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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에 들여놓은 시간과 값의 산술

석양의 건맨 (세르지오 레오네.1965) : 서부에 들여놓은 시간과 값의 산술 ​ 삶에 값이 없던 곳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문장 하나가 먼저 스크린을 차지한다. 삶에 아무런 값도 매겨지지 않던 곳에서 죽음은 때때로 값을 지녔고, 그래서 현상금 사냥꾼들이 나타났다는 선언이다. 서부극이 관습적으로 자기 세계를 소개하던 방식—광활한 대지, 개척의 서사시, 문명을 세우려는 의지—을 이 자막은 단 두 문장으로 폐기한다. 여기서 서부는 건설의 무대가 아니라 회계의 무대다. 〈석양의 건맨〉이 진정으로 다루는 것은 총이 아니라 척도다. 이 영화에는 사람의 값을 재는 두 개의 자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하나는 몽코의 산술이다. 그는 수배 전단에 적힌 액수로 인간을 인식하고, 죽인 뒤에는 반드시 셈을 한다. 다른 하나는 모티머 대령의 시계다. 그는 액수가 아니라 지속을, 잊히지 않는 어떤 시간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 두 척도 사이에 엘 인디오가 있다. 그는 기억에서 달아나기 위해 약을 피우고, 살인을 회중시계의 종소리에 맞춰 의례로 만든다. 시간을 죽이려는 자가 시간을 재는 물건에 매달린다는 이 역설이야말로 영화의 심장이다. 전작 〈황야의 무법자〉(1964)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를 서부로 옮겨 심은 각색물이었다면, 이 두 번째 작품에서 레오네는 비로소 자기 문법을 발명한다. 조각난 채 제시되었다가 나중에 완성되고, 완성되는 순간 소유자가 바뀌는 플래시백. 사건의 세계에서 흘러나와 악보의 세계로 넘어가는 음악. 총알이 아니라 총알이 발사되기 직전의 간격으로 만들어진 서스펜스. 3년 뒤 〈옛날 옛적 서부에서〉의 하모니카가 무기이자 기억이 되는 순간의 원형이 여기, 두 개의 똑같은 회중시계 속에 이미 들어 있다. 지평선의 점 하나 첫 장면에서 레오네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지평선까지 텅 빈 사막이 초광각으로 펼쳐지고, 그 위에 사람인지 벌레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점 하나가 느리게 움직인다. 화면 밖 어디선가 누군가 휘파람을 분다. 총성이 울리고, 점이 쓰러진다. 쏜 사람은 끝내 보이지 않는다. 관객은 살인을 목격했지만 살인자는 보지 못했고, 죽은 자의 이름도 듣지 못했다. 영화가 제목을 밝히기도 전에 사람 하나가 값으로 환산되어 사라진 것이다. 참고로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그 휘파람은 감독 세르조 레오네 본인이 직접 낸 소리다. 크레딧에 오르지 않은 이 목소리 배역은 그가 자기 연출작에 남긴 유일한 출연 기록이기도 하다. 자기 세계의 첫 살인을 자기 입으로 반주한 셈이다. 1965년 12월 18일 이탈리아에서 개봉한 132분짜리 이 영화는 이탈리아·서독·스페인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촬영은 스페인 알메리아의 타베르나스 사막에서, 실내는 로마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다. 미술감독 카를로 시미가 사막 한가운데 세운 '엘 파소' 마을 세트는 지금도 미니 할리우드라는 이름의 관광지로 남아 있고, 인디오 일당이 은행을 턴 뒤 숨어드는 아과 칼리엔테는 니하르 평원의 흰 마을 로스 알바리코케스에서 찍혔다. 다시 말해 이 미국 서부는 안달루시아의 흙과 로마의 조명으로 조립된, 유럽이 상상한 미국이다. 촬영감독 마시모 달라마노는 2.35 대 1의 테크니스코프로 이 세계를 담았다. 필름 한 컷을 2퍼포레이션으로 절약해 쓰고 나중에 아나모픽으로 확대하는 이 저예산 포맷은 원래 화질에서 손해를 보는 방식이지만, 레오네와 달라마노는 그 손해를 감수하는 대신 폭을 얻었다. 예산은 60만 달러였고, 전 세계에서 2,55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5만 달러를 받고 돌아왔고, 찰스 브론슨이 대본을 거절한 자리에 들어온 리 밴 클리프는 1만 7천 달러를 받았다. 밴 클리프는 당시 영화 일이 끊긴 채 텔레비전을 전전하던 조연 배우였다. 이 한 편이 그를 스타로 되돌려놓았다.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이 영화는 1967년까지 이탈리아 역대 흥행 1위에 올랐고 1,450만 명이 넘는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였으며, 스페인에서는 죽음에는 값이 있었다는 뜻의 제목으로 개봉해 그 나라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반면 미국 평단의 첫 반응은 싸늘했다. 뉴욕타임스의 보슬리 크라우더는 살인자를 영웅으로 내세운 오락물이라며 정면으로 비난했고, 로저 에버트조차 낡은 서부극 클리셰의 나열이라 평하면서도 그 맛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썼다. 훗날 이스트우드 평전을 쓴 리처드 시켈이 이 작품을 3부작 중 최고로 꼽으며 전작보다 우아하고 후속작보다 압축적이라고 평가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당대의 평자들이 클리셰의 나열로 읽어낸 것과 이 영화가 실제로 수행하고 있는 작업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 거리를 메우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 글은 〈석양의 건맨〉을 현상금 사냥꾼 두 명의 팀업 활극으로 읽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를 장부와 시계라는 두 개의 측정 체계가 벌이는 경쟁으로 읽고자 한다. 레오네의 위대함은 총알에 있지 않고 총알 이전의 간격에 있으며, 그가 서부극에 도입한 진짜 새로움은 폭력의 강도가 아니라 폭력의 지속시간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지속시간을 관리하는 장치가 하필 음악을 내는 회중시계였다는 사실이 이 영화를 단순한 장 두 사냥꾼이 같은 먹이를 쫓을 때 레오네는 두 주인공을 각각 하나의 완결된 시퀀스로 소개한다. 먼저 등장하는 쪽은 모티머다. 그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성경을 펼쳐 얼굴을 완전히 가린 채 앉아 있다가, 자기가 내릴 역에 기차가 서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비상정지 줄을 당겨버린다. 성서와 폭력이 한 인물 안에서 아무 마찰 없이 공존한다는 것, 그리고 그가 세계의 시간표를 자기 편의에 맞춰 멈춰 세울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 이 짧은 도입으로 전달된다. 역에 걸린 수배 전단에는 현상금 1,000달러 뒤에 0이 두 개 조잡하게 덧그려져 있다. 범인 본인이 자기 값이 너무 싸다며 직접 고쳐놓은 것이다. 스스로 몸값을 부풀리는 인간이라는 이 농담은 영화 전체의 주제를 미리 요약한다. 모티머는 가방에서 개머리판을 꺼내 권총에 결합하고, 소총이 된 그 물건으로 아득한 거리에서 표적을 처리한다. 그의 무기고는 살인을 정밀 공학으로 바꾸는 도구 상자다. 몽코의 소개는 정반대다. 화이트 록스의 술집에서 그는 수배범과 포커를 친다. 판돈으로 걸린 것은 상대의 목숨이고, 산 채로 데려갈지 죽여서 데려갈지는 상대가 고르라고 한다. 총을 뽑기 전에 그는 이미 셈을 끝냈다. 현상금 2,000달러를 받아 나오면서 그는 정보를 흘린 부패한 보안관의 가슴에서 배지를 떼어 옆 사람에게 건넨다. 법은 이 세계에서 하나의 소품이며, 소유자가 바뀌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처음 맞붙는 장면은 거리에서 서로의 모자를 쏘아 굴리는 유명한 대결이다. 총알이 사람 대신 펠트 모자를 관통하는 동안 사운드트랙은 모자가 떨어질 때마다 만화적인 낙하음을 넣는다. 웃기지만 이것은 협상이다. 사거리와 정확도와 배짱을 서로 계량한 뒤에야 두 사람은 손을 잡는다. 모티머의 제안은 냉정하다. 같은 먹이를 쫓는 두 사냥꾼은 결국 서로의 등을 쏘게 되어 있으니, 그렇게 되기 전에 인디오를 안팎에서 협공하자는 것이다. 우정도 신뢰도 아닌, 리스크 관리로서의 동맹이다. 세 번째 인물의 소개는 완전히 다른 장르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 부하들의 학살극과 함께 탈옥한 인디오는 자신을 밀고한 사내의 가족을 찾아가 아내와 젖먹이를 죽이고, 그 사내에게 회중시계를 열어 보이며 종소리가 끝나면 총을 집으라고 말한다. 방금 자기 가족이 살해된 총성을 들은 남자와, 무장한 부하들에게 둘러싸인 채 시계를 쥔 남자 사이에 공정한 승부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도 뚜껑이 열리고 태엽이 풀리기 시작하는 순간 도살은 시합의 외양을 얻는다. 시간이 정해져 있으므로 규칙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규칙이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학살이 의례가 된다. 알렉스 콕스가 이 장면을 서부극 사상 가장 끔찍한 죽음 중 하나로 꼽은 것도 유혈의 양 때문이 아니라 이 형식의 기만 때문일 것이다. 이어지는 폐허의 교회 시퀀스에서 그는 부서진 지붕 사이로 쏟아지는 빛기둥 아래 부하들을 둘러 앉히고, 감옥에서 만난 목수 이야기를 설교조로 늘어놓는다. 최후의 만찬과 산상수훈을 동시에 흉내 내는 이 구도에서 강도 계획은 복음이 되고, 그는 설교단에 올라 자기 계략에 도취되어 웃는다. 레오네가 가톨릭 도상을 인용하는 방식은 늘 이렇게 불경하면서도 애정 어린 데가 있다. 시각적으로 이 영화가 발명한 것은 극단의 병치다. 화면은 지평선까지 비어 있는 초광각 롱숏이거나, 눈과 눈썹만 남기고 잘라낸 클로즈업이거나, 둘 중 하나다. 중간 거리의 안전한 숏이 거의 없기 때문에 컷 자체가 물리적 충격으로 작동한다. 원래 시네마스코프 계열의 넓은 화면은 얼굴을 크게 잡기에 불리한 포맷이다. 좌우가 텅 비어버리기 때문이다. 달라마노와 레오네는 이 결함을 구도의 재료로 바꿔놓았다. 이스트우드의 클로즈업에서는 얼굴 양옆의 빈 공간이 그의 정보 없음, 과거 없음을 물리적으로 드러내고, 밴 클리프의 클로즈업에서는 그 여백에 배경의 인물과 사건이 들어와 지금 그가 무엇을 계산하고 있는지를 함께 보여준다. 같은 크기의 숏이 두 인물에게 정반대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이 병치는 결투 장면에 이르러 시간을 조작하는 장치로 전환된다. 눈, 총집에 얹힌 손, 시계 문자판, 마른 입술이 번갈아 제시되는 동안 개별 숏의 길이는 조금씩 짧아지고 화각은 조금씩 좁아진다. 물리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컷의 밀도만 계속 높아지기 때문에, 관객이 체감하는 시간은 실제로 흐른 시간보다 훨씬 길어진다. 몽타주가 사건을 압축하는 대신 사건 없는 구간을 부풀리는 이 역전 덕분에, 레오네의 서부극에서는 총을 뽑는 1초보다 뽑기 직전의 30초가 훨씬 큰 극적 단위가 된다. 색과 빛도 계급을 만든다. 낮의 사막은 표백된 황토와 흐린 하늘색으로 납작하게 눌려 있어 그림자조차 인색하고, 실내는 창살처럼 들어오는 몇 줄기 빛을 제외하면 거의 동굴이다. 검은 옷의 모티머는 실내에서 벽과 구분되지 않다가 빛에 걸리는 순간에만 윤곽을 드러내고, 먼지 색 판초를 걸친 몽코는 바깥의 흙과 같은 색이어서 야외에서 배경으로부터 잘 분리되지 않는다. 인디오만이 늘 조명의 초점에 있다. 그는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고, 관객을 필요로 하는 악당이다. 이 영화가 소리를 다루는 방식은 특히 창작자의 눈으로 볼 때 놀랍다. 전편이 동시녹음 없이 촬영되었고 대사와 효과음은 모두 후반에 입혀졌다. 이스트우드와 밴 클리프는 로마로 돌아가 자기 목소리를 다시 녹음했다. 사운드가 처음부터 기록이 아니라 구성물이었다는 뜻이고, 그래서 이 영화의 박차 소리와 옷깃 스치는 소리는 사실적이지 않고 과장되어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엔니오 모리코네가 촬영 전에 음악을 먼저 썼고, 레오네가 현장에서 그 음악을 틀어놓은 채 촬영했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이 사운드트랙에서 메인 테마를 이끄는 그 마르고 서늘한 휘파람은 모리코네의 오랜 협연자 알레산드로 알레산드로니의 것이며, 그가 기타와 함께 만들어낸 이 음색이 마카로니 웨스턴 전체의 청각적 서명이 되었다. 오프닝에서 화면 밖 인물이 부는 극 중 휘파람과는 다른 층위의 소리이지만, 둘이 같은 영화 안에서 겹쳐 울린다는 점은 이 작품이 소리를 얼마나 의도적으로 설계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영화의 관행이라기보다 무대의 관행에 가깝다. 총잡이들의 걸음과 시선의 이동이 사후에 편집으로 맞춰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박자 위에서 연기되었다는 뜻이며, 그 결과 이 영화의 결투는 액션이라기보다 안무처럼 보인다. 회중시계의 카리용은 그 설계의 정점이다. 처음 그 선율은 명백히 디제시스 안의 소리다. 인디오가 뚜껑을 열면 태엽이 풀리고, 등장인물들은 그 소리를 실제로 듣는다. 그런데 종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현이 슬며시 아래로 깔리고 트럼펫이 위에서 올라오면서, 인물이 듣던 소리는 어느새 관객만 들을 수 있는 논디제시스 음악으로 미끄러진다. 두 층위를 가르던 경계가 지워지는 이 이행이 중요한 이유는, 인디오가 자기 기억을 통제하려고 손에 쥐고 있던 사물이 바로 그 순간 그의 통제를 벗어나 영화 전체의 목소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모리코네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시계의 음악은 듣는 사람의 생각을 다른 장소로 옮겨놓으며, 인물은 매번 다른 상황 속에서 그 시계를 통해 드러난다. 이탈리아 사운드트랙에서 이 결투 주제가 붙은 제목이 「라 레사 데이 콘티」, 곧 셈을 치르는 날이라는 뜻이라는 점은 우연 같지 않다. 이 영화에서 음악은 분위기가 아니라 계량 장치다. 연기 역시 이 계량의 논리 위에 놓인다. 이스트우드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연기한다. 그의 이름 몽코는 스페인어로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실제로 그는 담뱃불을 붙이는 것부터 카드를 쥐는 것까지 모든 일을 왼손으로 하고 오른손은 총을 위해 비워둔다. 이름이 곧 신체 습관이고 신체 습관이 곧 직업윤리인 인물이다. 밴 클리프의 모티머는 수직으로 곧고 성직자처럼 고요하다. 킨스키가 연기한 꼽추 와일드의 등에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장면에서, 레오네는 도발하는 자의 무표정과 도발당한 자의 경련을 한 프레임 안에 나란히 놓는다. 킨스키는 대사 몇 마디로 위협의 총량을 늘리되 실제 권력은 조금도 갖지 못한 인물을 만들어내고, 그래서 훗날 술집에서 셋을 세라고 요구했다가 셋에 먼저 맞고 쓰러지는 그의 죽음은 무섭기보다 초라하다. 지안 마리아 볼론테의 인디오는 이 앙상블에서 유일하게 크게 연기한다. 레오네는 그가 지나치게 연극적이라고 여겨 테이크를 반복하며 배우를 지치게 만들었고, 볼론테는 결국 촬영장을 뛰쳐나갔다가 사막을 건널 방법이 없어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과잉이 옳았다. 인디오는 심리적으로 설명되는 악당이 아니라 자기 잔혹을 상연하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가 교회를 무대로, 부하들을 관객으로, 시계를 지휘봉으로 삼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좌파 연극배우 출신으로 이 시기 서부극을 생계 수단으로 여겼고 훗날 엘리오 페트리와 프란체스코 로지의 정치영화에서 이탈리아 영화사에 이름을 남긴 배우가, 자기가 진지하게 여기지 않은 장르에서 가장 오래 기억될 얼굴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아이러니다. 서사의 가장 정교한 수는 플래시백의 이중 사용이다. 인디오가 약에 취해 떠올리는 첫 번째 회상은 조각나 있고 맥락이 없다. 남자가 쓰러지고, 여자가 총을 집고, 시계가 등장한다. 관객은 이것을 악당의 죄책감으로 읽는다. 최종 결투에서 같은 장면이 다시 나올 때 비로소 빠진 조각이 채워지는데,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정보가 아니라 시점의 이양이다. 그 기억은 이제 인디오의 것이 아니라 모티머의 것이 된다. 시계 뚜껑 안에 붙은 초상을 통해 죽은 여자가 대령의 여동생이었음이 밝혀지고, 영화 내내 이유를 밝히지 않던 한 남자의 냉정함이 소급적으로 재해석된다. 정보를 유예했다가 뒤늦게 주인을 바꾸는 이 장치는 레오네의 서명이 되었다. 참고로 영국 개봉판에서는 여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두 번째 회상이 통째로 삭제되었는데, 그 결과 영화의 논리적 핵심이 사라졌던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 결투가 온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원형의 마당에서 인디오는 시계를 열고, 무장 해제된 모티머에게 종소리가 끝나면 총을 집으라고 말한다. 규칙을 정하는 자가 규칙을 어길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음악이 잦아드는 순간, 똑같은 선율이 바깥에서 다시 시작된다. 몽코가 언젠가 대령에게서 슬쩍해둔 쌍둥이 시계다. 여기서 몽코는 인디오를 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은 총을 대신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모티머에게 빼앗긴 60초를 돌려주는 것이다. 자기 총과 벨트를 건네며 그가 하는 말은 이제 시작하자는 짧은 한마디뿐이다. 공정함이란 이 영화에서 도덕이 아니라 계측의 문제다. 같은 길이의 시간을 두 사람에게 똑같이 나눠주는 것, 그것이 여기서 정의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다. 스물둘, 그리고 스물일곱 복수가 끝난 뒤 영화는 곧장 회계로 돌아간다. 몽코는 시체를 마차에 실으며 소리 내어 셈을 한다. 1만, 1만 2천, 15, 16, 17, 22. 그러다 숫자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아 마지막 하나를 쏜 다음 태연히 27이라고 고쳐 말한다. 방금 사람이 하나 죽었고, 그것은 장부의 오차를 정정하는 행위였다. 이보다 더 건조하게 이 세계의 원리를 요약하는 장면은 없다. 곧이어 대령이 지나가며 무슨 문제라도 있었느냐 묻고, 몽코는 셈이 틀린 줄 알았는데 이제 맞다고 답한다. 목숨과 덧셈이 같은 문장 안에서 아무 저항 없이 교환된다. 정작 놀라운 것은 모티머의 퇴장이다. 그는 자기 몫의 현상금을 받지 않고 떠난다. 전부 자네 것이라고, 자네가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면서. 두 사람은 정확히 서로 다른 것을 챙겨 각자의 방향으로 사라진다. 한 사람은 의미를 가지고, 한 사람은 돈을 가지고. 영화는 어느 쪽도 단죄하지 않고, 어느 쪽도 승리로 그리지 않는다. 다만 시체를 가득 실은 마차와 빈손으로 멀어지는 말 한 필을 같은 사막 위에 나란히 놓아둘 뿐이다. 이 영화가 60년이 지나 더 선명해지는 이유는 서부의 낭만 때문이 아니라 그 첫 자막 때문이다. 삶에는 값이 매겨지지 않는데 죽음에는 값이 매겨지는 세계. 지금 우리는 조회수와 신용점수와 실적 지표로 서로를 계량하는 데 익숙해졌고, 한 사람의 활동이 얼마의 값을 갖는지는 즉시 조회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활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여전히 아무도 계산해주지 않는다. 몽코의 덧셈은 낡은 서부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창작을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이 영화가 남기는 실질적인 유산은 따로 있다. 레오네는 총알이 아니라 총알 이전의 침묵을 연출했고, 그 침묵의 길이를 음악에 맡겼으며, 그 음악을 촬영 전에 완성해두고 배우들을 그 박자 위에 세웠다. 긴장은 사건을 빨리 보여줄 때가 아니라 잘라내기를 거부할 때 생긴다. 회중시계의 뚜껑이 열리고 태엽이 다 풀릴 때까지, 우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60초를 숨죽이고 견딘다. 그 60초가 이 영화의 진짜 총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