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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 (Capernaum)

드라마 / 2018

개요
드라마, 프랑스, 레바논, 126분, 15세 이상 관람가, 2019.01.24 개봉
감독
나딘 라바키
배우
자인 알 라피아
요르다노스 시프로우
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
나딘 라바키
하이타 아이잠
카우사르 알 하다드
파디 유세프
일라이어스 코리
파라 하스노
시놉시스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 출생기록조차 없이 살아온 12살 소년 '자인'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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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67%
4.08점
키노라이트 분포
9개
160개
별점 분포
예고편
리뷰
109

토비 님의 리뷰
2019.01.10 15:22:14
가난을 포르노화하는 나쁜 신파극
https://bit.ly/2SRdP4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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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 북부에 위치한 가버나움. 이 곳은 예수가 머물며 숱한 기적을 행한 곳이다. 이 곳에서 예수는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었던 열병을 치유해주었고, 중풍 환자를 낫게 하였으며, 진리를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가 행한 기적에도 불구하고 이 곳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예수는 가버나움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예수의 예언대로 가버나움은 7세기 초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종교인들의 성지순례 단골 코스가 되었다.

영화의 시선은 가버나움보다 조금 더 위에 위치한 레바논으로 향한다. 영화의 배경도 아니고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성경 속 몰락한 마을 가버나움은 더 이상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도시 베이루트에서 발견된다. 빈민과 난민으로 가득한 이 도시에는 길거리에 나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헌신하는 아이들이 있고,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월경만 시작하면 나이 많은 남자에게 팔려가는 소녀들이 있으며, 복지의 사각지대에 위치한 난민들이 있다. 출생신고도 되지 않아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소년 자인도 이 부류에 속해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간다. 동네 슈퍼마켓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받아오고, 동생들과 길거리에 나가 비트주스를 팔기도 하며, 가짜 처방전으로 처방 받은 마약성 진통제를 유통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고작 닭 몇 마리에 동생 사하르를 동네 슈퍼마켓 주인인 아사드에게 결혼시키는 부모는 자인이 사는 게 개똥 같다고 말하게 만드는 증오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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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그런 자인의 뒤를 핸드헬드 카메라로 바짝 뒤쫓는다. 바퀴맨 할아버지가 놀이공원에서 일하면서 바퀴벌레 같이 질긴 삶을 이어가는 세상, 라힐이 요나스를 힘겹게 먹여살리는 세상, 라힐이 사라지고 난 후 요나스를 부양해야 하는 세상을 자인이 마주할 때마다 카메라는 그 불행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거리의 소음까지 담는 음향 연출법은 현장감을 담는 핸드헬드 카메라와 더불어서 국가채무비율 세계 4위 레바논의 현실을 직시한다(참고: 파이낸셜뉴스 기사(http://www.fnnews.com/news/201901091418447273)).

심히 불편한 건 이 영화가 약자를 대하는 태도다. 따지고 보면 영화의 메시지는 법정 시퀀스에서 모두 토해진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빈곤에 고통 받는 자인을 비추는 플래시백이 없어도 관객은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을 대부분 다 알아차릴 수 있다. 플래시백은 잔인한 현실을 묘사하는 본래 의도를 넘어 인물을 어디까지 학대할 수 있나 과시하는 가난 전시회, 불행 전시회처럼 쓰일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인은 서사의 주체가 아니라 연민을 유발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버스에서 잠이 든 자인과 요나스를 비추는 장면 등에서 극적인 음악을 사용할 때나, 자인의 뒤를 쫓던 카메라가 악착 같이 생의 유지를 위해 힘쓰는 자인의 위에 올라서 버즈아이뷰 숏으로 꼬불꼬불 미로 같은 빈민촌을 비출 때 그 자극성이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낸다. 아이들의 눈을 빌림으로써 프레임에서 현실을 의도적으로 밀어냈던 <플로리다 프로젝트(The Florida Project)>와 정확히 반대되는 지점이다.

감정의 격랑에 전혀 휩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 영화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감상주의적 엔딩의 유려함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가장 놀라운 건 아역배우들의 연기다. 가난을 포르노화하며 약자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에 심드렁해하면서도,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하층민의 삶을 와닿게 만드는 아역배우들의 연기에는 가슴이 저절로 반응한다. 실제로 거리에서 배달 일을 하다가 캐스팅된 자인 알 라피아(Zain Al Rafeea, 자인 역)에게 쏟아진 찬사에 동조할 수밖에 없고, 한 살배기 아기 요나스 역의 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Boluwatife Treasure Bankole)은 연기 디렉팅을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장면에 필요한 연기를 기가 막히게 수행해 놀라움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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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athy not sympathy. 우리말로 '동정하지 말고 공감하라'라는 의미이다. 복지론에서 처음 등장한 이 말은 문화예술에서 약자를 다루는 태도에도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윤리비평에 자주 인용되는 말이 되었다. 동정은 기본적으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과 거리감이 전제되어 있다. 반면에 공감은 약자와 눈높이를 일치시킴으로써 가능하고 연대를 전제로 한다. 동정보다 공감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동정이 시혜적 도움밖에 주지 못할 때 공감은 약자에 대한 실질적 접근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그럼 둘 중 <가버나움(کفرناحوم‎)>이 호소하는 것은 무엇인가. 관객이 <가버나움>을 보고 느껴야 하는 건 야트막한 감정 자극이어야 하는가. 나딘 라바키(نادين لبكي‎)에게 묻는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두통 님의 리뷰
2019.01.22 16:48:06
[가버나움] 절망이라는 운명에 지지않기
종종 거리두기가 힘든 영화를 만난다. 저것은 그냥 영화이고, 저 배우들은 정말 저 상황이 아니고, 저것은 허구이다, 라는 인식 자체가 힘든.


나는 아이들이 고통받는 이야기에 약하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가난과 억압이라는 소재에 취약한데, 그것이 특히 아무 잘못 없는 아이, 아기에게 닥치면 마치 내가 그 피해자가 된 것처럼 불안해지기까지 한다. 아마도 나의 개인적인 무언가를 건드리는 것일텐데, 그래서 한편으론 눈물을 쏟으며 과거의 무엇과 마주하기도 한다. 이 영화 가버나움은 나를 그렇게 건드렸다.

그래도 이것은 영화입니다, 라고 나를 현실로 잡아준 것은 종종 물끄러미 보여주던 도시의 풍경이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무심한 회색빛의 도시는 한발짝 물러나 이것이 픽션임을 상기시긴다. '이것은 영화입니다.'라는 자각은 이 영화가 영화일뿐이라 현실보다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슬픔과 고통이라는 마취에서 깨어나도록 현실감각을 꿈틀꿈틀 일깨운다. 이것은 영화이므로, 나는 이제 생각을 한다. 왜 이것이 영화가 될 수 밖에 없는지, 왜 이 이야기가 선택되었는지. 왜 저 인물은, 왜 저 장면은, 왜 저 카메라는 이라는 질문들이 생겨난다. 영화로 향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다보면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자인 역의 배우 자인(역할의 이름과 실제 이름이 같다.)은 이 영화의 보물이다. 자인은 실제 시리아 난민이라고 한다. 감독은 연기 경험이 없는 실제 난민을 캐스팅하여 영화를 찍은 것인데, 영화 마지막에, 영화제작이 모두끝난 단계에서도 재단을 마련하여 난민과 아이들을 돕는 사업을 하고있다는 자막이 나온다. 실제 배우들이 처한 환경도 영화 스텝과 재단의 도움으로 나아졌다. 이것을 볼때 영화 자체와는 별개로,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쩌면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가져보았다.

다시 배우 자인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그는, 이 영화를 감성충만하게 이끌면서도 너무 감상에만 빠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준다. 그의 쓸쓸한 옆모습, 생각에 잠긴 얼굴을 보노라면, 어린 제임스 딘 같기도 하다. (사실 비교하자니 제임스 딘보다 자인에게 미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속 자인은 너무 빨리 어른이 된 아이다. 아이로 남을 틈이 없었을 것이다. 그게 너무 슬펐다. 늘 생계를 걱정해야하고 사랑하는 이를 지켜야하는 싸움에 내던져졌다. 하지만 그는 작고 어리다. 그 작고 어린 아이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기 요나스를 안고 아스팔트 길을 걸을때, 너무 빨리 자란 아이가 아직 천진한 아이와 함께 있는 장면 만으로도 눈물이 났다. 요나스는 정말 너무나 천진하고 사랑스러웠다. 어쩌면 저렇게 아기의 감정과 반응을 잘 잡아냈는지 연출에 감탄에 또 감탄을 했다. 나는 요나스의 엄마가 화장실에서 몰래 아이 젖을 먹이는 장면에서부터 이 영화에 홀딱 반했는데, 그 힘겨운 엄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젖을 먹으며 장난을 치고 엄마를 바라보며 웃는 아이의 얼굴에 나는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이 영화는 마음도 아프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장면들도 많다. 요나스만 나오면 아름다운 장면이 되었고! 특히 마지막 장면, 자인이 스크린을 꽉 채우는 마지막 장면도 아름다웠다.


나는 자인을 보면서 나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어려움이 닥칠때면 감정에 사로잡혀 현실을 직시하는데 문제를 겪곤했다. 내가 자인처럼 어려움이 닥친 상황에서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더 성숙한 모습이지 않았을지... 어려움들을 더 빨리 물리치거나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지.


학대를 당하는 아이가 문제를 인식하기란 매우 어렵다. 어른이 되고서 한참후에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어른이라고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쉬운 건 아니다. 어른의 눈은 아이의 눈보다 침침하기 마련이다. 마지막 재판 장면이 나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는데, 자신의 변명하는 어른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영화 내내 보여진 고통받고 상처받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엄마아빠가 돼가지고...라는 생각까지 했다. 나는 아이를 길러본 경험도 없으면서 비난하기는 그렇게 쉬웠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 울면서 변명하고 하소연하는 어른들을 보면서,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자포자기의 심정 또한 엄청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들만의 연민에 빠져있었다. 상처주는 줄도 모르고 운명을 탓했다. 깨어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의 상처와 절망에 눈멀지 않기를. 그 암흑에 안주하지 않기를.

영화의 마지막 자인의 얼굴을 보며 깨달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늘 좋은 어른이 어딘가에 있었으면하고 간절히 바랐다. 이제 내가 그런 어른이 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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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mon 님의 리뷰
2019.01.13 03:50:09
상처를 주는 동정으로 남지 않기 위한 영화 <가버나움>: 수직적인 동정이 아닌 수평적인 공감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영화
제71회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나딘 라바키 감독의 <가버나움> (2018)의 연기자는 모두 전문 연기자가 아닌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환경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다. <가버나움>을 관람하면서 떠올리게 되는 영화는 네오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영화 중 하나인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 도둑> (1948)이다. 왜냐하면 <가버나움>과 <자전거 도둑> 모두 가정법적인 시공간의 성격을 지닌 매체에 알맞은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 대신 현실의 삶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비전문 연기자를 캐스팅함으로써 익숙한, 그리고 어쩌면 왜곡된 이미지에 가려진 현실의 이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버나움>과 <자전거 도둑>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가 모호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두 작품은 결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자전거 도둑>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울해진 당시 이탈리아의 현실과 안타까운 실업자의 현실을 미세하게 접근하는 반면, <가버나움>은 다큐멘터리와 일반 드라마 영화의 성격이 혼재되었음에도 레바논 사태와 그런 상황에 놓은 빈곤한 사람의 삶을 약간 인위적이라고 여길 수 있는 시각적 이미지를 여러 플래시백 장면을 거쳐 표현한다. 그래서 <가버나움>은 언론을 통해 전달된 이미지 뒤에 가려진 이면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슬픔과 비극적인 현실을 쉽게 스크린으로 옮겼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더 나아가 영화를 보면서 관객이 흘리는 눈물에 당연히 진정성이 담겨 있겠지만, 어쩌면 이 눈물 역시 이창동 감독의 <밀양> (2007)에서 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김종찬’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준 공감이 아닌 사회화를 통해 드러나는 무의식적인 수직적인 동정일 수도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버나움>은 언급된 지적과 비판을 극복하고 영화의 힘을 믿는 진심에 시작해 동정이 아닌 공감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작품이다. 나딘 라바키 감독은 영화가 실제 상황을 이상적으로 쉽게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최소한 이 상황 테두리 밖에 있는 대중들이 상황 안으로 눈길을 돌려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그렇다면 이 확신에서 출발해 어떻게 동정이 아닌 공감으로 향하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분명 <가버나움>은 빈곤과 허덕이는 이들의 의식주 문제를, 생계를 위해 매매혼되는 어린아이들의 현실, 상대적으로 그나마 나은 지위를 이용해 난민을 갖고 장난치는 일부 사람의 모습 등만을 열거하는 일차원적인 접근법을 보여주고 있기에 공감으로 전진하는 과정을 찾아내기 힘든 영화다. 게다가, ‘자인(자인 알 라피아)’의 웃는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해 간직하는 엔딩 장면 또한 이 영화가 주장하고자 하는 공감과 거리가 멀다.

<가버나움>은 상처를 남기는 수직적인 동정을 반박하려는 목적으로 ‘종교’를 끌고 온다. 불법 체류로 수감된 이들을 위해 종교인들이 방문해 종교적인 구원과 믿음으로 이들의 상황을 동정하거나 ‘자인’의 엄마는 딸 ‘사하르(하이타 아이잠)’가 죽은 상황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황을 종교적인 해석에 의존한다. 이를 종교적인 희망과 동정의 허(虚)를 시각화한 장면과 언어적인 방식으로 반박한다. 우선, 영화는 중간중간 하이 앵글 숏(high angle shot) 혹은 버즈 아이 뷰 숏(bird’s eye view shot)을 활용하는데 어둠 속 전선에 걸쳐 있는 듯한 십자가를 연상하게 하는 그림자를 하이 앵글로 보여준 장면이 있다. 이는 어떤 빛도 일절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영화의 기저에는 종교적인 희망을 믿지 않는 시선이 깔려있음을 함의한다.

그리고서 언어적인 방식으로 이와 같은 시선을 형상화하는데, 자인과 엄마의 면회 장면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자인은 신은 하나를 가져가면 하나를 돌려준다는 엄마의 말에 엄마는 감정이 없고 모든 말이 칼처럼 심장을 찌른다고 눈물이 맺혔지만, 건조하게 말하며 교도소에 수감된 자신의 상황을 동정하는 것을 차단한다. 그다음, 재판장에서 내뱉은 자인의 부모의 호소는 동정을 차단하는 작업과 공감의 길에 들어서기 위한 마지막 관문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자인의 부모가 재판장에서 보이는 호소는 자기의 죄를 면피하기 위한 목적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이 호소는 사회 시스템의 사각지대를 지적한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뿐더러, 동정 이전 현재 사회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무엇인지 고찰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공감의 길에 들어서기 위한 마지막 관문은 재판장에서 자인이 던진 마지막 질문이다. ‘자인’은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도 못했지만, 갑자기 사라진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의 아들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를 혼자 보살피다가 결국 시장 아저씨에게 넘기면서 발동되는 죄의식으로 인해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이 눈물을 통해 책임감의 무게를 어린 나이에 깨달은 자인은 판사에게 태어나면 자신처럼 될 엄마 배 안에 있는 아기를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을 던진다. 당연히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며,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답이 없는 질문이다. 다만, 이 질문 후 형성된 숙연하고 무거운 공기가 앞으로도 유지되고 잊히지 않는다면 서서히 수평적인 공감을 향해 걸음을 옮길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근데, 이와 동시에 자인의 질문과 질문이 만들어낸 분위기가 재판 기록문이 법정 기록 보관소에 저장되는 일에 그친다면 수직적인 동정은 하지 않았지만, 수평적인 공감을 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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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9 22:59:34
열린 공간의 환영
열린 공간의 환영



영화를 보면서 줄곧 고민하게 되는 것 중 하나는 이곳이 환영임을 인정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영화가 다루는 게 재미를 위한 것에 불과하다면 그저 환영일 뿐이라며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있겠으나, 영화가 다루는 게 현실의 어떤 고통이라면 그것은 그저 환영에 불과하지 않게 된다. 그 스크린의 아른거림은 빛의 환영인 동시에 현실의 그림자이고, 이때 우리는 동굴 속의 죄수가 되어 영화관 밖의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요컨대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의 이면에 담긴 ‘이데아’가 아닐까 하고 우리는 의심해보게 된다.



우리는 동굴 속의 죄수들처럼 그 거짓된 상만을 바라보게 된다. 저곳이 실재하는 세계라 하여도,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허탈하게 사라지는 그 빛의 환영을 보면 마음속에 잠긴 우울만이 수면 위로 올라올 뿐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 영화를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에 잠기게 된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두 가지 의문점을 받아들게 된다. 저곳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는 것만으로 이 영화관람 행위는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그 인지를 통해 무언가 행동을 해야만 진정한 의미의 선순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가버나움>이 말하려는 것도 그런 현실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레바논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어느 남자아이의 모습을 통해 난민을 비롯한 여러 문제를 통틀어 건드리는 이 영화의 주제의식은 사실, 우리가 평소에 보던 뉴스에서도 흘러나오던 것들이다. 그러니까 의미적인 맥락에서는 새로울 게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그 뉴스의 보도화면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오는데, 아무래도 이것은 영화관이라는 어두컴컴한 장소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동굴에 가깝기 때문일 테다. 집에서 티브이를 보는 우리에게 그 화면은 언제든지 컨트롤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액정의 촉각적 경험이지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그 화면은 허구와 진실의 사이 어딘가에 진실이 있으리라고 믿는 그러나 그것으로의 접촉은 제한된 감금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마지막 엔딩 크레딧에 이 영화의 배우들이 실제 난민이었음을 밝히면서 자신이 보여주려는 게 허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배우들이 실재이기에 이것은 허구 위에 세워진 실재, 즉 스크린이라는 허구 위에 설립된 인간의 삶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면에서 가상 공간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모습으로도 보일 수 있고, 이 경우 그들의 삶은 ‘거짓된’ 것이 되어버린다. 장소가 어디든 간에 주체가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주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그동안 있었으나, 이것은 가상현실처럼 주체가 허구적 배경 속에 뛰어드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현실에서 흘러온 인물과 시나리오에 설립된 레바논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우리는 그 두 가지 층위를 구분할 수 있을까? 그 인물이 연기자가 아니라 당사자라면 영화 속의 풍경들은 그저 스크린의 환영에 불과한 것일까?



사방이 열린 무방비 도시(Open city)



스마트폰 액정 위에 재생되는 영상에 비하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촉각적인 체험은 그리 크지가 않다. 영화라는 매체는 촉각이 아니라 시각의 영역에서 출발했고, 그래서 그것은 버츄얼(Virtual)이라는 경험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요컨대 영화라는 매체가 나아간 것은 가상의 것을 눈앞에 재현하는 것, 플라톤의 이데아를 영화관에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때 그 버츄얼함이 갖는 특징 중에 하나는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거짓된 것’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객석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던 관객이 객석의 경험을 잊게 될 경우, 객석으로부터의 평가를 요구하는 스크린의 존재의미는 사라지고 그곳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가는 영화의 개념이 등장하게 된 것은 뭔 훗날의 이야기이고, 우리가 주목할 것은 관객이 없다면 영화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는 관객을 스크린으로 현혹하면서도 반대로 밀쳐내야만 하는 모순된 숙명을 품고 있다. 요컨대 그런 모순이 이 영화의 현실성과 비현실성이 동시에 발현되어야만 했던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관객이 없다면 영화가 성립할 수 없다는 말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영화를 보러오는 부유한 현실이 있다면 영화의 대상이 되는 가난한 현실도 있다”고. 다시 말해서 그곳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거짓된 게 아니라, 거짓된 것처럼 보이는데 정말로 현실이다. 이것은 끔찍한 일이며 당신은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아마도 당신은 왜 자기도 아는 이야기를 굳이 길게 늘어놓았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우리의 답변은 그 문제는 얼마를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난민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는 최근 국제 사회의 경향을 되새기는 이 영화에는 단지 국적의 난민뿐만 아니라 ‘버츄얼함’에 터전을 잃은 우리들의 모습 또한 담겨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주된 배경인 레바논이 그렇게 부유한 나라도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다시금 부와 빈이 갈리는 이 현실에는 도시 전체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신의 시점, 익스트림 하이 앵글 쇼트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도심의 풍경은 마치 ‘무방비 도시’처럼 보인다. 영어로 ‘Open city’라고 쓰는 무방비 도시의 문맥에는 그 ‘열림’이 모두에게 ‘열리지 않았다는’ 아이러니함이 담겨 있고, 그 열림이 인터넷 시대의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무방비’ 인터넷에 살고 있음을 말해주는 표지일 테다. 말하자면 우리가 인터넷상에서 자유롭다고 느끼는 사실에는 반대로 그것이 ‘길을 잃었다거나’ 혹은 ‘집이 없다는’ 등의 ‘무방비함’이 내재되어있다.



어린 꼬마 자인(제인 알 라피아)이 살인미수로 갇힌 곳은 교도소인데, 바깥보다 훨씬 나은 삶의 여건을 제공한다. 먼지가 풀풀 날리면서 길 잃은 하이에나들이 어슬렁거리는 슬럼가의 한복판보다는, 배식을 받고 티브이를 보고 학대하는 부모가 없는 철창 안의 환경이 더 낫다. 말하자면 그 도시는 열려있음에도 ‘무방비’하고 그 교도소는 닫혀 있음에도 ‘안전’하다. 그렇다면 이때 구속되기 전에 자인이 내다보던 창밖의 풍경은 열린 공간일까 닫힌 공간일까? 자인은 거지 같은 현실이 아니라면 창밖의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그런데 그 아래에는 자살이라는 죽음의 풍경이 있고, 그런 면에서 우리는 그 창의 안팎이 어떤 공간인지를 묻게 된다.



현실보다 나은 게 죽음이라는 말은 자유보다 구속이 낫다는 자인의 말과 상응한다. 즉 현실이 도시라면 교도소는 죽음이다. 이 죽음은 극단적인 경우 사형이고 그게 아니라면 도덕적 사회적인 죽음(매장)이다. 다시 말해서 열린 공간은 닫힌 공간보다 못하다. 다시 말해서, 의식이 열려있는 현실보다 의식이 닫혀있는 죽음이 더 낫다고 자인은 말하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버츄얼’ 시대의 담론을 끌어올 수가 있다. 가상현실이라는 것은 의식이 열려있는 현실에서 도피해 가상공간에 의식을 밀어 넣는 행위인데, 말하자면 그것은 열린 현실에서 닫힌 죽음으로 이주하는 것이고, 따지고 보면 가상공간의 열림은 ‘무한’하므로 그곳에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딱히 나쁜 선택도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가상현실이 누군가에게는 도피처, 즉 ‘열린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위해서 말한 두 가지 공간의 이분법은 우리가 어디에 속해있느냐는 주체의식에 따라서 언제든지 위치가 바뀔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가상현실이 ‘열린 곳’일 테고, 그렇다면 그에게는 오히려 현실이 ‘교도소’와 같은 닫힌 공간일 테다. 요컨대 <가버나움>에서 자인이 열림에서 닫힘으로 향하게 된 것은 오히려 우리의 시선에서일 뿐, 그에게는 닫힘에서 열림으로 향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화면의 위에서 아래로 늘어서는 쇠 철창 살의 이미지인데,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어딘가 모르게 자유로움이 담겨있는 듯 보인다. 그 표정에서 우리는 관찰하는 자와 관찰되는 자라는 두 가지 테마, 관객이 있어야만 영화는 시작된다는 영화의 버츄얼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철창 속의 그들이 우리를 향해 호소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이 영화는 그들이 관객이고 우리가 영화 속 인물이 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요컨대 관객이 영화 앞에서 편해질 수 있는 위치 즉 열린 공간일 때, 오히려 그들의 세계에 이입하지 못하고 타자로 떠도는 것은 닫힌 공간으로서의 우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분명 도시가 있다면 도시의 이면도 있을 테다. 동전에는 한쪽 면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삶이 있다면 죽음이 있고 열림이 있다면 닫힘이 있다. 그래서 이것은 문이기도 하다. 문을 밀든 당기던 간에 그것은 열림과 닫힘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이 수행의 척도는 단지 관찰자의 ‘처지’에서만 겨루어진다. 들어가는 사람에게 그 문은 열리는 것이고 나오는 사람에게 그 문은 닫히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이 영화를 보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 그렇게 물어야만 할 것 같다.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떤 처지에서 보고 있는가? 이 영화의 안은 열린 공간일까 닫힌 공간일까. 다시 말해서 이것은 무방비하게 포착당하는 카메라의 포착, 현실의 환영인 걸까.


사회의 병폐를 ‘찌르는’ 것


그 무방비 도시에는 여러 위협이 몰려들고 있다. 이곳은 사방이 ‘열려있기’ 때문에 어떠한 종류의 자유 또한 위협도 다가온다. 그들에게는 한쪽 전선만을 유지하기에도 벅차서 다른 세 면을 방어할 병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이곳은 자본이 점령한 자본주의의 식민지이다. 카메라가 허공으로 붕 떠서 도시 전체를 조망할 때, 건물 옥상의 타이어가 피자 위에 올려진 올리브의 절단면처럼 보일 때, 그 피자는 심지어 새까만 옥상의 모습에 겹쳐져 ‘썩은’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 썩은 피자조차 먹을 수 없다는 것이며, 이 썩은 피자가 아이들이 줄곧 피워대는 담배 연기에 대입될 때 영화는 점점 열린 공간의 구차함에 우리를 몰두하게 한다.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검은 연기의 근원을 알 수 없기에 그것을 피해 닫힌 공간으로 도주하는 자인의 모습에는 패닉룸의 공포가 있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집안에 강도가 들어 패닉룸으로 도주하고 그곳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패닉룸>이라는 영화에서 강도들은 패닉룸 안의 주인공을 꺼내려고 그곳에 가스를 불어넣는데, 주인공은 통쾌하게도 그 가스에 불을 붙여 가스를 투입하는 범인들에게 역으로 공격을 가한다. 요컨대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가능성이야말로 영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쾌감 중 하나인 셈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그런 쾌감이 있던가? 지긋한 가난에도 피임 없이 임신을 반복하는 자인 어머니의 자궁이 닫힌 공간이라면, 그곳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어린아이의 운명은 아늑한 닫힌 공간에서 퀴퀴한 열린 공간으로 나오게 되는 불행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탄생은 축복받아 마땅한 것일까 아니면 저주받은 삶의 시작일까? 다시 말해서 자인이 교도소에서 행복해지는 것은 원치 않은 탄생을 다시금 태초로 돌려보내려는 시도, 그의 대사를 빌리자면 “이럴 것이면 나를 왜 낳았느냐고” 항변하는 행위가 아닐까?


너구리를 사냥할 때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너구리굴에 매연을 흘려 넣는 것이다. 그러면 참다못한 너구리가 알아서 뛰쳐나오게 된다. 위에서 <패닉룸>의 범인들은 그것을 고대하고 가스를 불어넣은 것이었다. 하지만 <가버나움>의 도시에는 사냥꾼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연기만이 존재할 뿐이다. 말하자면 이 도시에는 사냥꾼은 없어도 연기를 수행하는 존재는 있다. 그것이 바로 카메라이다. 카메라가 불어넣는 것은 자욱한 연기이다. 그 연기는 영화관 밖의 영사기에서 시작되어 스크린에 투영되고 다시금 스크린을 위해 존재하는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그들에게로 전달된다. 즉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곳은 열린 공간이고 스크린 안은 닫힌 공간이다.



요컨대 우리가 이 영화에 대해서 물을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굳이 소년을 닫힌 공간으로 밀어 넣었어야 하느냐는 점이다. 그 공간에 소년을 밀어 넣고 카메라의 포착을 흘려 넣으면 참다못한 소년이 밖으로 뛰쳐나올 것이라고 영화는 믿었던 걸까. 그 카메라의 환영은 전통적인 사진의 조영술,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에서 비롯되는 걸까. 카메라 루시다란 눈앞의 상을 바로 아래의 종이 위에 투영하여 그대로 따라 그리기만 하면 되는 사진 이전에 발명된 광학 도구이다. 그리고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La Chambre Claire)라는 이름의 책에서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개념을 논하고 있다. 스투디움은 보편적인 이미지이고 푼크툼은 보는 이의 주관에서 비롯되는 닫힌 이미지인데, 말하자면 스투디움의 위에 푼크툼이 존재한다. 그것은 열린 공간에 세워진 닫힌 공간이며 객관 위에 세워진 주관이다. 이것을 <가버나움>으로 옮겨보면 열린 공간(Open city)에 세워진 교도소는 스투디움 위의 푼크툼이며, 그것은 말 그대로 ‘찌르는 이미지’ 즉 그들 사회의 병폐를 ‘찌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열린 도시에 세워진 닫힌 공간에서는 열린 공간에 밀려오는 검은 연기에서 벗어날 수는 있어도, 반대로 그 연기 한가운데에 갇혀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자궁은 결코 안락하지가 않다. 다시 말해서 현실의 문제를 스크린에 품은 이 영화의 닫힌 공간은 결코 안락하지가 않다.



분명 이것이 해답은 아닐 테다. 하지만 그 어린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사망하게 된 것은 임신 때문이었다. 그 임신은 불합리한 행위였고, 열린 공간이 닫힌 공간을 만들어낸, 그곳에 연기를 불어넣은 폭력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카메라를 통해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도 폭력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자인이 교도소에 갇히는 장면은 몹시 불행하면서도 필수불가결했다고 생각한다. 소년은 언젠가 교도소 밖으로 나올 것이라고 영화는 희망찬 결말을 암시하고 있다. 그곳을 자궁으로 본다면 그는 유산되거나 낙태되지 않을 것이며, 세상에 나와 빛을 볼 수 있을 테다. 요컨대 우리는 그 빛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향하는 게 아니라, 저쪽에서 이쪽을 바라보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우리는 그곳이 허구 위에 설립된 인간의 삶, 열린 공간 위의 닫힌 공간이 아니라,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을 향해 ‘반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반격은 <패닉룸>의 가스폭발처럼 화끈하지만 결코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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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명 님의 리뷰
2019.01.27 19:12:47
자인은 미소가 아름다운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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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잔 님의 리뷰
2019.01.25 02:10:42
'자인'의 환경, 그리고 '아이'의 삶
사람들은 제각각의 삶을 살아간다.
그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이다.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그 성향과 시각은 제각각의 개성으로, 혹은 다수들이 같이 살아가는 사회적인 위치까지 만들어진다. 그래서 좀 좋은 환경에서 살아간다면, 좀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를 상상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환경을 만들려고 사람들은 '삶'속에서 매일 매일 전쟁 같은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가버나움>은 그러한 제각각의 삶속에서 어느 환경에 대한 이야기다. 그 '어느환경'은 누구도 상상하기 싫은 현실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그 모습들은 결국 상상하기 싫은 최악의 이미지들로 생성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충분히 끔찍하다.

어떤 희망의 순간을 편하게 얘기하면서 반복되듯 보여지는 해피엔딩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혹은, 알고 싶지 않은) 저 구석탱이에 처박혀서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도 주지도 못하고 있어서 어떠한 확인조차 분간할 수 없는 어둡고 음침한 어느 뒷편의 이야기다.

거기다 그냥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대놓고 까발리면서 억울함과 답답함, 그리고 너무도 부정적이여서 감히 희망을 품을 수 없는 현실까지 겹쳐진다. 제3자의 눈으로 보는 관객의 시점으로 누구도 그들의 모습에서 처절하게 펼쳐지는 막막한 현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급기야 그러한 감정은 투쟁심으로까지 전이되어 자신도 모르게 그 아이들의 편이 되어 그러한 현실을 타파해 보고 싶어 하는 전사가 되고 싶을 정도로 자극적이다.

<가버나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아이의 시점으로 전개 된다. 한번도 어른들의 시각을 빌리지 않은 채 오롯하게 주인공 아이의 시점으로만 보여진다. 그것이 현실이 라는 의미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레바논의 영화가 처음이기도 하고, 그들의 현실을 1도 모르는 낯선 상황에서도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물론, 베이루트나 레바논의 어디쯤 살아가는 사람들이였다면 충분한 간극은 있겠지만, 큰 감정에 대한 차이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만큼 이야기는 대중적이다. 아이의 시각은 쉽게 따라갈 수 있고, 어떠한 트릭도 보여지지 않는다. 보는 그대로이고, 주인공 아이의 행동에 주저함이 없듯이 영화속에서도 어느 것 하나 주저하지 않고 직진한다.

그래서 보는 내내 불편할 수도 있다. 얼마전 봤던, 보는 내내 불편하기 그지 없었던 <박화영>이 생각났다. 주인공의 캐릭터를 청소년 여성으로 잡고, 그 여성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불편하고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는 모습이 영화적으로 너무 과도하게 집착하는 모습으로 비춰졌는데 <가버나움>속 상황은 <박화영> 보다 더하면 더 한 상황이지만, 그렇게 과도한 집착으로 느껴지지는 않은 이유는 아마도 아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순수함과 함께 주인공으로 나오는 배우의 연기의 덕도 한 몫한다.


레바논 길거리에서 캐스팅 했다는 모든 아역들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구축하면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감을 주저하지 않는데, 그것이 어쩌면 그들의 실제 생활이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기존의 배우를 썼다면 <박화영>처럼 과도한 집착으로 느껴져서 똑같이 불편한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만큼 아이들의 모습은 뛰어나고 <가버나움>을 빛나게 하는데 중추적인 역할들을 해낸다. 이 영화에 대한 '빈곤포르노'란 말은 저 멀리 던져 버려도 된다.

영화속에서 그 어느 순간도 안도할 수 없다. 정상적인 환경에서 생활하는 모습은 한군데도 없으며, 주인공 '자인'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발악하듯, 대들듯이 사납게 반응한다. 그나마 안도 할 수 있는 순간은 엔딩 의 아이의 웃는 얼굴과 타이틀이 올라가면서 자막이 나오는 순간이다.


영화속 아역들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실제 비슷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길거리 캐스팅으로 발굴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지금은 모두 영화속과는 다르게 잘 살아가고 있다는 자막 몇줄에 두시간 동안 끙끙 댔던 한숨과 한탄을 보상하듯 위로 하는 순간이다.


<가버나움>속 '자인'은 아마도 영화속 '아버지'의 어릴적 모습이였을 것이다. 레바논의 현실이 어떤지는 '1'도 알지 못하지만 최소한 <가버나움>속의 현실은 그러한 아버지에 그러한 '자인'일 것이다. 그리고 자인이가 커버린 십수년 후의 모습도 영화속 아버지의 모습과 그대로 오버랩 되듯이 상상된다.


어느 뒷편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햇살이 짱짱한 어느 마루턱이라면 모르겠지만, 어느 음침한 지하실 구석이라면 누구도 쉽게 찾아가지 않는다. 스스로 원하는 것만 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똑같지만, 엉거주춤하더라도, 그러한 지하실 구석진 방에도 한번은 고개를 디밀어야 한다. 손을 내밀면 금새 잡아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손을 내밀어야 하는 이유는 환경은 결국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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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꾸니 님의 리뷰
2019.01.21 12:06:54
다큐 같은 극영화
01 가버나움?

가버나움은 이스라엘의 갈릴리 바닷가에 있던 마을로 가파르나움이라고도 불립니다. 예수가 이런저런 기적을 일으키고 교훈을 준 곳으로 알려져 있죠. 하지만 후에 예수는 '가버나움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행하여 주었는데도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영화 <가버나움>의 촬영지는 가버나움이 아닙니다. 레바논 베이루트의 빈민가를 배경으로 하죠. 그렇다면 나딘 라바키 감독은 왜, 영화 제목을 가버나움으로 지었을까요? 추측건대, 비극과 리얼리티를 더 극대화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가버나움에 깃든 이야기를 활용한 듯합니다. 리얼리티를 위해 실제 거리에서 배달 일을 하던 소년, 자인 알 라피아와 시리아 난민 출신의 껌 팔던 소녀, 하이타 아이잠을 캐스팅한 점을 미루어 본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라는 걸 알 수 있죠.

​만일, 저의 추측이 맞는다면 <가버나움>이라는 작명은 목표한 바를 성취한 듯합니다. 다큐멘터리로 착각할 만한 극영화는 사실 흔치 않잖아요? 가버나움이 그 어려운 걸 해냈습니다. 칸 영화제에서 15분간 기립 박수를 받았다고 하니 말 다 한 거 아니겠어요?

02 영화 <가버나움>
감독: 나딘 라바키 / 출연 : 자인 알 라피아, 나딘 라바키 / 장르 : 드라마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칼로 사람을 찌르고 교도소에 갇힌 12살 소년 자인은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합니다. 법정에 선 자인에게 판사는 왜 이런 소송을 제기했는지 묻죠. 그러자 자인이 답합니다.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이 끔찍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게 그들이니까요."​

​자인의 말대로 자인이 보는 세상은 실로 끔찍했습니다.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인간성마저 잃어버린 세상이었으니까요. 오죽하면 축하해야 할 여동생의 초경 소식을 필사적으로 숨길까요? 부모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푼돈에 여동생을 팔아넘길까 걱정해야 하는 자인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리고 그 우려가 현실이 되었을 때, 그 절망의 깊이를 우리가 감히 예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절망감에 집을 뛰쳐나와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신분을 증명할 길이 없는' 이 작은 생명체에게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릴 뿐이죠. ​

​바깥세상 역시 비참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의 삶 역시 잔혹하다 싶을 만큼 참혹하거든요.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함께 절규하는 것뿐입니다. '약자가 모이면 약자들이 될 뿐'(상속자들 중)이라는 대사처럼요.

03 그래도 기적은 일어난다

우리는 도저히 손쓸 수 없는 상황에서 기적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기적은 항상 멀리 있지 않아요. 가까이에 있죠. 자인은 깨닫지 못했지만 자인 스스로가 기적이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사랑을 줄 수 없다? 적어도 자인에게만큼은 적용되지 않는 말입니다. 자인은 베풀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길거리에서 만난 또 다른 약자에게 배웠을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약자가 모이면 약자들'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며 합리화하기 바쁜 어른들 속에서도 더 사람답게 살기 위해 투쟁하는 법을 터득하며 기적을 이뤄나갑니다. ​

여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남자를 스스로 처단하고, 자신의 부모를 소송함으로써 부모 노릇은 안 하면서 무작정 아이만 낳는 어른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준 자인은 그 자체로 한줄기의 빛이며 기적입니다. 마지막 씬에서야 비로소 미소 짓는 자인은 정말이지 '아름답습니다'. 이 미소 하나 보자고 120분을 달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미소는 단순히 시각이 주는 감동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마주한 순간, 눈이 아닌 가슴에 와 박혀버리죠. 그리고는 속삭입니다. "기적은 있다"고.

04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엔딩크레딧

앞서 설명했듯이 나딘 라바키 감독은 리얼리티를 위해 주요인물들을 길거리에서 캐스팅했습니다. 덕분에 영화는 한층 더 실제적으로 그려졌죠. 그런데 여기에 현실감을 더 불어넣는 실화가 엔딩 크레딧에 등장합니다. 자인과 라힐 역을 맡은 배우, 자인 알 라피아와 요르다노스 시프로우가 실제로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불과 칸 영화제 입성 일주일 전까지는 말이죠. 왜 칸영화제에서 15분간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순간입니다.

​게다가 나딘 라바키 감독과 제작진이 '가버나움' 재단을 설립해 영화에 출연한 아이들과 가족들을 지속적으로 도와주고 있다고 해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엔딩이죠.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 나딘 라바키 감독은 <가버나움>의 극적 완성도보다는 제3세계의 현실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05 한줄평/별점

★★★★★(5)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아이의 미소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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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1 23:36:16
2001년 개봉해 국내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이란 영화 <천국의 아이들>에서는 엄마의 심부름을 나갔던 초등학생 알리가 동생 자라의 하나 뿐인 구두를 잃어버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남매는 운동화 한 켤레를 번갈아 신고 오전반, 오후반으로 학교를 다니며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 걸리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알리는 어린이 마라톤 대회 3등 상품이 운동화라는 걸 알고 자라에게 운동화를 선물해주기 위해 열심히 마라톤 연습을 한다. 그리고 1등을 차지한 알리는 동생에게 운동화를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을 왈칵 흘리고 만다.

이 남매가 구두 한 켤레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가난' 때문이다. 남매의 부모는 내일 당장 새 구두를 사줄 만한 경제적인 여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걸 아는 아이들은 구두를 잃어버렸다는 사실만으로 부모님께 혼날까봐 말을 꺼내지 못한다. 이를 우리는 '빈곤'이라고 부른다. 빈곤은 기본적인 욕구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가버나움>은 빈곤에 시달리는 소년 자인이 자신의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 말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출생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은, 아마도 12살의 소년 자인은 거리에서 주스를 팔고, 자신의 동생 사하르를 좋아하는 아사드의 가게에서 일을 한다. 자인의 부모는 제대로 된 일을 하지 못하고 있고 아이들을 거리에 내보내 일을 시킨다. 자인과 동생들은 거리에서 주스를 팔고 껌을 팔며 가정에 보탬이 되려 한다. 그들이 사는 집은 이불조차 제대로 없고 물이 새는 집이다. 부모에게 아이들은 돈을 벌어오는 존재다. 엄마 수아드는 남편에게 아이를 학교에 보내자며 그 이유로 지원 물품을 말한다. 하지만 아빠 셀림은 밖에 나가 돈을 버는 게 더 이득이라며 거절한다. 이들이 빈곤 속에서 사랑을 잃어버렸음을 보여주는 장치가 사슬이다.

가족의 품에서 자라야 할 막내 아기는 발에 사슬을 달고 집안 한 구석에 놓여 있다. 자유롭게 돌아다녀야 될 아이를 돌보는 게 귀찮아 택한 이 방법은 자인이 부모에게 느끼는 염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인은 부모가 돈을 위해 사하르를 아사드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하자 사하르를 데리고 도망치려 한다. 이를 눈치 챈 부모는 저항하는 자인을 때리고 사하르를 강제로 아사드의 집으로 보내버린다. 이에 자인은 사하르를 되찾고 또 동생들이 더 이상 부모 때문에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벌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자인은 우연히 버스에서 만난 노인을 통해 놀이동산을 향하고 그곳에서 라힐이라는 흑인 여자를 만나게 된다. 아프리카 불법 이민자인 라힐은 일거리를 찾지만 구하지 못하는 자인에게 자신의 아기 요나스를 돌보게 하며 자신의 집에서 살게 한다. 자인과 라힐은 같은 그림자를 지니고 있다. 두 사람 다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가 없으며 어린 나이에 빈곤을 경험하고 이를 짊어지게 된다. 그리고 소중한 피붙이-자인에게는 동생들, 라힐에게는 아기-를 위해 어떻게든 돈을 벌고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레바논의 시리아 난민 문제를 다룬 <가버나움>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는 소년 자인의 목소리를 통해 빈곤 문제를 조명한다. 시리아 내전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발생했고 이들은 주변 국가로 퍼져나갔다. 문제는 이런 난민들을 수용할 시설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국가들이기에 이들은 빈곤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어른들의 문제로 아이들은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다. 자인은 부모의 노릇을 할 수 없는, 그리고 할 여력이 되지 않는 부모가 자신을 세상에 낳아준 걸 원망한다.



일각에서는 이 영화에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가난한 사람의 사진이나 영상을 보여주는 '빈곤 포르노'가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감독 라딘 라바키는 지난해 12월 14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일부 평론가들이 이 작품을 빈곤 포르노로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감독은 "영화에서 보는 건 현실과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고통 받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답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조안나 슈넬레르 역시 지난 7일 < 더 글로브 앤드 메일 >에 기고한 글을 통해 영화 <가버나움>에 대한 몇몇 리뷰가 이 작품을 '빈곤 포르노'라고 부른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난 후, 이 영화가 '빈곤 포르노'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작품에서 변호사로 출연한 배우이자 감독인 나딘 라바키는 모든 인물들을 전문 배우가 아닌, 진짜 해당 경험을 했던 실제 인물로 캐스팅했다. 본명도 자인인 자인 역 배우는 시장에서 배달 일을 하던 시리아 난민 소년이다.

라힐 역의 요르다노스 시프로우는 실제 아프리카 불법 체류자로 영화 속에서 불법 체류자로 체포되는 장면을 찍은 다음 날, 실제로 당국에 체포되는 일이 있기도 했다. 감독은 실제 현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을 캐스팅해 그들의 아픔을 담아냈다. 그리고 제작진은 이 영화의 출연진들의 삶을 지원하기 위해 '가버나움 재단'을 설립했다고 한다. 자인은 사하르를 지키고 부모의 영향에서 동생들을 해방시키고 싶고 요나스를 돌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자인부터 출생신고 서류조차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가난을 자극적인 포르노로 소비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지는 자인의 증명사진을 통해 알 수 있다. 극중에서 자인은 신분증에 쓸 증명사진을 찍는다. 사진기사는 무표정한 자인에게 말한다. '이건 사망신고서가 아니라고. 살아있으면 웃어야지.' 이 영화는 어색하지만 환하게 미소를 짓는 자인의 표정을 통해 세상이 만들어 나가야 할 모습을 말한다.

삶이란 한 발짝씩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지만 죽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살아있는 동안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견디며 나아간다. 자인은 가족의 품 안에서 그 어떠한 즐거움과 행복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왔다. <가버나움>은 가난을 이유로 눈물을 강요하는 최루성 짙은 '빈곤 포르노'라기보다, 자인과 같은 아이들이 빈곤을 벗어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희망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P.S. 시사회 기회를 주신 키노라이츠에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김동진 님의 리뷰
2019.01.01 16:28:43
미국의 영화평론가 앤서니 올리버 스콧은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가버나움>에 대해 "동화이자 오페라이며, 책이자 뉴스이며, 항거의 울음이자 저항의 노래"라고 평했다. (2018년 12월 13일) 내 식대로 읽자면 영화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겠다. '보그'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나딘 라바키 감독은 제작비 조달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한 남편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기도 했다고. 영화 속 '자인'과 주변 사람들이 겪는 정도만큼의 가난은 아니겠지만, 감독 자신도 영화를 찍는 동안 환경의 변화를 겪었다는 의미다. 인터뷰를 계속 읽는데 인터뷰어가 흥미로운 질문을 했다. 만약 ('타노스'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 하는 것만으로 (영화 속에 투영된 사람들의 삶에서) 한 가지를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겠느냐고. 거기에 대한 나딘 라바키 감독의 답변이 더 인상적이다. "단 한 가지라는 건 있을 수 없어요." 모든 것이 너무나 상호 연관되어 있기에 과연 '단 하나'만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겠냐는 이야기다. 물론 뒤에 가서 영화에서 주요한 물건이자 소재처럼 다뤄지는 '서류'에 대해 언급하기는 하지만, 감독의 그 말("There's no one thing.")을 곱씹어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과연 영화에서 어느 한 가지 테마만을 따로 분리하기가 어렵다. 가난에 대해서도,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의 자질에 대해서도, 혹은 난민 문제에 대해서도. 그리고 국가의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이나 고용 문제, 나아가 인신매매나 신분증 위조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가버나움>이라는 영화의 제목은 영어로는 'Chaos'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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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31 21:49:16
잊혀지지 않는 마지막 웃음
1월 개봉 예정 영화 <가버나움>을 CGV Hello 2019전에서 만나보고 왔습니다. 이 영화는 자신을 방임한 부모님으로부터 도망쳐 한 사람의 집에서 아이와 함께 살게 된 어린 소년, 자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소재 자체는 <미쓰백>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를 만난 방식이 달라 다른 뜻의 소재인가?라는 생각도 들게 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예술 영화의 전개방식보다는 전기영화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전개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행동에 하나하나 의미를 새겨넣기보다는 인물과 상황을 직시하고 지켜봄으로써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영화의 이야기가 자연스레 이해되게 만듭니다. 이런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에, 영화는 훨씬 더 사실적이고 실감이 납니다. 잔혹한 배경과 책임감 없는 부모, 주인공인 소년의 감정까지 소름 끼치도록 사실적이게 표현되었습니다

사실감이 돋보였던 만큼 후반부 클라이맥스의 비중도 커집니다. 상영시간이 흐르는 동안 단 한 번도 웃을 수 있는 장면이 보이지 않다가, 막판이 되어서야 비로소 미소가 번집니다. 책임감 없는 부모의 본성과 인성, 참혹한 배경까지 정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마지막 한 번, 자인의 일침에 의해 벅차오르는 순간에서야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누립니다. 그동안의 전개가 전형적이었다면 식상한 방식이었겠지만, 영화의 사실적인 과정에 딱 맞는 후반부였습니다.

정확한 플롯이 존재하고, 어떠한 은유도 비유도 시적인 분위기도 없으며, 소름 끼치는 사실감이 존재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자인이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와 부당한 사회 시스템, 책임감이 1도 없는 부모를 부각하며 차근차근 쌓아나갑니다. 자인을 제외한 인물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소홀했던 점이 없지 않지만, 오히려 자인에게만 집중함으로써 영화의 메세지는 더 확실해진 느낌입니다.

또한 최근에 봤던 예술영화 <로마>와는 완전히 다른 전개방식입니다. 생각이나 의도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대신 자인의 행동에 집중하며 차근차근 이야기를 이어나갑니다. 현장감을 중요시하여 영화의 주제와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고, 후반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에는 그동안의 이야기들에서 쌓인 안쓰러움, 안타까움과 같은 감정들이 동시에 폭발하며 벅차오릅니다. 이 결과는 이 부분만의 공이 아닌, 결과까지 이어온 탄탄한 스토리의 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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