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당신을 그리고 싶어요

"핀란드의 뭉크"로 알려진 화가! 여류 화가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던 헬렌, 그렇지. 화가 헬렌이지, 그 앞에 여류가 붙을 이유가 없지. 여류작가, 여류시인, 여류 화가, 여류 법조인이라니... 이런 호칭부터가 차별이지 않은가? 83세까지 평생 독신이었던 헬렌의 자전적 영화를 감상하면서 엔딩 신에서는 코끝까지 찡해져 왔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그러리라~ 자신이 열연하는 그 캐릭터가 바로 나인 것처럼, 로라 비른 자체가 헬렌인 양 정말이지 완벽하게 헬렌의 심장을 지니고 옷을 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화 포스터가 독특하다. 초상화인 듯, 사진인 듯 초연하면서도 몽환적인 표정의 헬렌은 그녀를 마주하고 있는 내게 조용하게 말해 주는듯하다. "당신을 보는 나를 그렸어요." 그는 바로 에이나르였으리라. 그를 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은 정녕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노을 같은 여운이 가슴속에 고여 있는 표정이었다. 북유럽을 대표하는 화가, 헬렌 쉐르벡은 자화상으로 삶의 본질을 표현해 낸 예술가이다. 천재적인 역량을 지녔으나 가부장적 시대 속에서 어려운 가정 환경과 건강 등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예술성으로 우뚝 선 예술가! 남다른 기량을 소유한 헬렌은 미술전 수상한 경험도 있고, 예술 기금을 지불하겠다고 했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핀란드 헬싱키 국립 미술관(아테네움) 전시를 거부당한다. 그런 헬렌 앞에 어느 날 미술상 괴스타와 에이나르가 등장한다. 그들은 저평가되고 있는 헬렌의 작품들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그녀의 첫 개인전을 열도록 돕는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끝난 전시회에서 거두어들인 모든 수익이 헬렌의 오빠에게 돌아가는 것을 상관없어하는 엄마의 발언에 헬렌은 분노하고 가족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하는데... 영화는 한 폭의 풍경화를 만난 듯한 영상미와 고전적인 음악이 어우러져서 더 슬프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특히 이 장면은 최고의 컷으로 머릿속에 저장해 두고 싶다. 헬렌이 죽을 때까지 마음속에 품고 있던 하나의 사랑, 그 사랑은 바로 헬렌의 마지막 사랑이기도 했던 에이나르! 그가 헬렌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청했을 때 건넸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조건이 있어요. 당신을 그리고 싶어요." 아~ 헬렌은 에이나르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구나. 영화관을 나오면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그 표현 행간에 숨어 있던 가슴 설레는 뉘앙스를... 속 깊은 사랑 고백을... 10년 넘게 예술계를 벗어나 외딴 시골에서 살고 있던 헬렌 앞에 우뚝 선 젊은 예술가 에이나르! 그를 보는 순간 그녀의 가슴속에서 싹트기 시작한 사랑은 여러 가지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녀의 예술성은 무르익어가기 시작한 게 아닐까? 에이나르와 나눈 대화에서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대도시 헬싱키에 대한 느낌이었나? 헬렌은 그 도시에 대해 '뜨겁게 데워진 들 냄새, 씻지 않은 사람의 몸 냄새를 닮았다'라고 했던가? 뭔가 더 표현했는데 기억의 한계로 생각나지 않는다. 영화 속에는 헬렌의 어록이 의외로 많았다. 그림이 너무 추한 거 아니냐고 하는 오빠에게 '겉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그림 속에 숨어서 빛나는 영혼을 보'라고 했고, '짓밟히고 고통을 당한 이들의 내면은 더 단단하게 다져진다'라고. 영화 속 헬렌을 만나면서 지속적으로 따라다녔던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화가 나혜석'과 '작가 박경리'였다. 그렇다. 그 두 사람은 여류 화가, 여류 작가가 아니라 정말 뛰어난 우리 시대의 화가였으며, 작가였다. '여류'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가두려 했지만 그들은 결코 그 안에 속박된 적이 없었다. 그들의 영혼은 안에서 더 단단해지고 더 눈부시게 빛을 발했음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