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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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1

스포일러 주의!

인물과 자막을 활용한 영화<모가디슈>의 소통방식

영화 <모가디슈>(2021)의 마지막, 림용수 대사(허준호)의 시선처리를 바라보며 문득 영화가 관객에게 특정 감정을 요구한다는 사실에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는 분명 실화라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당연한 결과인데 말이다. 분명히 매끄럽게 잘 만들어진 영화지만, 의구심이 생길만한 지점들이 떠올랐다. 이 의구심이 생기는 지점들을 토대로 이상한 감정을 풀어보려 한다. 실제 일어난 사건과 동일하게 남/북 대사관일행의 생존이라는 의지가 단단해질수록, 극중 반대 진영으로 등장하는 소말리아의 분열 역시 심화된다. 반군은 어린아이를 포함한 민간인에게 무기를 배포하며 세력을 키우는 동시에 혼란을 야기하며, 정부는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한 뒤 돈을 받고 병력을 배정해주는 행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그간 관계를 유지해온 북한 측 정보원은 대사관의 재물을 탈취하고, 남한과 우호적인 인물인 솨마는 죽음을 맞이하며 소말리아 내부에서의 관계전환을 꾀할 요소가 사라진다. 그렇게 ‘소말리아’는 관객에게 부정적인 존재로 남겨진다. 소말리아 회의(U.S.C.)와 소말리아 정부군 진영이 모두 남한과 북한을 위협하는 존재로 일관되게 등장하지만, 솨마(앤드류 나간가 키마니)라는 인물은 이들과 다르게 등장한다. 이 인물은 극중에서 중요도가 낮은 인물이지만, 맥거핀의 기능을 한다. 이 남자는 소말리아 군인을 피해 대사관으로 피신하며 남측 진영 내부의 문제를 야기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그는 다시 대사관 밖으로 나간 후 극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이후 남한인물들 누구도 솨마를 떠올리지 않는다. 영화 중반에 이르러 솨마의 죽음을 목격했다고 추정되는 여인이 시위대 속을 지나는 차량에 탄 남자를 솨마의 살인범이라 지목한다. 여인이 ‘솨마’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는 다시 관객에게 상기된다. ‘솨마’라는 인물은 어째서 다시 호명되며, 관객은 그의 죽음 이후를 봐야하는 것일까. 솨마가 재등장한 이유를 추측하자면, 관객에게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장면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관객은 가해자라 지목된 이가 진짜 살인범인지 알 수 없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들 나름의 정의가 실현됐다는 정보를 습득하게 된다. 다시금 솨마라는 인물은 사라진다. 또한 솨마라는 인물은 대사관 일행의 미래를 암시하는 복선의 역할을 한다. 남/북 대사관 일행의 목적은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솨마는 ‘U.S.C’라는 단어가 적힌 체크무늬 머플러를 착용한 채 남한 대사관으로 몸을 피했다가 이내 사라진다. 하필이면 왜 남한 대사관이었을까. 추측하자면 솨마는 반군 소속의 시위주동자이며, 위험을 피해 정부군의 힘이 닿지 않는 타국의 영토인 대사관으로 자신을 숨긴 것이다. 위험을 모면했기에 그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반군의 입성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솨마 그 역시 현재 정부가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세력(U.S.C)이 집권하는 고국에 되길 원했고, 그렇기에 그는 안전한 대사관(타국)에서 담장 밖(고국)으로 나간 것이다. 이렇듯 자신이 원하는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솨마의 모습과 앞으로 소말리아를 탈출해해 고국으로 돌아가야하는 남·북 일행들의 모습은 서로 닮았다. 그렇다면 <모가디슈>는 왜 하필 솨마라는 인물을 선택해 보여주는 것일까. 영화의 초반 북한 대사관 인물들에게는 자막이 따라 붙는다. 이 자막은 분단의 시기가 오래되어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 내 사용된 북한 언어는 관람을 방해할 만큼 어렵지 않다. 심지어 북한인물이 남한 측 대사관에 들어가고 난 이후부터 북한 언어에 대한 자막은 나타나지 않지만 관객은 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결국 관객은 자막 없이 영화 관람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특정언어에 자막이 붙는 이유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극 속 자막을 사용하는 방법에서 이상한 지점들이 나타난다. 북한 언어에 대한 것도 물론 그렇지만, 국어 구사 능력이 낮은 솨마에겐 자막이 붙지 않는다는 것이 그러하다. 그가 스토리상 중요도가 낮고 간단한 소통이라는 명목으로 자막을 붙이지 않는 건 아닐 테다. 또한 대사부인인 명희(김소진)가 한국어, 영어를 섞어 그에게 설명을 할 때 하단에는 자막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지점 또한 눈여겨 봐야한다. 이런 지점을 토대로 생각해본다면 영화 <모가디슈>에서의 자막은 사람, 사용하는 시점에 따라서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생각해 본다면 자막을 소비하는 사람은 관객이지만, 정작 자막을 필요로 하는 이는 <모가디슈>일지도 모른다. 등장인물은 자막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므로, 실질적으로 영화 내부에서의 역할은 없다. 그러나 관객은 자막의 존재와 상관없이 관람을 했다. 그렇다면 사실은 자막의 정보적 기능보다 ‘자막’이란 존재 자체를 영화가 원한 것을 아닐까. 자막은 특정언어 즉, ‘북한어’에만 사용된다. 이때 자막은 보지 않아도 관람에 무리는 없지만, 극의 초반 관객은 북한어를 사용하는 인물을 보지 않고 화면 하단을 보게 된다. 스크린 밖에서의 정보전달을 하는 자막은 언어의 장벽으로서 관객의 불편함을 초래한다. 자막이 등장할 때 관객은 잠시 영화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금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겪기에 스크린 속 인물에 집중하지 못한다. 자막을 통한 관객의 몰입 방해라는 선택은 한 이유는 남한 측 인물이 느끼는 심리적 거리 변화를 관객도 동일하게 느끼길 영화가 원했기 때문이다. 앞서 영화는 매끄럽게 이야기가 진행됐으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언급했다. 이 지점은 다량의 정보에서 발생한다. 많은 정보가 관객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이 정보들이 관객의 선택의 폭을 줄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영화 밖에서는 자막을 활용해 인물간의 감정거리를 조절하는 동시에 영화 내부에서는 솨마의 죽음에 대한 일화가 마무리 됐음을 관객에게만 보여준다. 이를 통해 관객은 남한·북한 인물의 생존과 탈출에만 집중하게 된다. 또한 솨마라는 인물을 통해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를 미리 보여준다. 위와 같은 영화의 선택은 관객의 몰입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 안과 밖의 기능을 활용해 특정감정을 관객에게 요청하는 영화적 선택은 지나치며, 이는 관객이 생각 할 수 있는 자유를 방해하는 인상을 준다. 이미 관객은 알고 있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기에 관람을 한다면, 특정감정이 생긴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사실에서 오는 감정 외엔 다른 재미를 누릴 수 없었다. 이렇듯 영화 <모가디슈>는 생길 것을 예측할 수 있는 감정만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필자는 마지막 장면을 보며 예상했던 감정 외에 다른 어떤 재미도 느끼지 못해 당황스러웠다. 더불어 영화 <모가디슈>가 제공한 정보들이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하여 관람을 마친 후 영화가 평면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