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윤 님의 영화 <옥자> 리뷰 - 키노라이츠
어드벤처(모험) / 2017

2019.12.07 23:34:23
영화<옥자>를 통해 들여다 본 현대성

"다양한 연구진들의 정성과 사랑 속에, 다양한 관찰과 연구를 통해, 그리고 강압적이지 않은 자연교미 방식으로..."

작중 미란도 그룹의 3대 회장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의 대사다. 세계 빈곤과 관련한 식량 부족 문제를 환경, 생명 친화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갈 히든 카드를 발견했다! 영화 <옥자>의 내용이다. 현대는 가치 선호 사회로서 바람직한 가치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문화를 선도한다. 하지만 기업의 입장에서 그런 가치는 '시끄러운 마케팅'에 지나지 않는다. 미란도 기업이 발표한 환경/생명 친화, 고유의 전통과 결합, 콘테스트의 방식 등은 요란한 겉치레에 불과하다. 미란도 그룹은 옥자와 미자 간의 우정과 사랑도 마케팅 도구로 삼는다. 미란도 그룹의 실체는 곧 밝혀진다. 가치의 권태는 이렇듯 손쉽게 '전도 현상'과 마주한다. 미란도 그룹이 야심차게 준비한 슈퍼 돼지 콘테스트는 현대 대중 미디어의 본질을 드러낸다. 자극적인 언사, 예능성, 경쟁 구도, 편집, 어용 전문가...

사람들이 친윤리, 친환경적인 기업들을 바라고 기업들은 그들의 니즈(요구)를 충족하면서 선순환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여겼던 기대는 기업들의 요란하고 거짓, 과장된 마케팅을 촉발했다. 그 마케팅으로 인해 세계 각지의 축산 농가에서 길러진 슈퍼 돼지 중에 한 '마리'인 옥자는 곧 챔피언으로 뽑히게 된다. 옥자는 미자(안서현)와 희봉과 함께 강원도 산 속에서 지냈다는 점이 눈에 띠는 데 산속은 그야말로 속세와 단절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연 방목된 채로 미자(인간)과 친밀하게 생활했다는 점이 옥자를 가장 건강한 상태로 배출하게된 요인이라는 점이다. 사실 이게 영화의 결론이라봐도 무방하다.

잠깐. 영화에 반영된 현대성을 다루는 첫 부분이다. 처음엔 기업의 마케팅에서 읽은 '가치 전도 현상'에 대해 다루다가 <옥자>의 결론을 대뜸 점찍기는 논리의 비약이 있다. <옥자>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현대성이 반영되어 있는 지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현대성을 해석하는 데 옥자는 어떤 기능으로 작용하는지 적어야겠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를 구성할 때 현대 자본주의, 생산절차의 혁명, 분업화, 그리고 다국적 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표류하는 한국 상황(4대 보험을 들지 않은 한국 지사 트럭 운전사 김 군"좆된 건 회사지, 내가 아니다")까지 따로 고려하지 않았다면 영화 전반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영화의 시대 배경이 내 바로 옆 실재와 다름 없었기 때문에 옥자는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카메라와 미디어(유튜브, SNS 등) 속에 담기는 편집된 가상 현실, 혹은 만들어진 현실을 그대로 '진실'이라 믿는 대중들에게 '슈퍼돼지 콘테스트'와 '옥자'는 그야말로 돌풍이었다. 간혹 무리의 경향이 포털에 올라오는 기사거리를 가볍게 접하고 믿어버리는 마당에 정보 전달자인 기자들은 점차 필터링과 장벽이 낮아지는 대중을 상대로 더 쉽사리 속이게 된다. 미디어가 기업과 어떻게 이윤을 추구하게 되었는 지 그 바탕을 대중이 제공한 셈이다.

감독의 위트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가미된다. 옥자는 암컷이다. 익살스러운 쇼 진행자이며, 전문가이고 기업친화적이며 동시에 영합적 기회주의자인 조니 박사(제이크 질렌할)가 농가에 찾아와 옥자를 데려가는 중에 할아버지 희봉이 미자를 산 속으로 데려가 '금돼지'를 준다. 이 금돼지는 한국에서 전통으로 어머니가 딸이 시집가거나 독립할 때 살림 마련에 보태라는 의미에서 물려주던 재화다. 옥자를 떠나보내며 받은 금돼지를, 나중엔 옥자를 사는 데 쓰므로 금(금돼지)와 옥(옥자)는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관계다. 다시 말해 금이냐 옥이냐. 여기서 금은 물질과 배부름이고 옥이 가족과 연정, 사랑을 뜻할 때 우리는 항상 '금이냐 옥이냐'를 두고 고뇌해왔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영화에서는 미자가 금을 주고 옥을 구출하는 결론이기 때문에 현재적 결론은 틀 안에서 사랑을 택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영화적으로는 우리는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데, 미자는 진실한 가치와 사랑을 선택한다. 현대에서 우선시 되는 돈의 가치를 저항하며 역류하는 영화적 메세지는 미자의 캐릭터만큼이나 강렬하다.

옥자의 줄거리와 캐릭터

옥자는 미란도 서울 지사로 끌려간다. 그 뒤로 동물해방전선(ALF)이 등장한다. 한편 옥자와 미자 동행은 자동차를 부수고, 교통신호를 무시하며 지하 상가로 난입 해 온갖 자본주의 상품들을 들쑤시고 다닌다. 특히 '다이소'를 초토화시키는 장면은 우리에게 상징적인 메세지를 준다. 소비 만능주의와 브랜드 마케팅 세계에서, 해외에서 밀려드는 온갖 잡화로 둘러싸인 채로 옥자를 구하는 동물 해방 전선에 미자는 마음을 여는 듯 보인다. 동물 해방전선이 주적으로 삼는 것은 동물 학대를 비롯해 동물/식물 식량 유통과정을 포함한다. 실버라는 멤버의 대사를 들어보자. "시량 생산 자체가 착취야. 에틸렌 가스로 재배하고 경유차로 운송했지." 자칫 보면 코미디로 읽힐 수 있는 장면이지만 한편으로 소름이 돋기도 하다. 녹색의 설익은 토마토를 따서 에틸렌 가스를 주입한 빨간 토마토를 평소에 먹었다는 걸 생각하면 말이다. 바나나, 채소를 포함해 유통기한이 있는 식품이라면 자연 재료에 인공합성물은 기본으로 첨가된다. 식품 기업의 이러한 관행이 자연에 반하는 행위인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적어도 인간의 소비 행위나 감성이 생산과정에 일련의 책임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들은 옥자를 그들의 정치, 사회적인 운동의 희생양으로 쓸 생각을 한다. 미란도 그룹이 어떻게 유전자 조작 실험을 하고 슈퍼돼지를 상대로 잔인한 실험을 벌이며 학살하는 지 밝혀내고 실험실로 들어가 증거 영상을 마련하는 데 옥자를 이용한다. 케이의 거짓 통역으로 미자의 허락을 얻고 블랙박스를 옥자의 귀에 설치하고 옥자를 실험실로 들여보내게 된다.

조니 박사, 조니 박사 캐릭터는 앞에서 밝혔듯이 어용 전문가이다. 그는 동물을 시식하고 판매하는 이들을 증오하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별 수 없이 그들을 학대하고 실험하는 일을 한다. 조니 박사가 느끼는 감정은 인간 군상 만큼이나 다채롭고 동시에 인간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분열하는 인간의 욕망을 꾸밈없이 보여준다. 내면의 갈등은 화면 구성과 엮이면서 균열을 일으킨다. 딱딱하고 우울한 실험실에 화려한 반바지, 선글라스, 그리고 초록병의 소주... 이런 구성은 봉준호 감독이 이끌어낸 이질과 균열의 미학이다. 무튼 조니 박사의 실험실에서 강제 교미와 샘플 채취를 '당한' 옥자는 다음날 퍼레이드에 미자와 함께 공개된다. 동물해방전선은 옥자를 희생시켜 얻은 영상을 폭로하고 옥자를 탈출시키려는 데 루시 미란도의 언니이자 2대 회장이던 낸시 미란도가 다시 경영권을 쥐고 사건을 수습하기위해 사설 보안 단체인 블랙 초크를 부른다. 그들은 비폭력 평화 단체인 동물해방 전선을 무자비하게 제압하고 옥자를 다시 탈취한다. 가까스로 탈출한 미자와 ALF 일행은 도축 공장(beef plant)에 이르게 되고, 그곳에서 수만 마리의 도축 전 슈퍼돼지를 목격하게 된다. 숨통을 끊는 도정에 다다른 옥자. 최초의 숨통을 끊는 곳은 생물을 한 순간에 사물, 무생물로 전락시키는 결정적인 장소다. 기업이 관리하는 재산이며 인간들이 즐기는 부위별로 나뉘고 음식의 재료들로 변모하는 곳. 미자는 금돼지로 옥자를 산 채로 구입하고 동류를 등지고 탈출한다. 아기 수퍼 돼지를 입 속에 감춘 채로. 나는 후속작을 기대해본다. 옥자의 지능과 감성이면 자연 속에서 동류를 번식시키고 언제나 도축 공장을 탈취할 계획을 세울 지도 모른다.

우리가 참혹한 도축장에서 죄의식을 느끼는 이유

줄거리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영화 줄거리에 대한 분석을 이어간다. 무지막지한 살상을 자행하는 도축업자들은 미란도 그룹에 고용된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노동을 하고 정당한 댓가를 지불받는 계급이다. 혹여 참담한 실상에 대해 이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거라면 그들의 직업 윤리를 내세워 반론을 펼 것이다. 그들은 도축장을 스스로는 'beef(pork) plant'라 부른다. 그들은 돈을 버는 데 합당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근대 자본주의에 이르러 '소명' 의식이라고도 불리는 자본주의 정신이다. 하지만 사회 분위기에 영합해가다보니 개인성을 상실하고 오직 계급성에만 파묻힌다. 그들은 가장 위험한 '생각 없음'의 상태에 빠진다.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이 있다. 독일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부른 개념이다. 악의 평범성이란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는 뜻이며 '생각 없음'이야말로 악을 낳는다고 본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혹은 조직 사회에서 철저히 파편화되고 소외된 개인, 혹은 수동적이고 거의 죽어있을 정도로 기계적인 상태에 익숙해져 비판적 사고능력을 잃을 때 가장 빈번히 발생한다고 보았다. 자본주의를 신격화한 '소명'은 분명 과장된 이론이며 지금은 자본주의 정신을 넘어 다른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 조직과 규율보다는 양심을, 비효율에 대한 염려보다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아름답고 추한 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무지막지한 살상 영상을 보고, <옥자>를 보고 대다수는 채식을 선언한다든가, 최소한 무분별한 육식에 대한 성찰을 갖는다. 왜 우리는 잔혹한 도축장을 보고 죄의식을 느낄까? 왜 미자가 옥자를 데리고 나오는 장면을 마치 홀로코스트 보듯 할까 이 영화 역시 미란도 기업처럼 바람직한 가치를 내세우지만 정작 이 영화는 불편한 판타지를 갖는다. 결론부터 말해서 <옥자>는 자학 동화다. 상상할 수 없는 생명체와 다채롭고 자극히 인간적인 인간상을 창조해 내는 게 감독의 특기라 할 지라도, 이 활극은 그리 완전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첫째 옥자는 인간의 동물에 대한 사랑과 가축을 살육해 먹으려는 욕구를 충돌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미자라는 명랑하고 당당한 아이를 데리고 나온 점은 그가 꼭 필요했던 조건이었을 것이다. '어렸을 적' 아끼던 개가 보신탕이 되어 나온 경험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 '개'를 모르고서라도 이미 먹었다면 자기 속에서 느끼는 윤리적 괴리감이 '기억'으로서 남아있을 것이고 이것은 보편적 정서이다. '수퍼'라는 단어가 어두에 붙지 않았을 뿐이지, 개와 닭, 생선 역시 무분별한 학살을 당하는 동물 개체이다. 그들의 학살은 방관하고 매운탕과 삼계탕은 좋아하면서 미자는 옥자와 서로에 대한 집착증을 보인다. 이런 특수한 양상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잔혹 동화, 옥자

둘째, 옥자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감정 이입이다. 섬세함을 넘어선 눈빛,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시선과 능력은 인간 만큼의, 가끔은 인간을 뛰어넘는다. 인간성을 얻은 옥자는 미자와의 동성 유대관계를 키우는 데 이 관계를 이용하여 관중들로 하여금 육식을 자학으로 착각하도록 만든다. 또 자본의 이윤 구조로 질식해가는 인간의 윤리, 가치 전도 현상을 엮어 옥자를 죽이려는 일종의 모략을 막고 그를 구출해 내는 모험을 휴먼 드라마로 느끼게 한다. 이 영화가 휴먼 드라마일까? 스티븐 스필버그의 <A.I.>와 앤드루 스탠턴의 <월E>에 나오는 로봇들도 놀라울 정도로 인간의 섬세한 감성을 지녔다. 동화감성, 환경/생명 친화적 가치를 띠고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을 발휘한다. 월E의 감성은 아름다웠지만 옥자의 감정은 해괴망측하다. 동물의 탈을 쓰고 인간의 에피소드를 구현해내는 영화 <씽>과는 또 다르다. 우리가 먹고 있는 돼지이기 때문이다. 옥자를 다른 개체들과는 다른 특별한 개체로 여기고 있었다면 이 영화의 설득이 잠시나마 통했던 것이고 그 힘은 일시적이므로, 곧 우리로부터 아우라가 걷히게 될 것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휴머니티를 되찾을 것이다. 휴머니티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옥자에게 감정이입이 된 독자는 옥자에게서 생명을 넘어선 인간성을 느끼고 잔인한 자학성을 혐오하게 된다. 자학성이 싫어 채식주의자의 길을 선택한 거라면 육식을 혐오해서 그렇다기 보단 인간을 혐오해서 그렇게 되었을 확률이 높다.

셋째, 유전자 조작 실험을 통해 얻어낸 수퍼 돼지를 '자연 교미 방식'으로 세상 내어놓았다는 발상이 허술하다. 유전자 조작이 아니면 환경 오염의 부작용일 수 있지만 자연 교미의 결과로 한강 괴물과 같은 슈퍼 돼지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믿기 조차 힘들다. 슈퍼 돼지의 존재조차 돼지와 하마를 합성시켜놓은 괴생물체다. 그 자체가 인간의 이기성을 부각하는 데 소녀와의 순진한 우정이 이 모든 잔혹한 테마를 아름답게 관철하고 있다는 판타지가 다소 불편하다.


옥자에 담긴 감독의 반동성

미자가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한 군집의 사람들이 자하철 계단을 오를 때 홀로 돌아 내려가는 숏은 이동진 평론가의 말로는 '하강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한 숏이라고 했지만 난 다르게 본다. 물론 오르페우스-에우르페 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점과 지하에까지 내려가 속세와 자본의 탐욕적인 원리를 겪는다는 데 동감한다. 하지만 덧붙여 미자의 반사회성을 나타내고도 있는 것이다. 군집이 한 방향으로 일제히 도망갈 때 걸음을 멈추고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인물은 그의 반동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미자의 포켓 벨트는 서울과 뉴욕의 정장 차림에서 촌스러움으로 저항하고 그녀가 결국 루시 미란도가 디자인한 옷으로 갈아입게 되었을 때도 포켓 벨트는 벗지 않는다는 사실로 미뤄 보면 미자는 사회와 섞이지 않는 반동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미자의 어린 나이는 단지 순수성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듯이 보인다. 그녀의 빨간 외투는 반사회성을 나타낸다. (그녀에겐 심지어 폭력성까지 보인다.) 그녀가 사회 속으로 침투하는 것은 오로지 옥자를 데려오기 위한 사투로 읽혀지고 그런 의미에서 이 스토리는 <테이큰>이나 <가문의 영광>과 같은 느와르로 읽혀진다.

봉준호 영화 <설국열차>와 <옥자>의 공통점은 끝과 끝이 인력의 작용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의도든 의도치 않든 조력자가 있다. 먼저 <설국 열차>의 경우 커티스와 윌포드 사이에 길에임이 있고 <옥자>의 경우 미자와 낸시 사이에 루시가 있었다. (물론 이 프레임은 달라질 수 있다.) 길레임은 혁명을 조력하고 루시는 미자에게 항공권을 제공한다. 하지만 길레임과 윌포드는 친구였고 루시와 낸시는 자매다.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워지는 세계관에서 전복할 듯 대립하면서 동시에 거시적으로 공모하는 두 '끝'들은 봉준호 영화의 클리셰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다른 클리셰로 피도 눈물도 없는 자와, 피도 눈물도 과도한 자가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소통하는 모습이다. 이는 이율배반적이로 느껴진다. 다만 <설국열차>가 아이를 구하며 자기를 파괴하는 반면 미자는 아이를 구하고 파괴가 아닌 안정을 되찾는 것은 이 또한 커티스와는 다르게 자폐적이고 반사회적인 미자의 캐릭터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무론 파괴할 수 있는 힘이나 권력, 지위에 커티스는 있었으나 미자는 가진 게 금덩이 밖에 없었다는 것이 행위를 유발한 요인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은 미자가 단지 소시민 이었다는 의미라기보단 미자의 자폐와 반동의 결실이 자기 삶의 확보와 자기 소유물의 확보라는 것을 역설한다.

결국 감독의 반동성은 인간의 육식성 혹은 질서-자기통제적 사회라는 주류 패러다임을 넘어서려는 의도와 함께 캐릭터의 반동성으로 드러난다. 속세로부터 단절된 외진 산골 소녀라는 캐릭터는 캐릭터가 가진 반동성의 필연적인 결과였을 것이다. 반동은 흔히 소외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세계에 갇혀 그 속에서 살기에 만족하는 자폐성 역시 반동성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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