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원한고전
2026.10.12
스포일러 주의!
죽음을 빼앗긴 자의 노래
에이리언 4 (장 피에르 주네.1997) : 죽음을 빼앗긴 자의 노래 여덟 번째 몸에 새겨진 숫자 〈에이리언 4〉를 부활의 영화로 읽는 순간, 이 작품은 곧바로 실패작이 된다. 부활은 은총이고, 이 영화에는 은총이 없기 때문이다. 리플리의 팔에는 숫자 8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그녀가 여덟 번째 시도라는 뜻이다. 앞선 일곱은 실패했고, 실패한 채로 유리관 속에 담겨 보존되어 있거나 수술대 위에서 아직 숨을 쉬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다루는 사건은 한 사람의 귀환이 아니라 한 사람의 반복 생산이다. 원제가 약속하는 Resurrection은 신학의 어휘가 아니라 공정(工程)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왜 리플리를 되살렸는가"에서 "왜 그녀에게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가"로 옮겨가야 한다. 1992년 데이빗 핀처의 〈에이리언 3〉 마지막에서 리플리는 가슴에 퀸의 태아를 품은 채 용광로로 몸을 던졌다. 그 낙하는 시리즈 전체를 닫는 윤리적 결단이었다. 그런데 2379년, 통합체제군(USM)의 과학자들은 피오리나 161에 남아 있던 혈액 표본으로 그 결단을 소급해 무효화한다. 자기 죽음의 결정권을 회수당한 자, 그것이 리플리 8이다. 페레즈 장군은 그녀를 두고 "8번은 고기 부산물"이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영화의 세계관 전체를 요약한다. 인간이 원재료가 되는 순간, 죽음은 폐기의 다른 이름이 되고 애도는 재고 관리로 대체된다. 이런 상상력은 주네에게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델리카트슨 사람들〉(1991)의 정육점 지하와,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1995)에서 아이들의 꿈을 훔쳐 자기 노화를 늦추려던 과학자는 이미 같은 질문을 품고 있었다. 인간이 인간을 재료로 다루기 시작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다만 프랑스에서 그는 이 질문을 동화와 서커스의 문법으로 감쌌고, 20세기 폭스의 스튜디오에서는 감쌀 껍질이 없었다. 리들리 스콧이 설계한 우주는 애초에 자궁과 산도(産道)의 은유로 지어진 공간이었는데, 주네는 그 은유를 비유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실제 산업 설비로 되돌려놓는다. 이 글은 〈에이리언 4〉를 시리즈의 실패한 사족이 아니라, 시리즈가 처음부터 감추고 있던 전제를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물로 읽으려 한다. 웨이랜드-유타니는 사라졌지만 논리는 남았고, 괴물은 바깥에서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배양된다. 그리고 그 배양조 앞에서 주네는 관객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음악을 튼다. 헨델이다. 카메라가 먼저 도착한 곳 1997년 극장판의 첫 이미지는 얼굴이 아니다. 초점이 흐려진 살덩어리의 표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주름과 습기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카메라는 그 위를 느리게 미끄러진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로 관객이 붙들려 있는 동안 시고니 위버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우리 엄마는 괴물 같은 건 없다고 했어요. 진짜 괴물은. 하지만 있어요." 이 대사는 원래 리플리의 것이 아니다. 제임스 카메론의 〈에이리언 2〉(1986)에서 소녀 뉴트가 리플리에게 건넸던 말이다. 200년 뒤 배양조에서 깨어난 복제인간이 자기 것이 아닌 기억을, 자기가 지켜주지 못한 아이의 문장을 자기 목소리로 발음한다. 중요한 것은 그 왜곡된 클로즈업들의 정체다. 화면을 채운 살덩어리는 실패한 복제체들의 몸이다. 영화 중반 실험실 장면에 이르러서야 관객은 자신이 도입부에서 본 것이 1번부터 7번까지였음을 뒤늦게 짐작하게 된다. 남의 기억을 발음하는 목소리와 실패한 육체들의 표면. 이 영화는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선언하는 대신, 첫 30초 만에 그것을 관객의 눈에 감염시킨다. 참고로 2003년 〈쿼드릴로지〉 박스세트의 특수판은 이 도입부를 다른 시퀀스로 교체했다. 에이리언의 턱처럼 보이던 형상이 실은 벌레였고, 지루해하던 병사가 그것을 손가락으로 눌러 죽인다. 주네가 폭스 경영진 앞에서 감독 자리를 따낼 때 설명했던 바로 그 원안이지만 예산 때문에 잘려나갔다가 6년 뒤에야 복원된 것이다. 다만 주네 자신은 특수판 서두에 직접 등장해, 지금 볼 판본은 감독판이 아니며 감독판은 1997년 극장에서 상영된 그 버전이라고 못 박았다. 이 글이 극장판을 기준으로 삼는 이유다. 이것이 장 피에르 주네가 할리우드에 도착해서 처음 한 일이다. 마르크 카로 없이 홀로 연출 크레딧을 단 첫 장편, 그리고 자신이 쓰지 않은 각본으로 만든 첫 영화. 조스 웨던의 시나리오가 우주 해적들의 냉소적인 액션극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주네의 카메라는 자꾸만 다른 곳에 먼저 도착한다. 그는 미국 액션영화 몇 편의 컷 수를 직접 세어보고 대략 115~120개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작업에 들어갔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일화 자체가 이 영화의 성격을 알려준다. 그는 장르의 규칙을 학습했지만, 학습한 규칙 안에서 자기 취향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무기는 두 개였다. 첫째는 촬영감독 다리우스 콘지. 〈델리카트슨 사람들〉과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를 함께 찍었고 그 사이 핀처의 〈세븐〉(1995)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란 태생의 이 촬영감독은 자신을 "네거티브의 드라큘라"라고 부른다. 노출을 일부러 망가뜨리며 실험한 끝에 새로운 이미지를 건져 올린다는 뜻이다. 둘째는 프로덕션 디자이너 나이젤 펠프스. 콘지는 이 영화의 진짜 천재는 펠프스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두 사람은 촬영 12주 전부터 준비에 들어가 조명 자체를 세트 구조물 안에 새겨 넣었다. 그 결과 〈에이리언 4〉는 시리즈에서 가장 기묘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7천만 달러의 제작비로 전 세계에서 1억 6천만 달러를 벌었으니 흥행 참패는 아니었으나 북미 성적은 시리즈 최저였고, 로튼 토마토 신선도는 56퍼센트에 머물렀다. 로저 이버트는 혹평했다. 각본가 웨던은 2005년 인터뷰에서 "대사는 말했다, 대체로. 그런데 전부 틀리게 말했다. 캐스팅도 틀렸고 디자인도 틀렸고 음악도 틀렸다"고 성토했다. 25주년을 맞아 주네는 그 비판을 알고 있으며 웨던이 직접 만들었다면 아마 더 크게 흥행했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그런 종류의 영화에 흥미가 없다고 답했다. 이 불화야말로 이 영화의 정체다. 미국 장르 오락의 골격 위에 프랑스 그로테스크의 살이 붙어 있고, 둘은 끝내 봉합되지 않는다. 그리고 봉합되지 않은 그 틈에서, 이 시리즈가 한 번도 정면으로 던지지 않았던 질문이 새어 나온다. 죽지 못하게 만들어진 몸에게 삶은 무엇인가. 젖은 살, 형광등, 그리고 물속의 명암법 주네는 헨델을 튼다. 영화 전반부, 아우리가호의 실험 구역이 가동되는 대목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줄리오 체사레〉 1막의 아리아 '나는 모든 위안을 빼앗겼네(Priva son d'ogni conforto)'다. 캐나다의 콘트랄토 모린 포레스터가 부른 이 노래에서 코르넬리아는 남편 폼페이우스의 목이 잘린 뒤 이렇게 탄식한다. 나는 모든 위안을 빼앗겼고, 비참한 나에게는 죽으리라는 희망조차 없다. 고통에 잠긴 내 심장은 이미 견디는 데 지쳤는데, 죽음마저 내게 허락되지 않는다. 바로크 오페라의 관습대로 느린 다카포 아리아가 같은 문장을 되풀이하는 동안, 화면에서는 인간이 숙주로 가공되고 있다. 리플리 8의 상태를 이보다 정확히 설명하는 텍스트는 이 영화 안에 없다. 존 프리젤의 오케스트라 스코어가 징과 러브로드 같은 이질적 음색으로 불안을 긁어대는 사이, 300년 전의 애도가(哀悼歌)가 한 번 지나가면서 영화 전체의 정서적 좌표를 찍어놓는 셈이다. 프리젤은 도입부에서 제리 골드스미스가 1979년에 쓴 〈에이리언〉의 메인 타이틀을 잠시 인용하기도 하는데, 옛 선율을 되살려 쓰는 이 행위 자체가 복제라는 주제와 맞물린다. 시각적으로 이 배는 살아 있는 짐승처럼 설계되었다. 펠프스는 조명을 세트에 새겨 넣었고, 콘지는 그 위에 테크니컬러의 ENR 은잔류 현상 공정을 얹어 검정을 깊게 눌렀다. 통로 바닥은 대부분 격자 철망이었고 그 아래에는 확산지를 댄 2K 누크 조명이 깔렸다. 주 세트 하나에만 250개가 들어갔고 조광 회선은 550개에 달했다. 천장 역시 격자와 확산지, 그 뒤로 수백 개의 소형 전구가 배치되었다. 콘지의 표현대로 조명이 세트의 윤곽을 따라 각인되어 있어서, 와이드 숏에서는 관객이 거대한 짐승의 몸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두 사람은 조명의 강도를 1에서 5까지 다섯 단계로 나눈 도표를 미리 만들어두었다. 1단계는 거의 아무런 효과가 없는 상태, 3단계에서 경고등이 깜빡이고, 4단계에서 스트로브와 사이렌이 돌아가며, 5단계에 이르면 카메라 진동까지 더해져 화면이 뭉개진다. 서사의 긴장 곡선을 조광기의 눈금으로 번역해둔 것이다. 에이리언이 탈출하는 순간부터 관객의 신경이 급격히 곤두서는 이유는 편집이 빨라져서가 아니라, 공간 자체가 등급을 올려버렸기 때문이다. 렌즈 선택도 같은 논리를 따른다. 콘지는 아나모픽 대신 슈퍼 35를 골라 2.35 대 1 화면비를 얻었는데, 이유는 명확했다. 주네가 배우 얼굴에 아주 가까이 붙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아나모픽 렌즈는 그렇게 다가서면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그는 14.5밀리, 17.5밀리, 21밀리 같은 극단적 광각을 마스터 숏에 쓰면서 인물이 화면 가장자리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도록 배치했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프레이밍에 대한 오랜 애착이 여기서 드러난다. 넓은 공간과 코앞의 얼굴이 한 프레임 안에 공존하니, 인물은 늘 거대한 기계 속에 갇힌 작은 존재이면서 동시에 관객의 얼굴에 들이밀어진 낯선 표면이 된다. 도미니크 피뇽이 연기하는 휠체어의 정비공 브리스, 론 펄먼의 조너, 게리 도던의 크리스티 같은 베티호 사람들이 만화 캐릭터처럼 도드라지는 것도 이 광각 때문이다. 주네는 배우의 얼굴을 캐리커처의 재료로 쓴다. 에이리언을 찍는 방식은 더 흥미롭다. 콘지는 크리처를 메틸셀룰로오스 점액으로 계속 적신 뒤 그 주위에 키노플로 형광등으로 우리를 짜서 반사광만으로 조명했다. 검은 자동차를 조명할 수 없듯 검은 괴물도 조명할 수 없으니 빛을 반사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에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의 초록을 섞었다. 그가 초록을 관능적인 색으로 여겼기 때문이며, 악에도 관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선택이 이어진다. 리플리와 크리처가 한 프레임에 있을 때, 그는 때때로 리플리를 에이리언에 가깝게 조명했다. 피부를 적시고 형광등 반사를 만들고 노출을 살짝 죽여서, 인간의 살에 괴물의 질감을 입힌 것이다. 이 조명 설계 하나가 대사 열 줄보다 많은 것을 말한다. 리플리 8은 이미 저쪽 편이다. 물에 잠긴 주방을 지나는 시퀀스는 그 절정이다. 폭스 16번 스테이지의 가로 117피트 수조에 54만 8천 갤런의 물을 채우고 3주에 걸쳐 촬영한 이 장면에서, 콘지는 수중 조명을 회화 용어인 명암법(clair-obscur)으로 설계했다고 말했다. 물은 빛을 순식간에 퍼뜨리기 때문에 어두운 영역을 지키기가 대단히 어려운데, 그는 채우는 빛을 거의 쓰지 않고 위에서 내리꽂는 빛기둥만으로 명과 암을 갈랐다. 배우의 한쪽 얼굴은 완전히 검게 잠기고, 눈동자에만 작은 빛이 맺힌다. 주네가 이 장면을 자기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 이유는 스펙터클 때문이 아니라 카메라 운동 때문이다. 길고 느리고 복잡한 움직임. 물속에서 감독과 촬영감독은 서로 말을 걸 수 없었고, 그래서 이 시퀀스는 사전에 안무처럼 짜여야 했다. 실제로 콘지는 주네가 크리처의 동선을 비디오로 미리 연습시키는 모습을 보며 무용수를 다루는 안무가를 떠올렸다고 회고한다. 공포영화의 추격전이 발레의 논리로 조직된 것이다. 물이 소리를 삼켜 청각이 먹먹해지는 동안 위협은 시각과 촉각으로만 전달되고, 관객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는다. 시고니 위버의 연기는 이 모든 설계의 중심에서 방향을 튼다. 1편의 생존자도 2편의 전사도 3편의 순교자도 아닌, 4편의 리플리는 어딘가 즐거워 보인다. 걸음걸이는 느슨하고 시선은 게으르며, 위협 앞에서 물러서는 대신 고개를 기울인다. 흉부에 에이리언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공포에 질린 퍼비스에게 그녀가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은 서늘하다. "나는 그 괴물의 어미야." 대사보다 앞서 오는 것은 미소다. 이 미소는 이 시리즈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다. 인간의 편에 서서 괴물과 싸우는 자의 표정이 아니라,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가 그 사실을 즐기기 시작한 표정이다. 그 방향 전환이 가장 잔인하게 응결되는 곳이 실험실 장면이다. 리플리는 1번부터 7번까지의 자기 자신과 마주친다. 유리관 속의 기형들, 그리고 수술대 위에서 아직 살아 있는 7번. 얼굴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녀를 닮았고 몸은 부풀어 뒤틀려 있다. 7번이 죽여달라고 말하고, 리플리는 화염방사기를 받아 든다. 자기 얼굴을 태우는 것이다. 태우고 나서도 그녀는 멈추지 않고 실험실 전체를 불태운다. 이 장면에 조스 웨던의 냉소는 없다. 오직 애도가 있다. 그리고 곧바로 조너가 내뱉는다. 총알 낭비라고. 그러고는 여자들 일이겠지, 하고 덧붙인다. 각본의 농담과 연출의 비통함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 짧은 순간에 이 영화의 분열이 압축되어 있다. 주네는 웨던의 농담을 지우지 않았다. 대신 농담 바로 앞에 태워지는 얼굴을 놓아, 웃음이 목에 걸리게 만들었다. 거울상 인물의 배치도 정교하다. 위노나 라이더의 콜은 처음에 밀수선의 어린 승무원처럼 보이지만, 안드로이드가 만든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리플리의 대칭항이 된다. 리플리는 인간의 형상을 한 비인간이고 콜은 기계의 몸을 한 윤리적 존재다. 리플리가 그 정체를 알아채고 던지는 말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사다. "그럴 줄 알았어야 했는데. 인간이 그렇게까지 인간적일 리가 없잖아." 인간성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소유물이기를 그치는 순간이다. 두 사람이 겹치는 지점은 형상의 대비에 그치지 않는다. 콜은 자신을 설계한 계보에 등을 돌린 존재다. 원격으로 함선 시스템에 접속하라는 요구를 받자 그녀는 모뎀을 태워버렸다고 답한다. 우리 모두 그랬다고 덧붙인다. 리플리 역시 자신을 배양한 군의 목적을 배반하고 실험실을 불태운다. 창조주에게 등을 돌린 두 피조물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크리처 액션의 관습 아래 숨겨둔 진짜 이야기다. 웨던의 각본이 냉소로 처리한 관계를 주네는 연대로 찍었다. 브래드 도리프가 연기하는 게디먼 박사는 그 반대편에 선다. 그는 유리벽 너머의 크리처에게 홀린 사람처럼 굴고, 끝내는 유리를 핥는다. 롤링스톤의 피터 트래버스는 이 대목을 두고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에서 아이들의 꿈을 침범하던 과학자를 떠올렸다. 주네의 세계에서 과학은 늘 이런 얼굴을 하고 있다. 지식욕이 아니라 애무하고 싶은 욕망, 대상을 소유하려는 관능적 도착. 그리고 뉴본이 있다. ADI의 톰 우드러프 주니어와 알렉 길리스가 만든 이 인간-에이리언 혼종은 시리즈에서 가장 논쟁적인 크리처다. 웨던이 처음 구상한 것은 눈이 없는 네발짐승이었다. 주네는 정반대를 요구했다. 에이리언보다 인간에 가깝게, 표정을 지을 수 있도록 눈과 코를 달아달라고. 그가 원한 것은 살인 기계가 아니라 하나의 배역이었다. 그 결과 뉴본은 웃고, 슬퍼하고, 어미를 알아본다. 그리고 그것이 이 크리처를 견디기 어렵게 만든다. 리플리가 산성 피로 창을 녹여 뉴본을 우주로 밀어낼 때, 감압이 그것을 좁은 구멍으로 빨아들여 찢는 동안 카메라는 괴물의 최후가 아니라 리플리의 얼굴에 머문다. 위버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눈꺼풀이 떨리고 입술이 벌어지고 눈물이 맺힌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시리즈의 세 편에 걸쳐 에이리언을 죽여온 여자가 처음으로 살해를 애도한다. 참고로 주네는 이 크리처에게 양성의 성기를 달겠다고 고집했다가 후반 작업에서 마음을 바꿨고, 그래서 와이드 숏의 하반신은 디지털로 지워졌다. 이 우스꽝스러운 일화조차 이 영화의 성격을 말해준다. 스튜디오의 예산과 감독의 그로테스크가 프레임 안에서 실시간으로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편집자 에르베 슈네드는 주네의 오랜 동료답게 이 영화를 시리즈에서 가장 짧게 잘라냈다. 109분. 리플리가 등 뒤로 던진 농구공이 그물에 꽂히는 짧은 대목에서 코미디의 리듬이 튀어 오르고, 다음 순간 실험실의 정적이 그것을 눌러 끈다. 이 진폭이 크다는 점이 오랫동안 이 영화의 결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실제로 톤은 고르지 않고, 시나리오의 재담은 자주 헛돈다. 다만 결점의 목록을 다 인정한 뒤에도 남는 것이 있다. 시리즈의 다른 어떤 편도 복제와 폐기, 상품이 된 신체, 그리고 죽을 권리라는 주제를 이만큼 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1997년은 복제양 돌리의 탄생이 발표된 이듬해였다. 주네의 우주선은 그 시기의 불안을 정확히 담아낸 그릇이다. 웨이랜드-유타니는 오래전 파산했다고 언급되지만 회사가 사라졌다고 논리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자본이 넘긴 자리를 군이 이어받았을 뿐이며, 인간을 재고로 취급하는 계산법은 소유주가 바뀌어도 그대로 작동한다. 지구를 처음 보는 눈 마지막 장면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창밖의 지구를 내려다본다. 조너는 저 쓰레기장이 지구냐고 투덜대지만, 인간이 아닌 콜은 다르게 말한다. 아름답다고. 그럴 줄 몰랐다고.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는 물음에 리플리는 대답한다. 모르겠어. 나도 여기선 이방인이야. 특수판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베티호가 황폐한 지상에 내려앉고 두 사람이 그 위에 앉아 앞날을 이야기하는 동안, 카메라가 천천히 들어 올려지면 등 뒤로 무너진 파리와 에펠탑이 드러난다. 성층권에서 내려다본 푸른 행성이든 발밑에 펼쳐진 폐허든, 리플리가 도착한 지구는 구원의 장소가 아니라 소외의 장소다. 어느 판본을 택해도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조용한 결말이며, 동시에 가장 가차 없는 결말이다. 200년 만에 도착한 고향은 그녀의 고향이 아니고, 그녀를 만든 자들은 모두 죽었으며, 그녀가 태운 것은 자기 자신이었고 그녀가 죽인 것은 자기 아이였다. 남은 것은 목적지 없는 생존이다. 〈에이리언 3〉의 리플리는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인간이었다. 〈에이리언 4〉의 리플리는 선택할 죽음을 빼앗김으로써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이것이 이 영화가 시리즈에 더한 유일하지만 결정적인 한 문장이다. 코르넬리아의 아리아가 노래하듯, 고통에 지친 심장에게 죽음마저 거절될 때 남는 것은 위안 없는 지속이다. 헨델이 1724년에 쓴 이 탄식이 1997년의 우주선 복도에 그대로 얹힐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떤 질문 앞에서는 300년 동안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물음은 스크린 밖에서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다. 우리는 사람의 목소리와 얼굴과 문장을 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세상을 떠난 이를 데이터로 되살려 다시 노래하게 만드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때마다 우리는 리플리 8이 던졌던 질문을 우회한다. 되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되살려도 좋다는 뜻인가. 그 존재는 누구의 동의로 그곳에 서 있는가. 화염방사기를 들고 자기 얼굴 앞에 선 여자의 표정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대답이 없다는 사실의 형상이다. 주네는 그 표정을 광각 렌즈로 코앞까지 당겨와 관객의 얼굴에 붙여놓았다. 피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에이리언 4〉는 잘 만든 영화가 아니다. 톤은 어긋나 있고 농담은 자주 실패하며 액션은 관습적이다. 그러나 잘 만든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과 볼 가치가 없다는 판단 사이에는 넓은 공백이 있고, 이 작품은 그 공백에 서 있다. 시리즈에서 가장 아름답게 촬영된 장면 몇 개가 여기 있고, 시고니 위버의 가장 이상하고 대담한 연기가 여기 있으며, 무엇보다 프랜차이즈가 감히 묻지 않았던 질문 하나가 여기 있다. 20년 넘게 이어진 혹평 속에서도 주네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그 자신이 무엇을 남겼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