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스포일러 주의!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편지, 정확히는 손편지를 주고받은 경험이 있으신가요? 백스페이스키로 쉽게 지우고 다시 입력할 수 있는 기계 속 글과 달리, 손편지는 수도 없이 망설이고 고민하며 써 내려가야 하지요. 받는 쪽에서도 퍽 낯설게 다가오는데요. 설령 같은 내용일지라도, 매끈한 액정 너머의 이메일과 필체 가득 글쓴이가 담긴 편지는 천지차이니까요. 그렇기에 손편지에는 보다 농축된 정서가 담기기 마련입니다. 서두에 쓰일법한 제목답게 『윤희에게』는 편지로 시작합니다. 본래 전하지 않은 채 남았을 서찰은 마사코를 거쳐 바다 너머에 닿지요. 이국의 겨울 냄새가 담긴 편지를 읽은 새봄은 모녀여행을 계획합니다. 쥰의 고모에서 윤희의 딸로, 동반자가 보내 동반자에게 닿는 일련의 과정은 무척 상징적입니다. 감춰진 삶을 살아가던 윤희와 쥰이 만날 길을 연 게 그들의 주변인, 그것도 같은 여성인 혈육이었다는 의미니까요. “너희 엄마는... 같이 있으면 주변 사람을 외롭게 만들어.” 윤희의 전 배우자(유재명 분)는 상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혼의 책임을 전가하는 말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딸인 새봄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 역시 윤희와 함께 살아가는 단 하나뿐인 가족이기에 어렴풋이 느꼈겠지요. 무엇이 그를 고독의 늪에 빠트렸는지, 새봄은 그 답이 되어줄지도 모를 한 사람을 찾아 어머니와 함께 설국으로 떠납니다. “지금껏 숨겨온 게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숨긴 채 살아가는 게 좋을 거예요.” 모녀의 이야기를 새봄이 주도한다면, 쥰의 이야기는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됩니다. 수의사로 일하는 그는 고양이 손님의 주인 료코와 자주 만나는데요. 어느 날, 무언가 결심한 듯 저녁 약속을 잡은 료코에게 그는 고백합니다.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모르니까 자신은 여태까지 어머니가 한국인인 걸 숨겨왔다고, 당신도 지금껏 숨겨온 게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숨긴 채 살아가라고... 고백을 막는 고백으로 쥰 역시 윤희와 같은 고독의 늪에서 살아왔음을 알 수 있지요. 같은 공간에 네 사람이 모이기야 했지만, 바로 만남으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각자의 삶에 켜켜이 쌓인 세월을 무시하고 갑작스러운 재회를 연출한다면 충돌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기에 두 동반자, 새봄과 마사코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거리를 좁혀갑니다. 마사코와 새봄, 새봄과 쥰, 그리고 쥰과 윤희. 한 발짝씩 다가가는 만남의 단계는 더없이 섬세하지요. 이 세심함은 곧 영화 전반에 담긴 분위기이기도 합니다. 『윤희에게』로 시작한 영화는 『쥰에게』로 끝납니다. 오랫동안 쥰은 편지를 쓰고도 부치지 않았고, 윤희는 글솜씨가 없다는 핑계로 펜을 들지 않았는데요. 이러한 행동의 기저에는 끝내 감춰야만 한다는, 누구도 이 고독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심리가 깔려있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의 재회는 분명 커다란 변화를 낳았겠지요. 그리고 이제는 편지지에 자신을 담아 보내도 된다는 확신 역시 얻었을 테고요.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과거의 쥰이었을 마사코가 만들고 미래의 윤희가 될 새봄이 완성한 만남. ‘우리는 잘못한 게 없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가져온 이들의 연대야말로 이 영화에 담긴 가장 큰 가치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