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라씨에이
2024.10.16
8.3/고작 몇 달 간의 시간으로 갈음될 리 만무한 무려 수 십년 치 사랑. 그 불순하고 투박하지만 기특한 시도, 무뚝뚝한 듯 다정하고 관대한 포용.
8.3/고작 몇 달 간의 시간으로 갈음될 리 만무한 무려 수 십년 치 사랑. 그 불순하고 투박하지만 기특한 시도, 무뚝뚝한 듯 다정하고 관대한 포용. / 부모님 세대는 그 무엇보다도 자식들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 참으로 와닿았음. 물론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닐 테고, 부모님들이 아닌 자식세대의 입을 통해 듣긴 하지만, 그래도 듣는 순간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 잠시 띵했고, 이내 극중 노인들의 모습은 물론, 부모님과 함께 보낼 때의 일상 속 경험들이 절로 떠오르며 자연스럽게 나와 우리 부모님을 대입하게 됐음. 생각해 보면 부모님이 어디 외출하자 할 땐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함께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극중 할머니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이해해줬던 반면, 어쩌다 부모님께 어디 다녀오자고 제안하면 부모님은 언제나 반가운 얼굴로 만사 제쳐두고 따라나서 주셨던 것 같음. 어쨌든 언뜻 쉬워 보이지만 막상 실천할 생각을 하면 갖은 핑계들이 우후죽순 피어나기에 결코 쉽지 않은, 오히려 어렵기 그지없는 일이다 싶었고, 불순한 의도로 투박하게 시작하긴 했지만, 그래도 진심을 담아 변화해가며 꾸준히 몇 달 간 할머니와 시간을 보낸 엠의 시도는 충분히 유의미하고 값진 것이라 느껴졌음. / 줄 서서 먹는 생선 튀김, 아들을 위해 수 십년 간 입에도 대지 않은 소고기, 전자레인지 말고 정성 들여 끓인 차, 답답하다며 풀어놓은 마지막 단추, 꽉 맞아 발이 좀 아플 지경인 신발, 주인이 따로 있기에 그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은 석류 열매, 집 옆 모퉁이에 놓인 작고 오래된 벤치, 새 집 대신 마련한 묘지 위에 흩뿌려진 색색의 꽃잎들. 할머니와 엠의 관계가 점차 변화해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다소 클리셰스럽고 단순하면서도 현실적이고 정감가는 소재들의 활용이 좋았음. /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데, 부모 자식 간 갈등은 누가 뭐라 해도 결국 허공에다 선 긋기쯤에서 그치는 듯함. 겉보기엔 낡고 헐거워진 듯 보여도 여전히 질기고 억센 부모의 내리사랑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한, 부모는 언제나 오롯이 부모이고, 자식은 끝끝내 자식일 수밖에 없는 것 같음. 자기 처자식이 우선이라 늙고 병든 엄마는 나 몰라라하지만 내리사랑을 누구보다 오래, 진하게 받아 온 무심한 큰 아들이나, 한심하게 사고나 치고 다니는 백수지만 기어이 집을 물려받은 막내 아들, 받아가는 것도 없이 미련하게 헌신하다 고생길을 면치 못했던 둘째 딸까지. 공평함 따위 간데없는 다분히 불합리한 처사였지만, 그럼에도 하얀 상복을 입고 할머니 곁에 앉아있는 세 자식들의 모습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평화로워 보였음. / 아무리 경솔하고 어리석은 주인공이 변화해가는 과정을 다루는 이야기라 해도 도입부에서 주인공이 보여준 태도는 매사에 대충대충 너무 가볍기 그지없어서 비호감에 거부감도 좀 들었음. 그래서 과연 주인공을 믿고 쭉 갈 수 있을까 했는데, 초반에 품었던 우려는 간데없이 어느새 속 깊고 다정하며 진심도 탑재한 준수한 손자놈이 돼 있었음. 후반부 들어 서운함에 잠시 삐딱선을 타긴 하지만 그래도 이미 변화했음이 뚜렷하게 체감된 지라 진작부터 흐뭇함과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음. 다만 그 변화가 차근차근 완성됐다기보단 철없던 모습에서 어느 순간 성숙하게 철든 모습으로 점프 뛰듯 변해버린 감이 있어서 좀 아쉽긴 했음. 서정적이고 산뜻한 음악과 함께 잔잔하게 훑어나가는 할머니와 손자의 일상들이 변화의 과정보다는 이미 돈독해진 두 사람의 정겨운 모습 재확인 정도로 느껴져서 뭔가 살짝 허전한 느낌이 들었음. / 영화가 준비해둔 여러 감정씬들은 정겹거나 잔잔한 감동, 슬픔 정도는 안겨줬지만, 대부분 어디서 본 듯한 클리셰에 가까운 느낌도 들어서 감정적으로 막 커다란 동요까진 불러일으키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몇몇 장면들에선 도저히 찔끔 새어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음. 꽃무늬로 곱게 차려입고 벤치에 앉아 가족들을 기다리는 할머니의 모습, 무뚝뚝하고 굳세며 어떨 땐 시니컬해 보이기도 하던 할머니가 배를 움켜쥐고 어린 아이처럼 엄마, 아빠를 외치며 울부짖을 때, 암에 걸렸어도 동글동글 정정해 보이던 할머니가 막판 잔뜩 야위어서 사경을 헤맬 때, 그리고 주인공 엠이 할머니의 관을 두드리며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다 문득 밀려오는 슬픔에 눈물을 삼킬 때 등등. 분명 울리기 위한 의도가 담긴 장면들이었지만, 결코 싸구려 억지 신파로 느껴지지 않았고, 충분히 절제해서 표현해놓은 덕에 가슴 아프지만 담담하게 눈물지을 수 있었음. / 도입부에서 주인공이 사진을 찍으며 곳곳을 지나다닐 때 보여준 시내의 모습이나 전개 중간중간 보이는 동네의 풍경들에서 조금은 낯설지만 편안함과 친근함 등을 느낄 수 있었는데, 보면서 왠지 이런저런 영화 속에서 봐온 일본과 홍콩 거리의 풍경을 합쳐놓은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었음. 청량한 듯 어딘가 조금은 축축하고 퀴퀴하며, 어수선하지만 동시에 한적하기도 한 정겹고 평화로운 풍경. 그러한 풍경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상하는 맛이 있었고, 막판 주인공이 할머니의 관과 함께 마실 다니듯 앞선 풍경들 곳곳을 둘러볼 때엔 수미상관의 시너지를 내며 산뜻한 감동, 슬픔을 자아내기도 했음. / 할머니와 오빠의 말다툼을 보면서 잠시 현실 속 우리 어머니 쪽 형제들의 일이 떠올랐음. 유산을 가로채다시피 해서 가져간 오빠들은 나름대로 호의호식하고, 받지 못한 여동생들은 알아서들 각자도생하고. 다 늙어서까지도 욕심을 부리는 고약한 할배가 죽음을 앞둔 불쌍한 여동생을 내칠 땐 잠시나마 분노가 살짝 치밀기도 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