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9.5/당신과 함께 춤을, 나의 첫여름과 함께 춤을. 싱그럽고 뜨거운 그 첫여름과의 춤바람.

9.5/당신과 함께 춤을, 나의 첫여름과 함께 춤을. 싱그럽고 뜨거운 그 첫여름과의 춤바람. / 수십 년간 잔뜩 묵혀온 낡고 지친 나의 봄을 마침내 싱그럽고 뜨거운 첫여름으로 피어오르게 해준 당신과의 인연. 그런 당신과 함께 춤을, 당신을 위해 춤을. 49제가 진행되고 있는 절간의 소리를 음악 삼아 예고 없이 먼저 떠난 학수를 위해, 지긋지긋한 가족을 떠나온 자기 자신을 위해 춤을 추고있는 영순의 모습을 보며 절로 울컥했음. 생각보다 그리 오래 추지도 않은 춤사위였지만, 영순이 지난 세월 동안 겪고, 느끼고, 감내해온 모든 인생은 물론, 첫여름을 맞으며 경험한 생경하고도 퍽 달가운 감각들이 한데 응축돼 있는 것만 같아서 일순 형언하기 힘든 감정 다발이 밀려왔고, 그간의 지난했던 일생과 작금의 떳떳한 일상에 존중과 경의를 표하고자 하는 마음마저 피어올랐음. 몇몇 작품들에서 제법 접해온 주인공의 독무 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기에 앞으로 쉬이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음. / 묵묵히 억세고 못난 남편의 병수발을 들고, 손녀딸을 위해 철 지난 속옷 선물을 준비하며, 드센 딸내미와 오늘도 언성 높여 티격태격하고, 먼저 간 저승 친구들 말고 얼마 안 남은 동네 이승 친구들과 한산한 가게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우리네 소소하면서도 서글픈 여느 할머니들처럼. 허나 한편으론 춤바람이 들어 화려한 의상을 갖춘 채 요란한 쿵짝 소리와 현란히 반짝이는 조명 아래서 수더분하고 멀끔한 남정네의 손에 몸을 맡기기도 하고, 오롯이 자신만을 향한 그의 질문에 옅은 미소와 설렘을 머금은 채 달가운 고민에 빠지기도 하며,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고서 수줍고도 농염한 눈빛과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하는 한 여자처럼. 누군가의 아내, 엄마, 할머니, 언니이기 전에 영순이자 여자로서 맞은 첫여름. / 구도며 샷이며 촬영 등에 대해선 여지껏 잘 모르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이 영화가 촬영 단계에서부터 꽤나 치밀하고 사려깊게 계획됐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음. 거의 매 장면마다 화면 속에 담긴 인물의 감정과 심정이 여실히 전해졌고, 여전히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음에도 동시에 매순간 여운이 감돌았음. 이전 장면의 잔상과 지금 장면의 생동감이 매끄럽게 연결돼며 조화마저 이루고 있기에 모든 장면이 의미있게 다가왔고, 당연하게도 어느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음. / 주인공 영순의 외모부터 복장, 영순의 집 안을 꾸며놓은 미술 및 소품에다 영순이 일상 속에서 거쳐가는 장소와 상황들, 말투에 대사 내용까지 모든 부분들이 굉장히 디테일하고 사실적이었음. 덕분에 단편임에도 시작하자마자 순식간에 극에 몰입할 수 있었고, 주인공 영순의 입장과 감정 등에 공감하며 동행하듯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음. / 허진 배우가 보여준 덤덤하고 과묵하며 절제된 톤의 연기가 매우 인상적이며 강렬하게 다가왔고, 그 속에서 한가득 품어낸 한 여자의 기구한 생애가 절제된 와중에도 은은하게 새어나오는 듯했음. '할머니' 하면 절로 떠오를 만한 익숙한 모습들은 물론이고, 보통의 인자하고 친근한 할머니가 아닌, 조금은 까칠한 데다, 친절하거나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얼핏 괴짜처럼 보이기도 하는 모습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연기해줬고, 여기에 남의 집 낯선 할머니에게서 '여자'로서의 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눈빛과 표정, 자세, 제스처 등도 디테일하게 표현해줬음. 한편 영순의 삶에 문득 찾아와 파릇하고 뜨거운 첫여름의 춤바람을 선사해준 학수 역의 정인기 배우 역시 짧은 분량 속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음. 배우 특유의 무색무취이자 무궁무진한 이미지 위에 부드러움과 젠틀함, 친근함과 진중함 등을 얹어내며 영순의 늦바람과 춤바람이 결코 가볍고 경솔한 한 때의 불장난 따위로 치부되지 않을 수 있게 해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