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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동화가 파시즘에 건네는 자장가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기예르모 델 토로.2006) : 잔혹한 동화가 파시즘에 건네는 자장가 ​ 염소뿔의 사제가 열어젖힌 두 개의 세계 어떤 영화는 장르의 외피를 빌려 시대의 상처를 말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El laberinto del fauno, 2006)는 '판타지'라는 이름표 뒤에 파시즘의 야만, 순수의 희생, 그리고 이야기가 지닌 구원의 가능성을 촘촘히 직조해 놓은 영화다. 1944년 프랑코 정권 치하의 스페인을 배경으로, 열한 살 소녀 오필리아가 숲속 미로에서 고대의 파운을 만나 지하 왕국의 공주 모안나로 돌아가기 위한 세 가지 시련을 수행하는 이야기 — 이 한 줄의 줄거리만으로는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심연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델 토로는 어린 시절 꿈에 나타났던 "염소뿔을 가진 남자"를 모티브로, 20년간 노트에 적어온 낙서와 아이디어를 이 한 편의 영화 안에 응축시켰다.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 프란시스코 고야의 검은 그림들, 아서 매컨의 위대한 목신 판, 보르헤스의 픽션들, 그리고 1973년 스페인 영화 벌집의 정령까지 — 이 영화의 뿌리는 문학과 미술과 역사의 심토 깊숙이 뻗어 있다. 델 토로의 전작 악마의 등뼈(El espinazo del diablo, 2001)가 스페인 내전 속 고아원의 유령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폭력을 우회적으로 말했다면, 판의 미로는 그 주제를 한층 더 깊고 넓게 확장한다. 감독 자신이 DVD 코멘터리에서 두 영화의 정신적 연속성을 언급했듯, 악마의 등뼈의 주인공 카를로스와 판의 미로의 오필리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존조차 버거운 열 살 남짓의 아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그러나 판의 미로가 전작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판타지의 세계가 단순한 배경 장치가 아니라 현실과 대등한 무게로 서사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동화는 도피가 아니라 저항이며, 미로는 미궁이 아니라 귀환의 길이다. 거꾸로 흐르는 피, 멈추지 않는 자장가 영화는 검은 화면에서 시작한다. 거친 숨소리가 들리고, 하비에르 나바레테가 작곡한 자장가 선율이 유령처럼 떠오른다.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것은 한 소녀의 창백한 얼굴이다. 코에서 한 줄기 핏물이 역류하듯 빨려 들어가고, 카메라는 소녀의 눈동자 속으로 잠수하며 첫 번째 환상의 세계로 관객을 이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이 오프닝은, 죽음에서 시작하여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영화의 서사 구조 전체를 예고하는 장치이자, 기예르모 나바로의 카메라가 영화 전체에 걸쳐 보여줄 불안한 유동성의 첫 번째 선언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이바나 바케로, 세르히 로페스, 마리벨 베르두, 더그 존스, 아리아드나 힐이 호흡을 맞춘 이 영화는, 스페인어로 된 저예산 판타지라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8,30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거두며 스크린 안팎을 동시에 정복했다. 그러나 흥행 수치만으로는 이 영화가 왜 2000년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나아가 영화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걸작으로 남게 되었는지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그 답은 영화의 결 하나하나에 스며 있다. 만삭의 어머니 카르멘과 함께 새아버지 비달 대위의 산속 기지로 향하는 오필리아의 여정은, 동화책을 품에 안고 전장을 가로지르는 순수의 행군이다. 정부군 대위이자 잔혹한 파시스트인 비달은 프랑코 정권에 저항하는 마키(게릴라)를 소탕하는 임무를 맡고 있으며, 그의 세계는 시계와 면도칼과 총구로 이루어져 있다. 오필리아가 숲속에서 발견하는 고대의 석조 미로,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는 기괴한 파운 — "산이고 숲이자 땅"이라 자신을 소개하는 이 존재는 소녀에게 지하 왕국의 공주 모안나로 돌아가기 위한 세 가지 과제를 부여한다. 이 순간부터 영화는 두 개의 서사를 동시에 직조하기 시작한다. 하나는 전쟁과 폭력의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시련과 경이의 환상이며, 이 두 세계는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면서도 결코 합쳐지지 않는다 —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차가운 세계의 금이 간 거울 속에서 오필리아의 첫 번째 과제는 거대한 무화과나무 아래 살고 있는 두꺼비의 배에서 열쇠를 꺼내는 것이다. 오필리아는 어머니가 만들어준 아름다운 새 원피스가 더러워질 것을 염려해 나뭇가지에 조심스레 걸어두고, 흰 속옷 차림으로 진흙투성이 나무 속에 기어든다. 순응을 상징하는 예쁜 옷을 벗어놓는 이 행위는 파시즘적 질서에 대한 소녀의 본능적 반항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걸어둔 원피스는 돌풍에 날려 진흙탕에 떨어져 엉망이 되고 만다. 순수를 보존하려는 의지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의 폭력에 의해 훼손되는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비극적 궤적을 소품 하나로 예언하는 델 토로 특유의 서사적 밀도를 보여준다. 촬영감독 기예르모 나바로는 이 두 세계를 색채의 언어로 분리한다. 비달 대위의 파시스트적 현실은 탈색된 청회색과 차가운 회색조로 물들어 있다. 군복의 칙칙한 푸른빛, 돌로 된 방앗간의 차가운 표면, 심문실의 날카로운 그림자 — 나바로는 극도로 낮은 F스톱 범위에서 촬영하며, 노출계조차 무의미할 정도의 어둠 속에서 자신의 직감에 의존했다. 반면 환상의 세계는 따뜻한 호박색과 황금빛, 짙은 적갈색으로 빛난다. 미로의 돌벽은 이끼와 이파리 사이로 은은한 금빛을 내뿜고, 지하 왕국의 옥좌실은 진홍색과 금색으로 물들어 있다. 나바로는 이 색채적 대비에 대해, 영화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서사를 필요로 했으며 "판타지 장면은 다채롭지만 군사적 세계는 차갑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 색채 전략은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영화의 존재론적 구조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장치로, 영화가 진행될수록 두 세계의 색채는 서서히 침투하고 뒤섞이기 시작한다. 두 번째 과제에서 오필리아는 페일 맨(Pale Man)의 연회장에 들어선다. 길게 늘어진 식탁 위에 산해진미가 가득하지만,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의자에 앉아 꼼짝 않는 이 괴물은 창백하고 축 늘어진 피부에 눈이 없다 — 대신 두 손바닥에 박힌 안구로 세상을 본다. 델 토로 자신의 급격한 체중 감소에서 영감을 받은 이 캐릭터의 물리적 형태는, 제도적 폭력에 대한 감독의 혐오를 형상화한 것이다. 더그 존스는 파운과 페일 맨이라는 두 역할을 모두 소화했는데, 페일 맨 분장 상태에서 그가 외부를 볼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는 캐릭터의 콧구멍뿐이었다. 존스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페일 맨의 앙상하고 가는 다리는 그린 레오타드를 입은 존스의 몸 앞쪽에 인공 다리를 부착한 뒤 실제 다리를 디지털로 지우는 방식으로 구현되었다. 파운의 역관절 짐승 다리 역시 스틸트(죽마) 위에 실물 인형 다리를 장착하고 그린스크린 소재의 스타킹으로 감싼 존스의 하퇴부를 후반 작업에서 삭제하는 방식이었다 — 두 괴물 모두 CG의 역할은 배우의 다리를 지우는 데 한정되었고, 캐릭터의 물리적 존재감은 전적으로 존스의 신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장면의 공포는 괴물의 외양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식탁 뒤 벽에 걸린 그림들은 페일 맨이 아이들을 잡아먹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는 전쟁이 아이들의 미래를 집어삼키는 현실의 거울상이다. 오필리아가 유혹에 못 이겨 포도를 두 알 집어 먹는 순간 — 이 미세한 불복종은 성경적 원죄의 메타포이면서 동시에, 어떤 규칙이든 절대적으로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델 토로의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영화의 현실 세계에서 비달 대위는 오필리아의 세 가지 과제가 벌어지는 것과 병행하여 점점 더 깊은 폭력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세르히 로페스의 연기는 이 캐릭터에 소름 끼치는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로페스는 스페인에서 주로 멜로드라마나 코미디 배우로 인식되어 있었고, 마드리드의 제작진은 델 토로에게 "당신은 멕시코 사람이라 모르겠지만, 이 배우는 그런 연기를 해낼 수 없다"고 경고했다. 델 토로의 대답은 "모르는 게 아니라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다. 로페스 본인도 비달을 "내 경력에서 가장 사악한 캐릭터"라고 평했으며, "파시즘에 대한 어떤 정당화도 고려하지 않는 이 영화가 위대하다"고 말했다. 비달이 거울 앞에서 면도하는 장면 — 그의 방은 아버지의 시계를 닮도록 설계되었으며, 이는 감독에 의하면 그의 뒤틀린 정신세계를 상징한다 — 에서 날카로운 면도칼이 피부 위를 지날 때, 카메라는 미세하게 떨리며 이 남자의 내면에 도사린 통제 불능의 폭력성을 암시한다. 비달의 냉혹함에 대한 대위법으로 기능하는 것이 마리벨 베르두가 연기한 가정부 메르세데스다. 비밀리에 오빠 페드로와 마키 대원들을 돕고 있는 그녀는, 영화에서 판타지적 요소 없이도 저항과 용기를 실천하는 유일한 어른이다. 메르세데스가 오필리아에게 들려주는 자장가(나나 데 메르세데스)는 영화의 처음과 끝을 감싸는 선율로, 하비에르 나바레테의 음악적 구조 전체의 축을 이루는 모티프다. 나바레테는 이 단순한 자장가 멜로디를 중심으로 사운드트랙 전체를 건축했다. 숨결처럼 가녀린 허밍으로 시작하는 이 선율은, 프라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연주를 통해 때로는 경이로운 슬픔으로, 때로는 악몽 같은 어둠으로 변주된다. "Long, Long Time Ago"에서 피아노와 여성 보컬이 함께 제시하는 이 테마는, "Mercedes Lullaby"에서 한층 풍성하게 발전하고, 마지막 트랙 "Pan's Labyrinth Lullaby"에서 독주 바이올린의 꿈결 같은 연주로 귀환한다. 나바레테의 음악은 아카데미 음악상과 고야상 음악상 후보에 올랐으며, 그래미상 최우수 영화음악 부문에도 노미네이트되었다. 더그 존스의 신체적 연기는 이 영화의 판타지 세계에 물리적 실재감을 부여하는 핵심 요소다. 미국인인 그는 촬영 현장에서 유일하게 영어만 구사하는 배우였다. 다섯 시간에 걸쳐 특수 분장을 마친 후, 그 시간 동안 고어 스페인어 대사를 외웠다. 비록 최종 음성은 스페인 연극배우 파블로 아단에 의해 더빙되었지만, 존스가 대사를 완벽하게 익힌 덕분에 더빙 배우가 입 움직임에 맞춰 자연스럽게 음성을 입힐 수 있었다. 파운의 펄럭이는 귀와 깜빡이는 눈은 DDT 에펙토스 에스페시알레스의 다비드 마르티와 사비 바스티다가 현장에서 원격으로 조종했으며, 델 토로는 존스에게 파운의 움직임에 대해 "록스타처럼 가되, 데이비드 보위보다는 믹 재거에 가깝게"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는 파운이 지닌 고대의 위엄과 야생적 에너지, 그리고 오필리아를 시험하면서도 보호하는 이중적 본성을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다. 존스의 긴 사지가 만들어내는 유려하면서도 기이한 동작은, CG가 아닌 배우의 신체가 환상의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걸작적 퍼포먼스다. 이 영화는 디지털 효과보다 정교한 특수 분장과 애니매트로닉스에 주로 의존했으며, 이는 델 토로가 특수효과 기술자 출신으로 10년간 그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세 번째 과제에서 판은 오필리아에게 갓 태어난 남동생의 피를 요구한다. 오필리아는 거부한다. 이 거부는 영화 전체의 도덕적 정점이자, 현실 세계와 환상 세계가 마침내 하나의 윤리적 원칙으로 수렴하는 순간이다. 비달이 대의를 위해, 질서를 위해, 명령을 위해 무고한 이들의 피를 흘리는 것과 정확히 대척점에 서서, 오필리아는 무고한 자의 피를 흘리기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지하 왕국의 진정한 공주임을 증명한다. 판은 이 선택을 칭찬하며 "전하"라고 부른다. 죽어가는 오필리아가 석조 미로 위에서 미소 짓는 마지막 장면, 그리고 이어지는 에필로그에서 모안나 공주가 지하 세계로 돌아와 수세기 동안 자비와 정의로 통치했다는 내레이션은 — 이 영화가 던지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관객에게 남긴다. 오필리아의 환상은 실재했는가, 아니면 죽어가는 소녀의 마지막 백일몽에 불과한가? 델 토로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영화의 첫 장면이 이미 죽어가는 소녀의 얼굴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보는 모든 이야기가 이미 끝난 뒤의 회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서 메르세데스가 오필리아의 시신 곁에서 자장가를 부를 때, 시든 무화과나무에서 하얀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장면은 — 환상이든 현실이든 — 이야기가 지닌 구원의 힘을 시각적으로 선언한다. 이 영화는 남미 문학의 마술적 리얼리즘 전통, 마르케스와 보르헤스의 소설들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려 독재와 내전의 상처를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과 깊이 맞닿아 있다. 멕시코인인 델 토로가 스페인을 배경으로 이 영화를 만든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스페인 내전 당시 멕시코는 소련과 함께 공화파를 적극 지원한 몇 안 되는 나라였으며, 내전 이후 대거 망명한 스페인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멕시코 영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영화는 그 역사적 유대의 예술적 결실이기도 하다. 미로의 끝에서, 이야기의 시작에서 판의 미로는 한 편의 영화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신화다. 2006년 칸 영화제 초연에서 영화제 역대 최장인 22분간의 기립 박수를 이끌어낸 것은, 화려한 비주얼이나 섬세한 연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아카데미 촬영상, 미술상, 분장상 3관왕,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을 포함한 3개 부문 수상, 로튼 토마토 95%, 메타크리틱 98점(2000년대 최고 점수) — 이 숫자들은 결과일 뿐 원인이 아니다. 관객이 박수를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 — 파시즘의 폭력 앞에서 동화책 한 권을 무기로 드는 소녀의 세계 — 가 스크린 안에 머물지 않고 관객 자신의 현실로 번져 나왔기 때문이다. 비달 대위가 체현하는 절대적 복종의 논리는 1944년의 스페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명령이 양심을 대체하고, 질서가 정의를 삼키고, 효율이 인간성을 밀어내는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비달의 시계는 여전히 째깍거린다. 나바로의 색채 설계가 이 결론부에서 완성된다는 점도 놓칠 수 없다. 영화 초반에 엄격히 분리되었던 차가운 현실과 따뜻한 환상의 색채는, 후반부로 갈수록 서서히 경계를 허문다. 오필리아가 지하 왕국의 옥좌에 오르는 마지막 환상 시퀀스에서, 화면 전체를 물들이는 황금빛은 더 이상 환상 세계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필리아가 현실에서 선택한 희생의 도덕적 빛깔이며, 두 세계가 하나의 윤리적 진실로 수렴하는 순간을 색채로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계 소리가 들리는 곳이면 어디든, 진흙투성이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미로의 입구에 서 있다. 오필리아의 선택 — 무고한 자의 피를 흘리기보다 자신의 죽음을 택하는 — 은 영화적 순교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나는 명령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내 양심에 복종할 것인가. 델 토로는 이 질문을 동화의 문법으로, 자장가의 선율로, 황금빛 미로의 미장센으로 건네면서, 그 어떤 정치적 선언보다 더 깊은 곳에 이 물음을 심어놓는다. 판의 미로가 개봉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어디를 봐야 할지 아는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흔적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시든 나무에서 피어나는 하얀 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