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재윤
2019.12.07
스포일러 주의!
나는 영화를 볼 때 대사에 치중한다. 영화란 사람들의 갈등과 해결을 다룬 플랫폼이기 때문에 대사 속에 어떤 판타지가 담겨 있는 지, 그들의 외모나 성향은 판타지와 직결되는 지 등을 밝혀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추후에 종합적으로 밝혀질 일이고, 영화 특성상 온갖 비주얼 요소들에 홀리지 않고 온전히 듣고 생각할 요소는 오로지 대사 뿐이다. 시네마의 대사에는 사실 비주얼이 '무성'으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이 다수이지만 '유성' 영화가 가지는 독립적인 특성 역시 있다. 간혹 비평가 중에 '무성 영화가 더 지적이고 고도의 기술을 가졌다'고 보기도 하지만 '유성'이 아니었다면 영화 매체가 이토록 범위를 넓혀오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 철학적인 사색을 하여 형이상학적으로 세계를 해석하려고 한 가장 큰 이유는 삶이 괴로움과 불행에 빠져 있는 뿐만 아니라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종교에 관하여' 법운(안성기)은 출가를 결심한 후 마음 속 온갖 욕구를 지워버리고 참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불도를 닦는다. 대학생 무렵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거대한 진리에 마주친 후 만물의 인위적 노력이 무가치하게 느낀 지도 어안 6년. 매일 새벽에 일어나 법당에 앉아 불경을 외우며 참선을 한다. 참선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부처의 목소리와 비주얼, 향은 세속적인 번뇌를 가라앉히고 오로지 그 속에만 골몰하게 한다. 주지 스님은 '병 속에 갇힌 새'로 화두를 법운에게 던진다. 오랜 참선 생활 끝에도 마땅한 답을 내리지 못한 법운은 본당을 떠나 국내를 떠돌며 화두에 대한 구도를 이어가고 있다. 여기서 지산(전무송)이 등장한다. 병 속에 갇힌 새라는 화두는 갇혀 있는 우리의 삶을 형상화한 것으로,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조건이 '병'이라는 경계 속에 위치함을 나타낸다. 파스칼 역시 인간의 자연적인 조건은 불행함이라 했는데, 불교에서도 '삼고'라고 하여 인생은 고苦라고 했다. 우리는 왜 그토록 불행할까? 어째서 행복은 일시고 잠깐의 환영이며 불행은 언제나 종착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있는 걸까? 그것도 태어날 때부터 지녔다니. 흔히 종교에서는 원죄, 선천적임을 자주 다룬다. 끝이 없는 불행한 여정 속에 끝이 있으리라는 잠깐의 희망을 행복이라고 하는 것처럼 불행에 비해 행복은 현세에서는 아득한 것이라 꼬집는다. 그 중에 불교는 삼고에 대한 극복, 세속에 대한 번뇌, 욕망, 집착에서 해방되는 식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는다.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속세에서 떨어져 나 홀로 묵상하는 '참선'이다. 지산은 파계승이다. 불교의 가르침, 정규 과정, 속세화되는 불교의 터전을 떠나 법운과 같이 이리 저리 떠돌며 수행하고 있는 처지에다 스님이라고 증거할 만한 증명증서 한 장 없다. 영화는 강하게 말한다. 파계란 새로운 길이며 목적이고 동시에 '유리병에 갇힌 새'를 구출하는 방법이다. 한 동안 답을 찾지 못하고 떠돌던 법운을 감화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법운과 지산이라는 인물을 들여다볼 때 단조로운 구도로서 받아들인다. 구도하는 자와 구도 받는 자. 영화는 법운의 도랑생활을 쫓고 있지만 지산을 화자로서, 법운을 청자로서 설정한다. 이 영화는 전적으로 혼자서 모든 일들을 짊어지는 '참선' 생활에 대한 탄식과 반성이 담겨 있다. 이 탄식은 영화를 이끄는 힘이다. 처음 시작할 때와 같이 영화 엔딩 때도 도랑을 이어간다. 지산과 어머니를 조우하고 과거에 사로잡히며, 개인에게 부여 된 틀을 깰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여정이다. 임권택과 각본을 공동 작업한 송길한 작가는 "실제 원작에서 다루었던 절 내 비리보다 일생에 빗댄 로드 무비를 연출하는 데 치중했다"고 말했다. 이는 관찰하고 감회받는 이와 자신만의 답을 찾고 실천하는 이들이 있는 인간 세상의 이야기다. 헤세의 데미안과 같은 소설을 떠올리게 된다. 질문의 폭을 넓혀서 혼자 갈 것인가, 같이 할 것인가, 절제할 것인가, 방종할 것인가 사이 윤리의식 그리고 요구, 무기력들이 서로 삶과 죽음 사이 내내 싸우고 있는 도중에 구도는 무의식적으로 치뤄진다. 이 영화에서는 불교의 틀을 입고 있기 때문에 '만다라'라는 삼라만상이 담긴 성화라는 소재를 가져온 것이다. 만다라라는 제목은 그것이 담고 있는 삼라만상이란 원리 이전에 '성화' 자체에 의미가 있다. 성화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마무튼 종교적 삽화라고 했을 때 성화 속에 진리가 담겨 있을 수 있는 지 역시 의문이다. 이 의문이야말로 핵심이다. 성상 혹은 성화 숭배는 이단이라는 주장을 들여다보자. 유일신 신앙인 기독교 역사를 들여다보면 '성상 숭배 금지령'이 몇 번 내려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소아시아에서도, 동방 교회의 산실ㅡ비잔티움에서도 성상 숭배는 금지되었다. 말씀 속에 있는 거룩함, 혹은 그리스도의 '아우라'가 종이조각이나 혹은 진흙조각에 불과한 사물에 의해 훼손될 뿐더러 성상 하나하나에도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믿음이 전파되면 신도를 그리스도와 연결하고 중계하는 교회와 사제의 역할이 감소되기 때문이다. 이는 간단하게 화페의 가치가 그것들의 수많은 복제에 의해 그 가치가 떨어지는 인플레이션에 비유될 수도 있다. 만다라의 가치는, 다른 성화나 성상의 가치가 인정됨에 따라 그것들 속에서도 신이 존재할 수 있고, 진리가 내포될 수 있다는 믿음의 승인이다. 어디에도 신과 진리는 존재하기 마련임을 선포한다. 지산의 캐릭터가 설파하는 내용과 같다. 내 속에서 나를 찾는 도정에서 타인 속에서 나를 찾는 도정으로의 전환이다. 사실 지산의 파계 행위와 불교적 교리를 듣다보면 그가 시인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구도란 직선적 구도가 아닌 '원형적 구도'이며 이는 세계 원리와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지산은 원효가 니힐리스트였다는 얘기를 한다. 허무와 어리석음의 허물에서 벗어나고 보니 또 새로운 윤회더라고 한다. 니체가 말했던 영겁 회귀와 비슷한 맥락의 깨달음이요 예이츠의 'a vision'에 나왔던 수레바퀴같은 끝없는 순환과도 같은 맥락이다. 법운은 도반의 고백 이후로 지산에 대한 믿음이 배가 된다. 그러나 지산이 여자 친구와 섹스를 하고 본인에게도 유혹이 덮쳐 오자 법운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불경을 왼다. 법운이 가지는 성적 도태, 즉 방종에 대한 두려움은 부처 앞에서 죄의식을 느끼는 형태다. 동시에 오랜 세월 참선했지만 진전 없는 삶에 대한 불안, 혼란과 겹쳐지기도 한다. 금욕은 어째서 해탈하는 데 필요한 것일까? 금욕은 또 하나의 집착이라는 반론이 있다. 논리적으로 불교는 학계의 공격을 받아 왔다.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들어보자. "충족된 모든 욕망과 현실의 비참한 고뇌 속에서 쟁취한 행복은 거지가 손에 넣은 푼돈과 같은 것이다. 그는 그 푼돈으로 오늘을 보낼 뿐 내일은 다시 목마름에 시달리게 되는데, 욕구의 단절(사리)는 조상 대대의 부동산과 같은 것으로 그 복된 소유자는 영원히 삶의 노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자기 허욕에 반항하여 많은 투쟁을 거쳐서 비로소 세상에서 승리자가 된 것이며...그 눈앞에서는 삼라만상이 흡사 눈앞에서 번쩍이다가 사라져 버리는 영상이요, 선잠을 잔 자의 가벼운 새벽 꿈이요, 진리의 빛을 흡족히 받아 이미 흔들리지 않을 야음夜陰처럼 흘러간다." 지산을 따르는 법운은 지산의 죽음으로 끝을 맺게 되지만 다시 혼자가 된 법운은 이전의 법운과는 변화가 있다. 우선 어머니를 만난 점이다. 산속의 불당을 모신 불자들에게 한 번은 지산이 '점안' 의식을 한 적이 있었다. 열심히 절하고 비는 불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복 달라고 비는 게 불교가 아닙니다. 스스로 마음의 눈을 찍어 부처가 되는 게 불교입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구도를 바란다면 기생충처럼 의지하는 마조히즘의 삶의 수렁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담배나 그 무엇처럼. 무엇보다 스스로 마음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또 무조건 따르는 것도 불교에 거스르는 일이다. 지산과 헤어지고 법운은 파도 치는 겨울 해변가에서 절을 한다. 이 씬은 매우 웅장하게 다가온다. 그 이유는 한 화면에 동과 정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파도는 끝없잉 부서지고 소리를 내며 바위 위에 엎어지는 반면 흰 눈이 덮힌 바위에 차분히 앉아 수양하는 법운. 동과 정, 욕구와 해탈, 속세와 산사山寺, 자신과 타인, 직선과 원형, 진보와 퇴보가 연쇄적으로 충돌하며 하나의 길을 다듬는다. 만다라의 내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