계를 잇고자 한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부하를 고기 방패로 쓰며 철저히 본인의 이윤에 따라 움직이는 디멘투스는 전자의 두 집단과 관계성에서 차원이 다르다. 영화의 종반, 퓨리오사에게 잡힌 그가 하는 장광설에 의하면 그는 그를 이어받아, 그의 삶의 장대함 (epic)을 증명해 줄 작은 D를 기다렸다. 누벨바그, 뉴 할리우드, 신랑차오 등 국가별 미시적 시기는 다르지만 거시적으로 뉴 웨이브의 영화 물결은 학생 운동, 그리고 공산권의 몰락과 동시기에 진행됐다. 사회주의의 실패와 학생 운동의 좌절 후의 세대는 하나의 세계가 붕괴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시작에서 시작했다. 포스트 뉴 웨이브 이후의 세대에게 본인 즉 개인은 점차 절대적 상수가 됐고 손익을 따라가는 각자의 수직적 운동은 삶의 물리 법칙이 됐다. 포스트 팬데믹의 지하철 스마트폰들에 범람하는 웹소설, 웹툰 등 스낵 컬쳐에서 회빙환은 기본값이 된 지 오래며, 성인향 콘텐츠의 경우에는 최면 기기 등 마법에 필적하는 설정이라도 없이는 개연성 있는 섹스의 성립 자체가 힘겨워졌다. 공유하는 정신적 가치가 없는 군상에게는 미래 세대가 필요 없다. 퓨리오사가 한낱 자원에 지나지 않는 디멘투스의 세계에서 출산율이 낮아지는 현상은 자연스럽다. (아마 <말아톤>이었던 것 같은데) 언젠가 장애를 소재로 한 영화에 관해 본 짧은 리뷰는, 기억나는 대로, 다음과 같았다: 순한 장애인 프레임은 기득권이 바라는, 손해를 봐도 저항하지 않는 착한 소시민의 모습이다. 착한 사람과 호구가 동의어로 쓰인지 오래, 우리가 잃어버린 풍요는 우리의 윤리일지도 모른다. 증오는 사랑을 씨앗으로 한다. 그래서 자기애에서 비롯된 증오는 우애로부터 비롯된 증오보다 작다. 물리적 강함은 정신적 강함의 결과, 별이 없으면 방향도 없다. 별을 잃은 팔의 빈 자리가 퓨리오사의 별자리가 된다. 깝죽대다 젖꼭지나 뜯기는 야만의 황무지 코메디에서 신경이 연결된 의수를 구현할 존엄의 기술을 지속 가능하게 한다. 16:20 메가박스 성수 DOLBY ATMOS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