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

표범상어의 모습은 어디있나요? 다큐멘터리에게 진실인지 아닌지의 문제란 그렇다. 그것이 실제인지 실존하는지 그리고 실존한다면 그것에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결국 다큐멘터리 안에 있어야 할 터 이다. 즉 직접본 것 체험한 것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다큐멘터리인 것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도 영화고 작가의 주관이 가미된 그렇기에 완전히 진실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창작품이다. 안에서 나오는 말과 대사들은 대본일 수 있고 있고 행동은 미리 동선을 짜맞춘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렇다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극영화와 같다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이상 다큐)는 한가지의 진실을 좆는다. 그 과정에 거짓이 들어가지만 진실을 향한 학술적 전진이다. 존 플래허티의 북극의 나누크는 가장 최초의 다큐이면서 다큐가 품고 있는 문제점을 처음 보인 작품이다. 다큐는 탄생의 순간부터 논쟁의 씨앗을 품고 탄생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에서 완성될 그의 스타일 즉 강박증적인 대칭에 대한 고집과 파스텔 톤의 색감이 정돈 되어지지 않은채로 보여진다. 앤더슨은(그의 여느 작품이 그러하듯) 환경이나 성격 등에 결점이 있는 인물들을 매개로 하여 휴먼드라마를 그려낸다. 지소와의 해저생활이라는 존재가 불명한 증거라고 해봤자 지소의 목격담 밖에 없는 표범 상어를 찾아 떠난다. 그들은 물건을 훔쳐 해군에게 쫓기고 해적을 만나는 등의 갖은 고생 끝에 결국 표범상어와 마주친다.. 처음에 친구의 복수를 위해 죽이지는 않더라도 다이너마이트라도 폭발시키겠다던 지소는 망연히 이를 지켜보기만 한다. ​ 과연 그것이 진실인가? ​ 맞다 틀리다 의 문제보다 진실인가 진실이 아닌가의 문제다. 지소의 바다 표범은 존재하는가? 네드는 지소의 아들인가? 제인의 기사는 보이는 모든 것을 쓰고 있는가? 그녀의 배속의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더 붙이자면 엘리너가 만난 남자들이 정말 게이인지도 모를 일이다. (헤네시는 양성애자였으니) 그렇기에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촬영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의 모험을 여과없이 보여주며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가 지소의 증거인 셈이다. 앤더슨은 명제의 참 거짓에 대한 대답을 유보한 뒤 우리를 깊은 해저로 이끈다. 그리고 보여준다. 이것이 진짜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고집에서 나온 허상일까? 결국 표범상어는 존재했고 네드는 지소의 아들이 아니다. 정확히는 아니었다. 양자로서 그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둘은 결국 가족이 되어진다. 거짓에서 진실로 바뀌어지는 순간이다. 결국에는 영화다. 진실이 아니고 주관이 들어간다. 그럼 우리는 왜 거창한 거짓을 보고 그들에게 공감할까 아름다운 화면비? 색채? 그것들을 제하고서도 심해에서 마주친 그 점박이 얼룩의 상어와 결국 그토록 바라던 지소의 가족으로 들어가게 되어진 네드를 보면 그리고 상을 내려놓고 아이를 업고서 시상식을 떠나는 지소의 뒷모습을 보면서 느껴지는 감정은 무엇일까 결국은 우리자신이다. 개인이며 역시 주관적이다. 영화를 진실로 만드는것도 거짓으로 만드는것도 결국은 관객인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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