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도라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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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라이츠 지수 60.0% (5명 평가)

별점 3.3/5 (4건 리뷰)

작품 정보 업데이트: 2026년 10월 18일

이사도라의 아이들

이사도라의 아이들

미정
·2019
·영화
·84분
·서사/드라마

6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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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전설적인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은 1913년 4월에 자신의 아이가 세상을 떠난 뒤 ‘엄마’라는 이름의 독무를 창작했다. 부드러움의 정점에 이르는 순간, 엄마는 아이를 떠나보내기 직전 마지막으로 그를 보듬어본다. 현대의 프랑스에서 이사도라를 포함한 4인의 여성이 새롭게 ‘엄마’를 접하고 이를 각자만의 방식으로 해석해나간다.

출연진/제작진

리뷰 & 평점

3.3

리뷰 평점

100%

로튼토마토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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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에 활동하던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은 사고로 두 아이를 잃은 뒤 '엄마'라는 무용을 창작한다. 다미앙 매니블의 영화는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현재 네 명의 여성이 이사도라의 무용을 접하고 그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과정이다. 이들이 무용을 각기 해석하는 방식은 다르다. 첫 번째 여성은 이사도라의 무용이 담긴 무보(무용 악보)를 보고 그것을 가능한 똑같이 재현하려 한다. 선생과 제자 관계인 두 번째와 세 번째 여성은 함께 이사도라의 무용을 재현하려 한다. 하나의 워크숍처럼 이사도라의 동작을 익혀가는 이들의 대화와 몸짓에서 무용에 대한 관점과 이들의 관계가 드러난다. 마지막은 '엄마' 공연을 관람한 어느 관객이다. 몸이 불편한 듯 지팡이를 짚고 집에 돌아간 그는 그 날 관람했을 무용을 어설프면서도 주의깊게 따라한다. 무용은 비록 무보가 존재하지만, 악보를 보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과는 다르다. 피아노를 비롯한 악기들은 언제나 같은 소리를 내며, 그것을 연주하는 뉘앙스, 세기, 속도 등에 따라 악보는 재해석된다. 반면 무용은 신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신체는 악기처럼 일정하지 않다. 무보는 한 세기 전의 무용을 전달하지만, 무보를 보고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몸은 언제나 다르다. 사람에 따라 다르고, 무용을 펼치는 때에 따라 다르다. <이사도라의 아이들>은 네 사람의 다른 제스쳐들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전문 무용수의 움직임은 다운중후군을 앓는 소녀 무용수의 움직임으로, 그리고 다시 이들의 공연을 관람한 노년 여성의 몸으로 이어진다. 각기 다른 움직임이 공유하는 것은 아이들을 감싸는듯한 이사도라의 동작이다. 이사도라가 활동하던 시기와 한 세기의 시차를 지닌 이들을, 영화는 이사도라의 아이들로 명명하고 이들의 움직임을 담아낸다. 각자의 동작이 지닌 세세한 차이들로 전달되는 이사도라의 동작은, 미세하게 변주되며 모두를 감싸는 제스쳐로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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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무용)은 인종과 세대 그리고 다양한 언어와 시간의 장벽을 허무는 신체 언어이다. 누군가의 몸짓은 설명하지 않아도 그 동작이 내포하는 의미들이 고스란히 가슴 속에 내려앉는다. 다미앙 매니블 감독의 <이사도라의 아이들>은 1913년 전설적인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이 아이를 잃은 뒤 창작한 `엄마`라는 독무를 100여년이 지난 뒤 4명의 여성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재해석해가며 스크린 밖 관객들과 교감하는 이야기이다. - 영화는 짜임새 있는 3부 구성이다. 1부는 젊은 여성 무용수 2부는 다운증후군 아이와 중년의 안무 선생님 그리고 3부는 흑인 노(老)부인 이렇게 각 부마다 등장인물이 달라진다. 이런 구성은 아이를 임신하고, 양육하며, 아이를 떠나보낸 이사도라 던컨이 겪은 경험과 닮아있다. 이 과정을 영화는 일기 형식을 빌린다. 문자와 음성으로 점철된 언어적 공간 속에서 그녀의 삶이 각 인물과 어떤 교감을 이루고, 이 교감이 어떻게 신체 언어로 100여년을 뛰어넘어 관객들에게 전달되는지를 지켜보게 된다. -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각 인물이 재해석해 표현한 `엄마`라는 안무가 저마다 다르지만 이사도라 던컨이 어떤 심정과 감정으로 이 안무를 창작했을지 짐작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처럼 영화는 저마다 다른 몸짓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설득한다면 그것이 설령 신체 언어일지라도 교감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싶다. 어쩜 정제되지 않은 신체 언어야 말로 가장 진솔한 언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점이 가장 잘 느껴지고,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다운증후군 아이가 재해석한 `엄마` 독무가 아닌 관객 중 한 명인 흑인 노부인의 얼굴을 비추는 장면이었다. - 3부에 들어서며 시간의 간극은 좁혀진다. 이 좁혀진 간극은 100여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이사도라 던컨과 흑인 노부인이 교감의 거리감처럼 느껴진다. 이 간극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물리적 공간인 집으로 향하는 흑인 노부인의 움직임이다. 이사도라 던컨을 알기 전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움직임에 그쳤을 이 움직임 하나하나가 당시 이사도라 던컨이 아이를 떠나보내고, 겪었을 힘겨운 상태를 표현한 일상의 예술로 탈바꿈한다. 이처럼 영화는 개인의 슬픔에 의해 창작된 독무가 어떤 형식을 거쳐 또 다른 개인과 교감하고, 일상의 예술로 재해석되는지를 지켜보며 예술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그리고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음을 전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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