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JC
2020.05.17
<랜드 오브 마인>은 덴마크 서해안에 2차 전쟁 당시 독일군이 심어 놓았던 220만 개 이상의 지뢰를 종전 이후 동원된 전쟁 포로 독일 소년병들이 직접 제거했고, 천 명 이상의 소년병들이 그 과정에서 사망했던 역사적 실화를 다룬 영화다. 놀라운 것은 감독의 국적이 덴마크라는 점과 제작에 독일과 덴마크가 공동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영화가 다룬 실화는 전쟁 포로를 불법적으로 동원한 것으로 명백히 제네바 협약을 위반한 사건이다. 덴마크 입장에선 당연하게도 부끄러운 역사.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에도 감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덴마크 내에 많았다고 한다. ⠀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나라에게나 불리한 역사를 가리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까. 게다가 이 영화는 나치를 피해자로 묘사한 거의 유일한 영화다. 또한 이 사건은 덴마크 국민에게도, 독일 국민에게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드러내지 않아도 되었을 문제를 왜 굳이 드러냈냐는 말이 나왔으리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이 영화의 선택은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더욱 강하게 가진다. 인류 역사에서 극단의 악으로 취급받는 나치 중에서도 분명 피해자라 부를 수 있는 병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전쟁을 대할 때 더 세심하게 짚어봐야 할 당연한 지점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영화를 덴마크 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사실 역시 영화의 주제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든다. 감독은 대외적인 피해국 출신임에도 자신의 나라가 저질렀던 가해 사실을 알리는 용기 있는 선택을 했다. ⠀ 더 자세히 말하자면, <랜드 오브 마인>은 전쟁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모호한 경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전쟁의 보복성과 세대성을 다루면서 전쟁 안에서 집단화를 통해 소실되어 버리는 개인이라는 문제를 들춰낸다. ⠀ 영화는 패전 후 독일로 돌아가는 나치 병사와 그들을 보는 칼 상사의 증오어린 표정을 드러내며 시작한다. 그는 덴마크 국기를 들고 가는 한 병사를 붙잡아, 네가 왜 그 국기를 가져가느냐며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한다. 이 첫 장면에서부터 영화는 전쟁을 다룰 때 '국적'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르는 기준이 되어왔음을 보여준다. 이 나치 병사가 왜 덴마크 국기를 가져가는지를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칼 상사 입장에서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 감히 '독일' 병사가 '덴마크'의 국기를 손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해당 병사를 두들겨 팰 명분을 얻었던 것이다. ⠀ 그리고 영화는 여기서 질문을 던지고도 있다. 전쟁을 둘러싼 보복이 국가와 국가 간의 체계가 아닌 개인을 향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 이유가 여전히 국적일 수 있는가. 곧바로 감독은 지뢰 제거 작업에 끌려가는 소년병들의 이름 없는 얼굴을 한 명 한 명 클로즈업하며 구체적인 담론으로 나아간다. 지뢰 작업에 투입되어 생사를 오가는 소년병들은 이 전쟁을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다. 이들은 가해 국민이지만 가해자가 아니다. 국적을 이유로 보복을 정당화했던 칼 상사의 이념은 서사의 진행과 함께 경험적으로 깨져 간다. 전쟁을 결정하는 건 소수의 권력자이지만 그 전쟁에 나가 피해를 입는 건 그들이 아닌 다수의 국민이라는 점. 그런데 여기서 상기해야 할 것은 당시 독일 국민들은 대다수가 (괴벨스의 선전에 의한 결과였다고 해도) 전쟁과 히틀러의 민족주의에 동의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전쟁에 찬성했던 독일 국민에게 향했던 보복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실제로 소비에트 병사들은 1945년 승전 직후, 베를린의 독일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온갖 약탈과 강간, 살인을 저질렀다. 소비에트 사령부는 사실상 이를 승인했다). 이를 테면 그 지뢰를 매설했던 독일 병사나 그 지휘관들을 직접 데려와 해체 작업을 시켰다면 그건 괜찮은 일인가? 이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전쟁의 모순이다. 그리고 일단 여기서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볼 수 있다. 세대성이라는 문제다. 전쟁의 결과는 그 전쟁을 찬성했든 반대했든 그 전쟁과 얽혀 있는 세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뒤이어 태어난 세대, 곧 전쟁을 향한 어떤 이념과 찬반을 둘러싼 논의에 참여하지도, 주체적으로 생각해 보지도 못했을 다음 세대에게도 향한다. 영화 속의 소년병들처럼 말이다. ⠀ (스포 있음) <랜드 오브 마인>은 극 중 무대인 스캘링엔 해안에 살고 있던 어린 소녀를 등장시키며 이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다. 이 아이는 영화가 다루고 있던 소년병들 보다도 뒷세대다. 그리고 영화는 이 아이가 전쟁의 모순을 이제 막 온몸으로 체감하던 소년병의 자살을 목격하도록 만든다. 소녀의 구출과 소년병의 자살, 그리고 소녀의 목격으로 이어지는 시퀀스는 이 영화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를 잘 드러낸다. ⠀ 죽은 소년병은 에른스트. 그의 동생인 베르너는 이미 지뢰 해체 작업 중 사고로 죽었다. 그들은 쌍둥이였다. 그들은 가해자의 위치에서 가해를 당하는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이들. 영화는 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 경계를 짓기 어렵다는 것을 말 그대로 얼굴이 같은 쌍둥이라는 설정을 통해 표현한다. ⠀ 그리고 무고한 에른스트가 순수한 소녀를 구한 뒤 죽는다. 소녀가 앉아 있던 곳은 지뢰밭 한가운데. 그곳은 언제 무언가가 터질지 모르는 땅이다. 우리가 밟고 서 있는 땅처럼. 이 땅은 바로 전쟁이 일어났던 그 땅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 위에 앉았던 소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구해진다. 세계 전쟁의 마지막 세대가 그 전쟁 이후의 첫 세대를 구했다. 그 과정에서 소녀는 죽음의 목격자, 그러니까 전쟁의 직접적인 목격자가 되었다. 소녀의 몸엔 그 죽음이 트라우마로 각인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는 질문하게 될 테다. 그때 그 사람은 왜 죽었어야 했을까. 이것이 이 영화가 전쟁과 무관한 듯 보이는 우리 세대에게 질문을 남기는 방식이다. 그는 왜 지뢰 속으로 걸어가야 했을까. 그토록 슬픈 눈을 남기고. 전쟁의 트라우마가 가장 어린 세대에게, 우리에게 전이되었다. ⠀ 마틴 잔드블리엣 감독은 칼 상사에 자기를 투영했다고 한다. 나라면 어땠을까, 라는 질문으로 만든 인물이 칼 상사라는 것. 곧 누구라도 피해국 국민의 입장에 선다면, 가해국 국민을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영화 매체가 가진 힘은 저런 소년병들을 한 명 한 명의 개인으로 보도록 도와준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전쟁 안에도 국가로 특정 지을 수 없는 무수한 국면이 존재한다는 걸, 그래서 올바른 공동체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한 한 최대한 살펴보아야 한다는 걸 알려준다. 가해와 피해의 역사는 자세히 고찰되어야 한다. 덴마크 해안에서 독일의 소년병 천 명 이상이 죽었다. 그리고 독일 역시 소련에서 지뢰 해체 작업에 민간인을 동원한 역사가 있고, 당시 삼천 명 이상이 죽었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역사를 가진 인간은 어떤 세대든 전쟁의 간접적인 목격자가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죽어갔던 무고한 개인들의 눈을 잊어선 안 된다. 전쟁이라는 망령이 고개를 들 때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