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수리남영역
2019.12.22
'백두산' 초간단 리뷰
1. 몇 년 전 한국영화 '7광구'를 볼 때 느꼈던 불편함들이 있었다. 일단 괴상한 CG부터 불편했겠지만 그보다 더 불편한 점은 배우들의 감정이 과잉됐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클라이막스에서 차해준(하지원)과 괴물이 싸울 때 해준이 지나칠 정도로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 거의 모든 장면에 "으아아아아" 거리면서 뭔가를 한다. 그때 관객인 나는 영화를 보면서 '이 인물이 괴물과 싸우고 있다"라는 생각보다 "이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보며 연기하는 일은 천하의 대배우 안성기조차 어려워 한 일이다. 그런 작업에 익숙해진 헐리우드 배우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해낸다 하더라도 우리 배우들에게 그건 여전히 낯선 일이다. 이 글이 이렇게 시작했다고 "'백두산'은 '7광구'급이다"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백두산'은 '7광구'에 비하면 당연히 훌륭한 영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연기하는 것도 많이 늘었다. 다만 이 영화가 가진 '불편했던 지점'은 '7광구'를 보고 느꼈던 것들을 그대로 답습한다. 이 불편한 점들을 개선하는 것은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꼭 풀어야 할 숙제다. 2. 다행스럽게도 '백두산'은 배우의 감정을 과하게 끌어올리진 않는다. 워낙 잘하는 배우들이 출연한 만큼 8년전 하지원이 하던 "으아아아아" 같은 것은 답습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같은 "으아아아아"를 하더라도 꽤 멋있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과하게 끌어올리는 것이 바로 음악이다. 클라이막스에서 등장하는 현악기 길게 늘어뜨린 음악은 "이러다 '아리랑' 연주하는 거 아냐?"라는 긴장감을 준다. 들을 때 마다 '디 워'가 떠오르는 음악이었다. 배우들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감정을 절제하며 자연스럽게 끌어올린다. 그런데 음악이 지나치게 앞서나간다. 만약 내가 '올해 최악의 영화음악'을 꼽아야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백두산'을 선택할 것이다. 3. '백두산'에서 음악보다 더 거슬리는 것이 바로 편집이다. 속도감을 더하기 위해 편집을 더 했다는 인터뷰 내용을 봤다. 대체 편집을 어떻게 했길래 영화의 많은 장면에서 흐름이 뚝뚝 끊어지는지 물어보고 싶다. 예를 들어 지하에서 드립을 주고 받다가 갑자기 지진이 나고 우루루 뛰어 나오는 장면이 등장한다. 바깥에서 뭔가 회의를 하나 싶더니 갑자기 지하에서 총격전을 한다. '백두산'은 꽤 많은 부분이 이런 식으로 흐름이 끊어지고 설명이 생략된다. "속도감을 더해야 한다"는 게 감독의 뜻인지 제작자의 압박인지 궁금하다. 누가 저질렀건 간에 편집을 더한 것은 '저스티스 리그' 수준의 참사를 불러왔다. 배우의 말대로 이 영화, 감독판이 절실하다. 4, '백두산'이 가져야 할 최대 장점은 CG여야 한다.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CG기업인 덱스터스튜디오가 참여한 작품인 만큼 헐리우드 수준의 퀄리티를 보여줘야 한다. 큰 그림에서는 당연히 놀라운 CG를 보여준다. 영화를 나름 큰 화면에서 보고 싶어서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슈퍼플렉스G에서 봤는데 대단히 만족스러운 스펙타클을 보여줬다. 그런데 스펙타클한 CG는 그렇게 잘 그리면서 그 흔한 크로마키는 왜 그렇게 티가 나는지 궁금하다. 리준평(이병헌)이 조인창(하정우)을 데리고 중국으로 넘어가려다가 차를 세우고 소변을 보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 이후 리준평은 탈출을 시도하려는 조인창을 발견하고 차 뒷문을 연다. 이때 하늘과 나무가 보이는 배경 앞에 리준평이 서있다. 이 장면은 크로마키 촬영한 티가 너무 많이 난다. 적어도 날씨예보하는 기상캐스터보다는 현실적으로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우리나라 최고의 CG 스튜디오 작품인데. 5. 올해 '나랏말싸미'를 보면서 문제점이라고 느낀 것이 "왜 개그를 끼워넣냐"는 것이었다. 확실히 극장에서 가볍게 팔아먹기 위해서는 적당히 웃겨주는 것이 좋다. 게다가 영화의 주인공인 이병헌과 하정우는 웃기는 걸로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다. 배우들의 재능이 출중한 탓에 웃기다가도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매끄러웠지만 웃기려고 하는 장면은 확실히 이야기와 따로 논다. 상업영화라고 굳이 웃길 필요는 없다. 재난영화라면 더더욱 그렇다. '백두산'이 많은 클리셰를 가져다 쓴 헐리우드 재난영화에서도 섣불리 웃기려고 들지 않는다. '재난영화 매니아('장인'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은)' 롤런드 에머리히의 영화들도 그랬고 그냥저냥 봤던 '샌안드레아스'도 웃기려고 들지 않는다. 만약 웃기고 싶었다면 재난이 터지기 전에 웃기는 것이 좋다. 특히 아무리 EOD(폭발물처리반)팀이라고 해도 구보시 발도 못 맞추고 총도 제대로 못 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더 록'의 스탠리 굿스피드(니콜라스 케이지)는 FBI 화학무기 전문가(=과학자)였다. 그럴싸한 EOD는 '허트로커'에 나온다. 걔들은 총 잘 쏘잖아. 6. 많은 관객들은 '백두산'이 "전형적이고 뻔하다"라고 말한다. 분명 그런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난영화에는 '한국이니깐 가능한 장면'이 분명 등장한다. 화산이 터져서 범국가적 재난이 불어닥쳤는데 총질하는 장면이 나오고 작전지휘권을 빼앗기는 장면이 나오는 건 미국영화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재난을 극복하고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휴머니즘이나 추악한 인간성 대신 총질하는 정치적 사건들이 등장한다. 안 어울리는 상황들이 등장하는데 그게 꽤 말은 된다. 미중 갈등상황도 어느 정도 반영돼있어 더 말은 된다. 헐리우드 재난영화였다면 오직 재난하고만 싸워야 했을테지만 한국의 재난영화는 싸워야 할 상대가 너무 많다. 그건 꽤 기발했다. 기발한 걸 잘 못 살린 게 문제지만. 7. 결론: 나는 '백두산'이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재미가 없어진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 불가피한 사정은 '저스티스 리그'가 노잼이 된 사정과 통한다. 재미없는 영화지만 감독판이 보고 싶다. 추신) '백두산'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마동석을 새롭게 썼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마동석은 2017년 '부라더' 이후 처음으로 사람을 때리지 않았으며 2016년 '38사기동대'의 공무원 백성일 이후 가장 지적인 역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