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스포일러 주의!

액션과 플롯을 아우르는 웅대한 비전에 미치지 못한 절제와 균형. 소재의 독창성과 연출의 스타일을 제외하곤 이전 자기 영화들의 장점과 단점을 '인버젼'시켜버린 크리스토퍼 놀란.

[테넷]은 그의 데뷔작 [미행]을 제외하곤 크리스토퍼 놀란이 10번째로 연출하는 장편 영화다. 그래서 TEN을 회문으로 만든 TENET을 제목으로 쓴 것일까? 뭐, 진실은 알 수 없다. 테넷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인버젼'이다. 어떤 블랙박스를 이용하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상태로 만들 수 있고 이를 이용한 세계멸망의 음모가 실행되는걸 주인공이 막아야한다는 줄거리다. 여기서 놀란이 현실의 물리량인 엔트로피를 이름만 가져와 영화적 설정을 풀어내는 탓에 이 영화를 [인터스텔라]와 같은 류의 영화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현실의 개념과 영화적 설정을 혼동하지 않고 영화 내의 논리를 따라가야 헷갈리지 않는 [인셉션]과 비슷한 류에 속한다. (엔트로피가 이렇네 저렇네는 큰 의미가 없는 얘기란 뜻이다.) 이 '인버젼'의 개념을 통해 놀란은 영화의 플롯과 액션에서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한다. 플롯에서 놀란은 본인이 항상 집착했던 것처럼 단순하지 않은 시간의 흐름에 집중한다. 주인공과 조력자, 그리고 빌런들은 인버젼을 통해 과거와 미래로 이동하며 자신의 과거를 미래에서 마주한다. '인버젼'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중반부 이전에 벌어졌거나 언급된 사건들이 후반부에서 다시 되풀이되면서 영화의 퍼즐을 맞추는 구조를 생각했을 때 놀란은 쾌재를 부르지 않았을까? 또한 같은 시공간에서 순행하는 시간과 역행하는 시간이 뒤섞이며 다른 어떤 메인스트림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형태의 액션이 거대한 아이맥스 스크린을 수놓을 때 관객들은 그저 경외감에 가득찰 뿐이다. 이런 점 때문에 크리스 놀란이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이야기꾼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웅대한 비전을 실현시키기 위해 놀란은 많은 부분을 희생시킨다. 아니, 영화가 적절한 균형점을 찾지 못하고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진다. 앞에서 말한 몇몇 장대한 액션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이 끊임없는 설명과 대화로 이루어져있다. 관객에게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감독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를 완전히 표현하기 위해 캐릭터의 입을 빌려 설명하는 탓에 이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중간쯤에서 그 흐름을 놓쳐버린다. 또한 [테넷]은 놀란의 영화들 중 가장 캐릭터빌딩이 약한 영화다. 케네스 브래너가 맡은 악역은 70년대 본드 영화의 빌런에서 주제의식도 캐릭터성도 발전하지 않았고 주인공은 무색무취이며 엘리자베스 데비키의 캐릭터 또한 살아숨쉬는 캐릭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 인물들간에는 어떤 드라마도 느껴지지 않는다. [인셉션]에서 코브가 맬에게 자신의 죄의식의 원천을 고백하던 장면이나 [인터스텔라]에서 쿠퍼가 과거의 딸을 보며 STAY를 외치던, 혹은 [덩케르크]에서 케네스 브래너의 캐릭터가 수평선을 가득 메운 어선과 유람선을 바라보던 그런 아주 기본적인 드라마조차도 사치인양 캐릭터들은 장기말로 사용되고 버려진다. [테넷]은 극장 경험에 최적화된 영화다. '인버젼'을 이용한 액션과 2시간 30분동안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퍼즐을 맞춰가는 플롯은 [메멘토] 이후 놀란의 작품들 중 가장 독창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 사이사이를 채워주는 캐릭터와 드라마, 영화를 통해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는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약하다. 불안한 밸런스에도 불구하고 [테넷]은 이 어려운 시간에 왜 영화가 좋은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다. 쉰을 넘긴 놀란이 다음엔 어떤 이야기를 갖고 돌아올까 궁금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