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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들러 리스트 (Schindler'S List)

드라마 / 1993

개요
드라마, 전쟁, 미국, 196분, 15세 이상 관람가, 2019.01.24 개봉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배우
리암 니슨
벤 킹슬리
랄프 파인즈
캐롤라인 구덜
조나단 사갈
엠베스 데이비츠
말고샤 게벨
쉬뮬릭 레비
마크 이바니어
베아트리스 마콜라
안드레 세베린
프리드리히 본 선
노버트 와이저
마이클 슈나이더
마이클 고든
레미 휴버거
파웰 데라그
타데우즈 브라덱키
엘리나 로웬슨
빌리 마툴라
제노 레크너
어거스트 슈몰저
루저 피스터
브랑코 러스틱
한스 마이클 레베르그
어윈 레더
조컨 니켈
스타니슬라브 브레디간트
올라프 루바젠코
헤이몬 마리아 버팅거
토마즈 데덱
마틴 세멀로지
게랄드 알렉산더 헬드
요아힘 파울 아스뷰크
오스만 래그헵
지그뉴 코즐로브스키
에그니에즈카 와그너
마시에 코즈로브스키
마야 오스타쉐브스카
토머스 모리스
도미니카 베드나직
알렉산더 스트로벨
조르쥬 컨
괴츠 오토
허버트 크레이마
라지아 이스라에리
시놉시스
1939년, 독일에게 점령당한 폴란드의 한 도시. 독일인 사업가이자 냉정한 기회주의자인 오스카 쉰들러는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 인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않는다. 인건비 없이 수백명의 유태인을 고용한 오스카 쉰들러는 우연히 유태인 회계사인 스턴과 가까워지고, 나치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되는 유태인들의 참혹한 실상을 마주하게 된다. 서서히 그의 양심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마침내 강제 노동 수용소로부터 유태인들을 구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구해낼 유태인 명단이 적힌 쉰들러 리스트를 만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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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82%
4.1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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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분포
리뷰
19

영알못 님의 리뷰
2019.03.03 14:36:15
흑백화면에선 모두가 똑같은 사람으로 보일 뿐인데, 잔혹하기 그지 없었던 그 시대.
최소한 양심으로 똑같이 대하려고 했던 오스카 쉰들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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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8 00:51:16
한줄평
- 우리가 궁극적으로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멋지단다 (그레이스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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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8 15:07:11
인간과 악마를 나누는 것은 인종이 아니라 그저 옳은 일을 한가지 하는 것.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peel 님의 리뷰
2019.03.17 03:31:32
랄프 파인즈 얼굴 보면서 계속 "와 쓰레긴데 너무 잘생겼다..." 이런 생각이 자꾸 들어서 자괴감 들었는데 실제 나치들도 잘생긴 애들 위주로 뽑았다는 얘기 보고선 더더욱 스스로가 싫어졌다.

영화 얘기를 하자면... 잘 만들었다. 명작은 명작이다. 근데 [쇼생크 탈출]처럼 나한텐 별로 와닿지가 않는 명작. 나치의 전쟁범죄를 다룬 영화로는 [컴 앤 씨]가 더 충격적이고 무시무시했었다. 이 영화는 인물의 드라마에 더 집중하는 편이라 다른 거겠지만.

그리고 최후반부 클라이막스에서 쉰들러가 엉엉 울던 장면은 지나치게 감상적이게 느껴졌다. 영화 내내 스필버그 본인이 대표하는 할리우드 특유의 드라마틱한 영화 문법과 영화의 목적(참상 고발)이 계속해서 맞부딪히는 느낌이었는데 그 장면에서 폭발한 느낌?

그래도 스필버그가 대단하긴 한게 결국은 둘 사이 균형을 맞추는데 어느 정도 성공해서 나름대로 흥미로운(!) 전쟁 범죄 고발물을 만들었다는거임. 여기서 흥미롭다는 말은 순전히 영화적 몰입감 차원에서 말하는 거지 그 참상이 흥미롭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019.03.03 19:15:58
청각이 이어놓는 안팎의 풍경
<쉰들러 리스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좋은’ 영화라는 것이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걸 잘 안다. 나치 속의 희생자에 대해 말하는 이 영화에는 실제 역사에서 벌어진 여러 비극의 소용돌이가 에너지원으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특정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거의 필연에 가깝다.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 속의 비극적인 역사를 다루는 영화는 매번 하나의 방향성만을 지니게 되고, 그 속의 운전 기법에 따라 작품의 외양이 달라진다. 요컨대 우리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를 품에 안게 되는 셈이다.



비극 혹은 참사, 민감한 화두를 말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상처의 화끈거림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문제의 핵심으로 쉬이 접근할 수가 없고, 상처의 화끈거림을 외면하면 상처를 외면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진퇴양난(進退兩難), 실화 중에서도 비극을 다루는 영화가 직면하는 문제는 바로 그곳에 있다.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 오가는 여러 일화에는 이 사건의 본질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며, 실제로 사건이 부각될수록 본질은 사라진다. 사건 자체가 없던 일이라는 게 아니라, 사람마다 사건에 대해 말하는 화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사건을 말하는 법이 다르다면, 풍성한 말뭉치에 가려진 진실은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고 생각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야기가 많아질수록 허황이 섞일 가능성도 크고, 그 허황을 피하며 진실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눈으로 본 것은 분명 진실이나, 눈으로 본 것에 의심이 들게 하는 것은 옆에서 들려오는 소문이다. 요컨대 이것은 필름에서 사운드를 기록한 부분이 가장자리에 자리한 것과 유사하다. 필름에서 영상이 차지하는 게 70퍼센트라면 나머지 30프로는 사운드다. 다르게 말하면 영상 위에 덮쳐오는 게 사운드다. 화면은 늘 스크린 안에 있지만 그 밖에서 들려오는 게 (Digesis) 사운드다. 결국 시각에 후행하면서도 시각을 압도하는 것은 청각인 셈이다.



우리는 여러 영화에서 쇼트를 응집하는 사운드의 역할을 목격하고는 한다. 중구난방인 편집이라도 사운드의 연속성이 그것을 잇는 경우는 많다. 이를테면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들, 혹은 <지옥의 묵시룩>에서 발키리 행진곡이 유쾌하게 흘러나올 때, 아니면 이상일의 <분노>에서 바깥으로 던져지는 캐리어 소리 이전에 편집을 통한 공간의 이동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상기해볼 수 있겠다. 논점을 선회하면 임권택의 <서편제>에서 카메라가 왼쪽으로 고래를 돌릴 때도, 줄곧 진행되는 판소리 마당의 한 부분에는 소리가 담아내지 못한 그들 삶의 어떤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대목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영화에서의 청각이 압도하는 것은 영화 안의 시각뿐만이 아닌 영화 밖의 시각도 마찬가지라는 점일 테다.




도피와 환상으로서의 오즈랜드



이처럼 우리는 어떤 영화에서 청각이 안팎의 풍경을 이어놓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역사를 말하는 영화에서 청각의 그런 역할은 무척 중요하다. 그것은 영화의 쇼트를 잇는 게 아닌, 안팎의 역사를 잇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흑백이던 영화에 칼라가 찾아오면서, 말하자면 ‘광명(光明)’이 찾아오면서 그곳은 오즈랜드가 아니게 된다. 나는 지금 오탈자를 낸 게 아니다. 1939년 할리우드에서 개봉한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가 내딛는 칼라가 도피와 환상의 나라 ‘오즈랜드’였다면, 1994년의 할리우드에서 개봉한 <쉰들러 리스트>에서 유대인 생존자들이 내딛는 칼라는 도피와 환상의 나라 ‘오즈랜드’다. 같은 도피와 환상이지만 그 오즈랜드는 환상 속의 나라이고 이 오즈랜드는 환상을 피해 도달한 곳이다. 나치라는 환상, 여기서 방점은 ‘환해서’가 아니라 ‘환각적’이라는 점에 찍힌다. 나치라는 단체 환각을 보고 있는 이들이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럽에 있었고, 이때의 오즈랜드는 망상에 사로잡힌 사기꾼 ‘오즈’의 에메랄드 성이 된다. 패전 독일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오즈의 현혹이 만들어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기존에 도시를 지칭하는 것과 같은 ‘환상의 나라’였던 셈이다.



환상의 나라에서 환상의 나라로. 어쩌면 이것은 유대인들이 건설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성서에서 말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환상의 나라를 건설했던 것에 비견될 수도 있다. 이 연결은 꽤 긴밀하지 않아서 논점을 벗어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쉰들러가 예루살렘의 기독교 묘지에 안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우리는 환상의 나라라는 카테고리를 포기할 수 없게 된다. 환상의 나라는 실존한다. 바로 그곳에 환상이 있다. 눈앞에 아른거리던 그 환상은 실재했다. 이 시점에서 되돌아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소련군 하나가 와서 공장 앞에 모인 천 명의 노동자들에게 말한다. 여러분은 이제 안전합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그러나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안전이 아니다. 그들은 소련군에게 되묻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때 우리의 머릿속을 강타하는 단 하나의 사실. 유대인에게는 집이 없다는 점. 이제 우리는 다음처럼 묻는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공장 앞에 모인 천 명의 노동자들은 뤼미에르가 만든 최초의 영화 <공장에서 나오는 노동자들>로부터 기원한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할까. 나치로부터 왔고, 나치를 피해 간다. 이 두 개의 영화는 멍하니 앉아 그들을 바라만 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 태블릿 쇼트가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 영화가 아닌 현실이라는 것, 공장에서 나오는 노동자들이라는 점이었다. 마찬가지로 <쉰들러 리스트>의 결말 부분에 자리한 그 쇼트는 오즈랜드를 떠나온 이들이 현실에 내쳐졌음을 보여주는 것일 테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논할 때 영화의 안팎에 양립하는 두 가지 환상의 나라에 대한 것을 피해갈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치라는 환상, 이스라엘이라는 환상, 둘 다 실제로 있었던 나라이지만 전자는 붕괴했고 후자는 일어섰다. 엄밀하게 말하면 나치라는 환상은 붕괴했다가 한번 일어섰던 나라이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두 번의 전쟁 동안 독일이 겪은 것은 붕괴 그리고 복구라는 꿈의 높낮이였다. 이때 나치가 생겨난 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중간인 붕괴의 최저점, 인생의 골짜기에서 피어난 전쟁의 업화가 전후 독일에 닥쳐오는 순간, 표현주의는 오즈랜드에서 벗어나 세계를 뒤덮게 된다. 현실은 ‘사라지게 되었다’.








독일 표현주의 환영, 그런 어둠



독일 표현주의 환영은 영화를 포함하여 예술계 전반에 퍼져있던 풍조이나, 그 분위기만큼은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건 아마도 ‘어둠’일 텐데, 영화로 치면 키아로스쿠로와 같은 명암의 대비일 것이다. 나는 이때 그런 어둠이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에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표현주의라는 극단적인 어둠이 인생의 골짜기에 숨어있을 때, 이것을 축소하자면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 속 참호에 비견될 수 있을 테고, 이 대목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수많은 전쟁영화들이 자연스레 오즈랜드의 기반으로 자리 잡는다. 예를 들면 스탠리 큐브릭의 <영광의 길>속 카메라가 장교가 걷는 참호 속을 일직선으로 따라붙을 때, 그 끝의 쇼트는 거기서 단절되지만 적어도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다른 전쟁 영화로 빠져나가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예상하건대 이 부분에서 당신이 나에게 물어올 질문은 생뚱맞게 독일 표현주의를 왜 언급하느냐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1939년의 <오즈의 마법사>의 색을 음영으로 반전해보면 독일 표현주의 그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일렁이는 건물, 일렁이는 신기루, 그럼에도 현실이라 말하는 것은 아이의 순수함 때문일까 아니면 영화적 허용일까. 이때 내가 언급할 것은 영화적 허용이 영화를 허용하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영화에서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영화는 관람하기가 거북할 수도 있다. <돌이킬 수 없는> 또는 <살인마 잭의 집>은 그런 영화 중 하나이다. 또는 윤리적으로 문제시되어 허용되지 않을 영화도 있다. 이를테면 군사정권 아래에서의 검열, 혹은 <살로소돔의 120일>과 같은 역겨움, 이런 판단이 자의적이든 사회적인든 간에 중요한 것은 영화적 허용과 영화의 허용은 다르다는 것이고 나는 이것을 허용되는 어둠과 어둠의 허용에 관한 이야기로 바꾸어 말해보려 한다.



두 가지 어둠이 있다고 나는 말했었다. 그것은 도망쳐온 곳과 도망칠 곳이다. 한쪽은 과거이고 한쪽은 미래이다. 말하자면 영화 속의 유대인들은 그 중간에 머무르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중간지대이다. 공장에서 나온 노동자들은 태블릿 쇼트 안에 갇혀서 어디로도 갈 수가 없다. 동쪽은 위험해요. 하지만 나라면 서쪽으로도 가지 않겠어요. 라고 말하는 소련군 병사의 말에는 이곳이야말로 중립지대이며 동시에 그들은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는 지박령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요컨대, 나라 잃은 민족은 나라를 잃은 채로 정박될 수밖에 없다고 나치의 잔상이 말한다. 나치는 사라졌지만 나치가 남긴 어둠은 여전히 유럽을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영화의 말머리에 제시될 때, 이 영화는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게 된다.



붉은 현실의 붉은 속살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오즈랜드로의 출구는 무엇이고 입구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이 영화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이미지인 붉은 코트를 입은 소녀라고 생각한다. 영화 포스터에도 그려진 이 소녀는 흑백인 이 영화에서 갑작스레 등장한 칼라인데, 흑백으로 표시된 군중 사이에 붉은 소녀가 포착되는 장면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깝다. 그야말로 시선 강탈, 이 신묘한 존재는 실화를 다룬 이 영화가 갑작스럽게 허구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물론 영화는 허구의 물질이다 그러나 다루는 소재는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의 진실성에 대해 자꾸만 되묻게 된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에 대한 물음은 이것이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고 가정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허구임을 표방하는 일반적인 영화의 경우에는 아무리 현실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허구라는 인식이 관객의 머릿속에 박혀있다. 그러므로 흑백처리를 통해 과거의 사실에 대한 슬픔을 경감하는 동시에 이곳이 과거의 ‘현실’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이 영화에서 갑작스럽게 침투해온 칼라의 존재란 갈라진 현실 속에 드러나 보인 슬픈 꿈, 비극 속에 담긴 작은 희망처럼 보인다.



우리는 영화가 가면을 쓴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명백하게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가면을 쓴 존재 즉 현실의 배면에 달라붙은 기생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현실을 직시하는 게 아니라 거짓된 삶을 연기하는 인조 생명체가 되어버린다. 정리하자면 나는 이 영화에서 갑작스레 침투한 소녀의 모습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응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붉은 코트를 입은 소녀는 건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남성의 시선을 따라 관객에게로 주입되는데,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기에 그 시선은 끊김 없이 지속된다. 요컨대 이 카메라의 구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남성이 아래쪽에 있었다면 그 소녀는 우리의 눈에 들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일 테다. 즉 그곳에 동화되었기에 보이지 않던 풍경은 오히려 그들보다 상위의 존재 혹은 별도의 장소에 있는 자에게만 열리게 된다. 이런 고저차가 개인의 선악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시점의 문제만큼은 말해줄 수 있을 테다.



현실의 배면에 거짓된 삶이 있는 게 아니라, 현실 속에 환상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오즈랜드가 캔자스의 반대항으로 설립된 게 아니라 도로시가 만들어낸 균열된 삶 속 환상이라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어둠의 반대는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 빛이 있다는 점이 밝혀지는 것은 영화의 막바지에서 유대인 랍비가 간결히 기도하는 장면에서다. 흑백 속에 칼라가 침투하는 장면들이라는 점에서는 칼라로 시작해 칼라로 끝나는 이 영화의 형식에 대해 물음을 던져볼 수 있을 테다. 칼라에서 흑백으로의 전환이 현재에서 과거로 들어가는 절단선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완벽하게 분리된 세계일까? 이런 식의 해석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이 영화가 현재가 품은 과거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현실의 속살이자 핏물이다.





두 가지 오즈랜드



나는 이 영화의 편집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두 가지 색깔이 명확하게 단절되는 게 현실과 과거의 구분을 지을 수는 있어도 담론의 연속성 혹은 비극의 동시대성을 강조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는 독일의 표현주의가 욕망의 산물인지 아니면 목마른 이의 신기루인지를 구분 짓는 것은 캔자스의 도로시가 도달한 미국의 속살 ‘오즈랜드’를 논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 영화에서 오즈랜드로의 진입장치로 설계된 붉은 코트를 입은 소녀는 영화의 3/2 지점에서 사망한 상태로 목격되기 때문이다.



장장 3시간여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소녀는 삶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발견되는데, 쉰들러가 본격적으로 유대인을 위하게 된 것은 소녀의 죽음을 목격하고 난 직후이다. 쉽게 말해 이 영화에서 붉은 소녀의 존재는 영화의 초반과 결말에서 제시되는 칼라라는 절단선과 더불어서 관객에게 서사를 쉽게 이해시키려는 장치에 해당한다. 상업영화로서는 분명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다시 나오는 구조가 아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나오는 것은 이 영화 밖에 자리한 우리인데, 우리의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의 관람 즉 영화관 객석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형태이다. 그렇다면 이 위에서 아래로의 시선은 영화에서 노동자를 내려다보는 쉰들러의 시선에 대응하며, 쉰들러의 시선이 그들을 유대인 노동자에서 유대’인(人)’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나는 영화가 우리로 하여금 유대인을 노동자로 여기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영화의 배경인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과거와의 현재로의 출입구를 모두 만들어놓았다. 그러므로 그 노동자 이미지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가 영화를 보다 보면 그 노동자는 종전과 함께 해방되어 흑백화면에서 사라지고, 화면이 칼라로 바뀔 때 그 자리에 그대로 배치된다 (페이드인). 요컨대 이 영화는 편집을 통해 흑백을 칼라로 계승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렇다면 영화 초반은 칼라인 것의 과거 즉 ‘속살’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호평하는 지점이 바로 이것으로, 영화 속의 비극은 현실의 반대항이 아닌 현실 속의 어딘가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환상의 나라가 아닌, 현실 속의 환상으로 제시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불그스름한 현실의 잔해라고 <쉰들러 리스트>는 말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두 가지 오즈랜드를 설정한 후에 그 가운데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드러난 독일 표현주의라는 오즈랜드는 스크린 속에 있다. 그런데 이때 다른 한쪽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공장을 나선 노동자들이 향한 곳은 갑자기 점프하여 먼 미래의 칼라 즉 현재로 바뀌게 되는데, 이 현재에는 도로시의 염원으로 탄생한 현실 속의 낙원인 오즈랜드가 ‘존재한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다. 즉 이 영화의 내용에는 유대인 학살이 자리하고 그것이 현실 속의 진실인 것도 맞지만, 그 진실을 지지하는 양쪽 다리는 한쪽은 나치 다른 한쪽은 이스라엘이라는 점은 그리 탐탁지가 않다. 적어도 이스라엘의 현주소가 팔레스타인 문제와 면밀히 연루되어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제기되고 있는지를 떠올려 본다면, 자칫하면 그들의 과거와 현재가 엮여버릴 위험이 있다. 무엇보다 과거와 현실을 분리해놓은 듯한 연출은 그런 대비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 누군가의 목소리는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데, 왜 그에 핍박받는 이들의 목소리는 현재로 전해지지 않는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다. 그들의 과거와 현재는 명백히 분리된 사실이지만 그들의 현재는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차라리 두 가지 오즈랜드, 그 두 가지를 연쇄했다면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의 제목에 맞게 그 덕분에 살아남은 천백 명의 사람들 그리고 그 후손이라는 이미지에 더욱 부합했을 것이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Skin Job 님의 리뷰
2019.02.10 01:56:55
잊고싶지만 잊어서는 안될 이야기들
#쉰들러리스트 #SchindlersList #엠블린Ent_제작사 #스티븐스필버그_제작 #스티븐제일리언_각본 #유니버셜픽쳐스_배급 #스티븐스필버그_연출 #리암리슨 #벤킹슬리 #랄프파인즈 #존윌리암스_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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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이 영화를 스크린으로 본 눈을 가지게 되었다. 재개봉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ㅠㅠ 25년만에 재개봉을 알리는 스필버그 감독의 프롤로그까지...버킷리스트에서 쉰들러리스트는 지울 수 있겠다 ㅠㅠ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16 님의 리뷰
2019.02.09 20:43:14
제2차 세계대전 독일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은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으로 아무 죄 없이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로 죽어간 수백만의 희생자들과 아직도 그때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생존자들의 아픔은 위로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럼에도 잔혹하고, 엄혹한 시기 최소한의 인간성(양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있었을 테다.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숙명과도 같은 작품 <쉰들러 리스트>는 그 시기 유대인 1,100여 명의 목숨을 구한 오스카 쉰들러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된 1939년부터 종전 선언된 1945년까지 6년의 시간을 오스카 쉰들러(리암 닐슨)의 시선으로 담담히 그려 나간다. 그 시선 속엔 유대인을 사람이 아닌 장난감 취급하던 독일 나치의 잔혹한 모습이 담겨 있었으며, 그들의 희생양에 불과했던 유대인들의 삶에 대한 불안과 집념들이 담겨 있었다. 그런 수직적 간극의 차이가 한 인물의 눈을 통해 그려질 때 중간선상에 있던 쉰들러의 남모를 고뇌가 만들어지고, 그 결과 목숨을 두고 벌어지는 묘한 서스펜스가 만들어지며 영화는 전개된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고뇌와 별개로 쉰들러를 마냥 좋은 사람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그 역시 독일 나치에 협력한 기회주의자였고, 최고 부자를 꿈꾸는 자본가였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영화는 편집을 통해 나치과 쉰들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부각시킨다. 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있었으니 그건 쉰들러에겐 최소한의 인간성(양심)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이면에 값싼 노동력을 쓰기 위한 꼼수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그 이면에 자리 잡는 것은 인간성이란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쉰들러의 감정 변화의 설득이 자연스러웠기에 후반부 자신을 자책하며, 울먹이는 그의 모습에서 눈시울이 붉혀진다.


아시다시피 영화는 무채색의 흑백영화이며, 이는 희망조차 없던 그 시기를 상징하는 것일 테다. 이렇게 흑백으로 전개되는 영화의 흐름 속에서 단 2번 빨간 코트 아이의 모습만 유채색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 모습은 모두 쉰들러의 눈으로 목격되며, 첫 번째와 두 번째 둘 사이의 거리감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쉰들러의 인간성 크기를 은유함과 동시에 변화의 단초를 제공하는 사건일 테다. 그렇게 두 번째 만남 이후 그의 변화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 한 명의 변화와 용기를 담보한 집념이 얼마나 큰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한 생명을 구함은 곧 세상을 구함이다.`란 탈무드의 격언처럼 인간성을 가진 한 인물의 용기 있는 행동은 시간의 유한함 속에서도 그 기적만큼은 무한하다는 사실을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확인 시켜준다. 그리고 감독이 영화 시작 전 말했던 것처럼 “증오보단 사랑이 강하다”라는 보편적인 명제를 역사적인 사건 속 한 인물을 통해 오롯이 전하며 휴머니즘에 대한 감독의 철학을 알린 작품이었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정태희 님의 리뷰
2019.02.02 23:23:21
"세상의 친절함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을 때, 생명은 구해지고 새로운 세대가 탄생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단, 한명의 인간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죠." - 스티븐 스필버스 감독.

<쉰들러 리스트>에 담겨진 '사랑은 언제나 증오를 압도한다' 같은 메시지는 훌륭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영화를 명작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이번 25주년 기념 특별상영을 통해 새삼 정말 굉장하게 느낀 것은 '3시간 16분'이나 되는 런닝타임 동안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게 영화를 운영한 스필버그의 능력.

뛰어난 연출, 연기, 각본, 촬영, 음악, 미술 모든 것이 조화롭게 이어진... 실로 걸작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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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na09 님의 리뷰
2019.01.27 23:25:37
한 사람을 구함은 세상 모두를 구함이다! 명작,띵작 재개봉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개봉 25주년을 맞아 재개봉했습니다. 작지만 다양성 영화관에서 스크린의 감동을 느낄 수 있으니 부디 영화관에서 보길 추천합니다. 영화 상영에 앞서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짧은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1993년 영화 개봉 당시 보다 인종차별과 혐오가 더 커졌다며 지금이 더욱 위태로운 시기라고 우려의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25년 전이나 후나 형태와 형식의 변화만 있을 뿐 비슷한 일이 연일 벌어지는 미시감(과거에 보거나 경험한 경우를 잊고 처음이라고 느끼는 체험)이 느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난민 문제, 전쟁, 인종차별,여성혐오 등 날이 갈수록 쟁점이 심화되고 있을뿐더러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힘의 근원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분노나 증오보다 힘이 센 사랑과 연대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196분이란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명작을 관람해보는 건 어떨까요.


1939년 어느 날 독일군에 점령당한 폴란드의 도시 크라쿠프(Krakow). 전쟁을 기반으로 성공을 꿈꾸는 독일인 '오스카 쉰들러(리암 니슨)'는 유대인의 냄비 공장을 인수해 인건비를 주지 않고 그들을 고용하고 있습니다. 회계사 '스턴(벤 킹슬리)'을 알게 되면서 그를 전문경영인으로 위임하며 본격적인 파이를 키웁니다. 유대인들은 이 공장을 천국이라 칭합니다. 과연 쉰들러의 공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중후한 자태, 주색에 능한 쉰들러는 혈혈단신 가방을 들고 이곳을 찾았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나치당에 가입하고 SS 요원을 뇌물로 매수합니다. 그렇게 전쟁이 심해질수록 사업은 번창하고 쉰들러 또한 돈방석에 앉게 되죠.



한편 '아몬 괴트(랄프 파인즈)'가 새롭게 유대인 집단 주거지에 부임하면서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발코니에 서서 유태인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극악무도한 취미를 가진 인물입니다. 죽이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날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탈출한 사람과 같은 방을 썼다는 이유로 때로는 아무 이유도 없이 쏴 죽입니다. 쉰들러는 필요에 의해 그와 거래하지만 살인 만행을 보며 양심의 가책을 쌓아갑니다.



영화는 괴트가 한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대학살 장면에서 빨간코트를 입은 소녀를 등장시킵니다. 이는 그동안 소소하게 직원들의 편의를 봐주던 좋은 사장님에서 쉰들러 리스트를 작성한 의인으로 변하는 계기가 됩니다. 말을 타고 언덕 아래에서 잔혹한 현장을 목격한 쉰들러는 점점 악화되는 상황을 지켜본 관객의 눈과 양심입니다. 흑백의 화면에서 또렷한 빨간색은 죽음에서 피어오르는 희망을 상징합니다.



그가 군수품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가 필요하다며 빼돌린 유대인 명단이 바로 '쉰들러 리스트'입니다. 독일 장교를 온갖 뇌물로 매수해 1,100여 명을 구해냈죠. 그렇게 빼낸 유대인을 고용한 공장은 7개월 동안 제대로 된 생산품 없이 버텨냈습니다. 쉰들러는 유태인들을 위해 벌어들인 재산을 다 날렸고, 그렇게 종전을 맞았습니다.


유태인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나치당원이었던 쉰들러는 반대로 전범이 되고야 맙니다. 떠나는 쉰들러는 더 구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자책합니다.


이제는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쉰들러의 마지막 여정을 걱정하듯 스턴은 금니를 녹여 만든 반지를 건네며 이런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을 구함은 세상 모두를 구함이다'라고요. 이는 탈무드의 오랜 격언이자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있는 이야기입니다. 쉰들러가 구한 유태인은 이로써 후손을 이을 수 있었으니까요.


결국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 때문에 웃고, 사람 때문에 지칩니다. 배신, 증오, 혐오는 사람 때문에 시작됩니다. 하지만 잊고 있는 게 있죠. 바로 사람 때문에 세상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 인종을 넘어 사람 자체를 사랑한 쉰들러의 인류애(愛)와 자비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세계관입니다. 처벌할 명분이 있는데도 처벌하지 않는 용서가 진정한 권력임을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편견과 인종 차별에 대한 무서운 결과, 인간의 선과 악의 경계를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쉰들러 리스트의 실제 인물들이 쉰들러의 무덤을 찾는 장면은 먹먹함을 넘어 종교적 숭고함까지 갖게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쉽게 외면합니다. 때로는 이런 감정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큰 힘을 갖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 부른 전쟁이란 만행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의 작은 행동이 나비효과가 되어 퍼지는 연대의 힘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 필요한 이유입니다.





덧, 실제 쉰들러의 상황은 영화와 다른 점도 있습니다. 상영당시 쉰들러의 수많은 여성들과의 불륜을 아무렇지 않게 다루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재결합한다는 점, 그가 유태인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점 등 영화는 알려지지 않은 점이나 해명 없이 호도한 부분, 허구적 상상력도 존재합니다.



살아가는데 있어 팩트체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영화적 감동은 영화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이 영화를 스크린에서 감상했다는 만족감과 함께 앞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될 영화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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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호 님의 리뷰
2018.11.10 22:59:01
고등학교때 과학선생님이 해주셨던 얘기가 생각난다.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이 영화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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