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8.6/재현의 재현.

8.6/재현의 재현. / 재현은 학습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것을. 재현은 학습했다. 자신이 얼마든지 괜찮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재현은 미처 학습하지 못했다. 결코 돌이킬 순 없음을. 재현은 이제 학습하지 않는다. 더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재현은 이제 재현한다. 방관자로서, 시스템으로서. / 패기 넘치는 신입생에서 처량하게 주눅든 피해자로, 나아가 잔인하고 뻔뻔한 가해자로, 조금은 후회하는 듯한 위선자로, 그리고 끝내 악순환을 이어가는 방관자이자 시스템으로. / 자신만만했다가 움츠러들었다가 점점 기가 살더니, 이후 한껏 꺼드럭대던 끝에 이내 울상을 지으며 싹싹 빌고서는 오래간만에 나타나서 실실거리다가 끝내 한발짝 뒤에 앉아 여유롭게 이죽거리려 하는. 훌쩍훌쩍 점프 뛰는 시간 속에서 점차 변화해가는 인물의 모습을 즉각즉각 알아차릴 수 있도록 홍성배 배우가 말투, 자세, 태도, 눈빛, 표정 등의 디테일을 살려가며 직관적이면서 몰입감 있게 표현해냈음. 막판 카메라 뒷편에 위치해 있었던 선생님의 목소리까지 맡았을 줄은 몰랐고, 사실상의 1인극을 안정적으로 꾸려가며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음. / 폭력적인 장면 없이도 얼마든지 폭력적인 화면을 구성할 수 있음을 새삼 증명해냈음. 고정된 구도 속에서 (아마도 폭력이 오갔을) 특정 사건이 벌어지기 전, 혹은 벌어지고난 뒤의 상황만을 인물의 대사와 표정, 말투, 리액션, 약간의 동작 등을 통해 묘사하고 있는데, 충분히 전후 상황을 짐작하고 상상해 볼 수 있도록 꽤나 치밀하게 짜여져 있어서 전개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전혀 없었음. 또한 그 속에서 주제와 메시지 역시도 충분히 단적으로 드러났기에 마무리 직후에는 제법 강렬한 인상과 여운도 남았음. / 세심하고 안전해야 마땅한 "다들 잘 지내고 있지?"라는 선생님의 질문에서 불현듯 답정너의 압박과 위협과 폭력성이 느껴졌음. 마치 잘 지낸다고 답하는 것 외에는 허용된 선택지가 없을 것만 같은 궁지에 몰린 듯한 느낌. 선생님 역할의 목소리가 비교적 차분하고 부드러운 데다, 비겁한 방관자인 듯하면서도 일말의 정의감, 윤리 의식 정도는 갖고 있는 듯해서 초반에 불현듯 느꼈던 답정너의 기운이 기우였나 하며 사그라드는 듯했으나, 이전까지 카메라 뒷편에 위치해 있었을 그 자리에 무미건조한 표정의 재현이 떡하니 앉아 맞은 편의 누군가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모습을 보며 폭력의 연쇄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음. / 러닝타임 내내 이 작품과 유사한 구도로 진행된 장편 영화 <히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음. 엔딩을 제외하곤 사각형의 화면이 내내 고정된 한 장소를 계속 담아내고 그속에서 대상과 배경이 점점 변화하고 순환하는 모습을 담아낸 과감한 시도의 작품. 물론 <히어>가 기나긴 세월 속 여러 인물들을 담아내며 보편적이고 거대한 메시지와 함께 드라마 장르로서 감동과 여운 또한 남겼다면 이 작품은 좀 더 한정된 범위 내에서 시간과 인물의 변화를 담아내며 고발적인 메시지와 함께 촌철살인의 강렬한 끝인상을 남기는 스릴러로서의 마무리를 선보였기에 분명 차이가 있었음. 한편 두 영화가 비슷한 형식을 활용해서 서로 꽤나 상반되는 장르 및 메시지를 담아냈다는 점도 흥미롭게 다가왔음. // [22회 미쟝센단편영화제/고양이를 부탁해/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