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라파엘
2026.09.24
불쾌함을 독창적인 미학과 웃음으로 바꾸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뒤집는다. 혐오하면서도 자극을 소비하는 사회의 모순까지 거침없이 풍자하는 도발적인 반항이다.
▼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주의 🦩 ‘세상에서 가장 추잡한 사람’이라는 기막힌 왕관 존 워터스의 <핑크 플라밍고>를 단순히 충격적이고 불쾌한 영화라고 설명하는 것은 이 작품의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근친적 성행위, 살인, 식인, 납치, 인신매매, 성적 기행, 동물 학대와 배설물까지 당시 상업영화가 좀처럼 건드리지 않던 금기를 끌어모았지만, 존 워터스의 목적은 단순히 얼마나 역겨운지 자랑하는 데 있지 않다. 그는 가장 저속하고 불편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이용해 사회가 정상과 비정상, 고급과 저급, 품위와 천박함을 구분하는 기준 자체를 뒤집는다. 그 중심에는 범죄자로 악명을 떨친 디바인이 있다. ‘뱁스 존슨’이라는 가명으로 볼티모어 외곽의 트레일러에 숨어 사는 그녀는 타블로이드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추잡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욕으로 받아들일 말을 디바인은 최고의 명예로 받아들인다. 어머니 에디, 아들 크래커스, 동료 코튼과 살아가는 그녀에게 악명은 숨겨야 할 치부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왕관이다. 그래서 <핑크 플라밍고>는 의외로 고전적인 왕좌 쟁탈전과 닮았다. 왕관을 가진 디바인이 있고, 그것을 빼앗으려는 코니와 레이먼드 마블 부부가 나타나며, 두 세력이 누가 더 추잡한지를 놓고 경쟁한다. 단지 그들이 차지하려는 왕좌가 ‘세상에서 가장 추잡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모든 가치가 뒤집힌다. 이 황당한 설정이 영화의 강력한 코미디를 만든다. 등장인물들은 터무니없는 목표를 놀라울 정도로 진지하게 추구한다. 디바인은 자신의 악명이 훼손되는 것을 명예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마블 부부 역시 추잡함에서 그녀를 이기는 것을 중요한 목표처럼 여긴다. 정상적인 경쟁의 규칙을 완전히 뒤집어놓고 인물들만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하면서 존 워터스는 불쾌함과 웃음을 동시에 만들어낸다. 🏠 괴물처럼 보이는 가족과 정상적으로 보이는 괴물 디바인의 가족은 첫인상부터 정상적인 가족과 거리가 멀다. 트레일러에서 숨어 살고, 어머니 에디는 달걀에 광적으로 집착하며, 크래커스와 디바인의 행동 역시 사회적 규범을 수없이 넘어선다. 그럼에도 이 가족 안에는 기묘할 정도로 강한 결속이 있다. 에디가 달걀에 집착해도 가족은 그녀를 교정하려 하지 않는다. 서로의 이상함을 이미 가족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반대로 마블 부부는 비교적 평범한 부부의 외형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 행동은 훨씬 조직적으로 잔혹하다. 여성들을 납치해 지하실에 감금하고 강제로 임신시킨 뒤 태어난 아이를 판매한다. 인간의 몸과 출산, 생명을 하나의 사업수단으로 취급한다. 이 대비가 영화에서 가장 날카로운 사회적 풍자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외모와 옷차림, 말투와 취향, 성적 표현과 생활방식처럼 눈에 보이는 특징을 이용해 정상과 비정상을 쉽게 구분한다. 존 워터스는 가장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가족에게 애정과 결속을 집어넣고, 상대적으로 정상적으로 보이는 부부의 집 지하에는 인간을 상품으로 만드는 범죄를 숨겨둔다. 물론 디바인이 선한 영웅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녀 역시 살인과 폭력을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영화가 말하는 것은 ‘이상한 사람은 착하고 평범한 사람은 악하다’는 단순한 역전이 아니다. 외형적인 정상성과 실제 윤리성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우리의 습관을 조롱한다. 얼마나 점잖게 보이는가보다 실제로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세상에서 가장 당연하지 않은 방법으로 보여준다. 🥚 불쾌함과 웃음을 동시에 만드는 코미디 <핑크 플라밍고>의 또 다른 장점은 끔찍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본질적으로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영화라는 점이다. 특히 디바인의 어머니 에디가 보여주는 달걀에 대한 집착은 영화의 코미디를 대표한다. 주변에서 범죄와 복수극이 벌어져도 에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달걀이고, 그런 그녀에게 달걀을 가져다주는 에그맨이 나타나 사랑을 표현한다. 황당한 설정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묘하게 따뜻하다. 존 워터스는 기괴한 인물을 등장시킨 뒤 그 인물을 정상으로 교정하지 않는다. 에디가 행복해지기 위해 자신의 집착을 버릴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나타난다.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정상적인 사람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고 기괴한 사람은 주변에서 웃음을 제공하지만 <핑크 플라밍고>는 그 관계를 뒤집는다. 이상한 사람들이 주인공이고 그들의 기준에서는 오히려 평범함과 점잖음이 이상한 것이 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웃음은 누군가를 조롱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마블 부부가 추잡함의 왕좌를 진지하게 탐내고, 디바인은 자신의 악명을 스타의 명예처럼 받아들인다. 관객이 웃어야 할지 얼굴을 찌푸려야 할지 모르는 상태 자체를 웃음의 재료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존 워터스의 코미디는 독특하다. 🎥 조잡함마저 스타일로 만들어버리다 <핑크 플라밍고>의 거친 화면 역시 작품의 정체성과 떼어놓을 수 없다. 세련된 할리우드 영화와 비교하면 촬영과 연기, 미술 모두 거칠고 불균형하다. 하지만 바로 그 싸구려 같은 질감이 영화의 내용과 놀랍도록 잘 어울린다. 이 영화가 지나치게 깨끗하고 아름답게 촬영되었다면 화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세련된 영화적 볼거리라고 쉽게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홈무비와 기록영상의 중간처럼 거친 화면 때문에 기괴한 사건들이 어딘가에서 정말 벌어지고 있는 광경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 조잡함은 영화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핑크 플라밍고>는 좋은 취향을 공격하면서 자신을 좋은 취향의 포장지에 싸지 않는다. 영화가 추잡함과 저속함을 이야기한다면 영화의 형태 역시 거칠고 천박하다. 제작환경의 한계마저 작품의 세계관과 결합하면서 누구도 쉽게 복제할 수 없는 개성으로 바뀐다. 👠 디바인의 몸으로 완성되는 영화의 반항 실제 배우 디바인을 언급할 필요가 있는 이유도 배우 개인이 영화보다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의 이미지가 <핑크 플라밍고>의 태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디바인은 거대한 체격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강조하고, 눈썹을 지운 뒤 이마까지 올라가는 극단적인 화장과 과장된 몸짓, 화려한 의상을 보여준다. 사회가 날씬함과 절제, 자연스러움과 우아함을 아름다움의 조건으로 요구한다면 영화 속 디바인은 정확히 반대로 움직인다. 작아지지 않고 더 커지며, 얌전해지지 않고 더 화려해진다. 사회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대신 자신의 존재를 너무 크게 만들어 오히려 그 기준을 초라하게 만든다. 이것은 영화 자체의 태도와 정확히 겹친다. <핑크 플라밍고> 역시 조잡하다는 말을 듣는다고 세련된 척하지 않고, 저속하다는 말을 듣는다고 품위를 갖추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가해질 수 있는 비난을 가져와 영화의 개성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러한 디바인의 과장된 이미지는 훗날 디즈니 <인어공주>의 문어 마녀 우르슬라 디자인에도 영감을 주었으며, 풍만한 체형과 강렬한 화장, 과장된 존재감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 추잡함을 비난하면서 소비하는 사회 영화에서 타블로이드 언론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디바인이 유명해진 것도 언론이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추잡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붙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마블 부부를 붙잡은 디바인은 기자들을 불러 공개재판과 처형을 하나의 미디어 이벤트로 만들어버린다. 사회는 충격적인 사건과 사람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소비한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기사를 보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관심이 커질수록 매체는 더욱 자극적인 것을 찾는다. 결국 추잡함을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추잡한 사람 혼자가 아니라 그것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대중과 그것을 팔고 싶어 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현실의 <핑크 플라밍고>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유명해졌다. ‘도대체 얼마나 심한 영화인가’라는 악명 자체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사람은 불쾌한 것을 피하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심한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 존 워터스는 바로 그 모순을 영화의 힘으로 이용한다. 오늘날 자극적인 사건일수록 빠르게 확산되고 비난이 많을수록 더 많은 관심을 받는 현상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핑크 플라밍고>는 인터넷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관심과 악명이 서로를 키우는 사회를 타블로이드라는 장치를 통해 희화화했다. ⚖️ 정상이라는 이름표와 좋은 취향의 권력 후반부의 공개재판은 영화가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뒤집는 방식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내내 사람들은 서로에게 추잡하다는 판정을 내린다. 마블 부부는 자신들이 디바인보다 더 추잡하다고 주장하고, 디바인은 자신이 진정한 추잡함의 주인이라고 선언하며, 타블로이드는 그것을 기사로 만든다. 그리고 영화 바깥에서는 관객이 이들을 판단한다. 여기에 존 워터스가 설치한 함정이 있다. 관객은 화면을 보면서 역겹다고 판단하는 동시에 바로 그 역겨움을 보기 위해 영화를 계속 보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범죄와 관객의 호기심이 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타인을 구경거리로 소비하면서 자신은 그 구경거리와 완전히 분리된 사람처럼 행동하는 모순이다. 영화에서 반복되는 ‘추잡함’ 역시 단순히 신체적인 불결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가 가치 없다고 밀어내는 취향과 문화, 사람들을 과장한 상징처럼 기능한다. 어떤 영화가 고급스럽고 어떤 영화가 저급한지, 어떤 옷이 세련되고 어떤 행동이 천박한지를 사회는 끊임없이 구분한다. 존 워터스는 그 위계를 받아들이는 대신 가장 아래에 있다고 평가받는 것들을 화면 중앙에 세운다. 그렇다고 모든 행동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허용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개인의 취향과 타인을 해치는 행위는 전혀 다르다. 사회적으로 이상하게 보이는 것과 실제로 다른 사람의 자유와 존엄을 침해하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의 모습이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성을 판단할 수 없으며, 반대로 누군가가 정상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선하다고 믿어서도 안 된다. 🧨 불편함 자체를 영화의 언어로 사용하다 <핑크 플라밍고>가 특별한 이유는 이런 내용을 점잖은 대사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존 워터스는 설명보다 관객의 신체적인 반응을 먼저 끌어낸다. 역겨운 장면에서는 얼굴이 찌푸려지고, 터무니없는 상황에서는 웃음이 나오며, 어떤 순간에는 방금 자신이 웃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당황하게 된다. 바로 그 감정의 충돌이 영화의 언어다. 존 워터스의 코미디는 편안하게 웃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다. 웃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순간에 웃음을 만들고, 역겨워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순간에는 오히려 다음 장면을 궁금하게 만든다. 그 결과 관객은 자신의 취향과 한계를 의식하게 된다. 그래서 충격적인 장면들은 작품의 악명을 만들기 위한 장식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자체가 관객의 경계를 시험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충격은 형식의 일부가 된다. 존 워터스는 관객을 설득하기보다 도발하고, 정상성과 좋은 취향을 설명하는 대신 그 기준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이미지를 던진다. 🎞️ 연출된 충격과 실제 행위의 경계 <핑크 플라밍고>의 마지막을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유작 <살로 소돔의 120일>과 비교하면 이 영화가 충격을 사용하는 방식이 더욱 선명해진다. 두 작품 모두 악명 높은 배설물 섭취 장면을 가지고 있지만 촬영 방법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살로 소돔의 120일>에서 배우들이 섭취하는 것은 실제 인체 배설물이 아니다. 촬영 현장 기록에 따르면 초콜릿과 부순 비스킷, 연유와 마멀레이드 등을 섞어 먹을 수 있는 대용품을 만들었다. 파졸리니에게 중요한 것은 배우가 실제로 배설물을 먹는 행위가 아니라 권력이 인간의 존엄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미지였다. <핑크 플라밍고>는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한다. 마지막에 실제 개가 화면에 등장해 배변하고, 디바인은 방금 배출된 실제 개의 배설물을 직접 집어 입에 넣는다. 대체물도 아니고 편집으로 속인 것도 아니다. 그 뒤 실제로 헛구역질하는 모습까지 이어진다. 이 장면을 두고 존 워터스와 디바인이 당시 약물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퍼지기도 했다. 워터스가 이 발상을 당시 자신의 ‘대마초식 유머’와 연결해 회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훗날 밝힌 설명에 따르면 대마초의 영향 아래 각본을 쓴 것과 실제 촬영 당시의 상태는 구별해야 한다. 따라서 두 사람이 촬영 순간 약물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를 확인된 사실처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오히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행동이 우발적인 기행이 아니라 영화의 결말을 위해 계획된 행동이었다는 점이다. 존 워터스와 디바인은 영화의 마지막 농담을 완성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현실의 선을 넘어간 것이다. 💥 현실과 연기의 경계를 삼켜버리는 결말 마블 부부를 처형한 순간 이야기는 이미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디바인은 경쟁자를 제거했고 ‘세상에서 가장 추잡한 사람’이라는 왕좌를 지켜냈다. 그런데 존 워터스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디바인이 실제 개의 배설물을 섭취하면서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던 추잡함의 경쟁이 현실의 행위로 넘어간다. 이 장면이 강력한 이유는 단순히 불결하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 전체의 구조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무리 충격적인 일이 벌어져도 관객에게는 ‘영화니까’라는 안전거리가 있었다. 마지막 순간 그 안전장치가 사라진다. 배우가 캐릭터를 연기해서 가장 추잡한 사람이 되는 것을 넘어 실제 배우의 몸이 영화가 세운 목표에 참여한다. 동시에 이 결말은 너무나 유치해서 웃기기까지 하다. 누가 더 추잡한지를 두고 납치와 살인, 방화와 복수까지 벌어졌는데 최종적인 승리의 증명이 개의 배설물을 섭취하는 행동이다. 거대한 왕좌 쟁탈전의 결승선이 가장 원초적인 악취미 농담으로 끝난다. 거창함과 저속함, 현실과 연기, 혐오와 웃음이 한 장면에 겹친다. 그래서 이 장면은 단순한 충격요법이 아니라 <핑크 플라밍고>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정확한 마침표다. 🌈 사회가 버린 것을 자신의 왕관으로 만드는 영화 결국 <핑크 플라밍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특정 배우나 충격적인 장면 하나가 아니라 영화 전체가 취하는 태도다. 이 작품은 사회가 자신에게 붙일 수 있는 모욕적인 표현들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가져와 자신의 정체성으로 만든다. 저급하다고 하면 더 저급해지고, 조잡하다고 하면 그 조잡함을 스타일로 만들며, 불쾌하다고 하면 관객이 어디까지 불쾌함을 견딜 수 있는지 시험한다. ‘세상에서 가장 추잡한 사람’이라는 디바인의 태도와 ‘세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악취미 영화’가 된 <핑크 플라밍고>의 운명은 그래서 서로 닮아 있다. 모욕을 피하는 대신 왕관으로 바꾼다. 사람은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좋은 몸과 좋은 옷, 좋은 취향을 통해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 기준에서 밀려나면 자신의 모습을 숨기거나 바꾸려고 한다. <핑크 플라밍고>는 그 구조를 극단적으로 폭파한다. 사회가 싫어하는 것을 화면 한가운데 가져다놓고 그것이 자신의 세계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물론 이것이 영화 속 범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존 워터스가 옹호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 정상성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존재와 취향까지 획일화하려는 태도에 대한 반항에 가깝다. 🔥 가장 저속한 것으로 기준을 뒤집다 존 워터스가 공격하는 것은 너무 쉽게 만들어지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자신의 취향을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믿는 태도, 남을 심판하면서 자신은 심판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위선이다. 사람은 자신과 다른 것을 보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불편하다는 감정과 잘못되었다는 판단은 같은 것이 아니다. 낯설고 촌스럽고 저속하고 기괴한 것이 반드시 악한 것은 아니며, 깨끗하고 세련되고 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도 아니다. 디바인의 가족과 마블 부부의 대비는 바로 그 사실을 가장 과격한 방법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영화는 사회가 혐오하는 것을 소비하는 방식까지 조롱한다. 타블로이드는 디바인을 비난하면서 유명하게 만들고 사람들은 추잡하다고 말하면서 그녀를 구경한다. 결국 관객 자신도 이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이 영화가 얼마나 충격적인지 확인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이미 존 워터스가 만들어놓은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핑크 플라밍고>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단순한 충격이 아니라 기준을 뒤집는 힘에 있다. ‘세상에서 가장 추잡한 사람’이라는 모욕을 디바인은 왕관으로 바꾸고, 싸구려 영화라는 약점을 존 워터스는 누구도 쉽게 복제할 수 없는 스타일로 바꾼다. 마지막에 남는 감정 역시 단순한 혐오감만은 아니다. 어처구니없는 웃음과 당혹감, 불편함과 묘한 해방감이 동시에 남는다. 좋은 영화가 반드시 관객을 편안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온몸으로 증명한다. <살로 소돔의 120일>이 먹을 수 있는 대용품으로 끔찍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면 존 워터스는 실제 행위를 통해 영화와 현실 사이에 남아 있던 마지막 안전거리마저 없애버린다. 가장 나쁜 취향을 가지고 가장 점잖은 사회를 조롱하고, 가장 천박하다고 평가받는 재료를 이용해 정상과 품위의 기준을 흔들면서도 그 모든 것을 달걀과 타블로이드, 과장된 연기와 블랙코미디의 웃음으로 포장한다. 그래서 <핑크 플라밍고>는 단순히 ‘역겨운 영화’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불쾌함을 무기로 삼고, 저속함을 스타일로 만들고, 사회가 버린 취향을 화면 한가운데 올려놓은 뒤 관객에게 자신이 믿어온 기준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영화다. 가장 저속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여 가장 독창적인 개성을 만들어내고, 그 개성을 통해 정상과 비정상, 품위와 천박함, 주류와 주변부를 나누는 사회의 기준까지 유쾌하게 뒤흔든다. 그것이 <핑크 플라밍고>가 단순한 충격영화를 넘어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불쾌하고, 우습고, 당황스러우면서 이상할 정도로 강렬하게 살아남은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