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원한고전
2026.09.06
스포일러 주의!
원석(原石)의 시절, 그 거친 호흡과 찬란한 가능성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면 (곤도 요시후미.1995) : 원석(原石)의 시절, 그 거친 호흡과 찬란한 가능성에 대하여 돌아갈 고향 대신, 나아갈 곳을 묻다 1995년, 스튜디오 지브리는 처음으로 미야자키 하야오도 다카하타 이사오도 아닌 제삼의 연출가에게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의 연출봉을 맡겼다. 1993년 모치즈키 토모미 감독의 TV 스페셜 「바다가 들린다」라는 선례가 있었으나, 지브리의 핵심인 극장판 메인스트림을 다른 감독에게 위임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 이름은 곤도 요시후미. 지브리의 차세대 후계자로 촉망받던 이 애니메이터는 「반딧불의 묘」에서 작화감독과 캐릭터 디자인을, 「추억은 방울방울」에서 작화감독을 역임하며 다카하타 이사오의 사실주의적 미학을 체화한 인물이었다. 동시에 「마녀 배달부 키키」와 「붉은 돼지」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역동적 화면을 함께 구축한 장인이기도 했다. 「이웃집 토토로」와 「반딧불의 묘」가 동시에 제작되던 시절, 미야자키와 다카하타 두 감독은 어떤 스태프를 양보하더라도 곤도 요시후미만큼은 자신의 팀에 데려가겠다며 쟁탈전을 벌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결국 다카하타 감독이 자신은 그림을 못 그리니 곤도가 더 필요하다는 논리로 그를 「반딧불의 묘」 팀에 합류시켰다. 두 거장이 그토록 탐낸 재능이 마침내 자신만의 작품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 바로 「귀를 기울이면」이다. 이 영화는 다카하타의 리얼리즘과 미야자키의 낭만주의가 곤도 요시후미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판타지도 모험도 없는 도쿄 근교의 언덕 위 주택가가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무대로 변모하는 작품이다. 지브리가 그때까지 천착해온 '돌아갈 자연'이라는 주제를 원천적으로 전복하고, 대신 '나아갈 예술'이라는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콘크리트로 뒤덮인 서부 도쿄의 타마 구릉지대에서, 열다섯 살 소녀의 내면에 잠든 원석이 처음으로 깎이기 시작하는 소리를 이 영화는 조용히 들려준다. 도서 카드 위에 남겨진 이름, 혹은 아날로그 시대의 운명 올리비아 뉴튼 존의 목소리로 "Take Me Home, Country Roads"가 흘러나오는 오프닝 시퀀스에는 단 한 명의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도쿄 서부 타마 구릉지대의 야경을 느릿하게 훑는다. 불빛이 촘촘히 박힌 아파트 단지와 구불구불한 언덕길, 편의점의 형광등과 주택가의 가로등이 파스텔 톤의 붓질로 재현된다. 이 오프닝은 하나의 선언이다. 지금부터 펼쳐질 이야기에는 바람계곡도, 떠다니는 성도, 숲의 신도 없다는 선언. 곤도 요시후미는 지브리가 늘 그려온 울창한 자연 대신, 콘크리트와 전선주와 계단이 만들어낸 도시의 풍경 안에서도 충분히 서정적인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첫 장면부터 증명해 보인다. 영화의 무대가 된 세이세키 사쿠라가오카는 실제 도쿄 서부 타마시에 위치한 구릉 지역으로, 제작진이 현장을 답사하여 언덕길의 경사와 계단의 수, 주택의 배치까지 정밀하게 재현했다. 흥미롭게도 이 지역은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서 너구리들이 터전을 잃은 '타마 뉴타운' 개발 지구의 인근이기도 하다. 시즈쿠가 사는 마을의 지도 오른쪽 구석에는 '타마 뉴타운'이라는 표기가 있고, 학교로 가는 길목에는 오래된 농가가 남아 있다.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변모해가는 교외의 풍경이 시즈쿠의 이야기를 감싸는 시대적 배경이 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집요하게 묘사하는 것은 이 공간의 수직성이다. 지구옥으로 향하는 가파른 언덕길과 수없이 이어진 계단들의 수직적 지형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중력에 저항하며 숨을 헐떡이고 땀을 흘리며 계단을 오르는 시즈쿠의 육체적 피로는, 곧 미지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창작자의 물리적이고도 고단한 노동을 시각화한 것이다. 중학교 3학년 츠키시마 시즈쿠는 독서를 좋아하는 평범한 소녀다. 여름방학, 도서관에서 빌리는 책마다 대출 카드에 '아마사와 세이지'라는 같은 이름이 적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디지털 검색이 아니라 종이 카드 위의 손글씨로 교차하는 두 사람의 취향. 이 만남의 방식 자체가 이미 하나의 시대적 서정이다. 같은 해 먼저 개봉한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가 편지라는 아날로그 매체를 통해 기억과 정체성의 교차를 그렸다면, 「귀를 기울이면」은 도서 카드라는 더욱 소박한 매체를 통해 취향의 공유가 곧 영혼의 조우임을 보여준다. 시즈쿠는 세이지를 만나기 전에 이미 그의 독서 목록을 통해 그를 알고 있었다. 대면하지 않고 이름으로 먼저 만나는 이 관계의 설계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쓴 각본의 정교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곤도 요시후미가 그것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에서 더욱 빛난다. 시즈쿠가 대출 카드를 넘기며 세이지의 이름을 발견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녀의 손가락 끝에 머물고, 한 줄의 잉크가 한 소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순간을 과장 없이 포착한다. 영화의 포스터 슬로건은 이토이 시게사토가 쓴 한 문장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영화의 모든 떨림이 응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 떨림은 시즈쿠가 세이지를 실제로 만나면서 사랑의 감정과 자기 발견의 욕구라는 두 갈래의 물줄기로 갈라진다. 콘크리트 로드 위에서 깎이는 원석 시즈쿠가 어느 날 게이오선 전철에서 뚱뚱한 고양이 '문'을 따라가는 장면은 「이웃집 토토로」에서 메이가 토토로를 쫓아가는 장면의 도시적 변주다. 이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빈번하게 시즈쿠의 눈높이에 맞춘 시점 숏을 취하거나 그녀의 어깨너머로 좁은 골목길의 미로를 투시한다. 관객을 전지적 관찰자의 위치에서 끌어내려 시즈쿠와 함께 일상 속의 미지를 탐험하게 만드는 이 능동적 프레이밍은 곤도 요시후미의 연출적 선택이다. 그러나 토토로가 이끄는 곳이 거대한 녹나무 아래의 신비로운 공간이었다면, 문이 이끄는 곳은 언덕 위 골동품 가게 '지구옥'이다. 이 공간은 영화의 심장이다. 오래된 시계와 인형과 악기들이 빼곡히 들어찬 이 가게에서 시즈쿠는 고양이 남작 인형 '바론'을 만나고, 가게 주인인 니시 시로 할아버지를 만나며, 결국 그의 손자인 세이지와 재회한다. 무엇보다 지구옥의 커다란 괘종시계에 조각된 드워프 왕과 엘프 공주의 비극 — 정해진 시간에만 찰나의 만남이 허락되는 엇갈림 — 은,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해 물리적, 시간적 거리를 감내해야만 하는 시즈쿠와 세이지의 서사를 암시하는 정교한 거울 장치다. 학교 도서관 서가에 꽂힌 '토토로'라는 이름의 책, 시계에 새겨진 「붉은 돼지」의 포르코 로소 마크 같은 세부 요소들은, 이 영화가 지브리의 세계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넌지시 알려주는 좌표다. 지구옥의 지하 공방에서 세이지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시즈쿠가 "컨트리 로드"의 일본어 가사를 부르며, 니시 할아버지와 친구들이 비올라 다 감바와 류트로 합류하는 합주 장면은 이 영화의 감정적 절정 가운데 하나다. 음악감독 노미 유지가 편곡한 이 시퀀스에서 악기들의 음색은 거칠고 불완전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이 즉흥적 기쁨의 본질을 건드린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제자로서 클래식과 민속 악기 양쪽에 정통한 노미 유지는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음악적 설계를 통해 시즈쿠의 성장 서사를 청각적으로 구조화한다. 그는 다양한 고악기를 차용하여 섬세하면서도 소박한 음색을 만들어냈고, 이 음악은 이후 2002년 「고양이의 보은」에서도 이어지는 지브리와의 인연으로 발전했다. 오프닝의 올리비아 뉴튼 존 버전 "컨트리 로드"가 세련되고 완성된 음악이라면, 시즈쿠가 부르는 일본어 번안 버전은 투박하지만 생생한 자기 표현이며, 그녀가 장난삼아 만든 "콘크리트 로드" 개사는 기존의 노래를 해체하고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하려는 최초의 창작 충동이다. 실제로 이 일본어 번안 가사는 프로듀서 스즈키 도시오의 딸 스즈키 마미코가 작사한 것으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보충 가사를 덧붙였다. 시즈쿠가 개사의 이유를 설명하는 대사는 인상적이다. "고향이란 게 와닿지가 않아서 말이야,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건지 몰라." 이것은 단순한 사춘기적 반항이 아니다. 돌아갈 자연, 돌아갈 고향이라는 지브리의 반복된 주제에 대한 근본적인 재질문이다. 주어진 환경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 부유감은 역설적으로 시즈쿠에게 자신만의 세계를 주체적으로 구축해야 한다는 내적 동기로 작용한다.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 그녀의 자의식은, 점차 스스로 텍스트를 생산하는 단계로 진화한다. 시즈쿠의 성장은 '독서에서 번역으로, 번역에서 창작으로' 이어지는 세 단계의 문학적 여정으로 구조화된다. 처음에 시즈쿠는 타인의 이야기를 소비하는 독자다. 이어서 "컨트리 로드"를 일본어로 옮기는 번역자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바론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귀를 기울이면」을 쓰는 작가가 된다. 이 삼단 구도는 모든 예술가의 성장 과정을 압축한 원형적 서사이기도 하다. 곤도 요시후미 역시 다카하타와 미야자키라는 두 거장의 작품 안에서 기술을 익힌 '독자'이자 '번역자'로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 이 작품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작가'가 되었다. 시즈쿠가 니시 할아버지에게 완성된 소설을 건네며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그래서 곤도 요시후미 자신의 고백처럼 읽힌다. 미숙하지만 진심을 다해 만든 것을 누군가에게 처음 보여주는 그 순간의 두려움과 해방감. 니시 할아버지는 시즈쿠에게 말한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라고. 격려와 솔직함이 동시에 담긴 이 대사는 영화의 주제 전체를 응축한다. 미숙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 그러나 원석이 보석이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제 몸을 깎아내는 고통을 수반한다. 시즈쿠가 소설을 쓰며 겪는 불면과 성적 하락, 그리고 첫 작품의 한계를 직면하고 흘리는 눈물은 재능이 세공되는 과정의 잔혹함을 숨기지 않는다. 이 영화는 꿈을 좇는 일의 아름다움만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깎여나가는 것들의 무게까지 정직하게 담아낸다. 세이지 역시 이미 완성된 보석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공방이라는 낯설고 엄혹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깎아내야 하는 또 다른 원석이다. 바이올린 장인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이탈리아 크레모나로의 유학을 준비하는 세이지는 시즈쿠의 거울상이다. 크레모나는 실제로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바이올린 공방들이 밀집한 도시로, 이곳의 전통 바이올린 제작 기술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원작 만화에서 세이지가 몰두하던 것은 그림그리기였으나, 미야자키 하야오는 "컨트리 로드"를 영화의 또 다른 원작으로 삼으면서 세이지의 꿈을 바이올린 제작으로 변경했다. 이 변경은 단순한 소재의 교체가 아니라 영화 전체에 음악적 서사를 관통시키려는 의도적 설계였다. 세이지는 이미 방향을 정한 사람이고, 시즈쿠는 아직 방향을 찾는 중인 사람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비범한 것은 둘의 관계를 단순한 동경이나 열등감의 구도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이지는 시즈쿠에게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고 말하고, 시즈쿠는 세이지의 바이올린 연주에 노래로 화답한다. 둘은 서로를 자극하되 서로를 짓누르지 않는다. 사랑이 성장의 촉매가 되는 이 관계의 묘사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인간관계의 이상적 형태를 제안한다. 시즈쿠의 아버지가 딸에게 건네는 말 역시 같은 결을 지닌다. 글을 쓰겠다는 시즈쿠에게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삶을 살겠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 될 것이라는 현실을 조용히 일러준다. 이 어른들의 태도는 값싼 위로를 건네는 대신, 삶의 궤도를 이탈하려는 자가 마땅히 치러야 할 책임의 무게를 직시하게 함으로써 낭만주의적 서사에 차가운 현실의 닻을 내린다. 곤도 요시후미의 연출력은 이처럼 일상의 디테일을 포착하는 관찰력에서 극대화된다. 시즈쿠네 가족이 사는 좁은 아파트에 책과 서류가 쌓여 있는 모습, 언니 시호와의 사소한 다툼, 학교 복도의 소란과 교실의 정적. 열차 유리창에 비치는 반사광, 인물의 얼굴 위로 흘러가는 그림자, 비 온 뒤 하늘의 색감 변화 같은 미세한 시각적 변주들이 화면 구석구석에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세부 묘사는 과시적이지 않다. 카메라는 마치 그 공간에 이미 살고 있는 사람의 시선처럼 조용히 머물며,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기억 속 사소한 풍경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곤도 요시후미는 다카하타식의 건조하고 사실적인 생활 공간 — 좁은 아파트, 어질러진 책상, 빨래가 널린 베란다 — 을 캔버스로 삼되, 그 위에 미야자키식의 낭만주의적 빛을 투사한다. 비 온 뒤의 극적인 하늘, 일출의 색채 전이, 골동품 가게 안에 깃든 따뜻한 호박색 조명이 그것이다. 물리적 공간의 철저한 고증 위에 감정적 색채를 덧칠하는 이 이중 구조야말로 곤도 연출의 핵심이며, 두 스승의 미학이 한 화면 안에서 융합하는 지점이다. 시즈쿠가 쓴 소설 속 판타지 시퀀스는 화가 이노우에 나오히사가 그린 '이바라드'라는 초현실적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인상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노우에의 배경화는 영화의 나머지 부분과 의도적으로 이질적인 색감과 질감을 보여준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노우에의 전시회에 참석한 뒤 그의 작품에 매료되어 협업을 제안한 것이 이 배경화의 탄생 배경이다. 바론이 하늘을 나는 이 장면은 지브리 역사상 최초로 디지털 합성 기술이 사용된 시퀀스이기도 하다. 전통적 방식으로 각각 그려진 요소들을 컴퓨터로 결합한 이 장면은 기술적 실험인 동시에 서사적 필연이다. 시즈쿠의 상상 속 세계가 현실과 다른 질감으로 빛나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세계가 2D 셀 애니메이션의 투시도법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다면, 디지털 컴포지팅을 통해 완성된 이바라드 시퀀스의 부유하는 섬과 공간들은 다중 평면 효과를 극대화하며 중력의 법칙을 이탈한다. 미야자키가 고수하던 아날로그의 평면을 뚫고 들어온 이 디지털의 공간감은, 곧 시즈쿠의 내면이 현실의 제약을 벗어나 확장되는 차원을 물리적으로 직조해낸다. 본래 90분으로 기획되었던 러닝타임은 이 이바라드 시퀀스와 바론의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111분까지 늘어났다. 미야자키가 당초 디지털 기술에 반대했음에도, 이 장면의 복합적 구성을 위해 결국 컴퓨터 합성을 수용했다는 사실은 작품에 대한 완벽주의적 태도를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른 아침 세이지가 자전거를 타고 시즈쿠를 데리러 온다. 둘은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고, 도쿄의 새벽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일출의 색채 변화를 정밀하게 포착한 이 시퀀스의 하늘은 차가운 남색에서 따뜻한 주황으로, 다시 맑은 하늘색으로 전이된다. 곤도 요시후미 감독은 이 결말에서 두 사람에게 행복한 미래를 선물하고 싶었다고 전해진다. 이 장면의 빛은 두 사람의 미래를 비추는 동시에 곤도 요시후미라는 한 예술가의 여명이기도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가 남긴 여명 그러나 이 여명은 곧 어둠으로 전환된다. 곤도 요시후미는 「귀를 기울이면」 이후 「모노노케 히메」의 원화 작업에 참여했고, 1998년 1월 21일 대동맥 박리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7세. 과로가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2000여 명의 애니메이션 관계자가 조문했고, "컨트리 로드"가 울려 퍼졌다고 전해진다. 곤도가 떠난 뒤 지브리는 오랜 시간 후계자 부재의 공백을 겪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은퇴를 번복하고 감독직에 복귀해야 했다. 시즈쿠가 쓴 소설 속 고양이 남작 바론은 훗날 2002년 모리타 히로유키 감독의 「고양이의 보은」으로 되살아났지만, 곤도 요시후미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면」은 31억 5천만 엔의 흥행 수익을 올리며 1995년 일본 자국 영화(방화) 박스오피스 흥행 1위를 기록했다. 일본 최초의 돌비 디지털 사운드 적용 극장 영화라는 기술적 이정표이기도 했다. 로튼 토마토에서 95퍼센트의 신선도를 기록하고, 타임아웃 런던이 선정한 애니메이션 영화 50선에 이름을 올린 것은 이 작품의 보편적 공명력을 증거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정한 가치는 흥행 수치나 기술적 혁신 너머에 있다.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이 판타지와 모험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현실의 일상을 지극히 정밀하게 관찰하고, 그 안에서 인간의 성장과 꿈과 사랑의 떨림을 포착하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애니메이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 부재 자체가 역설적으로 「귀를 기울이면」의 주제를 증명한다. 니시 할아버지가 시즈쿠에게 말한 것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갈고닦아야 빛이 난다. 곤도 요시후미는 그 갈고닦는 과정 한가운데서 멈춰야 했다. 그가 살아서 더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면, 지브리는 지금과 전혀 다른 풍경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즈쿠의 소설이 미완이되 의미가 있었듯, 곤도 요시후미의 유일한 감독 작품은 미완의 커리어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이 영화가 수많은 관객의 내면에 깊은 상흔과도 같은 노스탤지어를 남기는 것은, 시즈쿠와 세이지의 반짝이는 궤적이 역설적으로 우리 각자가 끝내 발현시키지 못한 채 묻어두었던 가능성의 시간을 잔인하도록 투명하게 비추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도로 위에서도 자신만의 노래를 만들 수 있고,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라도 깎기 시작하는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 곤도 요시후미는 시즈쿠를 통해 그 진실을 말했고, 자신의 삶으로 그것을 증명했다. 그의 첫 영화이자 마지막 영화는 여전히, 귀를 기울이는 모든 이에게 조용히 속삭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